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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9일 [성 요셉 대축일]
마태오 1,16.18-21.24ㄱ
기도의 성 요셉: 고민을 오래 하지 말고 회의도 길게 하지 말라
지금까지 성 요셉의 의로움과 정결함에는 많은 강론을 하였으나, 성 요셉의 기도라는 부분에서는
크게 묵상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는 기도가 필수적이고, 성 요셉에게서도 그 특징은 여지없이 나타납니다.
우선 기도하지 않는, 혹은 잘못된 기도를 하는 이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고민을 오래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단호합니다.
일생일대의 결정 앞에서 성모님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하셨고, 예수님은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며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자아가 강한 사람은 언제나 우유부단하고 이런 사람들이 모이면 하나를 결정하는 데도
엄청난 시간이 소비됩니다.
그래서 저는 회의를 길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각자가 기도하고 결정이 된 상태에서 와야 하고 책임자는 기도를 통해 빠르게 나아갈 길을 확정지어야 합니다.
전쟁이나 기업과 같은 경쟁 상황에서 빠른 판단력은 필수적입니다.
빠른 판단력이 사라지는 이유는 신앙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은 대관식 이후부터 자신감을 잃기 시작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은 1804년,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성대하게 거행된 대관식에서 스스로의 손으로 황제의 왕관을 머리에 얹었습니다.
그 자리에 교황 비오 7세가 있었지만, 나폴레옹은
하느님의 축복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로부터 11년 후인 18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그러한 교만함과
홀로 결정해야 하는 지도자의 외로움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뼈아프게 경험하게 됩니다.
워털루 전투는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돌아와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른바 ‘백일천하’의 마지막 전투였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의 군대는 약 7만 3천 명이었고,
상대편 연합군은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영국과 네덜란드, 벨기에군 연합 6만 8천 명, 그리고 블뤼허 장군이 이끄는 프로이센군 5만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전략은 이 양쪽 군대가 합류하기 전에 신속히 공격하여 각개격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투 당일인 6월 18일, 새벽부터 내린 비로 전장이 심하게 질척거렸고, 포병과 기병의
이동에 불리하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오전 6시부터 공격을 망설이기 시작했습니다.
측근의 많은 장군들은 즉각 공격할 것을 조언했지만, 모든 결정을 홀로 내려야 하는 황제였던 그는 쉽게 결단하지 못한 채 고민을 이어갔습니다.
나폴레옹은 조금 더 좋은 환경이 오기를 기다리며
공격 명령을 계속 미루었고, 그렇게 결정적인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습니다.
나폴레옹은 무려 6시간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낭비한 끝에, 오전 11시가 넘어서야 첫 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 결정의 지연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공격이 늦어지는 동안, 18km 떨어진 곳에 있던 프로이센군 5만 명은 전장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확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공격을 지연한 사이, 프로이센군은 오후 4시경부터 전장에 도착하기 시작했고,
이후 계속해서 병력을 증원했습니다. 결국 저녁 7시가 될 무렵에는 영국군과 프로이센군의 병력이 완벽히 합류하여 총 11만 명을 넘어서게 되었습니다.
반면, 전투를 너무 늦게 시작한 나폴레옹의 군대는 이미 피로와 혼란으로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이 전투에서 크게 패배했고, 단 하루의 우유부단함으로 자신의 운명뿐 아니라
프랑스 제국 전체를 몰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다시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추방되었고,
쓸쓸히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만약 그가 홀로 모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외로운 왕좌가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기도하고, 신중하지만 빠르게 결단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눈치채고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이것은 ‘묵상’기도입니다. 마리아의 잘못을 자기가 다 끌어안겠다는 엄청난 결단입니다.
묵상기도를 통해 여기까지는 도달할 수 있지만, 관상의 단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보지 못합니다.
바로 그 잉태가 곧 성령으로 인한 것임을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요셉의 꿈에 나타나 마리아와 결혼하라고 하십니다.
요셉은 그렇게 합니다.
이 외에도 헤로데가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할 때 꿈을 꾸고는 바로 짐을 싸서 이집트로 피신합니다.
다시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기도할 줄 모르는 교만한 사람이었다면, 성모님과 결혼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결혼했다면 시간을 끌다가 메시아를 잃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기도하는 이는 모두 결단력이 좋고 빠릅니다.
1805년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아시시에서 태어난 프란치스코는 원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기사로서의 명예와 세상의 부귀영화를 꿈꾸며 살았지만, 전쟁터에서의 패배와 포로 생활을 통해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1205년 어느 날, 아시시 외곽에 버려진 산 다미아노 성당에서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깊은 기도에 잠겨 있던 프란치스코는, “프란치스코야, 가서 무너져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순간 프란치스코는 망설이거나 우물쭈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즉시 자신의 화려한 옷을 벗고 거친 옷을 입었으며, 아버지의 재물을 포기하고 온전히
주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돌 하나하나를 손수 쌓아 올리며 산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하기 시작했고, 그의 단호한 결단에 감동한 동료들이 그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무너져가는 당신 집은 결국 탐욕으로 기울어져 가는 교회를 재건하라는 것이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저 작은 하느님의 집은 다미나노 경당을 재건하기 시작한 그의 결단력은 바로 요셉 성인과 같은 기도에서 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찬가지로 마더 데레사도 있습니다.
그녀는 1929년 열아홉 살의 나이에 인도의 콜카타로 파견되어 로레토 수녀회 소속으로 가르치는 일을 하며 평범한 수도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46년 9월 10일, 데레사 수녀는 다르질링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깊은 묵상 중에 강력한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녀에게 수도원의 울타리를 넘어 길거리의 가장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라는 소명을 명확하게 전하셨습니다.
데레사는 이 부르심을 듣고 즉시 결단을 내렸으며, 자신이 20년 가까이 지냈던 수도원과
안정된 생활을 떠나 콜카타의 빈민가로 뛰어들었습니다.
그곳에서 맨손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살피며, 극도의 가난 속에서도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결단력 있는 행동은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1950년 ‘사랑의 선교회’를 창설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마더 데레사는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고, 전 세계에 가난과 사랑의 가치를 전하며 노벨 평화상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 프란치스코와 마더 데레사의 삶은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분명히 깨달았다면 절대로 주저하지 말고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요셉 성인과 이 성인들이 그러했듯이, 우리도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하느님께 묻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즉시 겸손과 용기로 결단하여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놀라운 축복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고민을 많이 하지 말고, 회의를 길게 하지 맙시다.
예수님은 기도하는 분이시기에 항상 주저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19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복음: 마태 1,16.18-21.24a
여행객들에게는 요구가 많지만, 순례자에게는 감사가 전부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요셉 성인의 이름 뒤에는 몇 가지 중요한 닉네임이 붙습니다.
마리아의 아내, 예수님의 양부, 나자렛 성가정의 수호자, 임종자들의 수호자, 성교회의 보호자...
구세사 안에서 요셉 성인의 공로와 역할이 얼마나 지대했던지 미사 경문 내 가장 중요한 부분인 성찬 예식 내에 그분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하느님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그 배필이신 성 요셉과...”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마리아 못지 않게 요셉 성인의 삶도 참으로 기구하고 혹독했습니다.
그가 꿈꾸고 있었던 평범하고도 단란한 결혼 생활은 하느님의 초대로 인해 일찌감치 물건너 갔습니다.
어찌보면 그는 닭쫓던 개처럼, 낙동강 오리알 같은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결혼한 것도 아니고 결혼 안한 것도 아니고. 그는 하느님으로 인해 평범한 한 인간 존재로서
기본적인 욕구나 희망이 모두 차단되었습니다.
대신 그에게 성가정을 위한 봉사와 헌신, 침묵만이 요구되었습니다.
제가 만일 요셉 처지였다면, 입만 열면 불평불만에 하소연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과묵했습니다.
충실했습니다.
하느님의 요청에 흔쾌히 순응하며, 그렇게 순탄치 않은 신앙 여정을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요셉 성인에게서 강하게 풍기는 덕행은 순례자로서의 충실함입니다.
그의 모습에서 성조 아브라함의 신앙을 느낍니다. 일어나라니 즉시 일어났습니다.
떠나라니 군말 없이 떠났습니다.
요셉 성인은 부단히 자신의 의지와 계획을 접고 하느님의 뜻을 찾고 추구했습니다.
언제나 한치앞을 내다볼수 없는 안갯속같은 여정이었지만, 기쁜 마음,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 하루 그날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여행객은 요구가 많지만, 순례자는 항상 감사할 뿐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강론>
(2025. 3. 19. 수)(마태 1,16.18-21.24ㄱ)
<‘버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 ‘지키려고 한 것’입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 1,1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마태 1,18-23).”
1) 유대교에서는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자비로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는 요셉이 ‘율법의 준수’보다 ‘자비의 실천’을 먼저 생각했음을 나타냅니다.
<‘법’보다 ‘자비’가 위에 있습니다.
마태오복음 12장에 있는,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 라는 말씀을 요셉과 마리아의 경우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2) 요셉이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한 것은, 마리아를 ‘버리려고 한 일’이 아니라, ‘지키려고 한 일’입니다.
여기서 ‘남모르게’ 라는 말은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만일에 요셉이 남모르게, 즉 세상 사람들 모르게 파혼을 했다면, 사람들은 요셉과 마리아가 파혼한 사실을 모르니까 두 사람을 부부로 생각했을 것이고, 그러면 마리아가 잉태한 아기를 요셉의 아기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리아도 아기도 무사히 보호할 수 있습니다.
파혼은 왜 하려고 했을까?
요셉은 ‘성령 잉태’를 이해하지는 못했어도 믿었기 때문에, 아기의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생각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자기는 뒤로 물러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의 지위를 포기하려고 파혼을 생각한 것인데, 마리아와 아기를 모두 지키려면 그 모든 일을 사람들 모르게 해야만 했습니다.
3)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라는 말은, ‘저절로 드러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 잉태’는 ‘저절로’ 드러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성령 잉태 사실을 알게 되자 곧바로 요셉에게 가서 그 일을 알렸을 것입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라는 말은, “마리아는 요셉에게 가서 자신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을 알렸다.”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요셉은 그 말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믿었습니다.
마리아를 믿었으니까 마리아가 하는 말을 믿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만큼이나 사람을 믿는 것도 중요합니다.
4) 주님의 천사가 나타난 일은, 요셉의 기도에
하느님께서 응답하신 일로 해석됩니다.
요셉은 자신의 판단과 계획이 과연 하느님 뜻에 합당한 것인지를 알 수 없어서 많이 고민했을 것이고, 그래서 간절하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천사가 요셉에게 한 말 가운데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라는 말은, “일을 그렇게 복잡하게 진행할 것이 아니라, 원래 하려던 대로 결혼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라는 말은, ‘성령 잉태’에 관해서 마리아가 한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보증해 준 말이기도 합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라는 말은, ‘메시아 강생’을 예고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요셉과 마리아가 메시아의 부모로 선택되었음을, 즉 하느님의 ‘부르심’을 전해 주는 말입니다.
5) 겉으로 보이는 표현들만 보고서, 요셉을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인물로만 생각하기가 쉬운데, 잘 생각해 보면, 요셉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또 그는 용기가 없어서 가만히 있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용감하고, 강인한 사람이었습니다.
만일에 용기 없고 비겁한 사람이었다면, 율법을 방패로 삼아서, 율법 뒤로 숨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용감하고 강인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마리아와 아기를 지켰고,
온갖 어려움들을 자기가 떠맡았습니다.
<복음서에는 ‘요셉의 말’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요셉이 ‘말보다 행동으로’ 실천하는 신앙인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진정한 믿음은, 원래 많은 말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