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강을 돌아서
같은 공휴일인데 ‘부처님 오신 날’은 신록이 싱그러운 산자락으로 올라 절간 언저리를 서성인 적 있는데 성탄절은 도심에 있는 교회나 성당 부근을 지나친 적 드물고 예배 의식도 잘 모른다. 그럼에도 성탄절이 달력에 빨간 날로 표시되어 하루 쉴 수 있어 감사하고, 그보다 더 매주 일요일이 빨간 날로 표시되어 주기적으로 쉬게 해줌은 예수님이 인류에게 보낸 거룩한 은총 아닌가.
성탄절 새벽녘 빈 배낭을 맨 체 길을 나섰다. 마금산 온천장을 찾아 목욕을 한 뒤 날이 밝아왔을 즈음 어디론가 무념무상 걸어볼 셈이었다. 겨울철이면 온천을 찾는 사람들이 느는데 휴일을 더 그렇다. 마금산 온천장까지 가는데 시내버스 첫차를 타고 가도 한 시간이 더 걸려 늦을 수밖에 없었다. 성탄절이 공휴일이니 주말 아침처럼 목욕탕에는 내보다 먼저 온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한 시간 남짓 걸려 정한 절차 따라 목욕을 끝냈다. 남들보다 잘 붙는 발바닥 굳은살을 갉아냄이 중요했다. 새벽에 길을 나섰으니 어둑했을 때 온천장에 닿았는데 목욕을 끝내고 나오니 그제야 날이 밝아왔다. 집에서 이른 아침을 먹고 왔지만 점심나절까지 길을 걸으려면 기본 열량을 확보해둘 필요가 있었다. 온천장 바깥 노점 할머니가 파는 지역 특산으로 잘 알려진 곡차를 마련했다.
새벽부터 지나가는 손님을 기다리느라 두터운 이불을 덮고 웅크린 채 날이 밝아오길 기다린 할머니는 내가 마수를 해준 첫 손님이라고 고마워했다. 할머니는 패트 병에 담은 감식초와 막걸리를 진열해 두고 손두부도 파니 사 가십사고 했다. 나는 두부는 바깥에서 혼자서 어떻게 처리할 자신이 없어 사지 못했다. 집으로 바로 향하지 않고 반나절 넘게 걸어야하니 찌그러질 수 있었다.
낙동강 강가로 나가는 북쪽을 난 찻길을 따라 걸었다. 신목과 신기를 지나 바깥 신천이었다. 앞들 건너편 백월산 산자락으로 엷은 구름 사이로 놀이 붉게 물들었다. 아침 해가 솟아오르기 직전 상황으로 서광에 해당했다. 백월산은 삼국유사에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두 도반이 남사면과 북사면 움막에서 수도하다 노힐부득이 먼저 등신불이 되고 뒤이어 친구도 득도했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바깥 신천에서 강둑을 넘었다, 찻길을 따라 계속 가면 강마을 명촌이 나오는데 거기로 가질 않았다. 본포 취수장 암반 벼랑 생태 보도교를 따라 걸었다. 여름 철새로 남녘으로 내려가지 않은 왜가리와 백로 무리들이 열지 않은 강가에서 아침을 맞고 있었다. 북녘에서 내려온 오리들은 그 곁에서 자유로이 헤엄쳐 다녔다. 북면에 흘러온 샛강 신천에 낙동강 본류에 합류한 지점이었다.
본포를 돌아 다리 밑 쉼터에서 아까 할머니에게서 산 곡차를 꺼냈다. 안주는 껍질을 깎아 잘라간 야콘으로 족했다. 야콘은 중남미 어딘가 원산지로 최근 우리나라 농가에서도 더러 재배한다. 고구마와 같았는데 멀리 떨어져 사는 친구가 어디서 제 것을 구하면서 나한테도 한 박스 보내와 겨울을 나는 간식으로 잘 먹고 있다. 고구마보다 더 부드러운 식감으로 아삭하고 달짝지근했다.
쉼터에서 둑으로 올라 본포다리를 건너 학포로 갔다. 학포는 의령 남씨 집성촌으로 구미에는 수도권 있던 정순공주과 부마 묘가 이장해 왔다. 정순공주는 태종의 4녀로 세종대왕과는 남매지간이다. 공주 남편이 남휘로, 남휘 손자가 그 유명한 남이 장군이다. 구산 구미로 가질 않고 반학교를 건너 밀양으로 향했다. 수변공원은 봄에는 꽃양귀비로 가을엔 코스모스 꽃길로 알려진 곳이다.
초동 연가길 시든 코스모스 꽃대에서 꽃씨를 몇 줌 따 모았다. 봄이 오면 어디가 될지 모를 곳에다 뿌려둘 참이다. 둑길을 계속 걸으니 저만치 곡강마을이 아스라했다. 곡강은 수산 근처 강변 벼랑으로 벽진 이씨 집안에 관리하는 곡강정이 있다. 곡강마을을 돌아 수산에서 추어탕으로 점심 요기를 하고 수산다리를 건너 창원으로 복귀하는 1번 마을버스를 타니 주남저수지를 돌아왔다. 18.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