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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1년 9월 13일 화요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주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마라.”하고 위로하시며
앞으로 다가서서 상여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예수께서 “젊은이여, 일어나라.”하고 명령하셨다.
(루가 7,11-17)
When the Lord saw her,
he was moved with pity for her and said to her,
“Do not weep.”
He stepped forward and touched the coffin;
at this the bearers halted,
and he said, “Young man, I tell you, arise!”
말씀의 초대
교회의 지도자와 봉사자는 가정생활에 충실하고 이웃과 관계에서도 품위 있으며 좋은 평판을 듣는 사람이어야 한다. 모범적인 삶을 살며 교회에 봉사할 때 신자들은 그들의 모습을 보고 신뢰하며 더욱 굳건한 신앙을 갖게 된다(제1독서). 예수님 일행이 젊은 외아들을 잃은 슬픈 장례 행렬을 만난다. 주님께서는 그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일으키신다. 주님께서 생명의 주인이심을 드러내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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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외아들을 잃은 한 여인이 있습니다. 자식의 시신을 메고 가는 상여 뒤를 그 여인과 그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 행렬 지어 따라가고 있습니다. 남편 없이 오로지 외아들에게만 희망을 두고 모든 것을 바치며 산 여인입니다. 그런데 그런 외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같이 슬퍼하며 상여 뒤를 따르는 것으로 보아 그 여인의 슬픔이 얼마나 큰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식이 먼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지요. 그래서 부모가 자식을 먼저 보내는 심정을 ‘참척(慘慽)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소설가 박완서 씨는 오래 전, 남편을 잃은 지 석 달 만에 외아들마저 잃게 되었지요. 그는 십자가를 내동댕이치고 하느님을 원망하며 스스로 미치지 않는 게 저주스러웠다고 그때의 순간을 회고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견딜 수 없는 극도의 고통 속에서 주님을 더 깊이 만납니다. 자신의 잘남과 능력을 믿고 살다가, 운명을 한 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만나는 순간, 그 고통의 밑바닥에서 결국은 주님을 부르게 됩니다. 고(故) 박완서 씨도 그 순간에 다른 사람들에게 철저히 무관심하며 이기적으로 살아왔던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그 후에 그는 신앙 산문집, 『한 말씀만 하소서』를 발표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외아들을 잃은 슬픈 ‘죽음의 행렬’이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을 만나면서 외아들은 다시 살아나고 이제 그 행렬은 기쁨으로 가득 찬 ‘생명의 행렬’로 바뀝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마주하는 슬픈 운명은 결국 주님을 만날 때에만 위로받을 수 있고 생명을 얻게 됩니다. 박완서 엘리사벳 님이 아름답게 한 생을 마감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의 행렬’에서 예수님을 만나 ‘생명의 행렬’에 합류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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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인이라는 동네에 이르시어 장례 행렬을 만납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이 과부의 외아들임을 아시고 다시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무엇이 그분께서 기적을 일으키시게 하였을까요?
동정심이었을까요? 아니면 어머니의 애절한 마음이었을까요? 이에 대한 답변은 각자의 깨달음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기적의 원인은 분명 그 어머니에게 있었습니다. 아들을 잃고 처연한 모습으로 걸어가는 모습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느낌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더구나 나인의 기적은 누구의 간청으로 일어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당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을 아주 냉정한 분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인간 각자의 애환에 특별히 신경 쓰지 않는 차가운 심판관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반대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인간적인 슬픔을 외면하시는 분이 아님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세상의 그 누구라도 부모님의 사랑 앞에서는 숙연해지기 마련입니다. 나인의 기적은 어머니의 사랑이 정답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그러한 사랑을 지니신 분이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과부의 아들
-김인한 신부-
몇 년 전 주일이었습니다. 홀로 계신 제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본당 신자 할머니가 병자성사를 청했기에,
비록 마음은 어머니에게 가 있었고 어머니 생각으로 마음은 아팠지만
눈물을 삼키며 그 할머니에게 정성스럽게 병자성사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주일 미사를 다 마치고 나서야 어머니 병실을 찾아가 볼 수 있었습니다.
사제의 삶은 지금 맡겨진 이들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 눈물을 머금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어머니를 떠나 복음 전도를 위해 여행하시는 예수님도
부모를 몰라라 하는 분이어서가 아니라,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
지금 가난한 사람들, 지금 당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을
더 사랑하시려 함이었습니다.
오늘 저는 복음을 묵상하다 예수님께서 과부와 그의 아들을 바라보시며
자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떠올리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 생각에 눈물을 흘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과부인 저희 어머니를 떠올려보았습니다.
문득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이 떠오릅니다.
부부관계가 자녀의 양식입니다.
-송미영 수녀-
작년에 사랑하는 친구가 주님 곁으로 갔습니다. 친구는 참으로 남편과 자녀들을 사랑했습니다. 어느 날 자신의 병이 깊다는 것을 안 친구는 가족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것을 아파하면서 그들이 새 가정을 꾸밀 수 있도록 자신이 멀리 떠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그때 저는 어떤 말로도 위로를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단지 엄마와 아내는 ‘무엇을 주어야만 가치있는 존재’가 아니라 ‘있어서 좋은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그들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족한테는 충분하다고 말했습니다. 항상 그들을 바라보고 용기를 주고 칭찬해 주고 귀여워해 주고 자랑스럽게 여기며, 한결같은 믿음을 주는 그런 존재로 머물러 있는 사람이 엄마요 아내라고 말입니다. 가끔 부모들이 자녀를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물어옵니다. 저는 다음 기도가 참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부모의 기도’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온화한 미소입니다.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상냥한 말과 친절입니다.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기쁨 속에 사는 모습입니다.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분수에 맞는 검소한 삶과 기도의 모습입니다.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소망과 이상입니다.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사랑의 주님, 이것이 저희가 자녀들에게 물려줄 유산임을 명심하여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자녀들은 부모님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만 봐도 저절로 큽니다. 부모님의 분위기가 자녀의 일용할 양식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한 어머니에게 아들을 되살려 돌려주셨습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우리 아이를 살려주시고 다시금 우리 품에 안겨주신 날입니다.
바울로가 제시하는 사제양성 지침
-경규봉 신부-
사도 바울로는 교회 안에서 직책을 맡을 이들에 대해 말한다. 먼저 ‘내려다 보다, 돌보다, 감독하다.’란 뜻을 지닌 동사에서 비롯된 감독(주교)은 ‘목자’(1베드 2,25)의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되었다. 여기서 감독은 하느님 백성을 인도하도록 선택된 주교나 신부 등의 사목자들을 뜻한다. 초대 교회 당시에 감독은 온전한 헌신과 희생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대단히 어려운 직책이었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었기에 교회에 유익한 좋은 일로 간주되었다.
감독의 직책이 좋기 때문에 감독은 특별한 자격 조건을 필요로 한다. 바울로는 감독에게 요구되는 여러 가지 품성을 열거한다.
먼저 탓할 데가 없는 사람으로 감독의 권위가 손상되지 않도록 비행이 없어야 한다. 또한 한 여자만을 아내로 택하여 아내에게 충실하여야 하며, 자제력이 있어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신중함으로써 매사에 분별력을 잃지 않아야 하고, 품위가 있어서 도가 지나치지 않고 점잖으며 정중하게 행동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남에게 후하게 대접할 줄 알며, 하느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시켜 영적으로 가르칠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맡은 양떼를 말씀으로 잘 양육할 능력을 지녀야 한다.
술을 즐기지 않음으로써 술을 통해서 마음의 안위와 쾌락을 누리는 말아야 하고, 난폭하지 않음으로써 행위나 언어의 폭력을 사용하지 말아야 하고, 온순하여 친절하고 동정심이 많은 관대한 사람이어야 한다. 또한 자기주장만 내세우지 않음으로써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을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하며, 돈에 대한 욕심이 없어야 한다. 나아가 가정을 잘 다스리고, 자녀들의 모범이 되어 그들로부터 공경받을 수 있어야 하며, 품위를 잃지 않고 자녀들을 복음의 진리 속으로 이끌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을 감독으로 택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그가 자칫 오만과 야심으로 가득하여 타락함으로써 악마가 받는 심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 밖의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을 받는 사람이어야 한다. 교회 지도자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지 못할 때 교회 역시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늘나라의 시민인 동시에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과의 관계를 무시할 수 없다(1베드 2,12).
보조자(천주교의 부제이며 개신교의 집사를 가리킴)들 역시 감독과 비슷한 자격 요건을 가진다. 사도 바울로는 이들이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믿음의 심오한 진리(그리스도의 구원의 진리)를 간직하고 있는가를 시험해야 한다고 말한다. 초대 교회에서는 이들 가운데에서 감독이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로의 가르침은 오늘날 교회의 사제양성지침이기도 하다. 종신부제직을 받아들이는 지역을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부제는 사제가 되는 과정에서 주어지는 품계이며, 주교는 사제 가운데에서 선택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제를 양성하기 위한 신학생을 선발하고 교육하는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점은 그들이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도록 이끄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대한 깊은 믿음을 간직함으로써 그들이 세상 것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께 의지하며 살도록 하는 것이다. 하느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은 사도 바울로가 제시하는 여러 가지 요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오늘 사제직을 지망하는 신학생들과 성소자들이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깊은 믿음을 지니고 그 믿음을 키워감으로써 교회의 훌륭한 지도자들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자. 뿐만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인 신부님, 수도자님, 주교님, 교황님께서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온전히 의지함으로써 믿음으로 교회내의 모든 문제를 풀어나가고, 교우들을 믿음의 길로 이끌도록 기도하는 하루가 되자...........◆
-김병수 신부-
오늘 복음은 나인이라는 동네에 죽은 외아들의 과부와 만나는 장면입니다.
당시 가부장적인 유다 사회 안에서 과부라는 것만 해도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거기다 외아들까지 잃었으니 더 이상 할 말이 필요 없습니다.
과부가 느낀 슬픔은 절망 그 자체였고 죽음보다 더한 슬픔이었습니다.
남편을 여의고 나서 여인에게 펼쳐진 고통의 세월은 그나마 견딜 수 있었습니다.
외아들이란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것입니다.
과부의 삶은 외아들의 죽음으로 이제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과부의 통곡소리가 얼마나 크고 슬펐던지 나인 동네 곳곳에 그 소리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너무도 안쓰러운 나머지 너나 할 것 없이
장례 행렬에 참여하여 큰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이런 과부의 절망적인 슬픔을 측은히 여기신 예수께서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도 큰 슬픔에 잠겨있는 과부의 얼굴을 눈여겨보신 예수께서는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들에게 다가가십니다.
지칠 대로 지친 과부의 어깨에 손을 엊으시며 따듯이 위로해 주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슬픔의 원천인 죽음마저 물리치십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왜 사랑하시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고통, 우리의 상처, 우리의 부끄러움, 우리의 한계, 우리의 과오,
우리의 실수, 우리의 치부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오늘 이 과부의 애절한 울부짖음을 예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상여의 행렬을 멈추게 하시고, 과부에게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그 과부의 크나큰 슬픔을 안쓰러워하시며 과부를 위로하십니다.
그리고 이미 죽은 지 오래되어 관에 넣어진 채 무덤으로 향해 가는 과부의 아들을 살리십니다.
참으로 주님의 손길은 생명의 손길이요 축복의 손길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이제 죽음의 행렬이 생명의 행렬로,
슬픔의 행렬이 기쁨의 행렬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참으로 필요한 우리의 자세는
바로 나인 동네의 과부와 같은 간절한 심정을 지니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오실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우리를 향해 다가오실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슬픔을 아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오셔서 우리를 향해 "울지 말라."고 다정하게 우리의 등을 두드리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노력일 것입니다.
- 하용달 신부-
오늘 복음 말씀의 주제는 예수님께서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리신 ‘치유기적’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 기적의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나인’이라는 도시는 나자렛 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나자렛에서 걸어서 두어 시간의 거리에 있는 마을입니다. 이곳 나인이라는 마을의 젊은이를 되살리신 기적 이야기는 루가 복음서에만 전해옵니다.
루카 복음서는 흔히 ‘소외자들의 복음서’라고 불리워집니다. 루가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활동 초기부터, 곧 나자렛 회당에서 설교하신 때부터 소외자들에게 큰 관심을 드러내십니다. 루카 복음 4장 18절-19절에 의하면 이사야서 61장 1절-2절: 58장 6절을 읽으셨다는데, 그 대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셨기 때문이로다. 주께서 나를 보내셨으니,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들에게는 해방을, 소경들에게는 시력 회복을 선포하며, 억눌린 이들을 해방하여 보내고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기 위함이로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은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각별히 아끼신 여러 부류의 소외자 안에는 고통받는 병자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향한 특별한 관심과 사랑은 초기 교회에서부터 지금까지 교회가 의료사업에 깊이 헌신하는 소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다시금 ‘의료와 선교’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초기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소외받는 병자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시대 정신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기 위해 의료 사업에 지속적인 활동을 펼쳐 왔습니다. 또한 선종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1992년도에 질병의 고통에서 신음하고 있는 병자들에 대한 사회와 이웃의 관심을 유도하고, 의료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사명감을 일깨우는 동시에 고통의 의미를 묵상할 수 있도록 ‘세계 병자의 날’을 제정하기도 하였습니다.
천주교부산교구에서도 메리놀병원과 성분도병원을 메리놀수녀회와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수녀회로부터 경영권을 인수받은 후 지금까지 지역사회 내에서 그리스도의 치유사도직을 재현하고, 생명사랑과 인간존중을 실천하기 위해 사랑과 정성을 다해 헌신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경제적 발전과 제도의 변화로 의료사업은 큰 전환기를 맞고 있습니다. 특히 의약 분업 이후 의료계의 경영 악화와 국민들의 질적 수준과 의식의 변화 등으로 메리놀병원과 성분도병원의 의료 시설로는 이에 부응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천주교부산교구에서는 2003년 8월 29일에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 산 85-5번지에 부산성모병원 기공식을 갖고, 현재 마무리 공사가 한창 진행 중에 있습니다. 부산성모병원의 신축 과정은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크고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 교구민의 적극적인 관심과 기도와 익명의 은인들의 협조 및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 계획한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산성모병원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준공되어 진다면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에 보이신 많은 기적들, 특히 고통 받는 병자들을 치유하신 기적들을 재현하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또한 전인적 치료와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여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평등하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구에서 진행하고 있는 이 힘겨운 일이 하느님의 뜻대로 마무리되기 위해서는 교구장이신 정명조(아우구스티누스) 주교님께서 강조하셨듯이 무엇보다 모든 교우들이 하나된 마음으로 열심히 바치는 기도, 특별히 교구의 주보이신 성모님께 바치는 묵주기도의 뒷받침이 더없이 중요합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천사들로부터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 받은 후 바친 아름다운 기도의 한 구절을 묵상하면서 오늘의 말씀을 갈무리 하겠습니다.
“주님의 종이오니,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아멘.
간절한 기도
-최혜영 수녀-
과부의 외아들을 되살리신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가슴이 뭉클합니다.
과부 어머니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외아들을 잃고 울고 있는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측은지심을 느끼시고 “울지 마라” 하고 위로하시며 젊은이를 살려주셨습니다. 자녀의 죽음을 지켜보는 부모님만큼 절실하게 기도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저도 몇 번 이런 처지에 있는 분들에게 기도를 부탁 받은 적이 있는데 하느님께서 백발백중 이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들은 다른 것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오직 자녀의 생명만을 기원합니다.
그들은 자기 자녀가 내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임을 깨닫고, 그들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매달려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들의 기도는 자녀가 좋은 학교에 들어가기를 청하거나 돈 잘 버는 직장에 들어가기를 청하는 때와는 매우 다릅니다. 이때의 기도는 이기심 따위는 개입되지 않고 순수하게 하느님께 의탁하는 마음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바로 이러한 때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는 통찰력을 주시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할 수 있는 겸손한 믿음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은 진정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의 행복을 원하시는 분이시지 고통이나 죽음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생명의 주님, 우리에게 참 생명이 무엇인지 알려주시고 당신께 모든 것을 의탁할 수 있는 믿음을 주소서.”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김경희 수녀-
주님께서 나인이라는 동네 과부의 아들이 죽은 것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십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제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70평생 냉담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셨습니다. 어느날 아침을 먹고 있는데 집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지가 임종하시려고 하니 빨리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집에 달려가 보니 말씀도 못하시고 겨우 숨만 쉬고 계셨습니다. 지난밤 병자성사를 받으셨는데 노자성체도 넘어가지 않아 신부님이 영하고 가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신부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아 신부님께서 마지막 강복을 해주고 가셨다는 겁니다.
이렇게 아버지가 임종을 맞으면 하느님 나라에 가지 못할 것 같아 열심한 자매님 몇 분께 아버지의 선종기도를 부탁하고, 아는 신부님·수녀님께도 기도를 부탁드렸습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계신 아버지를 위해 어떤 기도가 가장 힘이 있을까 생각하다 우도가 생각났습니다. 예수께서 돌아가실 때 우도는 예수님의 자비를 입어 천국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우도 성인님, 당신처럼 우리 아버지도 예수님의 자비를 입을 수 있도록 전구하여 주십시오. 예수님, 우리 아버지에게 우도의 축복을 내려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동안 아버지는 한마디도 못하셨지만 눈에서는 계속 눈물이 흘렀습니다. 회개의 눈물 같았습니다. 동네 어르신들이 기도하고 가시면서 “이 노인네 오늘 돌아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마침 그날이 금요일이라 장례미사도 못할 것 같았습니다. 평생 냉담하셔서 미사 은혜를 받지 못했는데 장례미사까지 못하게 되면 안 될 것 같아 아버지의 귀에 대고 “아버지, 하루만 참으세요. 월요일 장례미사는 꼭 하셔야 합니다” 하고 큰소리로 말씀드리고 나서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밤 10시가 되었습니다. 2시간만 기도로 아버지를 붙잡고 있으면 장례미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모두 안방에 모여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묵주기도를 하는 동안 성모님께서 오셔서 아버지의 70평생 묻은 때를 다 닦아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월요일 장례미사를 하는 동안 이 세상 삶을 마치고 가는 저희 아버지께 하느님께서 크신 자비로 이 세상 모든 근심 걱정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하느님 나라로 초대해 주시는 기쁨에 저는 장례미사 내내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심
-김웅태 신부-
오늘 복음[루까 7:11-17]에서 우리는 나임이라는 곳에 사는 과부의 외아들이 죽은 것을 예수께서 살려 주셨다 하는 기적을 말씀을 들었다.
나임이라는 곳은 열왕기 하권 4:18-37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예언자 엘리아가 과부의 아들을 살렸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한 곳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과 함께 들렸을 때 상여에 매어 무덤으로 향하고 있는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만나게 되셨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적인 뼈아픈 슬픔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남편을 여윈 과부의 슬픈 생애,그리고 거기에다 세상에서 의지하고 마음 둘 사람이라고는 그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뼈 아픈 슬픔" 이것은 인간의 삶속에 뼈아픈 비애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슬픔에 잠긴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그대로 지나치실 수 없으셨다. 예수님은 그 과부를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말라!"고 위로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 인간의 비애를 그토록 마음 아파하실 줄 아는 예수님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얼마나 인정어린 예수님의 모습인가? 그토록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을 같이 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상여에 손을 대시고 "젊은이여, 일어나라!" 명하신다. 죽음에서 생명을 되찾아 주신다.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 속에 우리는 무엇을 또 볼 수 있는가? 바로, 사람의 생명을 주시고 걷우시는 주체자이시며, 생명의 주인, 즉 우리의 생명을 살리실 수도 걷우실 수도 있는 생명의 주 되심을 알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 내 생명 주인이 되시기에 요한복음 14:19에서 볼 수 있듯이 그분은 무덤에서 승리하시어 친히 스스로 살으셨기에 우리도 또한 살리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음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기적을 부르는 믿음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1코린 12,12-14.27-31ㄱ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복 음 : 루카 7,11-17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 묵상
㰡죽은 자식 불알 잡기㰡‘라는 말 들어 보셨습니까. 죽은 후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이고 그래봐야 다시 살아날 수 없으니 아쉬움을 접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되는 일이 오늘 복음에 발생했지요.
한 과부가 외아들이 죽자 장례를 지내려 상여를 따라 갑니다. 마침 나인이라는 동네를 가고 계시던 예수님께서 슬픔에 잠겨 떠나가는 상여와 마주치시지요. 측은한 마음이 드신 예수님께서는 과부를 위로하시며 젊은이를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십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옛 예언자들 중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도 하고, 하느님의 사람이 찾아와 주셨다고도 하며 깜짝 놀란 반응을 보이지요.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기적은 오늘 복음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에서도 전해지는 사건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과부와 고아는 이방인과 합께 사회의 가장 晩募?층에 속하는 약자들입니다. 아무데도 의지할 곳 없는 이들은 재산과 권리조차도 제대로 행사할 수 없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과부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은 그 아들이었고 그가 생의 전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마저 죽음에 빼앗겨 버리는 일이 일어났지요.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 약자들의 보호자이심을 드러내기 위해 성경 저자들은 구약과 신약에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내는 기적을 연이어 언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구약과 신약성경에서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는 기적이 열왕기 상권 17장과 오늘 복음인 루카 복음 7장에 언급되고 있지마는 배경과 주제는 전혀 다릅니다. 열왕기 상권 17장에는 엘리야 예언자에게 먹을 것을 준 사렙타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숨지는 일이 일어나지요. 이때 엘리야 예언자는 하느님을 소리쳐 부르며 죽은 아이 위에 엎드려 몸과 몸을 맞추기를 세 번 합니다. 이는 고대인들의 사고방식에 따라 생명의 힘이 산 사람에게서 죽은 사람에게로 옮겨간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엘리야가 세 번 몸을 맞추기를 했습니다만 여기에서의 핵심은 엘리야의 기도입니다.
㰡’주 저의 하느님, 이 아이 안으로 목숨이 돌아오게 해 주십시오.㰡“(1열왕17,21)
그러자 하느님께서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죽은 아이에게 다시 생명의 호흡을 주셨고, 마침내 아이는 살아났습니다. 하느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기적을 일으키셨지요.
반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슬픔에 잠겨 떠나가는 상여를 멈추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㰡’울지 마라.㰡“(루카7,13)고 위로하시며 앞으로 다가서십니다. 그리고는 상여를 메고 가던 사람들의 걸음을 멈추게 하시고 상여에 손을 대며 㰡’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㰡“(루카7,14)고 명령하십니다. 그러자 㰡’죽은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㰡“(루카7,15)합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어머니에게 돌려주시지요.
이렇듯이 예수님께서는 엘리야와는 전혀 다르게 직접 당신의 힘으로 죽었던 과부의 아들을 살려내십니다. 사람들은 㰡’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㰡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㰡‘, 또 㰡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㰡‘하고 말하기도㰡“(루카7,16)하지요. 예수님의 이 이야기는 곧 온 유다와 그 근방에 두루 퍼져나갔습니다.
구약에서는 엘리야가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도움을 청했지만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직접 죽은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과부의 외아들을 직접 살려 주시는 사건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예수님의 출현과 함께 이 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하느님 나라는 죽은 후에나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 실천되는 그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래 전 인도에서 살았던 현자 썬 다싱의 이야기입니다. 네팔을 여행하다가 썬 다싱은 히말라야 산맥이 위치한 곳에서 우연히 한 여행자를 만나게 됩니다. 눈보라를 헤치며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가고 있던 그들은 눈밭에 쓰러진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썬 다싱이 갈등 끝에 그 사람을 데리고 가자 하자, 㰡’미쳤군요, 우리도 죽을 판인데… 우리는 인가를 찾아야만 살 수 있습니다.㰡“하며 동행자는 서둘러 떠나고 말았습니다. 썬 다싱은 죽을 각오를 하고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죽어가는 사람을 등에 업고 한 발자국씩 혼신의 힘을 다해 걸어갔습니다. 얼마를 가다보니 몸이 훈훈해졌고 등에 업혀 있던 사람도 깨어났습니다. 둘은 몸을 밀착하여 서로의 온기를 받으며 앞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동녘이 밝아오자 그들은 인가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쯤 가다가 싸늘하게 식은 시신을 발견하였습니다. 혼자 살겠다고 먼저 간 사람이 마을 어귀에서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이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㰡’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㰡“는 주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곳에 기적이 일어나고 새로운 희망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죽은 이도 일으켜 살리시는 하느님 나라는 구약이나 신약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은 지금 우리 안에서도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말씀으로 오신 그 분을 믿고, 그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고통받는 이들에게 위로를 주고 희망을 되찾아 주는 곳이 바로 㰡하느님 나라㰡‘이고 세상의 㰡빛과 소금㰡‘이 되는 삶인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내 방식을 고집하고 내 능력대로 살고 싶어하면서 기적을 바라는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지요. 그런 삶의 자세에서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 절망에서 희망을 부르는 기적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인간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이루는 기적을 불러오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젊은이여,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이수철신부-
주님 앞에 우리는 모두 젊은이입니다.
오늘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젊은이여,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절망과 죽음의 어둠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희망과 생명의 빛 되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기에 앞서
“사람을 찾아오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찾는 면만 강조하다 보면 삶이 팍팍하고 고단합니다.
예전에 이런 심정을 담아 표현한 ‘나무에게’ 란
시가 생각납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 가도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
때로는 하느님을 찾는 열정을 접어두고
고요한 호수의 마음이 되어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을 영접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과부의 죽은 외아들의
소생 이적에 대해 하느님을 찬양하며 드리는
사람들의 고백이 딱 맞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 오셨다.”
그렇습니다.
매일, 매 순간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성무일도의 기도를 통해, 매일 미사를 통해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신 후,
죽은 외아들을 살려내십니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 측은히 여기는 마음,
바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인 연민입니다.
청하기 전에 이미 우리 마음의 필요를 연민으로 알아채시고
개입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아니 외아들을 잃은 과부의 처절한 슬픔은
이미 기도가 되어 하느님 마음에 닿았을 것입니다.
“젊은이여,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얼마나 고마운 구원의 말씀인지요!
비단 죽은 젊은이뿐 아니라, 실의와 좌절의 어둠 속에
주저앉아있는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우렁찬 말씀입니다.
빛과 희망, 생명의 주님께서 절망의 어둠 중에
죽어있는 과부의 외아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이어 죽은 외아들이 일어나 앉아 말을 하기 시작하자
주님은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셨다 합니다.
얼마나 멋진 주님의 모습인지요!
외아들의 죽음으로 절망의 어둠 속에 죽어 살게 될 과부에게
외아들을 살려 돌려드림으로
생명의 빛 속에 희망으로 살게 된 과부입니다.
오늘날 주님을 만나지 못하므로 살아있으나 실상 죽어있는,
절망과 죽음의 어둠 속에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주님을 만나 생명의 빛 속에 희망 되어 사는 우리들,
연민의 사람들입니다.
한 성령 안에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된 우리들,
그대로 그리스도의 몸이요
각자는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지체가 되면 될수록 우리의 마음,
그리스도의 연민 가득한 마음이 되니
우리는 연민의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은 우리를
‘연민의 사람’으로 변화시켜주시어
당신의 빛과 생명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께서 해주신 일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2).”
아멘.
희망의 배달부
-조성풍 신부 -
새로운 모임에 처음 가게 되면 가족 관계에 대한 물음 외에 종종 듣게 되는 것이 취미에 대한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너무 진부한 듯하여 ‘독서’라고 대답하는 것이 쑥스럽기도 했지만, 지금은 자신 있게 답을 합니다. 사실 이런저런 책을 읽고 지식과 지혜를 쌓아가는 기쁨도 크지만, 그 내용을 정리해서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더 큰 기쁨을 안겨줍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주문한 책을 배달해주시는 분들이 반가운 소식의 전달자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과부는 우리네 인생에 있어서 가장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는 배달부를 만납니다.
외아들을 잃고 슬픔에 잠겨 있던 그에게 위로자로서 오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단순한 위로를 넘어서서 아들을 잃고 절망에 빠진 그에게 잃은 아들을 되돌려주심으로써 희망을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의 배달부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누구에게 희망을 둘 수는 없습니다.
젊은이여, 일어나라!
+주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마라.”하고 위로하시며 앞으로 다가서서 상여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예수께서 “젊은이여, 일어나라.”하고 명령하셨다.
-강영구신부-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은 죽은 부모를 산에 내다 묻고 곧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먼저 간 자식 때문에 가슴 아파합니다.
그래서 부모 앞서 죽는 것보다 더 큰 불효(不孝)는 없다고 합니다.
외아들을 잃은 나인의 과부는 살아있어도 산목숨이 아닙니다.
기대고 살던 남편이 떠난 후 그녀에게 유일한 희망과 기쁨은 외아들뿐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예레미야 31,20 이사야 43,4) 아들이지만,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 하늘이 불러 가면 어쩔 도리가 없지요.
아들을 가슴에 묻은 여인은 기쁨과 희망을 잃고 아들과 함께 죽은 목숨이 됩니다.
“젊은이여, 일어나라!”
예수님의 이 한마디 말씀은 죽었던 젊은이를 일으켜 세우지만,
사실은 아들과 함께 죽은 과부 어머니를 부활(復活)시킵니다.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자비지심(慈悲之心)과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죽은 아들과 함께 과부를 살려냅니다.
당신의 오늘이 예수님과 함께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마산교구
<깊은 슬픔>(2002-09-16)
-양승국신부-
언젠가 겨우 일곱 살 된 아이를 먼저 떠나 보낸 한 어머니의 주체못할 슬픔을 옆에서 지켜본 적이 있었습니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건만 결국 싸늘하게 식은 아이의 시신 앞에 오열하는 어머니에게 그 어떤 위로의 말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아이가 떠나간 빈자리는 너무도 커 보였습니다. 식사는커녕 밤잠마저 이루지 못해 몰골은 말이 아니게 변해 갔고, 하도 울어 눈물마저 말라버렸습니다.
그렇게 잊으려 잊으려해도 스쳐 지나가는 세상 모든 것이 다 죽은 아이와 연결되어 도저히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길을 지나가다가도 또래 아이들만 만나면 즉시 가슴이 미어져왔습니다. 평소에 아이가 좋아하던 음식만 봐도 당장이라도 "엄마!" 하고 외치며 아이가 뛰어올 것만 같았습니다.
슬픔 중에 가장 사무치는 슬픔, 세상에서 가장 깊은 슬픔은 무엇보다도 아이를 먼저 떠나보낸 어머니의 슬픔인 듯 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인성의 과부는 상황이 더욱 심각했습니다. 당시 가부장적인 유다 사회 안에서 과부란 것만 해도 최악의 상황이었는데, 거기다 외아들까지 잃었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나인성의 과부가 느낀 슬픔은 죽음보다 더한 슬픔이었습니다.
남편을 여의고 나서 여인에게 펼쳐진 고통의 세월은 그나마 견딜 수가 있었습니다. 외아들이란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설움이 복받칠 때마다 무럭무럭 성장하는 아들을 보며 달랠 수 있었습니다. 과부이기 때문에 손가락질 당할 때마다 효성 지극하고 총명한 아들만을 바라보며 견뎌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것입니다. 과부의 삶은 외아들의 죽음으로 이제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과부의 통곡소리가 얼마나 크고 슬펐던지 나인성 구석구석까지 그 소리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너무도 안쓰러운 나머지 너나 할 것 없이 장례 행렬에 참여하여 큰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이런 과부의 사무치는 슬픔을 자비의 예수님께서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도 큰 슬픔에 잠겨있는 과부의 얼굴을 눈여겨보신 예수님께서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 다가가십니다. 지칠 대로 지친 과부의 어깨에 손을 엊으시며 따듯이 위로해 주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슬픔의 원천인 죽음마저 물리치십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왜 사랑하십니까? 잘나서? 예뻐서? 사목을 잘해서, 기도를 열심히 해서? 물론 그런 이유 때문에도 사랑하시겠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 인간의 결핍 때문입니다. 우리의 고통, 우리의 상처, 우리의 부끄러움, 우리의 한계, 우리의 과오, 우리의 실수, 우리의 치부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
-박상대신부-
루가복음은 예수님의 평지설교(6,20-7,1)를 보도한 후, 곧바로 두 편의 기적사화를 들려준다. 두 편의 기적사화는 가파르나움에서 중병으로 거의 죽게된 백인대장의 종을 원격(遠隔) 치유하신 기적(7,1-10)과 나인에서 과부의 아들을 소생시킨 기적(7,11-17)이다. 오늘 복음은 과부의 아들을 소생시킨 기적에 관한 내용이다. 그런데 전후좌우의 문맥을 살펴보면 왜 두 편의 기적사화가 여기에 자리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루가복음사가는 이 시점에서 예수님의 신원(身元)과 정체성에 대한 중간결산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중간결산의 역할은 세례자 요한에게 주어졌다. 두 편의 기적사화 다음 대목을 보면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또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7,19) 라는 질문을 던지고는 그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이 보낸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먼저 살펴보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게 되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다"(7,22-23) 하고 말씀하셨다. 의아하면서도 재미있는 곳은 바로 직전의 구절이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신원(身元)에 관한 질문을 던지자마자 루가는 "바로 그 때 예수께서는 온갖 질병과 고통과 마귀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소경들의 눈도 뜨게 해 주셨다"(21절) 라는 재빠른 보도를 삽입하였다. 이 보도와 예수님의 답변을 비교해 보면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이 빠져있다. 따라서 루가에게는 죽은 사람을 소생시키는 기적을 앞서 보도해야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나인에서 과부의 아들을 소생시킨 기적은 루가복음의 고유사료이다. 전체 구조의 흐름은 엘리야 예언자가 사렙다 지방 과부의 죽은 아들을 되살린 기적(1열왕 17,8-24)이나 엘리사 예언자가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되살린 기적(2열왕 4,20-37)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복음이 선포하는 진의(眞意)는 판이(判異)하다. 엘리야나 엘리사는 죽은 아이를 살리기 위하여 안간힘을 다 쓴다. 엘리야가 과부의 죽은 아들 위에 엎드려 몸과 몸을 맞대고 야훼께 수 차례 기도를 올리는가 하면, 엘리사는 죽은 아이의 방에서 이리 저리 걷다가 아이 위에 엎드리기를 일곱 번 거듭하여 사자(死者)를 소생시키는데 비하여, 예수께서는 상여(喪輿)에 손을 대고 "젊은이여, 일어나라"(14절) 라는 단 한마디의 명령으로 생명을 도로 주신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되고 보니 사람들의 반응은 실로 놀라울 수밖에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는 일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드디어 예수님을 "위대한 예언자"로 "자기 백성을 찾아와 주신 하느님"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셈이다.(16절) 여기서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싹트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