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는 시민들에게 얘기합니다.
꿈을 꿔라.
그리고 말합니다.
당신도 노력하면 그들처럼 성공할 수 있다.
노력과 꿈에 대한 명언들
성공한 사람들의 자서전
무슨무슨 대학교수들의 자기계발서
이 모든 게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반복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꿈을 꾸는 것과 이를 실현시키는 것을 지상명제로 삼기 시작합니다.
즉,
우리는 성공에 모든 가치가 집중돼 있는 사회의 시민들이란 얘기.
꿈에 대한 절반의 진실
꿈을 꾸고, 그를 실현시켜나가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뭘까?
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많은 이들이 "나태함(procrastination)"이라고 답할 겁니다.
근데, 사실 나태함에 대해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게 뭐냐면,
이건 문자 그대로 아무 것도 안하고 게으르기만 한 걸 의미하진 않는단 겁니다.
예를 들어,
집안꼴이 엉망인데
어떤 자취생이 침대에서 뒹굴뒹굴, 누워서 만화책 보기, 웹서핑, 게임 몇 판
이런 식으로 하루를 보냈다 칩시다.
누군가 이 사람을 보면 어휴 저 나태한 인간
이라며 혀를 끌끌 찰 수 있겠지만,
자, 사실 저 자취생이 아무 것도 안 한 건 아니죠.
침대에서 노곤함을, 만화를, 인터넷을, 게임을 "즐겼잖아요".
설겆이를, 빨래를, 청소기를 돌리며 할 일을 다 하는 수고로움보다는,
당장에 맛 볼 수 있는 여러가지 쾌락을 좇은 거고,
이는,
인간의 기본적인 기제 중 하나인 『쾌락주의 원칙』에 매우 부합하는 행위입니다.
즉, 쾌락을 가까이하고 고통을 멀리한 결과인 거죠.
모든 나태함의 이면에는
당장의 쾌락을 수반하는 행위들이 숨어 있습니다.
이건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지니고 있는 본능 같은 건데, 문제는 뭐냐.
세상에는 당장의 쾌락을 참아내고 멀리 있는 과실을 따낼 준비가 돼 있는 "소수의 사람들" 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본능대로 어느정도 나태한 삶을 사는 와중에,
매우 소수의 사람들은 쾌락주의 본능을 참아내며 생산적인 일들을 하고 있다는 거죠.
공통점은 둘 다 꿈을 꾼다라는 겁니다.
차이점은?
후자만 성공한다 이죠.
표준정규분포는 소수만의 성공이 현실임을 알려준다
결국, 쾌락주의 본능에 반하는 사람들이 성공을 한다는 얘기인데,
이런 사람들은 통계적으로 전 인구의 3% 내외 정도입니다.
성공은 아니지만 그 언저리에 걸쳐 있는 사람들이 또 한 15% 내외를 차지하죠.
그렇다면, 대다수를 차지하는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똑같이 꿈은 꿨지만, 이들은 통계적으로, 시스템적으로 반드시 언젠가는 그 꿈을 접게 됩니다.
좌절하는 이들에게 사회는 말하겠죠.
저들을 봐라. 넌 그들만큼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그 자리에 있는 거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반드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노력은 누구에게나 평등한가?
노력은 능력이랑은 달리 누구에게나 공평히 존재하는가??
즉, 누구나 할 수 있는 건데 내가 안 했기 때문에 전적으로 내 탓인 거야???
NOBODY KNOWS.
노력이 능력과는 달리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라는 결론은 제가 알기로는 어느 학파에서건 공표된 바 없습니다.
근데, 사회는 그렇다라고 단정지어 얘기하고 있다는 거고,
그렇게 모든 책임을 개인들에게 돌리고 있다라는 겁니다.
생각해 봅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노력이라면, 왜 모두가 노력하고 있지 않는가?
서너살짜리 애들을 10명 모아놓고, 초콜렛을 줍니다.
그리고 애들에게 말하죠.
얘뜰아, 내가 지금 잠깐 한 시간 정도 자리를 비울 건데,
그 때까지 초콜릿 안 먹고 있으면 아저씨가 돌아와서 초콜릿을 하나 더 주마.
이런 상황에서 10명 중 과연 몇 명이나 초콜릿을 안 먹고 나를 기다릴까?
Cf) 스탠포드 대학의 마쉬멜로우 실험 : https://en.wikipedia.org/wiki/Stanford_marshmallow_experiment
이 상황에서 고작 서너살짜리 꼬맹이가
한 시간동안이나 초콜릿을 참아내고 눈을 부릅뜨며 아저씨를 기다리는 게
왜 대단한 능력이 아니지?
왜 사회는 당장의 쾌락을 참아내면서 고통을 감내하는 이 대단한 행위들을 단순 노력이라 라벨링하는가?
어째서???
시민들이 열심히 쳇바퀴를 굴려야만 돌아가는 사회
우선, 사회는 시민들이 열심히 쳇바퀴를 굴려야지만 돌아가게 됩니다.
더 비관적으로 (동시에 현실적으로) 얘기해보자면,
기득권층은 시민들이 쳇바퀴를 열심히 굴릴수록 배가 부르게 되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시민들로 하여금 쳇바퀴를 더 열심히 굴리게 만들 수 있을까?
열심히 하면 누구나 할 수 있어
성공할 수 있어
노력은 절대 널 배반하지 않아
노력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라구
"꿈과 노력의 공평성 패러다임" 이야말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쳇바퀴를 돌리게끔 하는 단언컨데, 가장 완벽한 미끼인 셈.
한편, 시민 입장에서는 어떠할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들 또한, 저 편이 낫습니다. 왜?
그래야지만, 희망이 있게 되니까.
현실은 고달파도, 꿈을 꾸고, 미래를 기약할 수 있으니까.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전 인구 중 80% 정도는 꿈꿔왔던 걸 이룰 수 없어
라고 말해주는 사회가 과연 좋을까?
아니요. 시민들은 분개하고, 즉발적인 무기력감에 빠지고 말 겁니다.
반면, '꿈과 노력의 공평성 패러다임" 내에서는,
모두가 어느 순간까지는 적절히 희망차고 미래를 그리다가,
점점 지쳐가면서 현실에 순응하며 체념하게 되죠.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돼? 라고 묻는다면,
사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잖아요.
성공하지 못 하는 한, 외통수라는 것을.
맞는 말이지만, Hey Eddie, 인생은 속도전 아니던가??
현 시대는 이번 주제와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① 정면돌파해서 승리하기 : 이렇게이렇게 해야 성공한다 식의 "자기계발" 멘토링
② 싸우지 않고 승리하기 : 긍정/행복 심리학 등의 "정신적 웰빙"에 대한 지침
쉽게 말해,
전자는 매트릭스 안에서 싸워서 이기는 법을,
후자는 매트릭스 밖으로 나와 평안을 얻는 법을 가르키고 있다 보시면 됩니다.
전자가 너무 빡세니까, 경쟁률이 하도 헬이다 보니 나온 조류가 바로 후자인 셈인 건데,
문제는 후자 역시 만만치 않다라는 거죠.
왜냐면, 나만 메트릭스 밖에 나와서는 소용이 없다는 거에요.
내 소중한 사람들, 지인들은 여전히 메트릭스 안에 있다면,
내 주변은 여전히 모두가 메트릭스에서 순응한 채 살고 있다면,
나만, 어허 덩기덕쿵더러러러 인생이야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것이제 하며
늴리리야 한다한들 얼마나 의미가 크겠냐는 말입니다.
우리는 다름아닌, 사회적 동물 이잖아요.
결국엔, 오픈 엔딩, 노답인 셈입니다.
싸워서 낮은 확률로 쟁취하느냐, 잘 안 되는거 어떻게든 붙잡고 정신의 웰빙을 이룩하느냐?
둘 다 힘드니, 지금 사회 전체가 앓아 누워 있는 거겠죠.
시스템이 이레버리니 사실 그 안에서 어떻게든 답을 찾느라 심리학이 관심을 받는 면모도 있겠지만,
동시에 시스템이 저레버리면 심리학은 제시할 수 있는 게 많이 없기도 합니다.
제시해서 무엇하리? 결국엔 사회가 도로아미타불로 만들어 버리는데.
그릇된 시스템 "내"에서 그 어떤 베스트를 찾는다 하여도,
시스템 자체를 바꾸는 것보다 획기적인 최선이란 없겠죠.
아마도 그게,
크리스에반스가 설국열차 "안"에서 개혁을 성공시키든말든
송강호가 열차를 전복시켜버린 이유일 겁니다.
※ 무명자 블로그 : http://blog.naver.com/ahsune
첫댓글 제발 노력이고 열정이고간에 그냥 하는만큼이라도 돈을 주면 고맙겠어요 돈은 안줄려니 자꾸 노력이니 열정이니 애사심이니 이딴 단어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아 결국은 노 답이군요 ㅜㅜ 설국열차 예시는 정말 좋네요. 휴우 이 노 답을 어찌해야 할런지.
오타발견 부탁드립니다. 자취생은 좇은걸로.... ^^;;;
오늘 후배와 저녁 먹으면서 얘기했던 주제와 밀접한 이야기를 쓰셔서 흥미로웠네요. 결론은 노답 그리고 탈한국 이런식이었는데...사실 요즘 제가 가지고 있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라서 참 힘드네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예전에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는 연구네요. 제가 논문을 읽어보지는 못 했고, 중독 관련하여 공부를 깊게 해 본 적이 없어 자세한 리뷰는 해 드릴 수가 없겠네요. 죄송합니다. ㅎ
다만, 이런 식의 연구자들 간의 논쟁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누구는 B가 A의 원인이라고 하고, 누구는 아니다 C가 A의 원인이다라고 주장하는데 있어서.
사실 가장 그럴싸한(plausible) 답변은 B,C가 복합적으로 A에 영향을 끼친다가 될 것입니다. 허나,
학계의 연구라는 게, 자신만의 간결/명확한 이론이 있어야 하고, 이것도저것도 영향을 끼친다 이런 식의 모호함은 이론으로서 좋은 평가를 받기 힘들죠.
그런 연유로, 하나의 현상에 대해 한 학파(lab)에서는 보통 한 개의 변수 위주로 연구 진행을 하게 되며,
그 연구를 리뷰하고 비판하는 다른 학파들은 그 변수 말고 다른 변수들의 영향일 가능성을 근거로 삼아 논박을 벌이게 됩니다. 이 중독 연구를 보자면,
알렉산더는 환경의 영향을 주요 변수로 삼은 것이고, 생리학자들은 당연히 자신들의 본업인 생리변수(뇌내마약기제의 무용화)를 도구삼아 논박을 벌이게 되는 거죠.
중독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하나일리는 없을 겁니다. 알렉산더 박사 연구의 의의는 생체기제는 중요치 않다, 결국 환경이다로 보기 보다는, 이제껏 간과돼왔던 환경의 영향력을 역설했다가 좀 더 적절해 보이네요
사견으로, 이 문제는 학습(후천성)이 우선이냐 본능(선천성)이 우선이냐의 문제만큼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고 봅니다. 분명히 둘 다 영향을 끼치는 것 같지만, 뭐가 우선인지에 대해서는 과학적으로 당분간은 검증이 어려운 영역이 아닐까 싶구요.
다만, 중독에 대한 관점을 대반전하여 환경의 중요성을 역설해 보인 알렉산더의 실험 자체는 심리학을 공부한 학생으로서 굉장히 대단한 업적이라고 사료되네요.
(※ 중독에 관한 한 거의 뉴메타였기 때문에, 당시 분위기가 학계로부터 굉장히 까임을 많이 당했나 보네요. 변수 하나의 영향력을 강조하다보면 학계에서는 흔히 발생할 수 있는 경우인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