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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태욱 열사의 장례미사에 참석한 유족들 ⓒ백설 |
“최 타대오 형제님, 너무 늦은 장례미사이지요. 죄송합니다. 당신을 너무 많이 기다리게 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형제님의 발자국과 손때가 묻어있는 이 성당에서, 형제님의 마지막 염원이 불꽃으로 서려있는 이 성당에서, 형제님께서 그토록 그리워하였고 온 삶으로 믿으셨던 하느님의 품으로 형제님을 보내드리기까지 22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왜 그토록 긴 시간이 필요했는지... 죄송할 따름입니다.”(김영호 신부)
7월 14일 최태욱 타대오 노동열사의 장례미사가 이성한 신부를 비롯해 6명의 사제가 참석한 가운데 고인의 본당이었던 대구대교구 청도성당에서 정의평화위원회 차원에서 22년 만에 거행되었다. 이날 미사에는 최태욱 열사의 유족과 대구지역 노동사목 활동가들, 지역 노동자들과 가톨릭 정의평화환경 활동가들 한 자리에 모여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최태욱 열사는 1990년 2월에 메리야스 군납업체인 ‘주신기업’에 입사했으나, 노동자들 월급이 법정 최저임금인 168,000원도 되지 않고 그마저도 체불을 일삼는 것을 보고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결국 최태욱 열사는 임금체불에 항의하다가 회사로부터 부당해고를 당했으나, 5월 14일 노동자들이 주신기업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최태욱 씨를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노조 신고필증이 발급되면서 해고는 철회되었으나, 회사는 노조원들만 야간근무를 시키고 무급처리하고, 이에 항의하자 회사는 징계위원회를 열어 노조원 전원을 해고시켰다.
당시 <대경정론>(1990년 9월호)에 실린 '고 최태욱 씨의 죽음에 붙임'이라는 표제가 붙은 글에 따르면, 당시 주신기업의 소유주인 김정숙 씨는 개신교 신자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하느님이 주신 기업'이라 해서 '주신기업'이라고 회사이름을 지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또한 김정숙 씨는 노조 설립 당시에 사원들에게 "내가 어제 저녁에 간절히 기도를 드리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계시를 하시길 노조가 들어오면 30%의 임금인상을 해주어야 한다고 하셨다. 지금 회사 형편에 30%를 인상해 주면 회사가 망하니까 노조는 절대 들어오면 안 된다"고 전했다고 한다.
한편 최태욱 열사는 해고된 노동자들이 생계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는 가운데 당시 청도성당 본당사제였던 이성한 신부를 만나 하소연 하며 ‘죽고싶다’고 호소했다. 이성한 신부가 ‘극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위로해 주었으나, 7월 8일 오후 6시 5분경 친구에게 이성한 신부에게 전해달라며 유서를 맡기고 성당 앞마당에서 분신했다. 소화기로 불을 끄고 최태욱 열사를 병원으로 옮겼으나 결국 청도 대남병원에서 7월 14일 사망했다.
이성한 신부가 최태욱 열사에게 종부성사를 주었으며, 성 베네딕도 왜관스도원의 진토마스 신부와 임세바스챤 신부, 대구대교구의 허연구, 원유술 신부 등이 유족들을 도왔다. 당시 대구 가톨릭노동사목의 요청으로 청도성당이 속한 2대리구 차원의 기도회를 준비하였으나, “최태욱 타대오 형제와 관련, 분신은 자살이기에 교회법상 어긋나는 행위이므로 어떤 종교행사도 해서는 안 된다”는 당시 대구대교장 이문희 주교의 이름으로 공문이 발송되어 모든 기도회와 종교행사가 취소되었다.
진토마스 신부가 교구장에게 편지를 써서 장례미사를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고, 장례 당일에도 청도성당 문이 닫혀 있어서 억지로 문을 따고 들어가 분신장소에서 노제를 지낸 뒤에 최태욱 열사의 시신은 경산 금곡 장미공원묘지에 묻힐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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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태욱 열사의 아들 최광민 씨가 영정을 들고 입당하고 있다 ⓒ백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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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년만에 최태욱 열사의 장례미사가 대구대교구 청도성당에서 봉헌되었다.ⓒ백설 |
7월 6일자 일기에서 최태욱 열사는 “목이 메인다. 십자가의 주여!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안겨 주십니까? 제가 겪어야만 될 고통입니까? 하지만 제가 감당해 내기엔 너무나 벅찹니다”라고 자신 없어 하면서 “솔직히 너무 힘이 없다. 기댈 곳이 없다. 주님께서 위안과 힘이 되어주긴 하지만 내가 버텨나갈 힘이 없다. 나의 신앙이 두텁지 못해서인 것 같다. 주님과 죽음을 생각해 본다. 주여! 언젠가는 당신을 거역할 것 같군요. 용서 하세요”라고 전했다.
결국 최태욱 열사는 분신을 결심했는데, 그가 남긴 유서에서는 “훨훨 날아가리. 영원히 안주할 수 있는 포근한 주님의 품 안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꽃으로 승화 되리니. 모든 추악한 것을 다 태워버리고 뼛가루 밖에 남지 않도록 사랑하자”고 했다.
이날 장례미사 강론을 통해 김영호 신부(대구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는 지난 22년 동안 가톨릭교회가 최태욱 열사의 장례미사를 봉헌하지 못한 데 대해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복음말씀을 인용하며 “노동자들의 삶과 불의에 눈을 감고, 부당한 자본의 권력과 정치권력에 침묵으로 동조하던 교회는 한 가난한 노동자의 소박한 신앙과 주님께 대한 간절한 기도를 법이라는 이름으로 외면했다”고 반성했다.
덧붙여 “정의로운 인간적 삶에 대한 희망과 꿈을 위해 싸웠고, 부당한 불의에 맞서 동료 노동자들을 지키고자 했던 가난한 노동자의 마지막 순간을 교회는 교회법이라는 이름으로 차갑게 냉대하고.. 기댈 곳도 없어 하느님만 찾았고, 하느님께 의지하고자 했던, 진정 성경의 가난한 사람과 같은 최 형제님이 이승을 떠나는 마지막 길에도 교회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김영호 신부는 교회를 대신해 최태욱 열사 영전에 뒤늦은 장례미사에 대해 “죄송합니다. 당신을 너무 많이 기다리게 했습니다”라며 용서를 빌고, 고인에게 “하느님 나라에서 이 땅의 민주주의와 정의로운 삶과 생태적 평화를 위해 싸우는 모든 이들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해 달라”고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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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최태욱 열사와 교분을 나누었던 청도성당 주임 이성한 신부와 최태욱 열사의 아들 최광민 씨가 묘소에서 나란히 섰다. ⓒ한상봉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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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날 장례미사에는 대구경북지역에서 활동하는 노동자들과 노동운동가와 신자들이 참석했다.ⓒ백설 |
한편 당시 청도성당 본당사제였던 이성한 신부는 장례미사에 참석한 최태욱 열사의 아들 최광민 씨에게 최태욱 열사가 남긴 일기와 유서를 돌려주며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광민 씨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려 미사 참석자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최광민 씨는 아버지 최태욱 열사의 분신 당시 3살이었는데 이제 어엿한 청년이 되어 부친의 장례미사에 참석한 것이다. 이성한 신부는 용서를 빌며 “오늘에야 지난 22년 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던 슬픔과 짐을 내려놓는 것 같다”고 전했다.
미사 후 민주노총 경북지역본부 경산지부와 대구노동사목 주관으로 경산 금곡 장미공원묘지의 최태욱 열사 묘소에서 추도식이 열렸다. 아들 광민 씨 등 유족과 지역 노동자 및 노동사목 활동가들은 최태욱 열사의 명복을 빌며 분향하고 국화를 바치며 ‘노동해방’을 향한 고인의 뜻을 되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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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태욱 노동열사의 추도식을 알리는 현수막 ⓒ한상봉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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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도식에 참석한 노동자들이 최태욱 열사의 뜻을 구호를 통해 기리고 있다. ⓒ한상봉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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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태욱 열사의 묘소에서 참배하는 지인들 ⓒ한상봉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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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소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가톨릭노동사목 활동가들과 김영호 신부 ⓒ한상봉 기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