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위원군(渭原郡)은 어디일까?
(1)위수(渭水)의 위치
반도의 지금의 평안북도에 지역에 위원군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첫째는 위원군이라는 지명은 위수(渭水)와 연관 지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대륙에는 위수가 있지만 그러나 반도엔 위수가 없다.
중국 서안을 다녀오신 지인의 말씀에 따르면 비행기를 타고 “서한함양 공항”에
가는데, “비행기위에서 본 땅 아래에 있는 위수를 보았을 때 한쪽은 맑고 파랗고
한쪽은 누런 것이 큰 장관을 이룬다고 하였는다”,
여기서 청(凊)한것은 경수이며 탁한 것은 본 필자가 앞 칼럼 글에서 “경위”에
대한 글 중에 밝힌바가 있다
그러나 “민족문화추진위원회”의 사이트에조차 위수가 맑고 경수가 탁하다고 반대로
주(註)를 달아 놓았는데 아직도 고쳐지지 않아 반도에선 아직도 경위를 모르분이 많은 것 같다.
서역조선설에선 황화를 중앙아시아 타림강(?) 지역으로 비정한 것 같다.
서경, 사기 등에서 위수는 동쪽으로 흘러 황하에 들어간다고 되어있다.
서역조선설에선 위수를 어디로 비정할지 또 그것이 경위(涇渭)의 청탁을 설명할 수 있는지 자못
궁금하다.
<사기> 渭水源出渭州渭原縣西七十六里鳥鼠山,今名青雀山.渭有三源,並出鳥鼠山,東流入河
(위수는 위수 위원현 서쪽 76리 오서산이며, 지금의 청작산이다, 위수의 근원은 셋인데, 오서산과
나란히 하여 동쪽으로 황하로 들어간다.)
<한국고전번역원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이익(李瀷)]> 위수(渭水) 주(註)에서,
위수는 중국 감숙성(甘肅省) 위원현(渭源縣)의 서북 조서산(鳥鼠山)에서 발원하여
섬서성(陝西省)을 거쳐 황하로 흐르는 강이다.
강태공이 이 강에서 낚시질하며 세월을 보내는데, 주(周) 나라 문왕(文王)이 등용했다.《史記 齊世家》
<중국고금지명사전>에서,
위주(渭州)를 찾아보면 ,
ㄱ)후위(後魏) 때 롱서군(隴西郡)에 두었고 수(隋)나라때 폐(廢)했다가 당(唐)이 다시 복치(復置) 하였다.
지금의 감숙(甘肅) 롱서군(隴西郡) 롱서군 서남(西南)에 있다고 하였다.
ㄴ)위원군(渭源郡) 지금의 감주란주도(甘肅蘭州道)이다
<강희자전>에서,
《說文》水出隴西首陽渭首亭南谷。《周禮·夏官·職方氏》雍州,其浸渭洛。
《書·禹貢》導渭自鳥䑕同穴。又州名。《廣韻》秦始置隴西郡,後魏置渭州。
《廣輿記》今爲鞏昌府。又府有通渭縣。又渭源縣,屬臨洮。渭南縣,屬西安。
<설문>에 위수는 롱서 수양 위수 남곡산에서 나온다.<주례.하관.직방씨> 옹주, 위수와 낙수가 잠겼다.
<상서 우공>위수를 오서 동혈산으로 부터 이끌었다. <광운>에 진시황이 롱서군을 두었고, 후위때
위주이다. <태평광여기>에 지금의 공창부이다. 또 그 부는 통위현에 있다. 또 위원현, 임조에 속한다.
위남현은, 서안에 속한다.
(2)위원(渭源)과 위원(渭原)
반도사학의 사서에는 동국여지승람 등 세종실록지리지에는 渭原으로 되어있고,
대륙의 명사와 청사 등에는 渭源으로 된 것이 많다.
이러한 지명 분리 방법은 忠州와 忠川(州에서 廢州가 된경우 川으로 쓰이기도 한다)의 경우도 그러하다.
이러한 原과 源의 지명 문제는 반도와 대륙을 분리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러하였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래 사료들은 살펴보면 위원渭原과 위원渭源이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2)-1 위원(渭源)
위원(渭源)은 <명사 地理3>에,
섬서(陝西) 림조부(臨洮府)에 있다고 되어 있으며,
<청사고>에서,
[도광(道光) 12년]에 감숙에는 위원 등 72현이 있다고 하였으며,
또 [청사고 지리12]에 감숙(甘肅) 란주부(蘭州府)에 속해있다고 되어있다.
<실록 세종 31년(1449)>에서
築行城自理山郡央土里至渭原郡, 石築七千四百七十八尺, 削土一萬一千六百六十尺
(이산군(理山郡) 앙토리(央土里)에서 위원군(渭原郡)까지 7천 4백 78척(尺)은 돌을 쌓고)
<실록 정조 즉위년(1776)>에서
竄前平安道觀察使趙曮于渭原郡
(전 평안도 관찰사 조엄(趙曮)을 위원군(渭原郡)에 귀양 보냈다.)
<실록 영조 10년(1734)>에서
以禹夏亨爲渭原郡守, 特敎也
(우하형(禹夏亨)을 위원 군수(渭原郡守)로 삼았으니, 특지(特旨)에 의한 것이었다.)
<成宗 12年 1481>에서
渭原郡守金碩宗, 曾爲三水郡守
(위원 군수 김석종(金碩宗)은 일찍이 삼수 군수(三水郡守)가 되었을 때)
(2)-2 위원(渭源)
<광해 6년(1614)>에서,
渭源郡守卞渾, 爲人悖妄酗酒, 專事剝割, 竝請罷職
(위원 군수(渭源郡守) 변혼(卞渾)은 사람됨이 패망스럽고 술고래인데다 오로지 재물
긁어모으기만을
일삼고 있으니 모두 파직하소서)
<영조 5년(1729)>
命渭源郡守尹彙貞、碧潼郡守李顯謨內擬)
(위원 군수 윤휘정과 벽동 군수 이현모를 내의하도록 명하다.)
*아래 사료에서 위원(渭源)과 위원(渭原)이 같이 보인다.
<세종 실록지리지> 平安道 江界都護府 위원군(渭原郡)에서,
渭源行城, 自都乙漢至朱毛老洞四里一百九十步
(위원 행성(渭源行城)이 도을한(都乙漢)으로부터 주모로동(朱毛老洞)에 이르는데,
4리 1백 90보(步)이요)
위글에서 위원군(渭原郡) 편에 위원행성(渭源行城)이 있으므로 위원(渭源)과 위원(渭原)은
혼용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3 오랍(烏拉), 오랍(烏喇), 올랄(兀喇)
목극동은 길림오랍(烏拉)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럼으로 오랍에 대하여 알아보자!,
<동이한족오천백년왕통사>에서 단제조선(檀帝朝鮮)의 북계는 오랍(烏拉)까지 라고 되어 있고,
<청사고 본기> 건릉 54년에 겨울 10월달에 길림 오랍 등에 수재가 있어 구휼하였다고 되어 있다.
(賑吉林打牲烏拉等處水災) 그럼으로 근대사인 청사가 바로 잡힌다면, 상고사인 단제조선의 사략도
고증 되어질 수 있다.
<清史稿 지리24>에, 오랄은 내몽고(內蒙古) 오랄특부(烏喇特部)가 있다고 되어 있고,
또 내몽고(內蒙古) 악이다사(鄂爾多斯)는,
東界歸化城土默特,西界喀爾喀,南界陝西長城,北界烏喇特
(동쪽으로 귀하성 토묵특, 서쪽으로 객이객, 남쪽으로 섬서(섬서성,감숙성) 장성, 북쪽으로 오랄특...)
*당시에는 원래 감숙성도 섬서서에 속했다.
<청사 권38 지58>지기악진해독산천(地祇嶽鎮海瀆山川)에서,
凡嶽五:曰東嶽泰山、南嶽衡山、中嶽嵩山、西嶽華山,北嶽恆山.鎮五:曰東鎮沂山、
南鎮會稽山、中鎮霍山、西鎮吳山、北鎮毉巫閭山. 又兀喇長白山
(무릇 오악은 동악은 태산이고, 남악은 형산이며, 중악은 숭산이고 , 북악은긍산(恆山)이다.
진오에는 동진는 기산, 남진은 회계산, 중진은 곽산 서진은 오산, 북진은 의무려산 또 올랄장백산이다.)
<동사강목>
태조가 야돈촌(也頓村)위원군(渭原郡) 서쪽으로 강 건너 30리에 있는데, 한 골짜기가 있어
그 안은 매우 평범하게 되어 있다. 북쪽으로 올랄과의 거리가 하룻길이다.
3.결어
결어는 아래 사료로 대신하고자 한다.
반도 측의 사료에도 위수가 없지 않다. 하지만 위수는 현 한반도에 없다.
<동무휘고>의 조선과 청의 국경 분쟁 기록은 현 동북 삼성지역이 아니다.
그것은 섬서성 감숙성 북쪽 변경의 사건 기록인 것이다.
*<대동수경 녹수(淥水) 2>에서,
위수(渭水)는 강계부의 두음령(杜音嶺)〔혹 두읍고개(豆邑古介)라고도 한다〕으로부터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서 위원(渭原)의 사창(社倉), 북창(北倉)을 지나 위면(渭面)에 이르러 좌로
응기수(鷹歧水)와 합류하는데 응기수(鷹歧水)는 고초산(古楚山)〔지금의 군(郡) 남쪽 103리에 있다.〕
위 대동수경의 사료는 정조때 인물인 다산 정약용이 쓴 반도측의 사료로 분리되는 것인데,
위수와 위원이 함께 있다.
지금 반도에는 위원군은 있지만 아직 위수(渭水)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구글지도에서의 현재의 위원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