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기상이해-49. 아브따르(avatara)
센과 우빠디야이는 예수를 하나의 아브따르로 부는 것이 그를 대중적인 힌두교의 많은 아브따르들 가운데 하나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것이라고 느꼈다.
대신에 그분을 인격적인 하나님, 지존하신 브라흐만의 낮은 단계의 현현으로 잉태되신 이슈와르(Ishvara)의 아브따르로 만드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빠사미는 자신의 다른 전망과 함께 특정한 안전장치를 발견할 수 있다면, 아브따르라는 용어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유용하고 생산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아브따르에 대한 힌두의 이해를 분명하게 언급하는 기타(Gita)의 구절로 시작한다.
“오! 아르주나여, 법도가 쇠퇴하고 무법이 발호할 때마다 나는 스스로 다시 태어난다. 선한 이들을 보호하고, 악인을 멸절하며, 법을 세우기 위해서 대대로 다시 태어난다.”
여기서 시작하여 아빠사미는 여러 인도의 언어에서 아브따르라는 단어를 실제로 계속해서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해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러나 그는 힌두교와 기독교에서 그 단어를 사용함에 명확한 구별이 필요한 곳을 지적한다.
힌두교에는 많은 아브따르들이 있으며, 이런 신들 대부분은 부분적 현존의 존재로 간주된다.
통상 받아들여지는 유일하고 완전한 아브따르는 크리슈나 안에 성육신한 비슈누의 그것이다.
분명히 그러한 개념은 하나님의 전존재의 성육신이며, 그 안에서 신격의 완전함이 육체로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기독교의 관점과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기타(Gita)에서 묘사된 아브따르의 목적도 부적절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스도는 악인을 멸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기타는 필요할 때마다 신이 거듭 반복하여 화신이 된다고 전제한다.
실제로 고전 힌두교는 일련의 아브따르들을 열거하고, 스리 라마크리슈나와 마하트마 간디와 같은 위대한 인간 지도자와 교사들을 신의 아브따르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기독교인에게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한 번에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고 유일한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아브따르였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오직 한 번만 사람으로 땅 위에 사셨고 그것은 예수님이셨다. 세상의 모든 위대한 종교적인 인물들 중에 하나님의 성육신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예수님 외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우리의 확고한 기독교 신앙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실재성과 역사성에 대한 질문은 힌두교의 아브따르가 사실 성육신이라기보다는 신의 현현(theophany)이라는 사실과 마주해야 한다.
아브따르는 걸어갈 때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아야 하므로 그 발이 땅에 닿지 않아야 한다.
남인도 사이바 싯단뜨(Saiva Siddhanta)에 속하는 인격주의 박띠전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상에 신이 나타나는 것은 오로지 인간을 돕기 위한 것이다. 그 신은 어린아이로 태어나지 않는다. 그 신은 오랜 세월 동안 육체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들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서 육체를 사용할 뿐이다.”
아브따르 개념을 기독교에서 사용하기 위해 선택한다면 가현설(docetism)을 피해야만 한다.
이와 유사하게 힌두교 사상가들은 화신의 역사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아빠사미는 라마크리슈나의 말을 인용한다.
“그리스도와 크리슈나가 살았는지 살지 않았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스도의 이상과 크리슈나의 이상을 품고 있는 사람들은 실제로 그 시기에 그리스도와 크리슈나로 살았다.”
아빠사미는 창조된 세계의 실재성과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의 역사성 둘 다를 강조한다.
이러한 자격요건과 함께 그는 그리스도와 연관하여 아브따르라는 용어를 받아들인다.
그의 신학은 상까라의 일원론이 아니라, 라마누자의 인격주의 유신론 및 박띠와 관련된다.
<인도기독교사상>에서 (로빈 보이드 저, 임한중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