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 -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利의 근원을 막아야 한다”
조광조는 당시 선비들의 행태가 바르지 못한 원인을 “이익(利)만 알고 의리(義)를 모르는 데서 나온 것”으로 진단했다. 따라서 “외람되게 정해진 훈공을 고치지 않는다면 이익의 근원을 막을 길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2010년 한국 출판계의 화두는 ‘정의(正義)’였다. 하버드대 교수인 마이클 샌델이 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출판계를 휩쓸었다. 인문·사회과학 책은 2쇄(刷)를 찍기가 힘든 우리의 출판 시장에서 이 책의 판매량은 가히 경이(驚異) 그 자체였다. 하버드 대학의 최고 인기 강좌라는 지적(知的) 호기심 내지는 지적 허영심에 기인한 것인지, 한국 사회 내부의 정의에 대한 갈증에 기인한 것인지는 단정할 수 없지만, 아무튼 이 책을 계기로 정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만큼은 사실이다.
필자는 진솔하게 물어보고 싶었다. 정의란 과연 무엇일까? 샌델은 이 책의 부제를 ‘옳은 일(right thing) 하기’로 정하면서 그 대답을 대신했다.
정의에 대하여 관심이 높아진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키워드로 풀어보는 조선의 선비정신>의 두 번째 주제를 ‘정의’로 정한 이유가 그것이다. ‘정의’라는 단어와 관련지어서 생각해 볼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선비는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1482~1519)였다. 사실 조광조를 정리하고 싶었던 차에 글을 샌델로 시작하는 것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솔직히 고백하고 싶다. 조광조의 삶 자체를 읽어가는 그 자체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정의’, ‘옳은 일’ 등의 실제 모습을 만나게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번 호의 글을 시작한다.
조광조 시대에는 정의라는 두 글자가 아닌 의(義)라는 한 글자가 주로 사용됐다. 조광조가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면서 지키고자 했던 의란 과연 무엇일까. 조광조가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한 의라는 말은 이익(利)과 상대되는 의미였다. 맹자(孟子)가 말하지 않았던가? 이익(利)보다는 의로움(義)이 중요하다고. 오늘날 우리는 승리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남아공 월드컵 경기에서, 그리고 나이 어린 여자 축구선수들의 승리로 우리는 작년 한 해를 즐겁게 보냈던 기억이 있다.
승리란 단어는 ‘이(利)를 이긴다(勝)’는 의미다. 그렇다면 이익을 이기는 주체(主體)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이익을 이기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의(義)다. 순자(荀子·BC298?-BC238?)가 말했다. 의로움이 이익을 이겨내면 치세(治世)를 이루게 되고, 이익이 옳음을 제압하면 난세(亂世)가 되고 만다(義勝利者 爲治世, 利克義者 爲亂世). 승리라는 단어는 바로 ‘이익(interest)이라는 욕망을 정의(justice)라는 올바른 정신으로 이겨낸다’는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
조광조는 바로 이 이익이라는 욕망을 정의라는 가치로 이겨내고자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버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조광조는 왜 이익으로부터 정의를 지켜내고자 했을까? 이하의 내용은 조광조에 대한 그간 연구물(정두희 이종호 최이돈 정옥자 이상성)을 참고하여 특히 그가 선비로서 현실 정치에서 보여준 활동을 ‘의(義)’라는 측면에서 정리해 본 것이다.
김굉필에게 수학
조광조의 본관(本貫)은 한양이고 자(字)는 효직(孝直), 호(號)는 정암(靜庵)이며 시호(諡號)는 문정(文正)이다. 개국(開國)공신 조온(趙溫)의 5대손이며,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어천찰방(魚川察訪)이던 아버지의 임지에서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유배 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했다. 1510년(중종 5) 진사시(進士試)를 장원(壯元)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성균관에서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자를 천거하게 되자 유생(儒生) 200여 명의 추천과 이조판서 안당(安?)의 천거로 1515년 조지서 사지(造紙署 司紙)에 임명됐다. 하지만 종6품이라는 파격적인 대우에도 불구하고 과거 출신이 아니었기에 정치의 중심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아쉬움을 느낀 조광조는 다시 성균관 알성시(謁聖試)에 응시하여 2등으로 합격했다.
과거에 급제한 조광조는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됐고, 이어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거쳐 1515년 11월에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이 됐다. 이후 조광조는 4년 동안 정치활동을 대부분 홍문관(弘文館)에서 한다. 홍문관에서 조광조는 왕을 교육하고 정책 자문에 응하고 신료(臣僚)들의 의견을 왕에게 전달하는 일을 했다. 1518년에 천거를 통해 과거 급제자를 뽑는 현량과(賢良科)의 실시를 주장하여 이듬해에는 천거로 올라온 120명을 대책(對策)으로 시험하여 28인을 선발했다.
1519년에는 중종반정(中宗反正)의 공신들이 너무 많을 뿐 아니라 부당한 녹훈자(錄勳者)가 있음을 비판하여 2등 공신 이하 76명에 이르는 인원의 훈작(勳爵)을 삭제했다. 1519년 11월 11일 공신 삭적이 이루어졌으나, 4일 뒤인 11월 15일에 비극적인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는 실각하게 되고, 결국 12월 16일에 붕당(朋黨)을 이루었다는 죄목으로 조광조의 사형이 결정된다.
이상이 조광조의 간략한 이력이다. 그렇다면 잘못 제정된 공신들을 바로잡은 지 4일 만에 조광조를 실각하게 만들었던 당시의 정치지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광조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사림(士林)은 당시 정치 상황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세조(世祖)의 집권, 연산군(燕山君)의 학정(虐政), 중종의 반정 등의 과정을 냉철하게 검토해 나갔다.
士林의 도전
사림은 먼저 세조의 집권과정에 문제를 제기했다. 훈구(勳舊) 세력이 이때부터 형성된 것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사림파는 1512년(중종7)부터 소릉(昭陵) 복위문제를 제기했다. 소릉은 문종(文宗)의 비(妃)이며 단종(端宗)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으로, 단종이 폐위(廢位)되면서 함께 폐위됐다. 소릉 복위 논의는 단종 폐위의 부당성과 세조의 집권과정에 대한 문제점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결국 1513년 소릉은 복위됐다.
한편 이 시기에 중종반정의 주축이었던 3인, 즉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 성희안(成希顔)이 각각 1510년, 1512년, 1513년에 사망한다. 중종은 1513년에 친정(親政)체제를 강화하겠다고 선언한다.
이후 사림은 연산군의 폭정에 피해를 입은 사림들을 주목했다. 먼저 김굉필, 정여창(鄭汝昌) 등 사림파의 지주(支柱)였던 인물들에 대한 처우 개선을 시작으로, 나아가 김굉필의 문묘배향(文廟配享)까지 추진하게 됐다. 문묘배향은 실패했으나 문묘배향 논의 자체가 이미 사림파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 주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사림파는 중종반정 공신을 형성하는 과정에 대한 문제까지 제기했다.
중종의 폐비(廢妃)인 신(愼)씨 복위(復位)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중종비 단경왕후(端敬王后)는 신수근(愼守勤)의 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인 신수근은 연산군 밑에서 좌의정을 지냈는데, 반정을 함께 하자는 박원종 등의 제의를 거절한 까닭에 반정 성공 이후 살해당했다. 그리고 단경왕후는 반정 직후 정국(靖國)공신들에 의해 폐출됐다. 시간이 흐른 1515년 계비인 장경왕후 윤씨(인종의 생모)가 죽자 사림은 신씨의 복위를 주장하고 나섰다.
폐비 신씨의 복위를 주장한 것은 단순히 복위 주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종반정 공신의 정당성을 문제 삼는 것으로, 이들은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등 반정 핵심인물들의 이름까지 거론하면서 이 문제를 제기했다. 상소가 올라간 지 3일째 되는 날,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사특(邪慝)한 의논을 올렸다는 이유로 상소를 올린 담양 부사 박상(朴祥)과 순창 군수 김정(金淨)을 문초할 것을 건의했다.
사태는 이제 신씨의 복위 여부가 아니라 이 문제를 제기한 김정, 박상 등의 처벌 여부로 번졌다. 의정부, 육조, 홍문관의 관원들은 임금의 구언(求言·절실한 사안에 대해 임금이 신하의 직언을 구하는 것)에 의한 상소를 벌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으나, 사헌부와 사간원의 처벌 요구가 강경해 결국 이들 2인은 유배됐다.
“臺諫을 모두 파직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