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도전과 응전(외세의 침략史)
1. 단군조선 건국(기원전 2333년)
배달민족의 18대 족장 환웅이 범족 출신의 첫째 부인과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고,
곰족 출신의 둘째 부인 사이에 셋째 아들 단군을 두었다.
환웅이 죽자 곰족의 지원을 받은 셋째 단군이 첫째와 둘째 형들 세력을 무찌르고 고조선을 세우고 왕검의 자리에 오른다.
2. 위만 조선(기원전 194년~기원전 108년)
중국 춘추전국시대 만주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연나라에서 이주한 위만이 연나라 유민과 토착민 세력을 규합하여
단군조선 마지막 왕 준왕을 몰아내고 역성혁명을 일으켜 위만조선을 건국한다.
3. 한사군 설치(기원전 108년~기원후 314년)
옛 고조선 지역에 중국을 통일한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 임둔, 진번, 현도군 등 네개의 군을 설치한다. 후에 대방군을 추가로 설치한다.
4. 수나라의 고구려 침입(4차 침입)
1) 1차 침입(598년)
수 문제가 30만 육군과 해군을 이끌고 고구려(평원왕) 침입했으나,
우기철이라 육군은 요동반도에서 발이 묶이고, 해군은 발해만에서 기상악화와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패퇴하였다.
2) 2차 침입(612년)
604년 수 양제가 등극하고, 군사 113만을 동원하여 2차 고구려 침입을 감행하였으나,
육군은 을지문덕의 살수 대첩과 평양으로 직접 쳐들어온 해군을 패퇴시켰다.
3) 3차 침입(613년)
수 나라가 3차 침입을 하여왔으나, 국내 반란(양현감의 반란)으로 회군하여감.
4) 4차 침입(614년)
소득없이 후퇴
5. 당나라의 고구려 침입(2차)
1) 1차 안시성전투(645년)
618년 당나라 건국, 613~647년 고구려 천리장성 축조, 642년 연개소문 정변, 고구려 영양왕 시절,
귀족간의 분열 및 연개소문 제거 계획이 탈로나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키고, 영양왕을 폐위시키고, 보장왕을 왕으로 세움.
2) 나당연합군의 고구려 침공, 및 고구려 멸망(668년)
고구려 멸망으로 고구려 영토의 거의 대부분을 당나라 영토로 편입되며 한민족의 활동무대가 대동강 이남 지역으로 축소.
6. 거란의 고려 침입(3차)
1) 1차 침입(993년)
거란은 중국의 북부지역의 여러민족을 통일하여 요나라를 세운(907년)후 남쪽의 송나라를 침공하려고하니
뒤쪽에 있는 고려가 협공할까 두려워 야율희석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으나,
거란의 의도를 파악한 서희의 외교담판(송나라와 외교관계를 단절하겠다.
거란과 선린관계 유지를 위해 걸림돌이 되는 압록강 동쪽 여진족을 몰아내고 강동6주 설치하겠다.)는 외교적 성과를 이룸.
2) 2차 침입(1010년)
1차 침입후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송나라와 외교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거란과 동맹관계를 가지 않자
소손녕장군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하여 개경까지 침탈하였다.
왕의 항복과 입조약속으로 되돌아감.
3) 3차 침입(1018년)
고려왕이 입조하지 않자 다시 3차 침략을 감행하였으나, 강감찬장군의 귀주대첩 등으로 회군하여 돌아감.
4)이후 강화조약체결(1019년)하여 이후 송나라와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요나라와 선린관계를 유지함.
7. 몽고족의 고려침입(1231년~1259년, 9차 침입)
몽고족은 1231년 몽고침입 이후 29년간 9차례에 걸쳐 한반도 전 지역을 도륰하였다.
이 시기 왕실은 강화도로 천도하여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결국 1259년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삼별초군은 강화조약에 반대하며 강화도를 탈출하여,
진도, 제주도로 옮겨가며 1270.5~1273.4월까지 항쟁을 계속하였다.
8. 원나라의 고려지배(1270년~1356년)
1270년이후 86년에 걸쳐 처음에는 강압적으로 이후에는 문화적, 포괄적으로 지배를 지속하였다.
9. 일본(倭)의 조선 침입(1592년~1598년, 2차 침입, 임진년, 정유년)
전국시대말 일본을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 16만 ~23만 5천명을 참전시켜 한반도 침탈,
첫 교전시 조선은 군인 84000여명이었으며,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여, 명군 43000명~10만명이 참전하였고,
군비 쌀 백만석을 지원하였다.
임진왜란 직전 정치상황은 명종시대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으로 국정이 문란, 남명 조식의 단성의 소 등 선비들의 상소가 있달았고,
1591년 일본사신단(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을 보내 전쟁을 일으킬지 여부를 탐지하려 하였으나,
침략조짐이 보인다는 황윤길(서인)측 보고와 침략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는 김성일(동인, 당시 주도 세력)의 보고가 엇갈렸으나,
좌의정인 류성룡이 같은 당파인 동인 김성일의 편을 들어 침략 대응이 미진하였다고 함.
한반도의 외세 침략사를 살펴보면, 고구려시대에는 수,당과 세력을 견줄 정도의 대응력을 갖췄으나,
그 이후 신라주도의 통일로 한민족의 활동무대가 줄어들고, 주로 수세적, 방어적 대응에 급급해온 것으로 보입니다.
산업이 농업과 관직 밖에 없던 시대에 쓸데 없는 논쟁으로 국력을 소모하며,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안으로 파고드는 축소지향적 사고, 명분위주의의 사고가 아니라,
실사구시의 정신, 밖으로 팽창하는 확장적 사고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