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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잠 17:8-17
8 뇌물은 그 임자가 보기에 보석 같은즉 그가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하게 하느니라
9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10 한 마디 말로 총명한 자에게 충고하는 것이 매 백 대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히느니라
11 악한 자는 반역만 힘쓰나니 그러므로 그에게 잔인한 사자가 보냄을 받으리라
12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
13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14 다투는 시작은 둑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
15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께 미움을 받느니라
16 미련한 자는 무지하거늘 손에 값을 가지고 지혜를 사려 함은 어찜인고
17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
잠 17:8-17 / 뇌물 갖다 바치는데 안되는 일이 있으랴! 9) 남의 허물을 덮어 주면 사람을 얻고, 거듭거듭 허물을 들추어 내면 친한 벗도 등을 돌린다. 10) 멍청한 이를 백 대 때리는 것보다 지각있는 이를 한번 꾸짖는 것이 더 깊이 그 가슴에 새겨진다. 11) 반기를 들어 못된 짓이나 꾸미는 반역자들에게는 마침내 사형선고가 코 앞에 내려지리라. 12) 미련하여 어리석은 일만 저지르는 사람을 만나느니, 차라리 새끼를 빼앗겨 독이 오른 암콤을 만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 13) 선을 악으로 갚는 자는 그 집안에 불행이 끊이지 않으리라. 14) 둑에 물이 새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큰물이 나서 막을 수 없다. 처음엔 사소한 일로 서로 다투다가도 나중엔 걷잡을 수없이 일이 커질 수 있으니, 처음부터 다툴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아라. 15) 남 짓누르고 착취하는 못된 자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고 판결을 내리거나, 바르게만 살아가려 몸부림 치는 이를 못된 음모 꾸민다고 몰아세우며 억울한 판결을 내리는 일은, 여호와께서 신물나도록 역겨워하신다. 16) 속에서는 텅텅 빈소리만 요란하면서도 있는 돈 다가지고 지혜를 사려 들다니 이 어찌 해괴한 일이 아닌가? 17)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이 도타운 이가 동무가 아닌가? 갑자기 어려운 일 당하여 곤경에 빠졌을 때 옆에서 구해 주려고 태어난 것이 동기간 아닌가?
지혜로운 자는 사랑으로 허물을 덮고 화평을 이루지만 미련한 자는 선을 악으로 갚아 하나님을 반역하므로 여호와의 미움을 받는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허물을 덮어 주는 자(8-10) 뇌물은 감사함으로 드리는 자발적인 선물이 아닙니다. 자신의 사욕을 추구하기 위한 동기로 시작되어 받는 자에게 공정한 판단을 둔화시켜서 주는 자에 대해 무작정 호의를 베풀게 하여 일을 그릇되게 합니다. 미움과 사랑은 길이 다릅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키는 길이요,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 줌으로 화평을 이루는 길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입술로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춰내며 이야기 소재로 삼아 친구를 이간하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단 한 마디의 말로도 돌이켜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듣는 말을 자신에게 합리화하여 그 미련함에서 돌이키지 않습니다.
악으로 선을 갚으면(11-14) 악한 자는 반역을 힘쓰며 선을 악으로 갚습니다. 모든 죄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며 그 죄를 회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미련한 자의 행위는 새끼를 빼앗겨 극도로 사나워진 암곰의 잔인함보다 잔인하며 파괴적입니다(삼하7:8; 호 13:8). 그 미련함은 예수를 죽이기 위한 헤롯의 유아 학살(마 2:16), 살기가 등등하여 예수를 해하고자 했던 무리들(눅 6:11) 등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선을 선으로 갚지 않고 악으로 갚는 행위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지혜 있는 자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자입니다(마 5:39; 롬 12:17; 살전 5:15; 벧전 3:9). 또한 사소한 다툼이 법정 소송으로 가기 전에 다툼을 그치는 자입니다(고전 6:1-6).
여호와께 미움을 받는 자(15-17)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롬 3:26; 4:5). 공의의 하나님은 선악간의 판단을 뒤집어 놓는 것을 미워하십니다. 미련한 자는 돈으로 지혜를 흥정하려 하거나 획득하려 하지만 지혜는 지혜의 근본이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잠 9:10). 진정한 친구는 형제와 같이 어려움을 당할 때에 사랑이 끊이지 않고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지혜있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연합하여 함께 웃고 울고 아파하는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시 133:1).
적용: 당신은 누군가의 작은 허물을 사랑으로 인내하며 덮어주는 지혜자입니까? 아니면 말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 지적하고 말하므로 다툼의 화근이 되는 미련한 자입니까?
어떤 설교자가 지금 우리의 세대를 빗대어 말하기를 ‘칠면조 세대’라고 고발했습니다. 그 설교자가 칠면조로 우리 세대를 비유한 이유는 그들의 습성을 보면 단번에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칠면조들은 그들 중에 한 마리가 등에 상처를 입게 되면 상처 입은 칠면조를 쪼아서 그 상처에서 피가 나고 쓰러질 때까지 공격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약하고 눌린 자들을 더욱 치고 눌러 쓰러뜨리는 모습이 오늘의 이 세대의 비극과 마찬가지의 모습입니다.
< 설 교 >
신앙적 유익이 있는 만남
잠언 17:9-10 / 김철현 목사
유명한 정신 의학자 [칼 융(Carl G. Jung)] 은“인간이 권위의 한계를 느낄 때 그에게는 적어도 세 가지의 심리적 현상이 일어난다.”고 말했습니다. 가장 먼저 찾아오는 심리적 현상은 불안감정입니다. 여기까지가 한계인데 예측할 수 없는 더 이상의 무엇이 또 있을까봐 불안합니다. 사람은 이쯤 되면 누구를 막론하고 그야말로 망망한 대해에 던져지는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둘째는 억압감정입니다. 사람은 한계에 다다랐다 생각되면 그 한계에 아주 확 눌려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체감하는 느낌이 사실보다 더 무겁게 느껴집니다. 이것이 누르고 눌러서 견디다 못해 병이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심리적 현상은 고독감정입니다. 절대로 실패 자체가 문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실패한 것으로 인하여 이제는 친구도 가고, 사랑하는 사람도 가고, 모든 사람이 나에게서 떠나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실존에 가장 무서운 심리 현상은 고독입니다. 나 혼자라는 이 생각이 마음을 병들게 하고 삶을 포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이런 지경의 고독에 이르지 말아야합니다. 늘 나 자신을 생각하고 내 가족을 생각하고 내 이웃을 생각하는 가운데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의식을 날마다 새롭게 하는 자기실존이 있어야합니다. 나는 내 가족에게 나는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가를 생각합니다. 내 이웃에게, 그 사람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알게 모르게 적어도 두 가지 질문을 스스로 하고 살아야합니다. 첫 번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굳이 철학자나 과학자가 아니더라도 이것은 반드시 물어야 하고, 해답을 가져야 합니다. 여기에 나의 본질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나는 어디로 가는가?” 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에 죽음이란 것이 분명히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이것으로 정말 끝이냐 하는 것입니다.“ 죽음, 그 다음의 인간이란 어디로 가는 것이냐?”하는 이 궁극적인 관심, 이 종말론적인 궁금증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다. 정말로 죽어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아무 거리낄 것도 없습니다. 저지른 죄에 대해 걱정할 것도 없습니다. 불안정한 삶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불안하고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그저 사는데 까지 살다가 언젠가 이렇게 끝나고 말면 될 것이니까요.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내 생이 세상에서 끝나면 어디로 가느냐? 결국 나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이냐?’하고 계속적으로 묻게 됩니다. 왜 이 질문이 중요하냐면 이에 따라서“오늘 내가 할 일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하는 목적 달성과 목적 관리에 대한 문제가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믿음에 대한 재평가를 해봅니다. 왜 우리의 신앙생활이 나약해지는 것입니까? 도대체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이란 하나의 관계성입니다.
[윌리암 바클레이] 라는 신학자는 이 문제에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심판자를 이제는 아버지로, 그리고 항상 두려워하던 하나님을 이제는 사랑하는 하나님으로, 공포의 대상을 사랑의 대상으로, 그리고 증오의 대상으로 여겼던 이웃에 대해서는 사랑의 대상으로, 이기적인 생각에서 봉사하는 마음으로, 질투나 앙심에서 용서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주 쓸모없는 존재로 알았으나 예수 안에서 이제는 소중한 존재로, 실패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성공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허무한 것이 아니라 여기에 막중한 의미가 있다는 것으로 생각이 바꾸어지는 것, 이것이 예수 믿는 것이다.”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관계성, 즉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가 바로 정립될 때에 거기에 바른 신앙생활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부터 이 모든 관계가 전부 단절될 때에 그 인간은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케이치프 노이드] 라고 하는 심리학자는 말하기를“관계가 단절된 인간이란 여섯 가지 감옥에서 산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자기의 예쁜 면만을 볼 줄 아는 <자기도취의 감옥>, 둘째는 다른 사람의 나쁜 점만을 보는 <비판의 감옥>, 셋째는 오늘과 내일을 암담하게 보는 <절망의 감옥>, 넷째는 옛것만 황금시대로 보는 <과거 지향적 감옥>, 다섯째는 다른 사람의 것만 부러워하는 <선망의 감옥>,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싫어하는 <시기와 증오의 감옥>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어느 것에든지 매여 있다면 내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과의 관계에 단절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결국에는 이웃과의 관계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고요. 이런 나로서는 나 자신을 지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돌아본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니 돌아보기는커녕 이런 사람의 눈에는 남의 허물만 보입니다. 우리의 만남이 이렇게 다른 사람의 허물이나 보고 그것을 떠벌리고 다니는 이런 관계여서는 안 됩니다. 아름다운 신앙이 있는 만남의 관계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크게 경계하고 있습니다. 9절입니다.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여기서“허물을 덮어 주는 것”은 모른척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의 실수를 이해하고 용서해 준다는 의미로 그의 허물로 인하여 비록 피해를 입기도 했고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관용하고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싸주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 믿고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도 이걸 못하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자요, 이 말은 곧 믿음이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어서 남의 허물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드러내는 것은 그 사람의 허물을 고치게 하려는 선한의도가 아니라 그 허물을 드러내어 헐뜯으려는 악한의도가 담긴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 감정적인 대립을 만들고 다툼을 일으키는 미련한 자가 되고 맙니다. “거듭 말한다.”는 뜻이 여기저기 말하며 돌아다니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남의 허물을 보았다 할지라도 때로는 침묵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남의 허물을 보면 입이 가려워 못 견디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일차적으로 이런 내 감정을 잘 통제할 수 있어야 인격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전문의가 된다는 것은 오랜 시간의 공부와 훈련을 통하여 표현하기 어려운 고난을 겪은 뒤에야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마지막 자격시험에 합격한 뒤에야 전문의로서 환자들을 책임 있게 돌보게 됩니다. 수술할 사람, 투약할 사람, 입원할 사람을 구분하면서 명의로서 명성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전문의가 되어서도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나 아내의 수술이나 진찰은 다른 사람에게 의뢰한다고 합니다. 감정으로 실수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남의 일은 명쾌하게 잘 처리하는데, 막상 자기의 문제는 공정성을 잃고 바르게 잘 처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의사뿐만 아니라 다른 일, 다른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훌륭한 사람은 남의 일도 잘 처리해야하지만 먼저 자기를 돌아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먼저 돌아보는 사람은 쓸데없이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받는 일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예루살렘성전에서 천국복음을 가르치실 때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발견된 여인을 붙잡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이런 사람은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서 죽이고 살리는 판결은 로마총독에게 있는 권한인데 만약에 예수님께서 율법대로 죽이라고 하면 직권남용이라는 국법을 어기게 되는 일이고, 그렇다고 살려주라고 하면 반드시 죽이라는 성경말씀에 위배되는 것으로 참스승이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하신 일을 잘 아실 것입니다. 아무 말씀도 아니 하시고 땅에다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이제까지 한 번도 머뭇거리거나 못하시는 일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입을 굳게 다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할 말이 없어서, 혹은 난처해서 침묵하신 것일까요? 침묵이 해결방법이었기 때문에 입을 다무신 것입니다.
우리 또한 원하지 않은 자기 실수로 인하여 후회하며 마음 아파하는 사람에게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큰 위로가 될 때가 있습니다. 실수한 사람, 범죄 한 형제, 비난받는 이웃에 대하여 변명하고 해명해 주는 것보다 때로는 나 하나 입을 닫고 침묵하는 것이 가장 멋있는 위로요, 해결책이 될 때가 있습니다. 괜히 거들다가 일이 커지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습니까? 차라리 침묵이 해결책일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의 지혜는 10절입니다. “한 마디 말로 총명한 자에게 충고하는 것이 매 백 대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히느니라.” 미련한 사람을 교훈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자기에게 유익을 주는 책망과 충고를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을 깨우쳐 주는 것인데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가 잘못 되기를 바라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칭찬보다는 충고가 내 인생의 약이 될 때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왜 미련한 자가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에서 미련은 오는 것입니다. 즉 쉬운 말로 신앙이 없어서 미련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믿음 있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피차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허물을 덮어 줄줄도 알 것이요, 충고도 유익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부디 우리의 만남이 이런 신앙적인 유익을 줄 수 있는 만남이 되도록 서로가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지혜와 지혜 자
잠 17:9 / 김철현 목사
살아가면서 삶의 한계를 느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 한계란 때로는 지능의 한계일 수도 있고, 지식의 한계일 수도, 혹은 능력의 한계일 수도 있습니다. 그 한계 앞에 섰을 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유명한 정신 의학자 [칼 융(Carl G. Jung)] 은 “인간이 권위의 한계를 느낄 때 그에게는 적어도 세 가지의 심리적 현상이 일어난다.” 고 말했습니다.
가장 먼저 찾아오는 심리적 현상은 불안감이라고 합니다. ‘이 한계 다음에는 어떤 일이 있을까?’ 라는 예측할 수 없는 한계 밖의 일에 대해서도 불안합니다.
두 번째로 찾아오는 심리적 현상은 억압감정입니다. 한계에 다다랐다고 생각되면 그 체감하는 느낌이 사실보다 더 무겁게 느껴져서 한계에 완전히 눌려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르고 눌러서 견디다 못해 병이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패와 함께 느껴지는 가장 마지막 심리 현상은 고독감입니다.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심리적 현상입니다. 실패 자체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실패한 것으로 인해서 이제는 친구도 가고, 사랑하는 사람도 가고, 모든 사람이 나에게서 떠나버렸다고 생각하는 감정입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실존에 가장 무서운 심리 현상이 바로 이 고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이런 지경의 고독에 이르지 말아야합니다. 늘 나 자신을 생각하고, 내 가족을 생각하고, 내 이웃을 생각하는 가운데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의식을 날마다 새롭게 하는 자기실존이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알게 모르게 적어도 두 가지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첫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굳이 철학자나 과학자가 아니더라도 이것은 반드시 물어야 하고, 해답을 가져야 합니다. 여기에 나의 본질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나는 어디로 가는가?” 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에 죽음이란 것이 분명히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이것으로 정말 끝이냐 하는 것입니다. “죽음, 그 다음의 인간이란 어디로 가는 것이냐?” 에 대한 것 또한 반드시 물어야 하고 해답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남은 생애가 의미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믿음에 대한 재평가를 해봅니다. 왜 우리의 신앙생활이 나약해지는 것입니까? 도대체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이란 하나의 관계성입니다.
[윌리암 바클레이(William Barclay] 라는 신학자는 이 문제에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심판자를 이제는 아버지로, 그리고 항상 두려워하던 하나님을 이제는 사랑하는 하나님으로, 공포의 대상을 사랑의 대상으로, 그리고 증오의 대상으로 여겼던 이웃에 대해서는 사랑의 대상으로, 이기적인 생각에서 봉사하는 마음으로, 질투나 앙심에서 용서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주 쓸모없는 존재로 알았으나 예수 안에서 이제는 소중한 존재로, 실패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성공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허무한 것이 아니라 여기에 막중한 의미가 있다는 것으로 생각이 바꾸어지는 것, 이것이 예수 믿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관계성, 즉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가 바로 정립될 때에 거기에 바른 신앙생활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는데 기도가 되겠습니까? 이웃과의 관계가 단절 되었는데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의 근본은 관계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신앙,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어느 날 커피를 한 잔 마시려고 포트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물이 끓지를 않는 것입니다. 물을 너무 많이 부었나 싶어서 물도 따라서 버리고 또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여전히 물이 끓지 않는 것입니다. 이상하다 싶어서 살폈더니 전기 콘센트에 청소기 코드를 꽂아 놓고는 커피포트가 끓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참 바보짓을 했었습니다. 단절 된 전기에서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이런 바보가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부터 단절될 때에 그 인간은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케이치프 노이드] 라고 하는 심리학자는 “관계가 단절된 인간이란 여섯 가지 감옥에서 산다.” 고 했습니다. 첫째는 자기의 예쁜 면만을 볼 줄 아는 <자기도취의 감옥>, 둘째는 다른 사람의 나쁜 점만을 보는 <비판의 감옥>, 셋째는 오늘과 내일을 암담하게 보는 <절망의 감옥>, 넷째는 옛것만 황금시대로 보는 <과거 지향적 감옥>, 다섯째는 다른 사람의 것만 부러워하는 <선망의 감옥>,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싫어하는 <시기와 증오의 감옥> 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면이 있다면 곧 하나님과의 관계에 단절이 생겼다는 말이요, 신앙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반드시 이웃과의 관계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괜히 사람이 싫어지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트집 잡아 물고 늘어집니다. 사람이 정말 더 이상 자신을 지키지 못할 지경까지 이르게 되면 다른 사람의 장점은 하나도 안 보이고 남의 허물만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의 허물을 만나는 사람에게 마다 떠벌리고 다니는 게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을 굉장히 싫어하십니다. 오늘 본문 역시 그것을 크게 경계하고 있습니다. 관계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이 말씀에서 지혜를 얻어야하겠습니다. 특별히 본문을 두 측면에서 남을 보는 지혜와 받아들이는 지혜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생각해 볼 지혜는 남을 대하는 지혜입니다. 9절입니다.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여기서 “허물을 덮어 주는 것” 은 모른척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의 허물로 인하여 비록 피해를 입기도 했고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관용하고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싸주는 것을 말합니다. 실수를 했지만 이해하고 용서함으로 또 다시 실수하지 않도록 격려해 준다는 의미입니다.
자, 그런데 보세요. 이것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차원의 일이냐 말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관계가 올바른 사람, 즉 신앙이 바른 사람이라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형편까지 돌아 볼 수 있는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어서 남의 허물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드러내는 것은 그 사람의 허물을 고치게 하려는 선한의도가 아니라 그 허물을 드러내어 헐뜯으려는 악한의도가 담겨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거듭 말한다.” 는 뜻이 여기저기 말하며 돌아다니는 것을 뜻합니다. 한 사람에게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남의 허물을 늘어놓습니다. 한 사람을 공공의 적으로 만들려는 이것은 악한 습관입니다. 한 사람을 몰아세워서 죄인을 만들거나, 그 사람의 허물을 집중적으로 폭로함으로써 아주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나면 상대적으로 자신은 깨끗하고 허물이 없는 사람으로 비춰지고자하는 이기적인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남을 깎아내려 내가 이득을 취하고자하는 마음, 이것이 정말고약한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또 하나의 지혜는 자신에 대한 지혜입니다. 10절입니다. “한 마디 말로 총명한 자에게 충고하는 것이 매 백 대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히느니라.” 9절 말씀이 남의 허물을 보고 내가 취해야할 행동이라면 10절 말씀은 자신을 향한 유익한 책망을 대하는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의 서로 다른 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현명한 사람 한 번 꾸짖는 것이 미련한 사람 백 대 치는 것보다 낫다.” 미련한 자는 자기에게 유익을 주는 책망과 충고를 절대로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알지 못하는 나를 깨우쳐 주는 것인데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가 잘못 되기를 바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명심보감> 에 보면 “도오선자(道吾善者)는 시오적(是吾賊)이요, 도오악자(道吾惡者)는 시오사(是吾師)니라” 말이 있습니다. “나의 선을 말해주는 자는 내게 도적이 되고 나의 악을 말해 주는 자는 내게 스승이 되느니라.” 는 뜻입니다.
사실이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고 직접적으로 대놓고 지적해 주기란 쉽지 않습니다. 정말 친하거나, 사랑하지 않으면 웬만해서는 “너 좀 그거 고쳐라!” 하기가 어렵잖습니까? 그런데 정말 사랑한다면 하지 않습니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야단도 치고, 책망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길을 가도록 마냥 내버려 둔다는 것은 이미 그를 버렸다는 아주 치명적인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그 누구도 나에게 책망하지 않고, 나무라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위험하게 인식해야합니다. 버려진 존재,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랑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성공한 사람입니다. 신앙인만이 할 수 있는 위로와 격려, 이해와 용서를 실천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백대를 맞아도 깨닫지 못하는 미련한 자로 살 것이 아니라 한 마디의 충고만으로도 제대로 알아듣는 총명한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혜란 깨닫고 받아들이는 자에게만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지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잠 17:22 / 조용기 목사
<서론>
오늘 “내적 치유”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육신의 고통이나 질병은 눈에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전력을 기울여 치료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마음은 아무리 병이 들어도 눈에 안보이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내버려둘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의 병은 육신의 병 혹은 그보다 더 아프고 괴로워 자살까지 합니다. 육신의 병으로 자살하는 사람도 가끔 있지만 마음의 병은 다른 사람이 못 보니까 자기 혼자서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우리 삶의 기쁨과 행복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마음의 고통을 우리는 다 다소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어떤 마음의 고통이 있어요?
<본론>
1. 마음의 빚을 용서하지 못할 때
제일 우리가 그냥 보고 지나가고 모르는 것은 마음에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남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미움을 갖고 있는 그것이 마음에 병을 가져오는 큰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3절로 35절에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어느 임금님이 종들을 불러서 전부 빚을 청산하라고 하는데 한 종은 만 달란트 빚을 졌어요. 예를 들어 말하면 한국 돈으로 한 10억쯤 빚을 졌어요. 그래서 임금님이 그 신하를 보고 당장 그 빚을 갚으라고 하니까 돈이 없으니 못 갚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람의 처자도 다 종으로 팔고 가재도구를 다 팔아서 빚을 갚게 하라. 그러니까 그 사람이 땅을 치고 울면서 임금님에게 살려달라고 광고하므로 임금님이 불쌍히 여겨서 그 빚을 다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기뻐 뛰면서 임금님 앞에서 물러나와 밖으로 나왔는데 자기에게 백 달란트 우리 한국 돈으로 말하면 한 천 만원 빚진 동료를 만났는데 당장 그 멱살을 잡고 “야 이놈아! 내 돈 갚아라!” “시간을 주십시오. 시간을 주면 내가 갚겠습니다.” “무슨 잔소리 하느냐? 당장 네가 못 갚으니까 이놈을 감옥에 쳐 넣자!” 그래서 고발해서 감옥에 처넣어 버렸습니다. 그 친구들이 보니까 참 괘씸하거든요. 자기는 10억을 용서 받았는데 천 만원 빚진 친구를 감옥에 집어넣는 것을 보고 임금님에게 고했습니다. 임금님이 그 말을 듣자 분노해서 “당장 그 놈을 끌고 오너라! 내가 너에게 1만 달란트를 용서해 주었는데 너희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감옥에 넣다니 이 나쁜 놈아, 이놈을 당장 감옥에 가둬서 그 빚을 갚을 동안 그 액수만큼 고통을 당하게 하라!” 그렇게 예수님 말씀하시고 너희도 각각 서로 허물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이렇게 하시리라 많은 사람의 육신의 질병과 가정의 고통과 생활의 괴로움이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결국 고통의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말씀한 것입니다.” 죄인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은택으로 모든 죄를 탕감 받았지 않습니까? 여러분과 나는 다 죄인입니다. 도저히 우리 힘으로 갚을 수 없는 사형 선고를 받기에 마땅한 죄인인데 이 죄를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서 다 탕감 받았습니다. 죄를 한 번도 안 지은 것처럼 탕감해 버렸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몸부림치며 6시간 동안 매달려 몸 찢고 피를 흘려 고통을 당했었습니다. 그 피 값으로 탕감해 버렸어요. 그런데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우리가 용서하느냐. 대개 용서하지 않습니다. “두고 보자! 이 천벌을 맞을 놈아! 네가 못되는 것 내가 봐야 되겠다.” 그런 앙심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괘씸하게 보여 지게 되고 그것이 우리의 심신에 고통을 가져오는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로 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우리는 값없이 용서와 의를 선물로 받았는데 나에게 적은 죄의 빚을 진자에 대한 원한을 가슴에 품고 탕감해 주지 못하면 그 빚 갚을 때까지 고통의 감옥에 갇힙니다.
마태복음 6장 14절로 15절에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큰 용서를 받았는데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우리 죄도 하나님이 용서하는 것을 취소해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 안 해주는 만큼 고통의 감옥에 갇혀서 괴로움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의 고통이 약을 먹어도 낫지 아니하고 치료를 받아도 효과가 없고 괴로운 사람 많습니다. 또 많은 가정 문제, 사회 문제, 생활 문제, 기대하지 않은 고통이 다가오고 염려, 근심이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그 때 우리가 늘 생각해야 될 것은 내가 내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주지 않아서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고통을 가하는 것이 아닌 가 깊이 생각해 봐야 되는 것입니다.
상담학자 보비 커닝햄은 그가 쓴 「치유적인 용서의 역할」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인이 어린 시절에 아버지에 대한 상처와 미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굉장히 지금은 좋은 집에서 훌륭한 남편 모시고 자녀들도 기르면서 잘 사는데 이 부인에게는 행복이 없습니다. 자랄 때 아버지에게 구박하고 박대당한 고통이 마음에 있어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자나 깨나 아버지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아버지를 욕했습니다. 그러니 그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불행해 가지고서 결국은 그 좋은 집에 좋은 남편에 자식들 두고 어느 날 자살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한 때 상처 받은 마음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으면 그것이 그 사람을 움켜잡고 평생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인간 영혼에 가장 강력한 독소로 작용하여 자신을 괴롭히고 인간관계에 불화와 갈등을 조장합니다. 또한 자신의 인격을 파괴하고 신체적인 병의 증상을 나타냅니다.
불면증, 변비, 소화불량, 두통, 면역력 저하, 암 등 질병을 유발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못한 마음을 가질 때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은 내 원수가 아니라 내 자신인 것입니다. 내가 마음속에 용서하지 못하고 원한을 품고 있으면 그것이 독을 받아서 내가 고통을 당하지 원수는 고통을 당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병은 육신의 병보다 더 아프고 괴로워 자살충동까지 느끼게 됩니다. 우리 삶의 기쁨과 행복을 앗아가는 마음의 병은 용서하지 못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2. 복수와 원한의 빚
우리가 2008년을 보내면서 우리 마음속에 있는 미움과 원한을 다 풀어 버리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 용서하지 못한 마음을 가지고 그 독소를 가슴에 품고 2009년 새해를 또 맞이하면 새해 역시 고통의 굴레가 우리에게 떠나지 아니하고 괴로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선행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 나가기 위해서 절실하게 필요한 삶의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복수와 앙갚음의 마음을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의 고통을 제가 읽어 본적이 있습니다. 어느 여학교 교장 선생님인데 심한 관절염으로 굉장히 고통으로 밤잠을 못자고 몸을 잘 움직이지 못해요. 온갖 치료를 다 받고 약이라는 약은 다 먹어도 아무 효과가 없이 점점 관절염은 나빠집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 나가서는 목사님하고 상담을 했습니다.
목사님이 “혹시 마음속에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미워하는 사람 있습니까?” 고개를 숙이더니 끄덕끄덕 했습니다. “누구를 미워합니까?” “우리 남편을 미워합니다.” “얼마나 미워합니까?” “죽이고 싶도록 미워합니다.” “남편하고 같이 삽니까?” “아니요. 10년 전에 이혼했습니다.” “그런데 법적으로는 이혼했는데 마음으로는 이혼을 안 하고 있어요. 남편은 이혼해서 다른 여자하고 결혼해서 잘 살고 희희낙낙 하는데, 자기 혼자서 아직 남편을 놓아주지 못하고 마음에 품고 “이 죽일 놈아! 이 나쁜 놈아!” 항상 저주하고 욕을 하고 있는데 그 남편은 아무 고통도 안 당하는데 이 부인은 관절염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빨리 이혼을 하세요.” “아니 법적으로 했는데요?” “법적으로는 이혼했는데 마음으로 안했잖아요. 마음이 아침, 저녁으로 늘 품고 있잖아요 남편을… 오늘 그 남편을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회개하고 돌려보내세요. 바이 바이 하세요. 그래야 법적으로 이혼하는 것과 동시에 마음으로도 완전히 떠나보내야 되는 것입니다. 미워하지 말고 용서해서 가서 잘 살아라! 할렐루야 하고 보내세요.” “못해요. 나는 못살아야지 잘사는 꼴 못 봐요.” “그런다고 해서 못살 것 아닙니다. 당신이 못살게 돼요. 그 미움을 가지면 그 독이 당신의 심신을 괴롭히고 관절염을 괴롭히고 결국 당신이 못살게 되고 말아요. 그러므로 용서해 주세요.” 그 목사님의 설득을 듣고서 엎드려서 “하나님, 우리 10년 전에 이혼한 남편을 내 마음에서 용서하고 떠나보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 주시고 가서 잘 살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미워하는 것을 회개합니다.” 그 기도를 하고 난 다음부터 마음에 평안을 얻고 그 길로부터 관절염이 낫기 시작하여 얼마 있지 않다가 관절염이 다 사라지고 깨끗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읽어 본 것입니다. 백약이 무효이던 것이 용서하는 마음을 갖자 치료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3절로 14절에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용서만 할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가서, 축복도 하고, 사랑도 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 못합니다. 나는 성자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니 그것 못합니다.” 못하면 그것이 내게 암초가 되어서 고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용서하면 내 마음에 평안을 얻게 되고 이웃을 축복하고 사랑하게 되면 내가 축복을 받고 사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남 잘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잘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수와 앙갚음의 빚을 마음을 속에 갖고 살면 그 빚단련을 마음속에 늘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위궤양으로 피를 토하고 고통을 당하는 법대생의 이야기를 읽어 보았습니다. 법대생인데.. 위궤양이 걸려서 피를 토하고 못 먹고 거의 죽게 되어서 병원을 찾아 왔는데 그 병원 의사선생님은 심리학 박사이기도 합니다. 모든 약이 필요가 없고 치료 안 되어서 “당신 마음속에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이 있느냐.” “그렇다.” “무슨 원한이냐?” “내가 어릴 때 우리 할아버지 손을 잡고 우리 논에 나갔습니다. 우리는 가난해서 논을 한마지기 밖에 안가지고 있는데 논뚜렁을 같이 한 이웃집은 굉장히 땅 부자입니다. 그런데 그 이웃집 노인이 자꾸 우리 논두렁을 파먹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한마지기 있는 우리 논두렁을 자꾸 파먹어 들어와서 우리 땅을 야금야금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우리 할아버지와 그 노인이 대판 싸움이 붙었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우리 할아버지를 밀으니까 할아버지가 논두렁에서 넘어져서 돌멩이에 머리를 부딪혀 뇌진탕에 걸려서 세상을 떴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상 하나 못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노인은 돈이 많고 힘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밀어 놓고 난 다음 안 밀었다고 한다. 나는 어린 아기이기 때문에 내가 증언을 해도 내 증언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사고사로 죽고 보상도 못 받았습니다. 내가 어릴 때도 너무 원한이 되어서 내가 기어코 법률가가 되고 판사가 되어 혹은 검사가 되어서 이 원수를 갚겠다. 그것이 내 생애의 전체 목적입니다. 우리 할아버지 원수를 갚겠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법대에 들어와서 지금 법률을 공부하고 있는데 원수를 갚기 전에 내가 죽게 되었습니다. 위궤양이 걸려서 밥을 못 먹고 이렇게 고통스러워서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까 의사선생님이 “당신은 원수 갚기 전에 당신이 먼저 죽소. 당신의 위궤양은 미움으로 말미암아 다가온 독소요, 당신이 그 노인에 대한 미움을 놓아 버리고 용서하고 축복해주면 당신이 낫습니다.” 이 청년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내 법과를 공부하는 목적인데요.” “당신 법대 졸업하기 전에 죽는다구요. 지금 보통 심한 위궤양이 아닙니다. 출혈성 위궤양인데 당신 이대로 있으면 죽는다구..” “내가 아무리 치료해도 약효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당신의 마음속에 미워하고 원한을 품을 독소가 있으니까 안 되잖아요. 회개하고 용서하고 마음속에 사랑을 품으면 당신이 고침 받을 수 있습니다. 용서하고 당신의 마음에 이미지 속에 원한을 품은 이미지를 웃고 악수하고 화해하는 사랑의 이미지로 바꾸십시오. 그 청년이 너무 괴로우니까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용서하고 마음에 미워하는 심정을 없애고 사랑하는 이미지로 바꿔 버리고 난 다음에 그 위궤양이 나았다는 의사선생님의 기록한 책을 제가 읽어 보았었습니다.
마태복음 5장 43절로 44절에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정말 힘든 말이지요. 원수를 미워하지 않는 것만 아니라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보통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 사랑은 못해도 미워는 안하겠습니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가서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축복하는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불공평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원수를 어떻게 내가 사랑하고 잘되라고 기도합니까?” 결국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너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은 너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원수를 향한 사랑이 원수에게 떨어지지 않습니다. 돌아와서는 나에게 들어와서 내가 사랑으로 치료를 받게 되고 원수를 축복하는 기도를 하면 그 기도가 원수에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게로 돌아와서 나에게 축복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결국엔 내 자신이 축복받고 살기 위해서 미움을 던져 버리고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이 하늘나라의 원리를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고 그럴 수가 있느냐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 원리를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장 25절에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이것 보십시오. 이웃을 용서하는 것은 이웃 잘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용서받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용서 못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용서하고 축복해주는 것은 내가 용서를 받고 내가 축복을 받기 위해서 하는 길이 바로 그것인 것입니다.
하버드 대학의 카논 박사는 연구 결과 화를 내면 보통 때보다 피가 훨씬 빨리 응고된다고 말했었습니다. 한 의학보고서 발표에 의하면 화가 나면 심한 복통이 일어나고, 맥박이 높아지면서 혈압이 상승하여 때로는 졸도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평소 혈압이 높은 분들이 심하게 화를 내다가 혈압이 높아져서 뇌출혈로 죽을 때가 가끔 있습니다. 우리 한국말로는 예부터 화병으로 죽는다는 말인 것입니다. 영국의 의사 팀들이 분노에 대한 실험을 했습니다. 사람이 화를 내고 욕을 하는데 그 코와 입에서 분노의 김이 나오는데 그 김을 실험 장치를 통해서 한 시간 동안 실험관에 모았습니다. 그리고 화학 처리를 하니 노란 액체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실험용 쥐에게 주사를 했더니 한방에 즉사해 버렸습니다. 한 사람이 한 시간 동안 화를 내서 그 몸에서 나오는 독을 실험해 보니까 백사람을 죽일 수 있는 맹독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한 시간 화내는데 그 화를 실험관에 받아 가지고서 그 김을 액체로 만들어서 시험해 보니까 백 사람을 죽일 맹독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마음에 쌓인 복수와 앙갚음의 빚은 누구보다도 당사자를 병들게 하고 파멸시키는 원흉이며 주변의 사람들도 크게 상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백 사람을 죽일 만한 독이면 자기가 얼마나 상처를 입겠습니까? 그러므로 화를 내지 말아야 돼요. 내가 화날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참아야 됩니다. 내가 그 화로 말미암아 큰 해를 당할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복수를 꿈꾸는 사람은 자신의 상처를 아물지 못하게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남에게 원한을 가지고 복수 하겠다고 하면 자기 상처가 더 아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해(年)가 지나기 전에 우리들은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다 제켜 놓고 원수가 잘못되라고 저주하는 말을 버리고 원수를 위해서 축복하고 사랑의 말을 해주고 은혜를 베풀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축복하고 은혜 베풀고 여러분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나에게 막힌 담을 헐어 놓는 것입니다. 미움과 원한과 저주는 하나님과 나 사이를 막아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웃에게 풀어 놓으면 나와 하나님 사이가 풀려서 비로소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다가와서 은혜와 축복을 주실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생각하면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이게 우리가 치료받는 길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마음에 평화와 기쁨과 행복을 가지는 길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미워하고 분노를 내고 주먹을 휘두른다고 해서 상대방이 그로 말미암아 고통 받지 않습니다. 내가 고통 받고 내가 마음에 독소가 생기고 내가 심신이 병들고 내가 불행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 해를 지나가면서 우리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오래된 상처를 다 치료하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마음에 상처를 입잖아요. 한 번도 상처 안 입은 사람 한번 손들어 봐 주십시오. 부모에게 받은 상처도 있고, 자식에게 받은 상처도 있고, 이웃에게 상처 받은 사람, 친구에게 상처 받은 사람, 상처받은 사람 많습니다. 어느 부형님이 내게 편지를 쓰셨는데 그 편지에.. 친한 친구인데 그 친구에게 돈을 1억 빌려주고 사기를 당해서 도저히 분해서 살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렇게 친한 친구가 돈 1억을 사기 쳐서 자기 돈을 빼앗아 갔는데 그 고통이 말로다 할 수 없어 매일같이 땅을 치고 벽을 주먹으로 치고 머리를 박고 고통을 당해서 견딜 수가 없는데 한번은 저의 설교를 듣고 비로소 마음속에 평화를 얻었다고 편지가 왔습니다. 그곳에서 설교 내용이 뭐냐면 “버릴 수 있는 것은 버려라. 고칠 수 있는 것은 고쳐라. 버리지도 못하고 고치지도 못하면 운명인지 알고 받아 들여라.” 그 말을 듣고 내가 미친놈이 돈 1억 먹고 달아났는데 이것을 버릴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고, 내가 가슴을 치는데, 내 가슴속에 있는 이것을 내 팔자가 이러니 어떻게하냐? 잊어 버려야 되겠다. 그렇게 마음이 들어서 그때부터 마음이 평안을 얻고 너무나 마음이 평안해서 목사님 설교는 전부 구해서 듣고 있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내가 옛날에 서대문에 있을 때 모 고등학교 영어 선생인데 학교 교무실에서 동료친구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를 하는데 동료 친구들이 다 모여서 조롱을 했습니다. 사람을 모욕했습니다. 얼마나 화가 났던지 전도하다가 말고 저놈들 다 지옥가라 같은 생각이 나서 이를 부득부득 갈았는데 그때부터 마음에 기도가 안 나오고 은혜가 안 되고 괴로운데.. 그러나 저럴 수가 있냐? 같은 동료가 전도하면 안 믿으면 그냥 안 믿지 그것을 가지고 나를 모욕하고 나를 짓밟을 수가 있느냐. 저럴 수가 있느냐.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세상에 저럴 수가 있습니까? 저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대답하시기를 “그럴 수도 있다.” 그러더니 마음이 평안하더랍니다. 그때부터.. 그때부터 마음에 분노하던 것이 “저럴 수가 있냐.” “저럴 수도 있다.” 그것을 못 받아 들일 때 고통이 다가오는데 그럴 수도 있다고 받아들이고 난 다음에 마음이 편안하게 되었다고 내게 와서 간증하는 말을 들었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 처한 환경에 대해서 불평하고 원망하고 환경에 대해서 불평하고 원망하고 대결하면 원수가 되어서 늘 싸워야 되고 괴롭지만 이것이 내 운명이다. 내게 주어진 팔자다. 나는 이 속에서 살아야 되겠다. 그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장애인들을 보고 그것을 느꼈습니다. 온 몸이 비틀어지고 ,사지가 비틀어지고, 말도 잘 못하고 화장실도 못가고 밥도 스스로 못 먹는 “아이구~ 내 팔자야.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왜 나를 이렇게 나았느냐? 하나님이 왜 나를 이렇게 나으셨느냐?” 원망하고 불평하면 얼마 안 있어 죽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에게 가장 내가 놀란 것은 이것이 내 팔자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것은 내 팔자가 이렇다. 그러므로 나는 내 팔자대로 산다.” 하나님을 믿고 찬송도 하고 기도도 하고 내가 악수하니까 활짝 비틀어진 얼굴로 웃으면서 악수를 하고 “야~ 도대체 성자가 아닌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그러나 그들은 운명을 원망하고 탄식하지 않고 운명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 운명을 받아들인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한분이 있는데 내가 그 이름을 잊어 버렸습니다만.. 어머니에서 태어날 때부터 팔도 없고 다리도 없고 발가락 두개만 있어요. 팔도 없고 다리도 없고 몸에 발가락 두개만 있어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다 저주 받았다고 하는데, 그 어머니는 하나님이 절대로 실수를 안 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이 뜻이 있어서 이런 애를 낳게 했다. 얘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다. 그래서 엄마가 입히고 먹이고 목욕시키고 그렇게 길렀습니다. 그리고 휠체어에 앉혀 가지고서 초등학교로부터 대학까지 어머니가 데리고 다니면서 공부시켰습니다. 이 몸에 붙은 발가락 두개를 가지고서 노트에 책을 기록하고 해서 신학대학까지 마치고 목사가 된 것입니다. 그가 강단에서 설교하면 수많은 청중들이 눈물바다가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젊은 청년들이 담배피고 술 마시고 마약 중독된 사람들이 수 천명, 수 만명씩 회개시키는 것입니다. 그가 하는 말이 “여러분 보세요. 나는 팔도 없고 다리도 없고 발가락 두개만 가지고 사는 사람이지만은 하나님을 믿고 이렇게 행복하고 기쁜데 사지가 멀쩡한 여러분들이 왜 술주정뱅이가 되고, 왜 아편중독자가 되고, 왜 인생을 낭비합니까? 나 같은 사람도 사는데 당신들은 무엇해서 원망과 불평을 합니까?” 그 말에 청년들이 숙연해지고 자기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통회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이분은 목회자로써 말씀을 증거하고 있는데 그 설교를 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고 변화를 받습니다. 자기가 그렇다고 해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나는 팔도 없고 다리도 없고 발가락 두개만 가지고 태어났으니 이럴 수가 있느냐고 부모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했더라면 벌써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고 웃고 자기는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나온 사람이니 자기 그 사명을 다한다고 할 때 하나님이 같이 하셔서 축복해 주시고 귀하게 사용하는 종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의 운명을 버릴 수 있으면 버리십시오. 고칠 수 있으면 고치십시오. 버리지도 못하고 고치지도 못할 바에는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고 감사하십시오.
3. 내 가슴속에 있는 상처 입은 기억
어떤 부인이 심히 자기주장이 강하고 자기를 나타내려고 몸부림치는 그런 부인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 기피 했습니다. 남편에게도 자기주장을 심히 하고 고집이 세고 사람들하고 다투면 안 지려고 하는 강성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심리치료를 받아 보니까 자랄 때 많이 구박을 받았어요. 부모에게도 멸시를 당하고 형제나 친구들에게도 구박을 당하고 사랑을 받지 못했어요. 그래서 자기를 보호하겠다는 본능이 있어서 언제나 사람들 앞에 가면 자기 본능을 나타내서 자기를 보호하려고 하는 마음에 상처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자라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도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상처를 준다고 생각하면 엄청나게 대결하고 싸우고 자기를 보호하는 본능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기피하게 되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못 받았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난 다음에 자기 상처를 주님께 다 내놓고 어릴 때 입은 상처를 주님 고쳐 주시옵소서. 회개하고 자복하고 기도하고 성령의 은혜로 그 마음의 상처가 다 아물고 난 다음에는 그렇게 착하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귀한 여인이 되었다는 글을 읽어본 것입니다.
잠언서 17장 22절에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마음이 평안하고 즐거우면 그것이 약공장이 되어서 모든 병을 고치지만 마음에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한다. 뼈가 마를 정도로 고통이 오니까 어떤 살이 녹지 않겠습니까? 어떤 병이 들지 않겠습니까? 마음의 근심은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마귀의 도구인 것입니다.
타인에 대하여 항상 의심하고 적대감을 가진 사람의 간증하는 것을 들으니까 그는 소년 시절에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서 자랐는데 친척집에서 쫓겨나서 다른 친척집으로 또 거기에서 쫓겨나서 다른 친척 집으로 나중에는 가출해서 가출소년들하고 함께 사는 이러한 배반당하고, 멸시당하고, 소외당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른이 되고 난 다음에도 모든 사람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지고 사회에 대해서 반항감을 가지고 삶에 굉장한 어려움을 당했는데 그가 목사님하고 상담하고 심리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어릴 때 그 이야기를 해서 그 어릴 때 기억을 지우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를 받고 하나님 앞에서 그 어릴 때 그 상처입은 기억을 치료해 달라고 간구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 상처가 치료받고 난 다음부터 정말 훌륭한 인격 가진 사람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우리가 구체적으로 상체를 내놓아야 치료합니다. 무조건하고 하나님 날 도와주시옵소서 하지 말고 내가 언제 어떤 상처를 가지고 있는데 그 상처를 하나님께 내놓고 하나님 이 상처를 고쳐 주시옵소서 할 때 그 상처를 고쳐주는 것입니다.
내가 청년 시절에 혹은 소녀 시절에 이런 고통을 당했었습니다. 고통을 지금도 마음에 품고 있었는데 그것이 지금 내 인격을 지배하고 있으니 주님 이 상처를 낫게 해 주시옵소서. 옛날로 돌아가서 그 상처를 하나님 앞에 펼쳐 놓고 하나님께 치료해 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내려와서 그 상처를 치료해서 그 악한 영향력을 없애고 평안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잠언서 18장 14절에 “사람의 심령은 그의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
사람의 심령이 평안하면 어떠한 병도 능히 이깁니다. 또 심령이 상하면 아무도 고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약도 어떤 의사도 치료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고 맡기면 옛날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상처입고 고통당하던 그 모든 흔적은 사라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때문에 여러분 오늘 옛날에 상처입은 마음을 가지고 현재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사람은 그 상처를 치료해 달라고 해서 옛사람과 함께 다 치료해 버리고 새사람으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 해(年)가 지나기 전에 여러분 이유 없이 마음에 늘 불안하고 고통스럽고 불행하고 괴로우셨으면 그것을 다 청산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박물관에 가면 여섯 개의 촛불이 켜져 있고 그 옆에 비누 세 개가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 여섯 개는 6백만 유대인들을 히틀러가 죽였습니다. 그것을 상징하고 비누 세 개는 그 죽인 시체를 녹여서 비누를 만들어서 독일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었습니다. 그러니 그 유대인 박물관에 간 유대인들이 보면 치를 떱니다. 6백만을 죽이고 그 살을 녹여서 비누를 만들어 사용했다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 왜 히틀러가 6백만 유태인을 죽이고 그 몸을 녹여서 비누를 만들었습니까?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어릴 때 그 아버지가 이웃에 사는 큰 유대인 남자의 사생자였습니다. 그 유대인이 외도를 해서 사생자를 낳은 것이 바로 히틀러의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가 사업한다고 밖에 늘 나가 돌아다닐 동안에 어머니는 역시 유대인하고 좋지 않은 관계를 맺는 것을 히틀러가 보았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자기 분노로 이 아들을 때리고 히틀러를 고통 받게 하고 그 어머니는 히틀러에 대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히틀러는 어릴 때 유대인에 대한 원한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가 나중에 독일의 수상이 되자 착수한 것이 유태인 박멸주의입니다. 6백만의 유태인을 죽였습니다. 한 사람이 그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상처 입은 그 상처가 아물지 않으니까 그것이 밖으로 나와서 살의를 가지고 6백만을 죽이고 그 살을 녹여서 비누를 만들어서 썼다니 얼마나 비참한 것입니까?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공격적인 행동은 어린 시절의 폭력과 학대로 인해 해결되지 않은 슬픔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어린 시절에 학대 받고 성장한 아이가 성인이 되면 폭력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연히 폭력적이지 않습니다. 과거에 어릴 때 상처 입은 그 상처가 아물지 않았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도 그것이 나타나서 사람을 폭력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상처 입은 기억을 해결하지 못하면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 남에게 큰 고통을 가합니다. 또한 자신에게는 신체적인 병으로 나타나고 고통 가운데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결론>
거의 모든 사람들은 옛날 상처 입은 기억을 마음에 파묻어 놓고 삽니다. 그 옛날은 싫다. 파묻어 버리자. 마음속에 깊이 파묻어 버리고 잊어버린 듯 생각합니다. 그러나 잠재의식 속에 들어간 옛날 상처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비가 오고 난 다음 이후에 우물을 들여다보면 기름이 둥둥둥.. 떠있습니다. 파란 기름이 물에 떠있어요. 왜냐, 비가 안 올 때 애들이 고양이 죽은 시체, 강아지 죽은 시체를 우물에 장난으로 집어넣어서 가라앉았습니다. 비가 안 올때는 몰라요. 사람들이 그 우물을 다 먹었어요. 비가 오고 물이 불어나니까 그 속에 죽은 시체의 기름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처럼 우리가 상처를 전부 마음속에 그냥 눌러 버리면 보통 때는 몰라요. 그러나 어떤 일을 당하면 그 상처가 다 살아 일어나서 사람을 폭력적으로 만들고 완악하게 만들고 몰이해한 사람이 되고 무정한 사람으로 만드는 그러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상처 입은 자기는 끊임없는 고통스러워하고 울고 있고 그것이 마음의 표면에 여러 가지 심적 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울고 있는 또 다른 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울고 있는 소년, 소녀, 젊은 시절에 울고 있는 아가씨, 청년.. 상처 입은 그가 그 속에서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 울음이 그 인생을 변화시키고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 마음을 탁 털어 놓고 옛날 상처 입은 자아를 용서하고 회개하고 치료 시켜서 잊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용연향(龍涎香)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이 세상에 제일 비싼 향입니다. 이는 고래로부터 나오는데 고래를 잡아 가지고서 상처를 입힙니다. 굶기고 찌르고 고통을 가하면 고래 속에서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연고 같은 액체가 흘러나옵니다. 고래의 코와 입에서 액체가 나오는데 연고 같은 액체가 나옵니다. 그것이 제일 좋은 이 향수가 되는 것입니다. 아픔을 극복하기 위한 고래의 몸부림이 세계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는 향수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상처는 분명히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상처를 잘 치료하면 우리 인생이 그로 말미암아 굉장히 깊어지고 이해력이 많아지고 향기로운 인생이 될수가 있는 것입니다. 상처를 그대로 내버려 두느냐. 상처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료하느냐. 그것이 우리 인생에 굉장히 큰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상처는 별이 된다.”라는 서양 격언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당한 현재의 아픔에 대해서 신앙적으로 반응하여 그 상처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면 그 상처가 오히려 내 인생에 큰 별이 되는 것입니다. 큰 병을 오래 앓다가 나은 사람은 환자들을 사랑합니다. 자기가 옛날에 많이 가난해 본 사람은 가난한 사람을 동정합니다. 자기가 옛날에 많이 슬펐다가 고침 받은 사람은 슬픈 사람을 위로합니다. 그 상처가 오히려 향기롭게 되고 아름다운 별이 되는 것입니다. 치료하지 못하면 그 상처가 우리에게 고통과 괴로움으로 남아서 큰 어려움을 가져오지만 치료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는 더 아름다운 별이 되고 향기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상처가 여러분에게 결코 해가 되지 않습니다. 옛날에 그런 상처가 치료받은 사람은 그런 상처 입은 사람을 치료해 주고 위로해 주고 동정하고 격려하고 힘이 될 수 있는 향기가 되고 반짝 반짝 빛나는 별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상처가 우리에게 나쁜 것은 아닙니다. 치료 안할 때 나쁘지. 치료하면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 마음을 탁 터놓고 하나님! 나는 과거에 이런 상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손으로 내 상처를 어루만져 치료하여 주시옵소서. 치료받으면 달라지는 것입니다. 미운 남편도 사랑스럽게 되고 보기 싫은 아내도 보기 좋게 되고 부모님도 미워했으나 부모를 용서하고 사랑하게 되면 부모를 그리워하게 되고 삶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이 마음속에 미워하는 일도 원한을 가진 사람도 있고 과거에 입은 상처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역사해서 우리 마음에 슬픔과 고통과 불안과 불행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해를 맞이하면서 이런 것을 그대로 두고서 새해를 맞아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미움은 용서하고 원한은 다 축복으로 떠나보내고 상처는 주님 앞에 드러내 놓고 치료받고 변화 받아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께 나갈 때 여러분의 손을 잡고 너희 장래는 내가 보장해 주겠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게 해주겠다고 하나님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의 큰 장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셔서 33년 동안 인생으로 살면서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을 다 체험하고 주님은 나중에 인간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걸머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를 흘려, 당신 자신을 헌신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사정을 다 압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처럼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그가 태어날 때도 가장 가난하게 태어나서 누울 자리가 없어 말구유에 누이셨습니다. 청년 시절에는 아버지를 도와 목수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고 손가락질 당하고 배반을 입었습니다. 나중에는 사랑하는 제자에게 팔려서 원수의 손에 넘어가고 그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겪었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를 다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다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가면 주님께서 못 고칠 병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음에 병을 다 고치고 마음의 원한을 다 씻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했습니다. 어떤 마음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져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해주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못자국난 손으로 어루만져 주고 여러분을 마사지 해주시면 여러분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보라 새것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교회를 떠나기 전에 주님 앞에서 새것이 되어 나가십시다. 새사람이 되어서 우리 나가는 개인이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고개 숙여 기도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