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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국에서는 장르문학보다 문단소설이 더 많이 팔리는 것일까요? 한국독자들의 수준이 높기 때문일까요?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웃음). 아니 어쩌면 정말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수준 높음’이 우리가 마냥 긍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겠지요. 일찍이 밀란 쿤데라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블로흐에게 있어 키치는 역사적으로 19세기의 감상적 낭만주의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그 까닭은 독일과 중부 유럽에 있어 19세기는 다른 곳보다 더 낭만주의적이었고 바로 이곳에서 키치가 싹터서 키치라는 단어가 생겨난 곳도 이곳이며 아직까지도 흔히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프라하에서 우리는 키치에서 예술의 주된 적을 발견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곳에서 진정한 예술과 대립되는 것은 오락이다. 위대한 예술에 대립되는 것은 가벼운 예술, 사소한 예술이다. 그러나 내 이야기를 한다면, 나는 결코 애거서 크리스티의 탐정 소설에 역정을 낸 적이 없다. (쿤데라, <소설의 기술>)
여기서 고백하고 있듯이 쿤데라는 자신이 대중문학의 독자라는 사실에 어떤 모순도 느끼지 않습니다. 그가 거북하게 생각하는 것은 대중문학(오락문학)이라기보다는 키치(문학)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키치문학’이란 어떤 부류의 작품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키치’라는 말 자체가 문학적 발전이 더디었던 독일과 중부유럽에서 생겨난 단어라는 점이고, 둘째는 그곳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낭만주의적가 활개를 쳤던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세계문학의 구조]에서 근대문학(장편소설)이란 결코 보편적인 예술양식이 아니며(즉 매우 특수한 것이며), 한국의 근대문학은 이식문학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그것은 애써 작품의 수준을 문제삼을 필요도 없이 대중문학의 열약함과 순문학의 압도적 영향력이 그 증거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영국인라고 하면 조이스를 즐겨 읽고, 프랑스인이라고 하면 프루스트에 대해 한마디씩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보통의 영국독자나 프랑스독자가 읽는 문학은 따로 존재합니다.
즉 근대문학이 발전한 나라의 경우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엄청나게 대중문학이 발달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소위 걸작들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대중문학의 일각으로서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즉 많은 독자를 거느린 대중문학이라는 든든한 물질적 기반이 없었더라면, 출판물을 통한 그들의 예술적 시도나 실험들 역시 위축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즉 대중문학이 즉자적이었다면 순문학(문단문학)이란 대자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프랑스나 영국과 달리 문학적 토대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산업적 토대의 부재) 어떤 이유에서(민족 내지 국민국가 건설 등) 그것을 수입하게 된 나라의 경우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쿤데라는 이와 관련하여 자생적으로 문학이 발달한 나라의 경우, 근대문학(그의 표현으로는 바꾸자면 ‘유럽소설’)은 오락문학(바꿔 말해, 대중문학)과 대립관계를 형성하지만, 그렇지 못한 나라의 경우는 키치문학과의 대립관계에 놓인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일까요? 저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자생적 근대문학은 기본적으로 국가와의 긴장 관계를 형성하면서 발전해갔지만, 이식적 근대문학은 도리어 국가와의 협력 하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문학 시장이 거의 발달하지 않는 곳에서 생겨난 근대문학은 자신의 존재이유를 국민적 가치를 일반 대중에게 전달하는 데에서 발견했다고 볼 수 있다. (졸고, 「한국문학과 스토리텔링」, <프레시안>, 2011, 9, 23일자)
자생적 근대문학에서 대중문학(오락)과 순문학(예술)의 구분은 자못 명확합니다. 한편으로는 서로를 적대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를 인정하지요. 대중문학이 순문학(본격문학)보다는 상대적으로 적은 상징자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그러므로 그들은 학교교육의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그들보다 막강한 대중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꿀림이 없지요. 그런데 이식적 근대문학에서 대중문학이란 순문학 다음에 오는 것으로서 기본적으로 그것은 키치문학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발생하는 문제가 소위 대중문학이라고 불리는 작품보다 순문학이라고 불리는 작품이 더 많은 상품가치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이것은 우리를 ‘문학의 효용’이라는 문제로 안내합니다. 주지하다시피 베네딕트 앤더슨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책에서 근대문학이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은 그가 말하는 근대문학과 근대국가의 밀월관계란 어디까지나 문학적 후진국(당연히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즉 이 책의 논리를 프랑스나 영국과 같은 문학대국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왜냐하면 자생적 근대문학과 이식적 근대문학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후자가 ‘감동(공감)’에 기반을 둔 서사를 소설의 골격을 삼았다고 한다면, 전자의 경우 도리어 그것(대중 소설이 지향한)에 대한 비판 내지 거부를 골격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토마스 만이 한 에세이에서 영화는 예술일 수 없다고 단정하면서 예술의 한 속성으로서 지적한 ‘차가움’은 정확히 이것과 관련이 있다. (위와 같음)
오늘날 문학의 유용성을 이야기할 때, 자주 이야기되는 것이 바로 ‘공감능력’입니다. 쉽게 말해, 공감능력을 키워주는 문학이야말로 바람직한 사회를 만드는 데에 매우 유용하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신형철도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학교폭력을 다룬 칼럼에서 비슷한 취지의 이야기를 한 바 있습니다. 물론 그는 노련하게 그런 유용성을 의심하는 입장까지 미리 언급함으로써 그런 비판을 모르는 것은 아니라고 부언하지만,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학교폭력 해결하는 데에 문학이 유용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러한 것일까요? 직접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지요.
문학작품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터라 문학과 공감능력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문학이 공감능력을 함양할 수 있을까?
문학 연구자들 사이에서라면 이런 발상은 소박한 낙관론이라고 타박 받기 쉬울 것이다. (…)
그러나 우리는 문학의 효력이라는 것을 급진적으로 테스트해본 적이 있기는 한가. 학교에서 소설 속 한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눈물의 의미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고 함께 이야기 나눌 시간을 아이들에게 허락해본 적이 있는가. 시도해본 적이 없으므로 실패한 적도 없다. 실패하더라도 시도해봄직한 일이 아닐까. 사회적 비용이 많이 드는 일도 아니다. 피해학생을 위해 117 신고전화를 개설하는 것 못지않게 가해학생들의 내면에 공감의 기제를 개설하는 일도 중요할 것이다. 아이들을 도와줘야 한다. (신형철, 「아이들을 도와줘야 한다」, <경향신문>, 2012년 1월 12일자. 강조는 인용자)
저의 입장에서 볼 때, 여기서 다소 의아하게 생각되는 것은 ‘문학의 효력’에 대한 새삼스러운 강조입니다. 그것은 마치 한국문학이 그동안 공감능력을 함양하는 데에 일조를 하지 못했다고 읽히는데, 사실은 정반대라는 것은 상식입니다. 따라서 이를 몰랐을 리 없는 그가 새삼스럽게 문학의 효용을 강조하는 것은 그동안 그것이 시도된 적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다소 과하게 사용되어 모두 소진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앞서의 논의와 관련하여 다시 이야기하자면, 자생적 근대문학에서 ‘공감능력’이란 대중문학의 영역에 속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이식적 근대문학에서 그것은 순문학이 담당해왔는데, 근대문학의 종언이 운운되는 지금 여전히 그것이 호출된다는 것은 이식적 근대문학의 깊은 곳에 존재하는 ‘교육도구’로서의 역할이 어떤 형태로든(이를테면, 키치문학으로) 당분간 계속 될 것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합니다.
좀 더 이야기해보도록 하지요. 문학의 효용이 문제될 때 자주 언급되는 글 중의 하나는 다음과 같습니다.
문학은 써먹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을 한다면 도대체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을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김현, [한국문학의 위상])
“도대체 문학은 어디에 써먹을 수 있는가?” 문학의 유효성을 미리 전제하고 있는 이 질문이 문학의 본질론과 연결되어 심각하게 논의될 수 있는 것은 이식적 근대문학에서가 아닌가 합니다. 사실 이 물음은 언뜻 보면 그럴싸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실은 궤변에 가깝습니다. 알기 쉽게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문학은 써먹을 수 없다. 즉 유용성이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써먹을 수 있다.
(그런데) 유용한 것은 인간을 억압한다.
(하지만)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다.
(고로) 문학은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그런데) 문학은 어디에 써먹을 수 있는가?
이것이 궤변인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면에서 그러합니다. 첫째는 문학의 유용성을 미리 전제해 놓고 있으면서, 자꾸 그것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우회한다는 점이고, 둘째는 <유용성=억압>이라는 등식을 당연한 것으로 가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이 둘은 어떻게 결합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문학을 억압당하는 위치에 놓음으로입니다. 요컨대 김현은 문학이란 억압을 당함으로써 그것을 인지하는, 그리고 그에 반작용하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반영론에 기초한 입장이지요.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는 시치미를 떼고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그렇다면 유용성이 없는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는 ‘억압의 부재’를 그 자체로 문제삼는 태도인데, 이때 그가 제시하는 억압의 대체물은 감동, 즉 공감능력입니다. 그가 ‘억압 없는 쾌락’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부정적 힘을 인지한다. 그 부정적 힘의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한다. 소위 감동이라는 말로 우리가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는 심리적 반응이다. (…) 인간은 문학을 통해, 그것에서 얻은 감동을 통해, 자기와 다른 형태의 인간의 기쁨과 슬픔과 고통을 확인하고 그것이 자기의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위의 책, 강조는 인용자)
위 논의를 문학에 대한 일반론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를 4.19 또는 이 글이 씌어진 시기의 시대상과 연결시켜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그렇게 한 것, 좀 더 확장시켜 보면,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느낌의 공동체인 한국근대문학에 대한 설명으로도 보입니다. 따라서 이를 뒤집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타인의 기쁨이나 슬픔에 공감하게 만들고, 그것을 통해 세계(사회)를 개조할 수 있는 문학이야말로 진짜 문학이다”라고 말입니다.
사실 이것은 앞서 다룬 신형철의 입장과 공명합니다. 그는 문학은 가해학생들에게 공감의 기제를 부여하여 학교폭력이라는 억압을 개조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김현의 재림이 맞습니다. 그러고 보면, 최근 그에 딱 들어맞는 작품이 화제가 되긴 한 것 같습니다. 공지영의 [도가니]가 바로 그런 작품인데, 문제는 김현 ‧ 신형철의 입장에서 이 작품을 그들이 생각하는 ‘진짜 문학’이라고 여기는가에 있을 것입니다. 짐작컨대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김현은 문학의 효용성을 ‘공감과 개조’로 논한 뒤, 다음과 같은 다소 당황스러운 이야기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사춘기 때에 나는 나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있는 여자란 여자는 모조리 마음속으로 간음하였다. 그녀들은 그때의 나에게 단순한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랑을 이해하게 되자마자, 여자들은 먹히기를 기다리는 고깃덩어리이기를 그치고, 장미꽃 핀 화원을 드나드는 천사들이 되었다. 문학은 그 고깃덩어리와 천사 사이를 왔다갔다 하게 만드는 매개체이다. 문학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게 만드는 것이다. (위의 책)
사적인 고백이 포함된 이 부분은 여러모로 흥미로운데, 왜냐하면 문학의 효용이 가진 부정적인 측면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문학을 ‘인간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만드는 매개체’로 규정합니다. 그런데 이때의 총체적 파악이란 대상의 양극을 오고가는 것으로 뜻합니다. 즉 여자라는 대상은 고깃덩어리(강간대상)로 볼 수도 있고 천사로도 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어느 쪽도 실제 여성과는 무관한, 말하자면 남성적 욕망이 투사된 전형적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물론 그는 자신이 여자를 강간대상으로 여기게 된 원인으로 성욕이 가장 왕성한 시기인 사춘기 탓으로 돌리고, 이것을 교정하게 만든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이 둘은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바탕에는 문학이 존재합니다. 대상을 과감히 왜곡하는 것에 거부감이 적고, 그렇게 왜곡된 이미지에 쉽게 감정을 몰입할 수 있는 사춘기 소년들의 문학, 김현이 옹호하려는 문학의 효용성이란 여기서 가장 많이 발견될 것입니다. 사실 공감능력이란 대상을 왜곡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발휘되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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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제가 최근에 쓴 글의 일부입니다 (올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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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쉽게 잘 쓰신 글 즐겁게 읽었습니다. 일부여서 일까요? 뭔가 더 있어야 글이 마무리 될 거 같은데...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여기 저기 생각할 거리들을 다양하게 던져주시네요. 자생적 근대문학과 이식적 근대문학의 차이점에 대한 이야기들을 조금 더 봤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공감'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시면서 필요한 수준에서 언급이 될 듯 한데 글의 뒷 부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것과 관련해서는 [세계문학의 구조]와 프레시안에 실린 [한국문학과 스토리텔링]에서 다룬 바가 있기 때문에 반복이 될 것 같아서 생략했습니다. 후자의 경우는 카페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헐...공감능력이라고 뭔가 새로운듯 말하기보다는 그냥 '상상력'이라고 하는게 더 솔직하고 뻔한 진리일듯. '상상'이 인간에게 가지는 효용과 그 상상력을 길러주는 매체로서의 문학의 효용을 말하는게 더 온당한듯 하군요. 김현의 인용이 말해주는 것이 있다면, '개인의 상상의 세계'가 '현실'과의 어긋남에서 자아에게 '충격'효과를 나타내는 방식의 '교훈'이라고 말하는게 나을듯.
지적하신 대로 사실상 같은 말이죠. ^^
[한국문학과 스토리텔링]은 '인용' 덕분에 읽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뒷글은 없는 거군요^^; 소조님이 생각하시는 문학의 효용을 정리하시면서, 그게 김현, 혹은 신형철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하든 간에, 그 개념쌍을 다시 시용하시지 않을까 생각했었습니다. 아무튼 잘 읽었습니다. 맥락을 그려주는 글이 저는 읽기 좋아요^^
뒷글이 있긴 한데, 원하시는 내용과는 좀 거리가 있습니다. 여하튼 조만간 나머지 부분도 올리겠습니다.
"어떠한 예술가도 윤리적인 공감을 지니지는 않는다. 예술가의 윤리적인 공감이란 용납할 수 없는 매너리즘의 양식인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경구가 정곡을 찌르네요.
와일드, 이 친구는 도무지 미워할 수 없습니다. 하는 말마다 옳으니까요. ㅎㅎ
오스카 와일드의 에세이나 아포리즘을 읽다보면 한국 작가나 비평가들이 와일드에 대해 사유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저도 소조님의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 문학>처럼 '오스카 와일드와 한국 문학'이라는 비평을 해보고 싶었는데 깜냥이 안 되서 못하고 있네요;; 주제는 괜찮은 거 같은데 비평으로 발전시키기에는 제 역량이 많이 떨어져서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