**揆園史話 太始記에 대해서
-글쓴이: 박연복
使神誌氏 作書契 盖神誌氏 世掌主命之職 專管出納獻替之務 而只憑唯舌 曾無文字記存(在)之法 一日 出行狩獵 忽驚起一雙牝鹿 彎弓慾射 旋失其跡 乃四處搜探 遍過山野 至平沙處
始見足印亂鑽 向方自明 乃俯首沈吟 旋復猛省曰 記存(在)之法 惟如斯而已夫 如斯而已夫!
是日 罷獵卽歸 反復審思廣察萬象 不多曰 悟得 成文字 是爲太古文字之始矣
신지 씨에게 서(글자)를 만들라 시켰다.
신지 씨는 왕의 명령을 맡아보는 직책에 있었다.
오직 왕의 출납과 일을 바꾸게 하는 보좌 역할이었다.
단지 혀로만 기대서 말할 뿐 기록할 만한 어떤 문자가 없었다.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
홀연히 한 마리의 암사슴이 놀라 달아나는 것을 보고, 활을 당기려고 했지만, 사슴의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사방을 살피고 탐색해 보고 두루 산과 들을 지나 모래톱까지 와서야 사슴의 발자국이 혼란스럽게 찍혀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방향은 자명(명확)한 것이었다.
이에 머리와 허리를 구부리고 읊조리고 생각했다.
도리어 자신에게 사납게 말하기를 기록하는 문자의 법이 있다. 오로지 문자를 분리(짓는)하는 방법은 바로 이것이야. 이것이야 했다.
이날, 사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모든 사물을 넓게 살피고 반복적으로 생각하였다. 그런 후 많은 날이 가지 않아 문자가 이루게 되는 깨달음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태고 문자 시작이었다.
*번역은
시인 박연복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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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규원사화(揆園史話)》는조선 숙종1년인1675년에북애자(北崖子)가 저술하였다는 역사서 형식의 사화(史話)로, 상고시대와 단군조선의 임금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저자[편집]
나.)북애자(北崖子)는 효종 ~ 숙종 시대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선비라고 스스로 소개한다. 붓을 던지고 전국을 방랑하던 중 산골에서 청평 이명이 저술한진역유기를 얻어 역사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청평 이명(淸平 李茗)은 고려 말에청평산에 머물렀던 도인으로 추정되고, '선가의 말이 많은(도교 용어가 많이 사용된)' 《진역유기》 3권을 지어 산골에 숨겨두었다고 한다. 조선 선조 때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조여적의 《청학집》에 도인의 계보를 설명하는 중에 언급되었다.
다) 전래과정
《규원사화》가 일반에 공개된 것은1925년간행된 《단전요의(檀典要義)》에 일부가 인용된 것이 최초로 여겨진다. 그 내용은1929년간행된 《대동사강》에서도 인용되었고 전체 내용은1932년5월 이전에 등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