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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홍씨(당성홍)인주도령중랑장공파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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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친 유적방 스크랩 남양홍씨중랑장파12세문화현령의외손남이장군
홍왕식 추천 0 조회 42 15.05.09 22: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충무공南怡장군!

南陽(唐城)洪氏麟州都領中郞將派12世

문화현령諱汝恭의外孫으로 할머니는

태종의따님정선공주시다.

  • 부 : 조선 3대국왕 태종
  • 모 : 원경왕후 민씨
  • 시아버지 : 의령 남씨(宜寧南氏) 병조의랑(兵曹議郞) 남경문(南景文)
    • 부마 : 의령 남씨(宜寧南氏) 의산위(宜山尉) 소간공(昭簡公) 남휘(南暉)
      • 장남 : 남빈(南?)
        • 손자 : 의산군(宜山君) 충무공(忠武公) 남이(南怡)
  •  

     

     

    병조판서 충무공남이장군추모비전경.

     

    잠긴 충무문사이로 스마트폰을넣어서찍은사진인데....

    그럴싸하다.

    남이장군()의 원혼을 달래고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제의를 발전시킨 서울특별시의 축제.

    남이장군사당제()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문동 일원에서 음력 10월 1일에 행하는 마을 신앙의 하나로,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어 있다.

    남이장군대제(), 용문동부군당굿, 남이장군당굿으로도 불린다.

    남이장군을 모신 남이장군당에서 행하는 당제와 당굿과 함께, 사당제를 올리기 전에 행하는 걸립, 꽃등행렬, 장군출진, 사례제() 및 대동잔치를 포함하여 발전시킨 축제이다.

    유래

    남이장군사당제가 서울시 용산구 용문동에서 행해지게 된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으나, 전설과 고로()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할 때 약 300년 전부터 행해져 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시애()의 난() 때 남이장군이 지금의 용산 삼각지 부근인 된지미에서 정병을 훈련시켰고,

     훗날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한 곳 역시 한강변 새남터로 용산 부근이었기 때문에,

    이곳에 남이장군을 추모하는 사당을 세우게 되면서 지금의 남이장군사당제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04년에 철도가 개통되고 도로가 생기면서 주위가 소란해지자 사당을 조용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용산구 원효로 2가에서 현재의 용산구 용문동 107번지로 새 사당을 짓고 옮겨서 모시고 있다.

     1972년 당굿을 끝으로 10여 년간 중단되었다가 1982년에 서울시의 당제 조사 보고에 의하여 복원사업이 시작되었고,

    1983년 당굿에 여러 문화 행사가 결합된 지금의 축제 형식으로 모습이 갖추어지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1999년 7월 1일 서울특별시 중요무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면서 서울을 대표하는 마을축제로 자리 잡게 되었다.
    현재 남이장군사당제의 중심 장소는 용산구 용문동 107번지이다.

    새남터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대지 130평에 남이장군 영정을 모신 사당과 부속건물 2채로 이루어져 있다.

    축제는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용문동과 산천동 일원에서 거행된다.

    현재 남이장군사당제는 남이장군대제사업회가 주관하고 있다. 사업회는 약간 명의 고문과 자문위원, 회장, 부회장, 운영위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남이장군사당제 전반의 행사 기획과 진행을 담당한다.

     행사에서 남이장군당굿을 담당하는 무녀를 당주무당이라 하고 음악을 담당하는 악사를 당주악사라 한다.

     당주무당 이명옥이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어 있어 전승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당주악사로는 김순봉이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으나 사망했고,

    현재는 한영서가 당주악사 역할을 맡고 있다.

    내용

    남이장군사당제는 음력 4월 1일과 10월 1일 두 차례에 걸쳐 봉행한다.

    4월 1일은 소제()라 하여 유교식 제의만 간단하게 올리고, 10월 1일에 치성의례를 하는데, 닷새에 걸쳐 걸립을 비롯한 대규모 행사를 펼친다.
    축제는 걸립부터 시작된다.

    걸립은 당제와 당굿에 소요되는 제물을 마련하기 위하여 걸립패를 짜서 동네 가가호호를 다니며 추렴을 하는 행사이다.

    당의 느림기를 앞세우고 풍물패가 마을을 돌면 주민들이 솔선해서 소반에 한지를 깔고 돈과 곡식을 차려 내놓는데 식구 수만큼 실타래를 놓고 가내 평안을 기원한다.

    이렇게 모인 돈으로 사당제를 진행한다.

    그러나 지금은 급격한 사회의 변화로 인해 걸립보다는 사당제를 널리 알리는 식전 행사로 성격이 바뀌었다.
    사당제가 열리기 하루 전에는 산천동 부군당에 가서 꽃을 받아오는 꽃받기를 한다.

    산천동에서 여신을 받들어 모셔오는 의미를 가진 이 행사는, 강릉단오제에서 대관령 산신을 모셔다가 강릉 여서낭에 합사하는 의식과 맥을 같이 한다.

    현재는 꽃받기 행사를 꽃등행렬로 확장시켜 축제적인 성격을 강화시켰다.

    100여 개의 등이 열을 지어 용문시장을 거쳐 산천동 부군당까지 행진하는 것은 하나의 전야제 행사로서 마을 주민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를 유도한다.
    본행사인 당제와 당굿은 음력 10월 초하루에 지낸다.

    당제는 원래 당굿 전날 지내게 되어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당굿과 같은 날 지낸다.

    상에는 편, 술, 과일, 나물, 탕()을 유교식 제사 법도에 맞게 차린 후 일동배례(),

    초헌(),

    아헌(),

    종헌(),

    독축(),

    첨작(),

    일동배례 순으로 진행한다.

    당제를 지내는 동안 최근 새롭게 만들어진 행사인 장군출진을 재현한다.

     남이장군이 반란군을 정벌하기 위하여 출진하던 옛 모습을 재현한 이 행사는 유가돌기(-)의 현대적 변형이라 할 수 있다.

    과거에는 무당이 부정을 물린 다음 유가를 돌았는데 여기에 역사교훈적인 의미를 더하여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
    당 앞에 따로 상을 차린 후 당굿을 올린다.

     당굿은 당을 관장하는 무녀 당주무당이 맡아 진행하는데 현재는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 이명옥이 맡아 진행한다.

    당굿은 17거리로 주당물림, 부정청배, 가망청배, 장군신장, 대감, 불사, 말명, 조상, 상산, 별상, 신장, 제석, 성주, 창부, 황제풀이(황제푸리), 군웅, 뒷전의 순으로 진행한다.
    이러한 굿거리의 짜임은 서울굿의 일반적인 흐름을 가지고 있다.

    주당물림에서 가망청배까지는 굿판을 정화하고 여러 신격을 굿판에 모시는 의미를 가진다.

    남이장군이 마을의 주신()이어서 장군 신장과 대감을 먼저 불러 모시는 것이 남이장군사당제의 특징적인 모습이다.

     불사부터 뒷전까지는 서울굿의 구조와 흡사하다.

    황제풀이는 남이장군사당제에서만 볼 수 있는 거리다.

    황제풀이는 대개 성주를 새로 모시거나, 굿을 하는 집의 대주가 특별한 나이가 될 때 행하는데, 남이장군사당제에서 행하는 황제풀이는 마을의 운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현재 마을굿 중에서는 여기서만 행한다.

    군웅은 마을의 수호신을 받들어 모시는 거리로 이때 당주무당은 사방으로 화살을 날려 마을의 액을 쏘아 물리치는 상징적인 행위를 한다.

    당굿이 진행되는 동안 많은 마을 주민들이 굿판에 참가하여 함께 어울리며 음식을 나누면서 한바탕 잔치를 한다.

    마을을 떠나 객지에 살던 주민들도 이날만은 마을로 돌아와 남이장군 영정을 참배하여 술잔을 올리고 배례를 행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당굿이 끝난 다음날 사례제를 올린다.

    신성한 당내에 잡인이 들어와 당을 시끄럽게 했을 뿐 아니라 당을 더럽혔음을 사죄하는 의미를 가진다.

    제관(), 화주(), 당주무당이 모여 사례치성을 드리는데 초헌, 아헌, 종헌, 독축, 소지()의 순으로 진행한다.

    소지는 대동소지 한 장과 개별 소지를 호주 성명을 부르며 올린다.

    사례제가 끝나면 제물을 내려 대동잔치를 벌인다.

    현재는 대동잔치를 당굿이 열리는 날로 옮겨 함께 벌인다.

    남이장군당이 있는 왕복 4차선 도로를 막아 차량을 통제하고 1000여 명 이상의 마을 주민들이 함께 어울려 음식을 나누는 모습은 일대 장관이다.

    이렇게 걸립부터 사례제 및 대동잔치까지 일련의 과정을 남이장군사당제라 부른다.

    의의

    현재 서울 전역에 많은 마을굿이 남아 있지만, 이처럼 체계적인 틀을 가지고 있으며 많은 마을 주민이 참가하는 마을굿은 흔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남이장군사당제는 서울특별시에서 많은 지원과 관심을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서울의 축제이다.

    거대도시 서울 속에 이러한 마을굿이 남아 있는 그 자체가 값지다고 할 수 있다.
    남이장군사당제는 첫째, 계급사회가 아닌 현대 산업사회에서 굿이 나갈 방향을 보여준다.

    전통적인 당굿이 민중 중심의 행사였지만, 지금의 축제화된 당굿은 민중의식과는 관련이 없이 글자 그대로 사람들이 한바탕 즐기는 문화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장군출진, 연등행렬 같이 과거의 행사를 현대적인 행사로 되살린 것은 바람직한 방향이라 할 만하다.
    둘째,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창조하는 데 성공했다.

     남이장군이라는 인물 전승에 내재해 있는 민중의식을 중시하기보다는 당굿을 놀이 중심으로 재현한 것은 전통을 현대에 어떻게 창조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예라 할 수 있다.

     기독교 신자들이 강릉단오제와 같은 행사에 와서 찬송가를 불러 행사를 방해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러나 남이장군사당제에는 그런 모습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남이장군사당제를 축제로 바꿈으로 인해 무속이라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면서 성공적으로 현대화시켰기 때문이다.
    셋째, 굿을 종교적 심성이 아닌 놀이적 심성으로 바라보게 하여 사람들의 참여도를 꾸준히 지속시키고 있다.

    비록 적극적으로 굿판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줄고, 젊은층의 참여도 적지만 굿 또는 미신이라는 인식을 넘어서 우리의 민속문화, 전통이라는 인식을 심어 준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중간에 당주무당이 바뀜으로 인해 굿거리와 전승 환경에 변화가 일어나기도 했지만, 성공한 현대적인 축제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앞으로 남이장군사당제 전반에 관한 자료집의 간행과 함께 마을 주민들이 지속적으로 참가할 수 있는 방안 모색이 필요하다.

    참고문헌

    • 박흥주. 서울의 마을굿. 서문당, 2001
    • 金泰坤. 남이將軍 堂祭. 전통문화사, 1984
    • 홍태한. 남이장군대제의 의미와 변화상 연구, 2003

      [네이버 지식백과] 남이장군사당제(축제) [南怡將軍祠堂祭] (한국세시풍속사전, 국립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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