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런즉 1)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ㄱ)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5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7 ㄴ)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함과 같으니라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 작년 대통령 후보로 나온 사람이 말한 것을 코미디언이 요즈음도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행복한 삶이 없었으면 이런 말이 다 나왔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사람이 사는 목적이 행복하기 위하여 산다고 하는데 여러분은 과연 행복하십니까?
사람들은 어떨 때 행복감을 느낍니까? 자기의 원하는 바가 이루어질 때 행복감을 느낍니다. 오랫동안 소원한 것이 이루어 졌을 때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교회 나오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려면 교회 나오는 사람들의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소원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해줍니다. 기도하라. 예배를 잘 드려라. 정성을 다하라. 헌금을 하라면서 소원 성취하는 방법을 알려 줍니다. 그러면 자기의 정성 바침, 자기 행함에 따라 소원의 성취가 빨리 되기도 하고, 늦게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안되는 사람은 믿음이 부족하다거나 정성이 부족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분위기속에서 다른 말도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여러분들은 그렇게 수준 낮은 이야기들은 이미 졸업하였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도대체 나를 무엇으로 보고 그렇게 말하는가 하실 것입니다. 나는 그런 것들이 싫고 하나님의 말씀을 좋아한다고 말씀하실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바른 말씀을 찾아서 복음을 찾아서 왔다고 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좀더 고상하고 차원 높은 수준이 되자는 것도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스스로의 행함으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있습니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다는 것은 인간의 어떤 행위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사람은 철저하게 자기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에 불가능하면 인간과 의논하거나 어떤 행위를 요구하기 전에 이미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예정하여 놓으시고 그 예정된 자들을 찾아 나서시겠습니까?
교회는 자기의 마음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너지고 부수어지는 곳입니다. 자기의 소원 성취가 죄임을 알고 나의 뜻이 포기되고 주님의 뜻이 내 안에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하는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우리는 자기 소원성취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모였다고 하여도 역시 이름만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지만 그 안에는 또 다시 자기의 행함에 가치를 두는 자기 의가 자기도 모르게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도대체 어느 정도로 죄인이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다 지킨다고 하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고 나섰겠습니까? 이들이 포기하지 못한 자기 의가 우리 안에도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죄인이기에 전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이 기분이 나쁘다는 것입니다.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정말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일한 것이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복음입니다.
4:1절을 봅니다. ‘그런즉’이라고 시작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의 말씀을 받아서 하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할례를 받은 사람이나 받지 아니한 사람이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사람에 대하여 아브라함과 모세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은 구약의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그들의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라고 바울이 증거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이나 신약이나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 그러면 대부분 먼저 기가 죽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믿음으로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믿음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단을 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100세에 낳은 아들도 바치라고 하니 단번에 바쳤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으로 우리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자는 설교를 아주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습니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들린 것은 우리의 종교적 본능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인간이 무언가 다른 것이 있어야지 복을 받은 사람은 무언가 다른 면이 있었지 그러므로 우리도 그런 사람 본을 받아 복을 받아야지 하는 이야기가 솔깃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 대하여 로마서 4장에서 계속말씀하고 있으니 계속 보겠습니다만 그동안 창세기에서 또 신앙 클리닉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하여 많이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믿음이 좋아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전혀 없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믿음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즉 계시입니다. 그 믿음이란 없는데서 생긴 것입니다. 원래 있는 것을 어떻게 손을 써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전혀 없는데 새롭게 창조하여 만들어 내시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자신이 믿어주어서 의로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하여 내신 것입니다.
4:1절입니다. ‘그런즉’이라고 시작을 하면서 아브라함의 예를 듭니다. 우리 성경에 두 가지 번역이 가능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육신으로 우리 조상되었던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이것을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육으로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전자는 육신으로 자기의 조상인 아브라함이라고 하지만 후자는 육으로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라고 봅니다. 즉 아브라함의 육체의 행함으로 무엇을 얻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번역이 자연스러운 것은 다음 연결되는 2절과 잘 어울립니다.
4:2절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즉 육체의 행위로서 의롭다 함을 얻었다면 자기 자랑할 것이 있겠지만 자기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의롭다 함이 무엇으로 검정이 된다고 하였습니까? 나는 무언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의 육체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오늘 다른 사람보다 무언가 나은 것이 있어서 복을 받고 산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은 자랑할 것이 없는데 오늘날 교인들은 자랑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자랑도 예수님이 아닙니다. 자기들 교회입니다.
4:3절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저의 의로 여기셨느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15:6절의 말씀입니다. 무슨 약속입니까? 후손에 대한 약속입니다. 창세기 15장은 아직 아브라함의 이름이 아브람입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후손이 하늘의 뭇별과 같이 많으리라고 하십니다. 그 약속을 믿으니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을 믿기까지는 애굽에 내려가서 바로 왕 과의 경험, 자기 조카를 구하기 위하여 소돔과 고모라를 치러온 연합군과의 전쟁의 승리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조금씩 알아간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 후손에 대한 약속을 믿을 정도로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이 빨리 생기지 않으니 아내의 말을 듣고 이스마엘을 낳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한 후손은 아브라함이 협조하여 나오는 후손이 아니라 없는데서 있게 되는 방법으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래에게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나올 후손을 꼭 찍어서 갈라디아 3:16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라고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후손아 나오리라는 것은 단지 아브라함의 육신의 자녀가 많다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도 예수님 안에서 은혜로 구원받는 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를 해석하는 예수님의 해석방법입니다.
요한복음 8:51-59절입니다. “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52 유대인들이 가로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53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5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어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55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장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7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59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너희의 아비는 마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보고 귀신 들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예수님께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도 예수님 안에서 은혜로 구원받는 다는 것입니다. 시간순서상으로 맞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묵시세계라고 합니다. 시간의 앞뒤가 아니라 주님의 일하시는 차원은 우리 인간의 시간개념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누구를 믿는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는 말이고 그 약속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의 태어나심과 죽으심과 다시 사심이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하여 계시가 된 것입니다. 마치 이삭이 태어나는 것처럼 없는데서 있게 되었고,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드려졌다가 다시 산 것처럼,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방식으로 예수님이 일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도 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 바울도 이렇게 증거 하고 있습니다.
4:4절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인간의 행위가 아님을 다시 예로 들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하는 사람이 삯을 받는 것은 은혜입니까 마땅한 대가입니까? 일하는 사람이 월급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사주가 근로자에게 일을 시켰으면 당연히 월급을 주어야 합니다. 만약 월급을 주지 못하면 사주가 근로자에게 빚을 진 것입니다. 계속 월급안주면 데모를 하든지 법적으로 사주의 재산을 차압하든지 해서 받아 내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자신이 일한 대가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만약에 의롭다 함을 인간의 행위로 받는 것이라면 일하는 정도에 따라서 많이 의롭고 적게 의롭고 하는 차이가 날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천국에서도 데모가 일어날 것입니다. 아브람과 바울 순교자들이 들고 일어날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를 십자가에서 예수 믿고 천국 온 강도와 같이 취급하느냐고 데모할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은혜로만 들어가는 나라이기에 주님을 위하여 순교를 하였어도 그것이 자기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된 것 인줄 알기에 주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오직 은혜만 강조하니 한국교회가 이 모양 이 꼴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을 강조하고 믿는 자의 책임을 강조하자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참된 은혜를 입은 자라면 주를 위하여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그렇게 된 것임을 고백할 뿐입니다.
야고보서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것은 믿음의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참된 믿음이란 세상의 차원을 뛰어넘은 행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모든 아브라함의 행함이 자기의 일한 열매라면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행함으로 나타난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열매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행함이 우리에게 나오지 않으니 자꾸 무엇을 행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행하라고 하지 말고 은혜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복음을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마음의 따름이 없이도 얼마든지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절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떨어져 있는 가지에다가 열매를 맺지 않는다고 고함을 지르니 열매를 돈 주고 사다가 가지에 붙들어 매어놓고 있는 실정이 되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4:5절을 봅니다. ‘일을 아니할 지라도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을 하여서 의롭다 함을 받으면 그것은 자기의 공로가 되기에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을 아니하고 받는 다는 것은 인간이 어느 정도로 무능한가를 알라는 것입니다. 일을 하라고 주면 오히려 망치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어려운 일을 맡기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덤벼듭니다. 그러면 어른이 무어라고 합니까? 가만히 있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도대체 어느 정도로 불가능한 죄인이면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구원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언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태어나기도 전에 그렇게 정하신 것입니다. 무슨 선한 일을 하기도 전에 배 속에 있을 때 그렇게 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구원 얻고자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극 정성을 바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부르시는 자에게 전적으로 달려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바울사도는 아브라함과 다윗을 가지고 논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율법 이전의 사람입니다. 다윗은 율법이후의 사람입니다. 율법 이전이나 율법을 받은 이후나 오직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무엇으로 되는 것입니까?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을 증거 하고 있습니까? 왜 인간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고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선물로 의롭다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율법의 완성인 것입니다.
4:6-8절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합니다. 다윗이 얼마나 의로운 왕이었습니까? 그러나 자신이 살인과 간음을 하여도 그것을 죄로 여기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이런 다윗이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결국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인간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까?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의 가리우심을 받는 사람을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소식이 기쁜 소식이 됩니까? 자기 살길을 다 마련하고 있는 사람에게 복음이 과연 기쁜 소식이겠습니까? 세상에서 살길을 다 마련하여 놓고서 여유가 있어서 종교를 한번 가져볼까 하는 사람은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소식이 별 기쁘지 아니할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으면 이 복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 죄인인지를 아는 사람은 일한 것이 없이 거주 주시는 은혜가 천하보다 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은 흔하지 않습니다.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할 정도로 못난 인간임을 아는 자는 성령이 아니고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복음은 그야 말로 행복한 소식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