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최고의 화제작 <모래시계>
1. 1990년대 최고의 화제작 <모래시계> 24부작을 모두 보았다. 30년이 지난 시점에서 지나간 시대의 명작을 늦게서야 관람한 것이다. 세상의 이목이 어떤 특정한 이슈에 꽂혔을 때,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싶은 청개구리적 심리가 그때 작동했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TV 앞에 앉기보다 술마시는 일에 더 열중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모래시계>에 대한 뒤늦은 시청소감은 약간의 과도한 감상적 분위기가 거슬리는 점은 있을지라도 전체적으로 매력적이고 감동적으로 80년대 젊은이들의 낭만적인 사회인식을 보여주었다고 요약할 수 있다.
2. <모래시계>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보다 80년대 한국 사회 가장 큰 비극이었던 ‘광주항쟁’과 ‘삼청교육대’를 나름 객관적이고 정직하게 재현했다는 점이다. 안방 화면에서 전개된 권력이 은폐시키고 싶었던 역사의 진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80년대의 비극을 환기시켰고 역사와 사회에 대한 신중한 감각을 심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폭력배들의 활동이 지나치게 부각되었지만, 권력자들과 기업가들의 정경유착과 상납과 비리의 실체를 정면으로 묘사했다는 점도 이 작품의 사회적 의미를 더해준다. 정당성이 없는 권력이 지속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했고, 그러한 비밀 자금이 부정한 이득과 혜택을 제공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을 흥미롭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3. 작품 속 주요 인물들의 밀접한 관계는 작품 전개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에도, 사건의 전개와 개연성에 과도한 낭만적 분위기를 부여하여 진실에 대한 객관적 접근보다 특정 인물들 사이의 애정과 증오가 동반된 감상적인 측면을 지나치게 부각시킨 점은 아쉬었다. 그러한 전개는 때론 감동적인 느낌을 부여하지만, 지나치게 인위적인 설정으로 인해 한국 사회의 객관적인 인식에는 분명 방해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듯했다. 지나친 감상성은 <모래시계>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이러한 감상적 요소와 낭만적인 관계가 사회적 드라마가 가질 수 있는 경직성을 완화하고 작품 감상에 대한 접근성을 높일 수 있다하더라도, 너무도 크게 울리는 배경음악의 불편함과 함께 80년대를 냉정하게 바라보게 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4. <모래시계>에는 80년대 유행했던 용어인 일종의 ‘전형성’이 지배한다. 사건의 전개에 따라 사람들의 변화를 보여주려고 시도하지만, 결국 남는 것은 인간적 측면의 복합성과 다양성이 아니라 항상 지속되는 어떤 특성의 전개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폭력배인 태수(최민수)는 분명 끔찍한 폭력배이지만 그가 휘두르는 폭력은 마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비장미로 표현되고, 검사인 우석(박상원) 또한 오로지 ‘정의’라는 키워드를 실현하기 위한 절대적인 신념의 보유자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조금은 복합적인 설정으로 등장하는 혜림(고현정) 또한 결국 시대의 변화 속에서 우왕좌왕하면서 주변 인물들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외형적으로는 능동적이지만 결국은 수동적 관계에 포섭되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그밖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도 특정한 상황을 대변하는 전형적인 인물들이다. 국가를 위해 봉사한다는 명분으로 온갖 비리를 저지르는 권력의 실세들, 의리로 똘똘 뭉친 깡패들과 배신과 음모를 남발하는 치사한 깡패들의 이분법적인 묘사, 한 여자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지고지순한 남성의 헌신, 조직폭력배들의 성격, 검사들의 모습, 기업가들의 실태, 이러한 모습이 보여주는 전형성은 분명 극의 몰입에 도움을 준다. 이해되지 않는 인물은 극의 전개에 방해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전형성이 반복될 때 극의 분위기는 인위적 감상성으로 가득차 버린다.
5. <모래시계>에는 ‘광주항쟁’의 비장미가 중요한 요소로 표현된다. 검사 우석이 권력과 싸우며 정의를 실현하려는 과정에는 스스로가 계엄군으로 참여했던 상처에 대한 보상의 의미가 담겨있고, 그것은 사건 전개에 지속적으로 명분을 주는 계기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태수가 광주항쟁의 시민군으로 참여했던 상황도 그의 행위에 대한 배후로 작용되고 있다. 작품 마지막 사형이 결정된 태수가 말하듯 광주항쟁 이후 달라진 두 사람의 삶에서 그것은 중요한 모멘트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피상적인 이해와 도식적인 정의감이라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그것은 <모래시계>의 배경과 사건 전개가 지나치게 짧은 시간 속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주인공들의 나이는 ‘1957생’으로 설정되어 있다. 20대의 주인공들은 짧은 시간동안 조직폭력배의 수장이 되었고,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검사의 중심이 되었으며, 기업을 이끄는 냉철한 경영인이 되었다. 80년대 20대였던 이들이 보여주는 것은 역사 속에서 경험했던 상처와 고난을 아픔으로 체화하고 그것을 구체적인 형태로 재현하기에는 지나치게 빠르고 성숙되기 어려운 모습들이었다. 작품의 압축미를 위해 전개된 사건을 통해, 그리고 마지막 선고되는 사형수의 어린 나이(31)에서 역사 속에서 급조된 존재들의 결코 어울리지 않은 모습이라는 느낌을 쉽게 버릴 수 없었다.
6.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에서 ‘정의’에 대한 마지막 보루로 등장하는 것이 ‘검찰’이라는 것이다. 국가의 폭력과 회유 속에서도 굳건하게 자신의 일을 처리하는 용기있는 검사들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87년 민주화 운동 때 악역은 경찰이었지만, 사건의 실체를 밝힌 것은 검사들이었다. 당시의 ‘검찰’에 대한 호의적인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이제는 철저하게 거대한 정치 권력체로 변모한 검찰에 대한 낭만적인 인상이다.
첫댓글 ^^^ 나름대로의 명분을 내세우며 살아가는 군상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