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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57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57. 길거리연극 "건달패 씨름판에 서다"를 해냈습니다.
"....모쪼록 와서 봐 주시기 바랍니다, 보잘것 없는 야쿠자(건달패)가 어설픈 모습의 요코즈나(천하장사)로 씨름판에 등장합니다." 훌륭한 세키토리(장사급 씨름꾼)가 되고 싶다고 뜻을 세웠지만 목표로 하는 에도는 멀고, 배고픔에 비틀거리며 역참 마을을 지나가던 모헤에(茂兵衛).
그런 그에게 술집 2층 창문으로부터 빗, 비녀 그리고 가진 돈 전부를 자신의 오비(기모노용 띠)에 묶어 전별 정표로 던져 주고 격려하는 게이샤 츠타 씨(芸者のお蔦さん). 그로부터 10년 후, 다시 나타난 모헤에는 삿갓을 쓰고 도롱이를 걸친 도박꾼 유랑자 모습, 완전히 야쿠자(건달패)가 되어 있었다.
그나마 옛날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에, 악한들로부터 그녀를 구하기 위해, 큰 싸움을 벌인 끝에 그녀의 남편과 아이 등 가족 셋이서 떠나는 츠타 씨의 뒷모습을 향해 모헤에가 만감이 교차하는 마음을 담아 독백하는 최후의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전승의 유명한 내용이다.
4월의 봄밤, 하늘에는 옅게 초승달이 떠오른다. 요코하마·노게골목의 양 끝은 돗자리를 깔거나, 서서 보는 사람 등 많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드디어 "건달패 씨름판에 오르다"의 클라이맥스다. 홀로 서 있는 모헤에 역의 나에게 일제히 시선이 쏟아진다. 자, 나의 마무리 연기를 보여줄 차례다.
"요코즈나(천하장사)가"를 외치며 오른발을 높이 들고, "씨름판에 들어"에서 쾅 내리고, "갑니다"에서 손을 힘껏 뻗은 째로 허리를 내렸다가 서서히 일어선다.(*일본 씨름, 스모꾼의 등장 모습 재현)
"모헤에, 일본 제일!" "경남 최고다!" 우렁찬 구호와 박수, 반지(半紙) 종이에 감싼 축의금 종이뭉치가 이곳 저곳에서 날아온다. 그래, 잘 연기했어. 아, 드디어 끝났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이틀 동안 총 네 번의 공연이었다. 농담으로 대꾸하다 맡게된 고마가타 모헤에 역이었지만, 끝나버린 지금은 마치 자신의 분신 같은 생각이 들어 신기하다. 연습 때는 아무래도 "나"를 버릴 수 없었지만, 실제 공연 때는 완전히 모헤에 그 자체가 되어 버린 나였다. 관객들 앞에서 하면 분발해 버리는 타고난 예능 기질(?) 탓일까.
풀어헤진 긴머리를 위에서 짚으로 묶고, 살색 속옷에 목욕 타월을 두른 위에 윗옷를 걸치고 터벅터벅 길거리에 나타나는 첫 등장 장면. 박진감 넘치는 연기로 걷던 나는 통로인 옆길을 지나가려던 남자와 갑자기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경악과 연민의 표정으로 순간 얼어붙은 그 남성은 이 칼럼의 담당자 이데(井出) 씨. 근엄성실의 본보기 같은 이데 씨는 내 모습에 이것은 악몽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나도 생각치도 못한 조우에 놀라고 당황해 하었지만 곧바로 스스로를 질타하며, 허기진 모헤에 역을 이어갔다.
해프닝은 계속 일어나는 법. 술 취한 손님 중 한 명이 술병과 술잔을 들고 달려왔다. 아니, 안면이 있는 가와사키시 교육위원회의 야노 씨가 아닌가. 고맙게 한 번에 꿀꺽 마시고 대사에 애드리브를 더한다.
"나, 지난 열흘 동안 물과, 이 한 잔의 술밖엔 먹은 것이 없구나"라고 받아 넘긴다. 현장의 실제공연을, 가장 느긋하게 연기하고 있는 자신이 놀랍다. 무엇보다 기뻤던 것은 신문 기사 오려낸 것을 들고 보러 와주신 많은 독자 여러분이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였습니다"라는 말은 기뻐해도 될런지 모르겠다. 강연의 마지막이나, 사람을 만나 헤어질 때 "앞으로도 좋은 인연으로, 또 만나뵙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늘 하는 대로 말하고 말았다." 내년에도 꼭 있는 일인데 아뿔사 어떡하지? (1994 05 15)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59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58. 훌륭한 쵸에이(長英) 씨의 배우 정신
지난 호에 내가 열연(?)한 "건달패 씨름판에 오르다."라는 노게의 길거리연극 이야기를 썼는데, 관람해 주신 독자분으로부터 바로 엽서를 받았다. 부부가 함께 구경하기 전에는 꺼려하던 남편이 "직접 보니 재미있다." 라며 축의금봉지를 던져주셨다고 한다(그 축의들은 출연자, 스태프 30여 명이 균등하게 분배. 배려의 무거운 촌지에 깊이 감사).
"게이샤 오츠타 역을 맡은 다카하시 쵸에이(*高橋長英1942~ 배우) 씨의 백분 칠한 얼굴이 재미있었다." 는 문구에 나도 "정말 그랬어요." 라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모헤에 역을 맡은 나를 괴롭히는 불량배들을 향해 2층 창문이 활짝 열리고 물이 왈칵 뿌려진다.
그리고 "그만 해, 약한 자 괴롭히지 마!" 라는 대사와 함께 쵸에이 씨가 라이트를 받으며 등장. 그 순간 왁자지껄한 갈채와 폭소가 골목 전체에 터져 나온다. 오랜 배우 인생에서 처음으로 여자 역에 도전했다는 쵸에이 씨.
백분을 가득 바른 얼굴에 빨간 작은 입술, 일본 여성용 가발 차림에 기모노 옷깃을 뽑아 교태를 부리는데 무서울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다(미안). 대사를 읊는 것은 물론 일품이기는 하지만, 역시 있는 그대로의, 남자다운 역할이 딱어울릴 것 같습니다(쵸에이 씨).
이 거리극을 체험한 가장 큰 재산은 역시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일 것이다. 노게(*野毛:
横浜市中区の町名)라는 활기와 정이 넘치는 거리에 모이는 사람들은 저마다 개성 있고 맛깔스러운 사람들뿐이다. 바로 인간의 보고였다. 틈틈이 소개하고 싶지만, 우선은 이 사람, 좌장 다카하시 쵸에이 씨.
누구보다 먼저 연습장에 나타나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 초보자들을 처음부터 열심히 지도해 나가는 그 모습에는 고개가 숙여졌다. 목소리가 쉬고 땀으로 셔츠를 적시며 전원의 역할을 하나하나 스스로 연기하며 가르쳐 나간다.
천하의 명배우에게 기초부터 공짜로 연기의 진수를 배운다는 것은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건달패가 되어 오츠타와 대면했을 때의 모헤에의 복잡한 심정을 눈의 표정, 목소리의 상태 등으로 어떻게 표현할지 좌장의 가르침은 자세하고 세밀한 것이었다.
고작 초보들의 거리극이라고 대충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을 하라는 쵸에이 씨의 배우 정신과 진지함이 참가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해져 본공연의 성공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언제나 수제 천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같은 천의 쪽 염색 셔츠에 청바지, 맨발에 마제(麻製)운동화 차림의 쵸에이 씨에게는 아무런 멋도 없다. 무리하지 않고 늘 나답게 있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다.
쉰한 살이라는 나이에도 몸에 군살이 없는 것은 팬츠 한 장(!)으로 매일 달리기 때문일 뿐 아니라 마음에 여분의 군살을 붙이지 않은 탓일지도 모른다.
TV에 자주 나오는 것보다 기타와 피리 연주자와 함께 전국 마을 마을을 돌며 작은 곳을 빌려 좋아하는 시 낭송을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쵸에이 씨다. 저도 조만간 노래나 춤이라도 익혀 일행에 참가시켜 주었으면 하고 은근히 바라고 있습니다만, 어떻습니까, 쵸에이 배우님! (1994 05 22)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59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59. 자폭한 젊은 일본병
전쟁이 끝난 지 올해로 49년째. 내년은 무려 반세기를 맞는다. 나는 전쟁을 모르는 세대이지만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는 전쟁을 과거로 밀어내거나 무관심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행한 추함, 어리석음을 외면하지 않고, 또 동시에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은 양심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알아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거기서 무엇을 취하여 현재, 그리고 미래에 살려나가느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패전 닷새 뒤인 8월 20일 중국의 지린
(吉林)역에서 한 일본병이 수류탄으로 자폭했다. 향년 22세.
내가 그 사람, 우케가와 모토스케(受川素介) 씨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구제 고등학교에서 우케가와씨와 동급생이었던 미타니 히로시(三谷弘 70세) 씨로부터, 그때의 정황을 담은 편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어 보내온 고인을 회상하는 소책자에는 자세하게 당시 상황이 증언을 섞어 기록돼 있었다.
지린에서 군 소대장이었던 그는 무장해제 날 징용된 조선인 부하(1943년 조선에 징병제가 공표되고 이듬해인 1944년에 실시, 약 200만 명이 대상이 됐다) 30여 명을 독단적으로 모두 도망가게 했다고 한다.
소련군의 포로가 되면 조선인들은 유난히 끔찍한 처우를 받고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책임을 우케가와 씨는 스스로의 죽음으로 대신한 것이다.
목숨을 버려서라도 조선인들을 돕고 싶다는 그의 마음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추측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일화가 소책자에 실려 있었다.
제6고보의 기숙사에서 우케가와 씨와 같은 방에 있었던 조선인 학생을 "잘 부탁한다"는 친구의 이야기이다. 옛 만주에서 태어나 자란 우케가와 씨가 조선민족이 처한 입장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는지, 그 조선인 학생에 대한 마음이 그의 지린에서의 결단으로 확실히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우케가와 모토스케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제6고보 시절 보트부에서 활약하면서도 성적은 3년간 항상 1위. 대단한 수재였지만 자신을 내세우는 타입은 아니었다.
"망양한 스케일이 큰 가운데, 타인에 대한 위로의 마음을 소유학고 있었다. 여유있고 유머러스한 남자. 강직, 반골정신. 대륙적인 호방함. 호걸스럽고 당당한 체험..."
친구들이 그를 다양하게 평가하면서 공통적으로 회자되는 것은 장차 일본을 짊어지고 일어설 인물이었다는 평이다. 교토대 법대에 진학한 그는 사법권의 독립을 지켜내는 대법원장이 되는 꿈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입학 두 달 만에 육군에 입대했고 일 년 몇 달 뒤 많은 가능성과 꿈을 간직한 채 생을 마감했다.
만난 미타니 씨는 급우였던 우케가와 씨의 죽음에 가슴이 뭉클해졌다고 말해 주었다. 전후 미타니 씨는 라틴아메리카 연구에 주력해 교단에도 섰다. 억압을 받는 쪽에 대한 관점은 우케가와 씨로부터 배운 것이었을까.
"우케가와군은 풍부한 휴머니즘을 가지고 있던 남자였습니다." 짧은 삶 속에서도 마음의 영혼을 흔들어대는 일을 하면 후세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을 그의 삶의 방식에서 알았다고 한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것은 동시에 어떻게 죽을 것인가와 표리일체다. 그러나 전쟁에서 그것이 강요되는 것은 아무래도 괴롭고 참을 수 없다. (1994 05 29)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60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60. 멋지고 멋진 오카모토 분야 씨.
지금까지 만난 멋진 남자를 물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분이 있다. 신나이이야기(新内語り)의 오카모토 분야(*岡本文弥 1895~1996)씨다. 그런 분야 선생님의 "백세 현역 연주회"가 얼마 전 도쿄 니혼바시 미쓰코시 극장에서 열렸다. 그 꽃다발 증정의 큰 임무를 분야 씨가 직접 지명하여 내가 맡게 되었다.
(*新内節しんないぶし: 18世紀中頃に江戸
で誕生した浄瑠璃の一つ)
대단한 영광이다. 분홍색 한복을 입고 꽃다발을 건넸다. 이러한 영광스러운 일과는 무관한 내가 기분이 들뜨서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것 같다. 무엇에 감사해야 할지. 너무 큰 행운에 길가의 풀 한 포기에도 "고맙다"며 말하며 걷고 싶은 심정이었다.
백세의 현역. 대단하다는 겉치레 말 따위는 접어둔다. 이날도 옛날 곡부터 신작 곡까지 생기 있고 윤기 있는 목소리로 낭랑하게, 또 때로는 애절하게 읊어 나간다. 신나이도 물론 가슴에 스며들기 마련이지만 틈틈이 들어가는 수다가 또 좋다. 이런 이야기에 장내가 들끓었다.
"허리가 구부러져 아래만 보고 걷고 있는데 누군가가 저쪽에서 에이로쿠스케(*永六輔 1933~2016 방송작가) 씨가 옵니다. 라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고개를 들고 걸을 수 없어서."
재미있고 은근한 말투의 유머가 고조된 장내를 느긋하게 만든다. 이야기뿐만 아니라, 분야씨가 쓰시는 글씨도 문장도 일러스트도, 심플하고 동글동글 따뜻하고, 접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솔직하고 상냥한 기분으로 만들어 준다.
전시 중 전쟁 반대의 의미를 담은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연주한 반골인 분야 씨의, 왜 전쟁이 싫은가 하는 설명을, 한 차례 객석에서 들은 적이 있다. 정말 분야 씨다워서, 크게 웃고 말았다.
자신의 체험담이다, 변소의 인분을 푸러 오던 농부가 전쟁이 치열해지자 못오게 되어 변소의 인분통이 넘쳐서 흘러나와 곤란했다고 한다. 밤이 되면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 볼일을 보기 때문에 온 동네 인분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지금은 수세식이라고 하지만, 또 전쟁이 나서 물이 나오지 않게 되면 그때의 전철을 밟는다. 군비에 분투 노력도 좋지만, 나는 분뇨 처리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여 말한다. 목청을 높혀 반전을 외치지 않아도 일상의 생활 감각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더욱 설득력을 갖는지도 모른다.
신문에서 일본군 위안부 기사를 봤을 때 사과하고 싶은 마음에 "분야 아리랑"을 바로 만들어낸 것도 핑계대지 않는 솔직함이었을까. 자신을 내세우는 것을 싫어하고 어떤 사람에게도 같은 태도로 대한다는 분야 씨.
"오직 인간으로서 양심적, 양식적으로 살고 싶다, 사람을 짓밟지 않으며 그러한 행위는 용서할 수 없다."라는 삶을 현재에 이르기까지 관철하고 있는 것, 그리고 아직도 예술인으로서 훌륭한 재주를 계속 연마하고 있는 것, 백 살의 나이를 그냥 먹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장수의 비결을 묻자 아침에 세수할 때 뺨을 토닥토닥 두드리고 발바닥을 주먹으로 두드리는 것이라고 한다. 모리 마유미(*森まゆみ1954~작가) 씨의 글에 의하면 "장수도 예능 중 하나"(마이니치신문사)" 라는 책의 후기에 후미야 씨의 "장수의 근원"은 무욕(無欲)에 충실한 것이 이라고도 적고 있다.
"되돌아보니 영화의 나날을 갖지 않았다고, 내 인생을 자화자찬한다"라는 말에도 매료된다. 소중한 것, 그렇지 않은 것을 백세의 분야 씨로부터 배우고 있는 것 같다. 백일세 현역 연주회에도 꽃다발을 선사할 행복을 고대하고 싶다. (1994 06 05)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61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61. 길거리 연예인으로 데뷔하여.
"저글러(juggler)"를 일본어로 번역하면 "서양식 복합 요술사"가 된다. 공을 비롯한 물건을 능숙하게 다루는 예능인을 말한다. 미즈노 마사히로(水野雅広 32세) 씨는 일본 저글러의 1인자다. 공뿐만 아니라 요요, 팽이, 죽방울 등등 그가 그것들을 다루면 마치 생명을 부여받은 것처럼 자유자재로 공중을 날며 헤엄치기 시작한다. 그 손놀림의 훌륭함은 볼 때마다 숨을 죽이게 한다.
미즈노 씨의 공연을 처음 본 것은 2, 3년 전 요코하마 노게 거리 공연 페스티벌이었다. 15미터는 되는 빌딩 옥상에서의 죽방울을 아래까지 늘어뜨린 긴 실이 구호와 함께 커다란 호를 그리며 쑥 죽방울의 본체에 들어갔을 때는 환호의 갈채가 구경꾼들로부터 터저나오는 것이었다.
그 미즈노씨가 얼마전의 길거리연극에서, 저가 연기하는 모헤에와 일전을 나누는 악당역으로 등장하여 한바탕의 몸싸움을 둘이서 선보였으니 인연이란 묘한 것이다. 하지만 보통의 그는 연극의 악역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어, 수줍음을 띈 소년 같다. 또렷한 눈이 인상적인 호청년으로 여아 두 명의 아빠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에서 죽방울이 유행하며 정신없이 연습한 것이 예능인으로서의 시작이라고 한다. 사회인이 되어 샐러리맨 생활을 하는 한편, 마음속으로는 예능인에 대한 꿈을 계속 키웠다. 독학으로 연습을 쌓았고, 방학을 이용해 기술은 연마하는 데 전념했다.
꼭 프로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여, 미국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요술대회에 가기로 결심한 미즈노 씨는 그 여비를 벌기 위해 4년 전의 6월, 처음으로 시부야 하치공(*ハチ公: 충견동상) 앞에 섰다.
길거리공연의 데뷔였지만 손님을 모으는 방법조차 전혀 모른 채, 겨우 번 돈을 지나가던 젊은 여자아이가 갖고 달아나기도 했다. 그런 실패와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점차 관객을 끌어들이는 방법도 익혀갔다.
미국에서의 한 달 반 동안에 미즈노 씨의 재능은 인정받자, 자신 있게 귀국했다. 큰맘 먹고 회사를 그만두고 예능 외길을 택한 그는, 오키나와에서 열린 길거리 공연 대회에서 우승하고, 시즈오카 길거리공연 월드컵에서도 준우승하는 등, 해외에서도 인정하는 다양한 상을 잇달아 받았다.
그에게 그런 공개적인 평가는 물론 훈장이 되기도 하지만, 반응이 바로 반영돼어 격려금과 박수로 평가받는 거리 공연이야말로 소중히 여기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관객이 평소와 비교해 반응이 시원치 않자, 공연을 마치고 "격려금 봉투는 빨간 거, 노란 거, 하얀 거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능하면 그중 하나에 격려금을 접어서 넣어 주세요" 라며 우스게 소리를 하자, 한 노숙자 같은 아저씨가 품에서 소중한 듯 간직했던 천엔짜리 지폐를 꺼내 편 후 두번을 접어 제일 먼저 봉투에 넣어 줬다. 평소 맨 앞에 앉아 야유를 보내며 보던 아저씨다.
주변 사람들도 놀라워 하며, 모두들 덩달아 격려금 봉투를 내밀었고 돈이 모였다. 잊지 못할 추억이다. 돈 외에 쌀구입권, 맥주구입권, 계란구입권, 희귀한 것으로는 결혼반지(불필요해진 것일까?)까지 들어 있었다는 얘기도 재미있다.
그의 또 다른 꿈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인정되는 공연자가 되는 것이다. 전철 안에서뿐만 아니라 어디서나 항상 공을 움켜쥐고 연습에 여념이 없는 저글러, 미즈노 씨, 그 꿈이 실현될 날은 분명 머지 않아 올 것이다. (1994 06 12)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62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62. 특별한 아침식사
"생명도 보물". 예로부터 전해지며, 사랑받아 온 오키나와의 말이다. 말 그대로 생명은 보물, 귀한 것이라는 뜻이다. 오키나와에서는 "누치도 타카라(ヌチドウタカラ: 생명도 보물)"라고 말한다고 한다. 전쟁 중 일본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져 많은 인명이 희생된 땅이기에 그 말이 무겁게 와 닿는다.
지난 1년여 동안 세 번 오키나와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에이로쿠스케(*永六輔1933~ 2016 방송작가) 씨와 함께 나하의 소극장, 쟝쟝에서의 대담이 목적인 여행, 1박 정도의 분주함 속에서도 매번 잊기 어려운 만남을 만들어 주었다.
며칠 전 방문했을 때는 올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먹어온 아침밥 중 특별히 사치스러운 "아침식사" 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국제거리 변두리에, 붉은 기와의 작은 목조 2층 호텔이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름은 '제일호텔'. 3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호텔로서는 오키나와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에이 씨의 안내로 비행기를 타기 전 아침 한때를 동행한 캄보디아인 절친 세타린과, 이곳에서 보냈다. 원래는 민가였다는 호텔 내부는 파초포(芭蕉布:오키나와 특산의 파초섬유로 짠 천)와 오래된 도자기 등 류큐 민예품이 장식되어 가정적인 분위기가 가득하다.
안마당에는 시사(오키나와 특유의 사자 장식물)가 빽빽하게 늘어서 있고 커다란 바나나나무 한 그루가 눈길을 끈다. 조용하고 아늑한 공간에 여행의 피로를 잊고 편안히 쉴 수 있다.
아침을 먹기 위해서만, 들어온 방문객을 경영자 시마부쿠로 요시코(島袋芳子 66세) 씨는 감싸는 듯한 미소로 맞아주었다.
줄무늬가 어울리는 옷에 오키나와 여성답게 묶은 머리, 풍성한 미소가 인상적인 시마부쿠로 씨는, 전후 남편을 잃은 뒤 이 호텔을 혼자 운영해 왔다. 가끔 도와주러 오는 딸 외에는 네 명의 여종업원과 함께 8개 방의 투숙객을 돌본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일본한지로 만든 몇 권의 공책을 펼쳐 보았다. 투숙객들의 소감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감사 편지, 엽서, 사진 종류도 정성스럽게 철해져 있다. 시마부쿠로 씨로부터 들은 전쟁 이야기에 감동받은 일이나 즐거운 추억담 등이 페이지를 채우고 있다.
어느 것에도 빠짐없이 적혀 있는 것이 아침식사의 훌륭함이었다. 물론 내가 생각해도 특별한 아침 식사이다. 큰 테이블에, 2인분으로 오키나와의 절임반찬을 비롯하여 무려 35접시(정확하게 세어 보았음)의 요리가 차려졌다.
류큐 유리그릇, 오키나와 전통도자기(壺屋焼)의 시크한 그릇에 정성을 다한 일품, 일품이 담겨 있다. 모두 오키나와 특산의 것. 유시두부(간수를 넣기 전 두부)의 수프가 몸을 따뜻하게 해준다. 홍고구마가 들어간 연한 홍색 빵도 잼도 직접 만들었다. 시콰사(오키나와밀감)라는 과일을 짠 주스는 깔끔한 맛이다.
약초류도 여러가지가 나왔다. 참깨를 뿌려 날로 먹는 장명초(長命草)는 천식에 효과가 있고, 튀김이 된 위쿄(ウイキョー)는 위장에 좋다고 한다. 초무침의 한다마(ハンダマ)는 빈혈을 고친다. 모두 몸을 가꾸는 자연식(自然食)이다. 물론 천연 조미료만 사용했다. 시마부쿠로 씨가 매일 열심히 생각해서 만든다고 한다.
아침 식사로 하루를 건강하게 하자는 배려와 함께 시마부쿠로 씨의 "생명은 보물"이라는 소망이 입으로 곱씹을 때마다 몸 깊숙이 스며드는 듯했다. (1994 06 19)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63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63. 파워 넘치는 어머니와 딸
상대방의 눈을 제대로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던 카쿠마 미나코(角間美菜子 23세) 씨. 처음 만난 것은 그녀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가족"을 주제로 한 인터뷰에 엄마와 둘이서 참석했다. 그런 그녀도 대학교 4학년이 됐다. 그 때와 마찬가지로 큰 눈동자를 빛내며 오랜만에 근황을 얘기 해주었다.
아이는 부모의 삶의 방식이나 본연의 자세를 가장 친숙한 본보기로 삼아, 따라하거나 반대로 반면교사로 삼는다. 잠재의식이나 실상이 거울처럼 서로의 모습에서 비춰져 무서울 정도다.
육아 비결을 이렇게 말한 친구가 있다. "그저 아이를 방해하지 않도록 유의하고 있을 뿐"이라고. 명언이구나, 하고 감탄했다.
방해하지 않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가 자기 본연의 힘으로 뻗어나가는 것, 부모를 넘어 서는 것, 그리고 그에 더하여 원하는 길이라도 찾아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마은 일은 없을 것이다. 미나코 씨와 그녕의 어머니를 보고 있으면 점점 더 그 느낌을 강하게 한다.
어머니 마사코 씨(54세)는 작위를 가진 공가
(公家くげ,こうけ:조정에 출사한 사람) 집안의 딸이었다. 계속 양가집안학교를 다니며 자랐다. 여성은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학교를 나오면 부모가 정한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당연한 환경이었다. 인형처럼 자신의 의지가 없던 마사코 씨가 갑자기 삶의 방식을 바꾼 것은 대장성 근무 아버지의 급서가 계기였다.
가치관이 일변하여 스물네 살 때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여성들이 생생하게 생활하는 모습에 신선한 놀라움을 빋게 되었다. 남성에게는 전혀 면역이 없었다는 그녀는 일본에서 온 특파원과 금세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되었다.
상대가, 장사하는 집안이라는 것만으로 반대가 있었지만 스스로 결정한 것을 소중히 여겼다. 그러나 '방탕한 생활'을 계속하는 남편에게 마침내 울화통이 터져 미나코 씨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아이를 데리고 이혼했다. 가문에 대한 수치심으로 친척, 형제로부터 인연을 끊었다고 한다.
무일푼에 가까운 그녀는 관공서를 뛰어다니며 자금을 차입하여 책상과 칠판을 사서 학원을 시작했다. 여러 차례 과로로 쓰러지거나 폐업 위기에 처하면서도 아이를 키우며 20년 가까이 버티고 있다.
지금도 학급회에 나가면 일을 하고 있는 것은 그녀 한 명. "보기 딱하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 양가집학교에 모두 딸을 들여보내고 있는 가운데, 역시 예외는 그녀뿐. 아이에게 맞는 학교를 선택해 왔다.
고교 1학년 때 미국 유타주로 유학을 떠난 미나코 씨는 향수병에 걸릴 틈이 없을 정도로 공부에 몰두했다. 아프리카 해방 운동에 관심을 가졌고 대학은 그와 관련된 것이었다. 국제관계법대에 다니며 1년간 케냐에도 유학을 가 스와힐리어도 습득했다. 장래에는 아프리카에 살면서 해방운동을 돕고 싶다고 한다.
여성의 취업난도 걱정하지 않을 정도의 실력과 파워가 전해진다. 올곧음과 아름다움은 어머니에게서 물려 받았다(국민 미소녀 콘테스트에서 9만 명 중 최종 15명에 남았다). 단발머리가 상큼하다. 엄마를 존경해 마지않는 그녀지만, 남자만은 엄마와 달리 '진실한 사람'을 선택하겠습니다라며 빙긋 웃어 보였다.
(1994 06 26)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64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64. 항상 거리감을 유지하다
화제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봤다. 평판과 다르지 않게 깊은 감동을 주는 영화였다. 실화가 가진 무게감에 더해 등장인물들의 존재감, 연출, 영상 기술의 훌륭함(맛)이 역사의 진실을 보다 사실적으로 부각시키며 보는 이의 마음을 파고든다.
유대계 스필버그 감독의 이 작품에 담긴 생각과 기백이 스크린에서 전해지는 듯했다. 나치 당원인 독일 쉰들러가 유대인을 구해낸다는 이야기의 본줄거리에서는 좀 벗어나지만 마음에 와 닿아 생각하게 되는 한 장면이 있었다.
마지막 부분이다. 독일의 항복으로 쉰들러 공장에서 일하던 1천2백 명의 유대인들이 해방된다. 대망의 자유를 얻은 이들은 공장에서 밖으로 일제히 걷기 시작하는데 도대체 어디를 향해 가야 할지 모른다.
여기서 나는 생가나는 게 있었다. 그렇구나, 그들에게는 돌아갈 모국이 없다는 것이다. 유랑 백성으로서 유대 민족의 근원적 비참함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불합리하게 죽임을 당해도 항의하고 지켜줄 내 나라가 없는, 마음의 기댈 곳으로 삼고 싶은 고향 산하조차 없다는 것은 얼마나 불안하고 괴로운 일인가 싶었다.
어릴 때 봤던 "영광의 탈출" 이라는 영화에서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 한 컷이 있다. 폴뉴먼이 연기하는 주인공이 배 위에서 기항지를 보며 눈을 반짝이며 동승했던 사람들과 함께 환희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모인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을 건국한다는 내용이었고, "이 땅은 우리 것♪ 이 황금 같은 땅은 우리 것♪" 이라는 주제가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은 한참 시간이 지나서였다. 해피엔드로 영화는 끝났지만 배가 도착한 곳에는 팔레스타인이라는 나라가 있었던 것이다.
평화롭게 살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땅을 빼앗기고 난민이 됐다. 자신들이 경험한 고난의 쓴맛을 이번엔 팔레스타인인에게 맛보게 해버렸다. 피해자가 일변해 가해자가 되기 쉬운 점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새로운 다툼이 생기면서 많은 피를 흘리게 하였다.
2년 전쯤 팔레스타인 음악 그릅 "사블린"의 첫 일본 방문 콘서트를 들으러 갔다. 아랍 민속음악을 배경으로 여성 보컬리스트 카밀리아의 힘차고 맑은 목소리에 공연장은 감싸여 간다.
뒷날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몸집이 작고 화장기 없는 그녀는 스물여섯 살이라는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과 겹쳐 나라에 대한 생각이 솟아나는 듯이 이야기했다.
현실은 정말 어려운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인간 각자의 생각을 마찰을 일으키지 않고 서로 존중할 수 있을까. 요즘 자주 떠오르는 문장이 있다. 화가이자 시인인 쓰지 마코토(辻まこと1913~1975) 씨의 책 속의 한 구절이다.
"눈 덮인 산과 숲은 나에게 말했다. 필요한 건 열정과 꿈이 아니라 냉정한 자각이라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증오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항상 마음을 가라앉히고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을 잊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1994 07 03)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65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65. 그래도 가야지.
1년 전 오사카에서의 강연회가 중지된 적이 있었다(1993년 10월 3일자). 사고로 신칸센이 멈추면서 엄청난 노고와 시간을 들여 도착했지만 무정하게도 늦었기 때문이다.
도쿄-오사카 간은 한달음 거리지만 내게는 까마득하다. 이번에도 역시 간난신고의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겉보기에는 원기왕성한 에너지 덩어리처럼 보이기 쉽지만, 사실은 허약 체질로 연중 몸이 고장 나 있다. 일하는 틈틈이 병으로 쓰러지거나, 앓으면서 일을 하는 식이다.
4월 중순부터 꽃가루 알레르기에 걸리기 시작해 5월, 6월은 몸 상태가 계속 좋지 읺았다. 감기로 두 번 정도 몸져누웠지만 급기야 배까지 아프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일과 부딪히지 않도록 잘 조정(?)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갑작스러운 복통만은 어쩔 수 없다.
타이밍이 나빠서 두 강연회가 이틀 간격으로 겹치고 말았다. 배의 통증을 참으면서 기력을 북돋아 간신히 첫 번째는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다다음 날의 오사카 강연회였다. 빨리 복통을 치료 해야겠다는 생각에 동네 의사를 찾아 찾아갔다.
존재감이 희박하고 미덥지 않은 인상의 의사 선생님은 내 목구멍 속을 들여다보더니 "너무 빨갛네요"라는 말만하고, 정작 배는 가볍게 만졌을 뿐이었다. 나온 약을 세어보니 11종류(!)나 되었다. 무심코 간호사에게 "이걸 다 먹으면 요괴로 변신하거나 하지 않아요?" 하고 정색을 하고 물어봤을 정도다.
그런 두려움을 안고 약을 먹고는 종일 안정을 취하고 자고 있었지만 복통은 전혀 가라앉을 기미가 없다. 마침내 심야에 구급 병원에 가서 링거를 맞았지만, 이것도 전혀 효과가 없었다(복통의 최종적인 진단은 '급성 장염'이었습니다. 창자가 터질 것 같았거든요. 약으로 먹은 항생제가 반대로 병을 악화시킨 것 같았습니다. 무섭네요).
잠 못 이루고 아침을 맞아 오사카행을 포기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여진다. 강연 제목은 졸저(拙著) 속 문장을 따서 "그래도 살아야지"이다. 좋아, 가자. "그래도 가야지" 아닌가.
부랴부랴 병원에 가서 진통제 주사를 맞고 의사가 말리는데도 휘청거리는 몸을 이끌고 공항으로 향했다. 도중에 출판사의 여성 편집자 모리 씨가 급히 동행해 주게 되어 불안한 마음이 가셨다. 고맙게도 시계와 눈싸움을 하면서 그녀는 척척 준비해 준다.
택시로 달려 히가시오사카시 행사장에 겨우 내릴 수 있었다. 주최자의 걱정스러운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떠오른다. 하지만 인사조차도 헉헉거리며 하고, 제대로 서지 못하고 구부정한 자세인 내가 강연을 할 수 있을지 정말 자신이 없다. 무대 한 가운데 의자를 준비해 주었다.
이름이 소개되어,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는 아픈 배에 힘을 주며 무대 가장자리에서 가운데로 나아갔다. 일제히 많은 사람들과 눈이 마주친다. 기대에 찬 따뜻한 눈빛을 접하자마자 몸속에서 힘이 솟아난다.
천여 명으로 가득 찬 공연장은 뒤까지 마이크 없이도 목소리가 닿고 있었다. 연단이 아니라 무대 제일 앞쪽에 섰다. 조금이라도 가까운 편이 친근감이 생긴다. 조금 전까지의 중환자와는 전혜 다른 사람처럼 등을 쫙 펴고 한복을 입는 퍼포먼스까지 보여준다.
"이런 모습을 보시면 몸의 컨디션이 좋지않다는 말은 거짓말 같지요"라고 도중에 말하자 공연장은 폭소로 들끓었다. 내가 아픈 것도, 의자의 존재도 까맣게 잊고 나는 평소처럼 계속 지껄였다(‘매우 활기찬 강연회였다’고 두고두고 좋은 평판이 났으니 사람일은 모르는 법인가 봅니다).
강연 후 준비해준 병원에서 링거를 맞고 다시 환자로 돌아왔지만 "만남"이야말로 나의 활기의 근원임을 두 번째 정직한 오사카에서 재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맹장'염이 아닐까 걱정한 아버지가 돗토리에서 행사장까지 달려와 주셨다. 아버지와는 처음 만나는 동행자 모리 씨의 소감이 재미있었다.
"연재에서 읽었을 때는 설마 하고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만, 아버님의 '코'에 정말 기운자국이 보였기 때문에, 왠지 '왓!'하고 감동해 버렸습니다." 그런 생각치도 못한 재미의 덤이 붙은 "그래도 가야지" 의 전말기였다. (1994 07 10)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66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66. 더 이상 상처받게 해서는 않된다
매일같이 만원 전철에 흔들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찌된 일인지 치한과는 만나지 않는다. 하지만 오래됐지만 딱 한 번 유사한 일이 있었다. 꽉 찬 전철에서 내려서 보니, 치마 뒤의 지퍼가 내려져 있는 것을 깨달았다. 부끄러움은 물론이고 보이지 않는 손의 악의에 강한 공포를 느꼈다.
몸도 마음도 경직돼, 한동안 움츠러든 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선인학교 교복인 한복이 통학 전철 안 등에서 잘리는 사건이 빈발하고 있다. 가로로 한 일자 모양으로, 또는 10cm 사방으로 잘린 치마를 비추는 TV 뉴스 화면을 봤을 때, 두 개의 또 다른 장면이 되살아났다.
하나는 서두의 나의 체험이다. 겨우 그 정도의 일에도 무서워 못 견딜 것 같았다. 차마가 베이고, 그것을 보았을 때의 소녀들의 마음이 상상되어 분노와 함께 가슴이 아팠다. 또 다른 한 장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종군위안부로서 17세 때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중국 전쟁터로 끌려간 김학순(金学順 69세) 씨의 이야기를 도쿄에서 들을 기회가 있었다. 정원의 두 배가 넘는 청중이 가득 찬 공연장에서 학순(学順)씨는 떠올리는 것은 물론, 말로 표현하기조차 힘들 체험들을 조용한 어조로 이어갔다.
일본으로 오는 비행기 창문에서 보인 비행기 날개에 그려진 일장기에,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는 학순 씨. 다다미방을 보는 순간 오십여 년 전의 끔찍한 다다미의 감촉이 떠올라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이 들었다는 학순 씨.
연약하고 작은 몸집에서 기억을 쥐어짜듯 하던 그녀가 목이 메이고, 봇물 터지 듯 눈물이 두 눈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군인에게 입고 있던 한복을 찢기고 찢긴 이야기를 할 때였다.
그녀에게 그것은 여성으로서, 또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짓밟힌 무엇보다 괴로운 체험이자 모욕이었음이 공연장 가득 전해졌다. 한복에 관해서는 최근에 알고 놀란 사실이 있다.
기모노 띠를 뒤로 묶게 된 배경에는 조선 여성의 슬픈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시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592년 히데요시는 조선에 대량의 군사를 보내 침략을 기도했다.
흔히 말하는 임진왜란이다. 1598년 철수할 때까지 무려 오만∼육만 명이나 되는 조선인이 끌려왔다고 하는데(도공들은 가라쓰, 사쓰마, 아리타야키 등을 연다), 많은 여성들도 배에 실려 납치되었다.
사가 현의 나고야(名護屋)에서 건물에 갇힌 이들은 앞에서 묶은 저고리(상의)의 옷고름(긴 리본)을 풀리지 않으려고 저항하는 바람에 벗기기 쉽도록 뒤에서 묶으라고 강요당했다는 것이다.
그녀들이 그 모습으로 밖으로 나가게 되면서 어느새 그것이 패션이 되어 퍼지면서 일본 기모노 띠의 위치가 앞에서 뒤로 바뀌어 갔다고 한다. 한복을 통해 보이는 과거로부터 현재의 역사와 인간의 관계. 소중한 민족의상을 더 이상 상처받게 하여서는 안 된다. (1994 07 17)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67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67. 대단한 "남자 아줌마"
"남자답게" "여자답게"를 필두로 뭔가답다는 말에 예전만큼 박진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예전에는 상당한 강제력과 위압감이 있었다.
"입 크게 벌리고 웃지 마라. 좀 더 여성스럽게 해라" 라든가, 너덜너덜한 청바지에 거무스름한 스웨터를 입고 있거나 하면, "더 여성다운 모습은 할 수 없나" 등등, 생각하면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자주 잔소리를 듣곤 했다.
그러나 여자는 여자다워야 힌다고 훈육한 부모님의 소망은 끝내 결실을 보지 못한 채, 나는 행동거지는 소홀하고 엉성하고, 여성스러움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각각의 개성을 정해진 틀에 맞춘다는 것은, 역시 어딘가 무리가 있을 것이다. 현대는 개성의 시대라고 하여, 각각 느긋하게 자신을 발휘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고마운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에이로쿠스케(永六輔 1933~2016 방송작가) 씨와 복식(服飾)평론가 피코(ピーコ 1945 ~2024)씨와 함께 가나가와 현에 있는 미즈노에 타키코(水の正瀧子1915~2009 여배우) 씨 댁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1993년 9월 15일자와 겹친다).
산 중턱에 지어진 단층 독채는 넓은 경관에 싸여 있었고, 멋진 손수 만든 음식을 대접받았다. 마즈노에 씨는 78세라고 하는데, 매우 젊고 예뻤다. 역시 왕년의 대스타(松竹歌劇団의 名男役으로 일세를 풍미했다)이었다.
식사가 끝나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피코씨가 "이렇게 대접해 주셔서, 뭔가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어요. 맞아, 교토에, 아주 맛있는 가모난반
(鴨なんばん 일본면요리)이 있어요. 그걸 세트로하여 보내달라고 할께요. 드셔보시겠어요?" 라고 미즈노에 씨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미즈노에 씨는 즉석에서 단호하게 한마디로 "필요 없어요. 나는 가모난반 아주 싫어해요." (음, 누가 남자고 누가 여자야인지 모르겠다!)
순간 내 머리는 혼란스러워진다. 이번엔 나가 씨 차례다. 가위와 셀로판 테이프와 이쑤시개를 준비하더니 마당으로 나갔다가 옆방으로 들어가 뭔가 바스락거리는 모습이다. 그러더니 어느새 커다란 새시의 유리창에 멋진 장식이 붙어 있지 않은가.
밖에서 모은 나뭇가지와 잎사귀, 나무 열매 등을 교묘하게 이어 붙여 만들어낸 자연 예술품이다. 햇빛에 비쳐 한층 아름답게 빛나는 그 장식을 보며 우리는 일제히 감탄사를 쏟아냈다.
감사의 마음을 즉석에서 순간적으로 손재주로 나타내 버리는 배려와 솜씨에 감탄한다. 에이 씨를 "남자 아줌마"라고 칭한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과연 그렇구나 하고 납득한다. 여자인데 남자 같은 미즈노에 씨, 남자인데 여자 같은 피코 씨, 그리고 에이 씨.
나의 평범함(?)이 부각되는, 참으로 신기한 공간이었다. "나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을 솔직하고 활기차게 나타내는, 편안함과 자유로움이다. 이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1994 07 24)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68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68. 2인 3각의 분투는 계속된다.
"장애인"이라는 표현에 망설임을 느낀다. 방해, 지장 등의 뜻을 가진 장애라는 말에 거부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나의 신경쓰이는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듯 히구치 게이코(樋口恵子 43세) 씨는 밝고 매력적인 미소로 말해 주었다.
“장애는 나에게 힘을 불어넣어 줍니다. 어차피 장애인으로 살고 있으니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찾고 싶습니다."
처음 그녀의 모습을 본 것은 올 2월 찬바람이 부는 도쿄 마치다 역 앞이었다. 히구치 씨는 시의회 선거 후보자로 거리에 서 있었다. 앞머리를 늘어뜨린 단발머리, 유난히 가늘고 작은 몸, 상냥핫 미소,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말투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장애인의 목소리로 의회에 대한 염원이 이루어져, 그녀는 훌륭하게 당선되었다. 천천히 이야기를 할 수 있기를 바라여, 나는 히구치 씨를 찾아갔다.
히구치 게이코 씨는 고치현의 항구도시에서 삼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한 살 반 때 아빠의 결핵균이 척추에 들어가 곱사병에 걸리고 만다. 어린 마음에 자신을 지켜야 한다며 긴장하며 생활했다고 한다. 유치원은 등원 거부아였지만 초등학교는 계속 다녔다. 이곳에서 공부를 해서 어엿해져야겠다고 아이 나름대로 각오를 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학교 시절, 성장통 때문에 몸의 균형을 잃게되어, 요양시설에서 누워만 있는 생활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힘든 날들 속에서도 유난히 깊은 상처를 받은 적이 있었다. 직원의 비리를 게이코 씨가 발견했을 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간호부장으로부터 심하게 입막음을 당했다.
어떤 처지에 있어도 어떻게든 자신다움을 유지하려던 게이코 씨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자살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 그녀에게 운명적인 만남이 찾아온다.
"가엽구나, 기운차려라" 라는 말을 듣는 것이 싫어서 그녀는 위문하는 사람을 피하고 있었지만, 중증의 사람이 침대에 누어만 있다는 말을 듣고 한 남성이 방까지 찾아왔다. 그도 휠체어를 탄 장애인으로, 곤도형님/오빠(近藤のお兄ちゃん)로 불리는 전국의 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인기인이었다.
당시 서른 살이었던 곤도 씨는 비서라는 직업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활기차게 살아 가고 있는 장애인을, 열네 살의 그녀는 처음 보았다. "자신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어." 곤도 씨가 보내주는 편지의 한구절 한구절이 가슴에 와닿았다.
한 살 반부터 복용하던 약의 허용량이 한계를 넘어, 서양의학으로부터 과감히 결별했다. 일어나면 안 된다고 했지만, 약을 끊은 기세로 일어서보니 그럭저럭 걸을 수 있게 되기도 했다. 시설을 나와 집으로 돌아와 고교, 대학으로 진학했다.
대학생이 된 게이코 씨는 곤도 씨와 재회했다. 열심히 밝게 행동하는 그녀의 패기에, 그는 "혼자 사는 것보다 둘이 편할 수 있으니 함께 하면 좋겠다"라고 말해 주었다. 그 순간 그녀의 마음도 정해졌다고 한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중증장애인 방문사업을 직업으로 삼아 왔다. 인생의 스승이자 소중한 파트너인 곤도 씨는 현재 시청 직원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 약한 처지에 놓인 사람이 당연히 활기차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목표로 2인 3각으로 그녀의 분투는 계속된다. (1994 07 31)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69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69. 이 사람은 분명 천사.
초대면부터 너무 신기한 사람이었다. 지난해 가을 오사카에서 열린 원코리아 페스티벌에서 사회를 볼 때, 출연했던 유카단(憂歌団)의 보컬 기무라 아츠키(*木村充揮 1954~가수) 씨와 관객들과의 응수에 깜짝 놀랐다. (*憂歌団 ゆうかだん 일본의 4인조 부르스밴드 1975~1998)
"야, 기무라~" 구호가 터져 나온다. "뭐야, 바보야!" 하고 그가 되받아치고, 금세 웃음소리가 퍼진다. 거친 말투와 달리 양측의 신뢰감 넘치는 응수가 신선한 놀라움이었다.
뒤풀이 파티에서 그와 자리를 같이했다. 가만히,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편안함을 느낀다. 밴드를 결성한 지 20년이니 나름의 연륜도 있을 터인데, "소년"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 시치미를 떼는 표정으로 연발하는 익살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종잡을 수 없는 그에 대한 관심이 부풀어 오른다.
강력하게 전해지는 상냥함, 흥겨운 무중력의 존재감. 정말 불가사의하고 매력적인 사람이다. 일본에서 손꼽히는 블루스 밴드로 유명한 "유카단"은 기무라 씨의 초등학교와 고교 동기생 4명으로 결성되었다.
라이브하우스에서 연주하던 중 스카우트되어, 음반 데뷔를 한 것은 이들이 스무 살 때였다. 수많은 명곡(‘청소부 아줌마’는 특히 재미있음)에 더해 커버곡(‘너와 언제까지나’) 등으로도 독자적인 세계를 만들어, 꾸준한 팬이 많다.
유카단의 활력 넘치는 농밀한 소리는, 태생도 성장도 오사카로, 지금까지 오사카를 거점으로 하고 있는 것과 분명 관계가 있을 것이다. 꾸밈없이 그대로, 속마음에서 나오는 연주가 듣는 관객에게 힘과 해방감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사카에서 첫 만남을 가진 이후, 도쿄에서 라이브가 있을 때마다 찾게 됐다. 객석에서 기무라 씨가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어느 순간 떠오른 것이 있다. 황당하고 무감한 것 같지만, 이 사람은 '천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렇게 느껴졌던 것이다. 땅으로 내려와 슬픔도 괴로움도 외로움도 모두 감싸고 빨아들여 그것을 승화시켜 노래하는 천사처럼 보였다. 더욱이 이 천사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여전히 관객과 오사카 사투리로 만담같은 응수를 하여 장내를 들끓게 하는 코믹한 천사이기도 했다.
옆자리의 여자는 그와 만나면 "마음이 진정된다"고 했고, 다른 남자는 "자연스러운 기분이 들게 된다"고 말했다. "그래요, 그래"라고 나도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기무라씨가 도시바 EMI(*음반회사)에서 첫 솔로 앨범을 냈다. 제목은 "포ㅡ" (꼭 들어주세요). 소개문에 "천사의 탁한 목소리" 라고 적혀 있어 깜짝 놀랐다. 역시 천사가 맞네요.
그리고, 더 놀란 것은, 소개문 속에 이 칼럼 제목과 같은 "두둥실" (그의 작사)이라는 곡이 있었다는 점이다. 친근감이 한층 더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기무라 씨의 본명은 나와 같은 박(朴) 씨였다, 재일교포 2세이다('천사'와 같은 성을 쓰다니 영광).
"가장 중요한 것을 간단히 전할 수 있다. 그게 가능한 것이 노래이다. 뭐, 슬슬 잘돼 갈 것 같습니다" 좋은 말입니다. 우리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두둥실, 슬슬 해 나가겠습니다. (1994 08 07)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70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70. 전후 50년, 아직도 농락당하고 있다
내일은 8월 15일. 성묘도 겸한 오봉야스미(お盆休み: 양력 8월15일을 전후한 연휴)를 고향에서 느긋하게 보내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또한 전쟁이 끝난 날이기도 하고, 싸움에서 잃어버린 많은 생명을 각자의 생각 속에서 추도하는 날이 되기도 한다.
일본에 있어서 패전의 날이, 우리에게는 해방기념일이 된다. 전후 태생인 나는 모르겠지만,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있어서는, 지도 위에서 사라졌던 자신의 나라를 되찾게 되어, 강제로 입힌 "일본인"이라는 옷을 벗을 수 있었던 기쁨의 날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끝없는 횡포 속에, 전후 50년을 맞이하려는 지금도 계속 치욕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이 이야기는 한번 써두고 싶었다.
올해 5월 14일 한 남성이 75세의 생을 마감했다. 재일교포 전 일본군 상이군속(傷痍軍属)의 진석일(陳石一) 씨이다. 일본인으로 해군 군속에 징용돼 작업 중 총격을 받고 왼발을 잃었다. 그런데 전후에는 더 이상 일본인이 아니라고 일본인 전(前) 군속에게는 지급되는 장애연금(연액 300만 엔 이상)을 받지 못했다.
오시마(*大島康徳 おおしま やすのり1950 ~2021)감독이 30여 년 전 만든 영화 "잊혀진 황군"에 지금은 죽은 진 씨의 모습이 나온다. 오시마 감독의 '일본인이여, 우리여, 이래도 되는 것일까'라는 마지막 내레이션이 가슴에 와 닿는다.
이 영화에서 시위에 앞장섰던 사람이 석성기(石成基 71세) 씨이다. 석 씨는 한국 경상북도의 한 농가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결혼해 농업지도소에서 일을 하던 그는 징용돼 1942년 남태평양 마셜 군도로 보내졌다. 일본군 비행장, 진지 건설 등의 일에 종사하던 44년 전투기의 기총소사를 맞고 오른팔을 잃고 만다. 하지만 진석일 씨와 마찬가지로 일본 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보상 대상이 되지 않았다.
전후 석성기 씨는 가와사키 시에서 폐품 수거, 행상 등 갖은 고생을 하며, 남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온 부인과 함께 다섯 아이를 키웠다.
10년 전 뇌혈전으로 쓰러진 석 씨는 왼쪽 반신마비를 안고 현재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시의 한 병원에서 요양생활을 하고 있다. 한번 방문하고 싶었던 나는 한여름 태양이 내리쬐는 어느 날 오후 2시경 병실을 방문했다.
얇은 여름용 이불을 어깨 위까지 덮고 침대에 누워 있던 이시 씨는 내가 동포라는 것을 알자 기쁜 듯 빙긋 미소를 지었다. 마비로 말이 불편하다고 하면서도 귀를 가까이 대는 나에게 계속해서 봇물이 터지 듯 말을 이어주었다.
석 씨의 눈앞에 걸려 있는 그림은, 손자가 스위스로 신혼여행을 갔을 때의 선물. 열세 명이나된다는 자랑스러운 손자에 관한 말이 나오면 얼굴이 한층 평온해 진다.
7월 15일 한국 국적이라는 이유로 도쿄지방법원에서 장애연금 청구가 각하됐다. 두 달 전 억울하게 급서한 진 씨의 모습은 없었지만, 석 씨는 불편한 몸을 추스려 병원에서 달려 나왔다. "인간의 존엄을 회복시키고 싶다"는 석 씨의 간절한 바람은 아직도 닿지 않는다.
"일본은 도의가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라고 화를 내는 석 씨. 아직도 전후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모두들 알아 주었으면 좋겠다. (2994 08 14)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71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71. 마음은 착하고 힘이 세다.
곧 스모의 9월 경기가 시작된다. 늦더위도 이겨낼 것 같은 스모 선수들의 뜨거운 싸움이 기대된다. 예의 길거리공연('건달패 스모판에 오르다'의 고마가타 모헤에역) 중에서 깡패역과의 일전(?)을 보여주고 스모판에 오르기까지 한 이후 스모가 친숙해졌다. 예전에 알게 된 스모 소년 후세 요시키(*布施美樹1974~) 군(스무 살)이, 동생이나 제자처럼 느껴지며 마음이 끌린다.
홋카이도의 농업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후세군을 학교로 방문한 것은 2년 전 더운 여름날이었다. 스모부 연습장, 훈도시 차림의 그는 하급생들에게 연습을 시키고 있었다. 몸으로 부딪혀 오는 후배들을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내던지는 엄격하고 진지한 얼굴과 몸에서 넘치는 기백에 보는 사람까지 몸이 움츠려드는 듯한 긴장감을 느끼게 했다. 그런데 교복으로 갈아입은 후 말을 꺼내자 남다른 애교가 있는, 상냥한 고등학생으로 돌아간다. 그 모습이 훌륭했다.
후세 군이 스모를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다. 그때까지는 계속 유도에 몰두했다. 중학교 2학년 때 홋카이도의 전도(全道)
대회에 출전하기까지 했지만 3학년 지역 예선에서 뜻밖의 1회전 패배를 당해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오른팔 손목 위 부분이 절단 되어 있다. 서로 움켜쥐는 것이 기본인 유도로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음을 느끼고 스모로 전향한 것이었다.
"앗!"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던 그는 농사일 중 부모가 한눈파는 사이에 제초 커터에 다가가 버린 것이다. 오른 손목 위가 절단되었을 때 통증보다는 ‘어떡해, 혼난다’는 것밖에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 잃은 손이 다시 생겨나올 것이란 생각만 했다고 한다. 친구로부터 따돌림을 당해도 부모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소극적인 부분을 걱정한 아버지가 스포츠를 권했다고 한다.
"연습을 열심히 하는 끈기있는 학생"이라고 선생님이 평하는 대로 남다른 노력은 해왔다. 수건으로 감은 아령을 오른팔 위에 올려놓고 근육을 단련하거나 강도 높은 훈련을 쌓았다. 그 노력과 천부적인 소질이 결실을 맺어 고등학교 2학년, 3학년 전도대회에서 훌륭하게 우승했다. 3학년 전국대회에서는 베스트8까지 올랐다.
무엇이든 도전정신이 강한 그는 NHK 노래자랑에서 합격 종을 울렸고, 농업고등학생 웅변대회에도 "삶의 보람을 찾아서" 라는 제목으로 홋카이도 대표로 출전했다.
"... 지금까지 계속 '삶의 보람'을 생각하며, 계속 추구해 왔습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연습이 힘들어 도망가고 싶을 때도, 남들이 내 오른손을 보는 호기심의 눈길을 느꼈을 때도 '져서는 않돼' 하고 이를 악물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현재, 도쿄 다쿠쇼쿠(拓殖)대학 2학년. 오랜만에 재회한 그의, 주위를 평온하게 하는 온화한 미소는 변하지 않았지만, 한결 크고 씩씩해진 듯 보였다. 명문 스모부에서 하루 3시간 맹연습을 한다. 18명의 부원 중 정식출전 멤버는 5명이다. 목표는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장래희망은 고향 학교에서 선생님이 되어, 학생들에게 유도나 스모를 가르치는 것. 지금도 귀성길에 오르면 아이들에게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현재의 고민은 여자친구가 없는 약년 20살. 마음은 상냥하고 힘센 후세 군, 동생 같이 생각하는 제가 보증의 도장을 찍습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1994 08 21)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71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72. 간지로(元次郎) 씨의 노래 인생
지금 지구상에는 얼마나 많은 인간이 살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인원수만큼의 삶이 있다. 개개인의 각자의 인생, 하나도 같은 것은 없으니 대단하는 생각이 든다.
요코하마에 메리(メリー) 씨라고 불리는 70대 중반의 일본 여성이 있다. 젊었을 때나 지금이나 얼굴은 하얗다. 얼굴뿐 아니라, 하얀 긴 레이스 드레스에 흰 구두와 온몸에 흰 옷을 입은 그녀는 요코하마에서는 전설적인 존재다. 친척도 살 곳도 없기 때문에 계속 노숙자 생활이다. 최근은 한 건물의 7층 복도에 묵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소문만 들을 뿐, 아직 모습을 본 적이 없는 메리 씨에 대해 나에게 친절하게 이야기해 준 사람은 나가토 간지로(*永登元次郎1938~ 2004 女샹송가수) 씨였다. 간지로 씨는 도도한 그녀의 자존심을 해치지 않으려고, 꽃값이라고 칭하며 돈을 건넨다. 생활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동분서주하고 있다.
추운 날이나 바람이 많이 부는 날 등은 걱정이 크다. 메리 씨와 함께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제안한 사람에게 돈을 속임당하는 실수도 있었다. 그녀를 엄마처럼 생각한다는 간지로 씨의 마음씨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샹송 가수(빅터 전속)인 간지로 씨의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도, 역시 하나하나가 마음에 와닿았다. 타인의 삶의 무게감을 느낄 수 있는 감성은, 그 자신이 살아온 고비마다 길러지고 갈고 닦여온 것인 것 같다. 샹송에는 노래하는 사람의 기쁨과 슬픔이 집적되어 짙게 배어 있다.
나가토 간지로(*永登元次郎 57세女) 씨는, 대만(台湾)에서 광범위하게 건설업을 하는 아버지와 애인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전후 귀국 후에는 히메지(姫路)의 외갓집에서 살다가 열세 살 때 고베(神戸)에 사는 아버지에게로 갔다.
하지만 그곳에는 본처와 또 다른 애인이 낳은 이복형제 세 명이 있었다. 본처는 간지로 씨에게 사사건건 엄격하게 대하였다고 한다. 그래도 그녀는 별탈없이 열심히 견뎌냈다. 본처의 분노와 억울함이, 아이 나름대로 이해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상대방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는 능력은 이때의 체험에서 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이발소에서 기술을 배우는 한편, 가요학교를 다녔다. 가수가 되고 싶다는 어릴 때부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상경한 것은 그가 스무 살 때였다. 여기서부터 다시 간지로 씨의 파란의 인생이 시작된다. 도쿄에서의 생활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길거리에 서서 몸을 팔기도 했다.
속는 경우도 많아 염세관에 빠져 죽음을 택하려던 참에 아버지가 급서했다. "너는 행복하게 오래 살아야 한다". 아버지의 유언처럼 들렸다. 열심히 하여 쉰 살에 첫 리사이틀을 열 수 있었다. 터져 나갈 듯한 박수를 받아 발이 공중에 뜰 것 같았다고 한다.
요코하마 히노데마치(日の出町)역 바로 옆에 있는 라이브하우스 ‘도안지(童安寺)’에서 노래하며 노게의 거리 공연(여기에서 함께 열연도)에도 매번 출연한다. 길거리에 흐르는 그녀의 노랫소리를 들은 사람으로부터 삶의 힘을 부여받았다는 편지를 받았다. 마음에 와닿는 노래를 하고자 하는 간지로 씨는 오늘도 메리 씨의 삶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의 애달픔을 위로하는 마음을 샹송으로 노래하고 있다. (1994 08 28)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73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73. 북이 왜 좋을까?
물건을 두드려 소리를 내고 리듬을 잡는다. 예를 들어, 기억에 없을 정도로 아주 어린 시절, 누구나 분명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원초적인 행위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세계 어디에나 북은 있다. 기도, 기쁨, 진혼, 혹은 고무(鼓舞)를 위해... 사람들의 삶에 울림을 주고 받듯 쿵, 쿵, 쿵하는 소리는 국경을 넘어 울려 퍼진다. 북소리를 들으면 힘이 나는 것은 심장 박동을 비롯해 인간의 체내에서 맥박치는 리듬이 약동하기 때문일까.
"코도(鼓童)"의 북과 처음 만났을 때, 북채를 휘두를 때마다 생겨나는 그 힘찬 소리를 받아들이며, 어느새 마음이 비게 되는 자신을 알게 되었다. 북이란 얼마나 좋은 것일까, 하고 절실히 생각했다. 그리고 한마음 한뜻으로 북과 마주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무척 아름답게 느껴졌다. (*鼓童 こどう: 新潟県佐渡市小木を拠点に国際的な公演活動を展開するプロ和太鼓集団. 設立1981年)
코도(鼓童)는 북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음악 예능 집단으로 본거지는 사도(新潟県佐渡市)에 있다(사도에 있었던 온데코자-鬼太鼓座가 전신). 첫 데뷔는 1975년, 미국에서 보스턴 마라톤을 멤버 전원이 완주한 후 연주를 한 것이 첫 데뷔였다고 한다. 이른 아침 산길을 매일 10km 달리는 그들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현재 한 해의 3분의 1씩을 각각 국내 공연, 해외 공연, 사도공연으로 배분하고 있다. "ONE EARTH TOUR" 라고 일컬어지는 공연 투어는, 지금까지 27개국 천칠백회 이상이나 되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일본을 대표하는 인터내셔널한 집단이다(국내에서도 해외에서도 티켓은 즉시 매진의 인기공연).
이번 여름 사도의 남단, 오기(小木)반도 산속 삼만 평에 자리잡은 코도마을(鼓童村)을 찾았다. 지은지 백오십 년이라는 오래된 민가에 머물며 코도 멤버들과 식사까지 함께 했다.
검게 다듬어진 대청마루에 앉아 있으면, 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감미롭다. 에어컨으로는 느낄 수 없는 상쾌한 시원함이다. TV나 차량 소음이 없어서인지 마냥 조용하다. 매미 소리에 휩싸일 뿐이다.
눈앞의 밭에서 갓 딴 오이를 된장에 찍어 먹는다. 맛있다. 일상생활의 건강하지 못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코도의 북소리의 청렬(清冽)함은 이런 환경에서 자란 것임에 틀림없다.
연습을 견학했다. 가까이서 보면 더욱 박진감이 넘친다. 튀는 땀. 단련된 몸으로 열심히 북을 친다. 눈시울이 뜨거워져 버린다.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북이다.
무대에 선 사람은 17명(여성 3명). 스무 살이 최연소이고 평균 나이는 스물여섯, 일곱 쯤 될까. 화기애애한 즐거운 연습 풍경에 마음이 느긋해 진다.
후지모토 요시카즈(*藤本吉利 1959~) 씨(43세)가 가장 연장자이자 가장 고참이다. 웃는 얼굴이 더없이 사랑스럽다. 무대에서는 박력있게 큰북을 치고, 그의 존재가 코도(鼓童)를 다잡는다. 젊었을 때는 힘껏 쳤지만 지금은 자연스럽게 강약을 섞어가며 북을 치게 됐다고 한다.
“북을 너무 좋아하니까, 죽을 때까지 현역이에요. 정신없이 두드리고나면, 스트레스도 모두 없어집니다.” 확실히 소리와 어울리며 지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육체로 자연의 리듬을 느끼는 순간이라는 것은 무엇보다 삶의 증거니까. (1994 09 01)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74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74. 인간이 가진 자연 치유력
마음이나 몸이 피곤하거나 재충전하고 싶을 때, 사람은 주변의 하늘과 바다, 산과 강, 그리고 수목에다 꽃과 풀... 등, 이러한 "자연(自然)'’과 자연스럽게 접하게 마련이다.
나도 때때로, 자연으로부터의 치유의 힘을 받아, 삶에 활럭을 받아 왔다고 절실하게 생각한다. 생각해 보면 인간이 자연계의 존재 중 하나이니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명한 이치를 잊어버리는 어리석음을 인간은 갖고 있다. 과학, 물질만능의 사상은 효율 우선, 이윤 추구의 사회를 낳아 인간의 행복을 추구했겠지만, 알고 보면 자연을 망가뜨리고 정작 인간도 멸망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자연을 정복하려는 서양의 합리주의에 대해, 자연과의 공생, 조화를 소중히 여기는 동양적 사고방식이 재조명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슬기로운 흐름이라 할 만하다.
“과학으로는 결코 자연(생명)을 만들 수 없는 것이지요. 자연에 더 눈을 돌렸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과학과 물질본위로 기울고 있는 생활 환경을 바꾸는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라는 다니 미치시(谷 美智士 56세) 선생의 말에 공감이 간다.
도쿄 아카사카에서 다니 클리닉을 개업하고 있는 다니 선생은 서양의학에, 한약과 침구를 이용한 동양의학을 병용하는 치료로 많은 환자를 치료해 왔다.
다니 선생을 동양의학에 결부시키게 한 것은 선생이 의대 대학원생이었을 때 위암에 걸린 어머니에게 시행된 온열요법이었다. 통증이 완화되는 효과에 관심을 가졌다.
서양의학으로는 어머니를 도울 수 없었다는 생각이 동양의학을 이용한 암 치료에 임하는 촐발점이 되었다고 한다. 한약으로 몸의 저항력을 높이는 면역요법에 힘을 쏟았다. 인간이 본래 가진 자연치유력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현재의 의학 속에 자연의 혜택을 도입하고 싶었고, 화학적인 약품만의 치료는 위험이 크고 유전자를 손상시킬 위험을 걱정하는 다니 선생은, 암과 동시에 불치병으로 꼽히는 에이즈에도 도전해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주삿바늘의 엉성한 취급으로 인해 현재 유아 에이즈 환자가 루마니아에는 1,700여 명이나 된다고 한다. 다니 선생이 그 아이들의 영상을 TV에서 본 것은 4년 전이었다. 화면에는 뼈만 앙상한 아이들의 비참한 상황이 담겨 있었다. 어른에 비해 저항력이 약한 아이들은 증상이 진행되는 것도 빠르다.
면역요법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다니 선생은 좌시하지 못하고 행동을 취했다. 이듬해 수도 부쿠레슈티로 향했다. 처음에는 정부 관리의 허가가 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지만 현장 의사들이 관심을 보이면서 치료의 길이 열렸다. 다니 선생은 한약을 만드는 방법(현지에 있는 허브도 도입해)과 식이요법의 지도를 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눈부신 성과가 생겨 모두가 놀랐다. 치료를 시작한 아이들의 얼굴에 생기가 되살아난 것이다. 설사 증상이 멈추고 체중이 늘어 건강하게 퇴원해 가는 아이까지 있었다. 사망률이 크게 떨어지면서 발병이 면역상태까지 되돌아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결과가 무엇보다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私費を投じてつづけてきた谷先生の活動に支援組織ができた(事務局0473-78-8552).自然の手立てを受けとめ、患者さんに役立てる仲介者だと自らを語る谷先生を応援したいと思う。 (1994 09 11)
사비를 들여 계속해 온 다니 선생의 활동에 지원 조직이 생겼다(사무국=0473-78-8552). 자연의 혜택을 받아들여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중개인이라고 스스로를 말하는 다니 선생님을 응원하고 싶다. (1994 09 11)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75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75. 훌륭한, 붉은 수염 의사 선생님
이번에는 오래전부터 친구가 추천했던 '멋진 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꼭, 취재에 응해 주시기를 바라며 시간을 내어 멀리 나고야까지 갔다. 이를 위해서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그분은 금년 3월까지 40년간, 기후현 구조군 와라무라(岐阜県郡上郡和良村)의 촌립(村立) 국보병원(국민건강보험직영병원)에서, 지역의료에 심혈을 기울여 온 '붉은 수염' 선생님인 나카노 시게오(中野重男 80세) 선생을 말한다.
퇴직이라고 생각했는데, 현재도 와라무라보다 더 벽지에 있는 시라시마무라(白島村)의 병원에서 진료에 열심인 현역 의사 선생님이시다. 사실은 병원을 방문하고 싶었지만, 시간 조정이 되지 않아 나고야의 집으로 귀가 한 후의 시간에 방문했다.
3시간 넘는 이야기는, 전쟁 중 군의관으로 옛 만주에서 체험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패전 후에도 8년간 계속해서 그곳에 머물며 의술이란 무엇인지를 배운 이야기 등, 지금의 일본을 판단하는 정확한 시각을 포함해, 어떤 상황에서도 양심을 잃지 않고 사는 한 인간의 삶이 역사를 종축으로 이야기돼 흥미로웠다.
이 지면에서 전부를 싣는 것은 무리이므로, 와라무라에서의 의료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와라무라는 인구 2,900여 명의 반농마을이다. 옛 만주에서 귀국한 뒤 고향 나고야에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개업할 예정이었던 나카노 선생은 2년 예정으로 와라무라 진료소에 왔다.
면사무소에서 훑어본 사망진단서에는 폐결핵, 폐렴, 기관지천식, 뇌졸중 순으로 병명이 적혀 있었다. 이들은 예방이 가능한 질병이다. 선생은 먼저 폐결핵을 퇴치하기로 마음먹었다. 각 마을마다 ‘위생 좌담회’를 열어 식생활 개선을 도모했다.
"염분이랑 밥을 줄이면 일을 할 수 없다" 는 불평의 목소리가 나온다. 된장국과 우메보시만의 반찬으로는 단백질이 극단적으로 부족하다. 선생 부인 케이 씨가 각 지역을 돌며, 짚이 있으면 만들 수 있다고 낫토 만들기를 권장하였다.
5년 사이에 식생활이 바뀌어, 10년 만에 결핵 환자가 제로가 되었다. 다음으로 대처한 것은 뇌졸중. 처음 10년은 실제로 식이요법을 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근절할 수 없었지만, 다음 10년 만에 마침내 제로가 되었다고 한다.
실은, 동시에 나카노 선생님이 힘을 쏟아온 일이 있다. 마을의 가정을 방문하면, 누워만 있는 사람이 있다. 생명을 구하더라도 몸이 움직이지 않으면 남은 인생은 즐거운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의사의 태만이라고 생각하고, 병원에 재활 시설을 만들었다. 당시 병원의 재활시설은 국내에는 도쿄대 분원에 하나 있을 뿐이었다.
면장을 3년 동안 설득했다고 한다. 노래를 부르거나 곡에 맞게 재활 체조를 한다. "당뇨를 즐기는 모임" "뇌졸중을 즐기는 모임" 등등, 고통스러고 괴로운 병을 다 같이 이겨내고자 많은 그룹이 생겨났다. 기분이 밝아져서 그런지 다들 회복력이 대단했다.
그리고 봄에는 재활 후, 사회 복귀를 위한 생활재활시설도 병원 옆에 만들었다. 항상 환자의 입장에 선다. 중국에서 알게 된, 병만 고치는 사람은 소의(小医), 더불어 인간(고민, 괴로움)을 고치는 사람은 중의(中医), 지역을 돕는 것이 대의(大医)라는 사고방식이 나카노 선생의 심저에 있다. 의사는 병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보는 것이라는 나카노 선생님이다.
인간(환자)을 둘러싼 사회•생활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당신의 몸은 여기가 나쁘다"는 식의 치료 방법밖에 가르치지 않는 대학교육의 문제점을 선생님은 실감나게 지적한다. "의료란 기술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다루는 과학이다"를 실천하는 나카노 선생님. 우리 마을의 붉은 수염 선생님은 오늘도 종일 한 분 한 분의 환자와 마주한다. (1994 09 18)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76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76. 앞으로도 많은 만남을.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는 물론이지만, 다음 세대를 짊어질 젊은 사람들이 진지하게 역사와 마주하고, 그것을 양식으로 삼아 새로운 미래를 구축하려고 하는 것은 든든하고, 특히 기쁜 일이다. 그런 젊은 사람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려 한다.
아름답고 맑은 물로 알려진 시만토강 유역에 있는 고치현 하타군(高知県幡多郡)의 고교생들은 10년 전부터 자주적인 서클 ‘하타 세미나’를 만들어 묻혀져 있는 지역의 역사를 파헤쳐 왔다.
그러던 중 전시(戦時) 중, 철도와 댐 건설을 위해 많은 조선인이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등학생들은 당시의 일을 아는 사람들을 찾아가 취재를 하고 있다. 그러한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는 한편, 그들은 현재의 상황에도 관심을 넓혀 갔다.
재작년 NHK 프로그램인 "청춘 메시지"에서 이러한 활동을 하고 있는 학생들과의 "만남을 원합니다."라는 고베의 조선인고등학교 여학생으로부터의 편지에 답장을 보내 시만토강이 흐르는 고치 쪽으로 오게 하였다.
교류가 생기면서 고치와 고베에서 각각 고등학생들의 홈스테이가 열렸다. 실제로 만남으로써 이해가 깊어지고 우정이 생겨난다. 만남은 모든 것의 시작점이다.
고등학생들은 지난해 한국로 건너갔다. 일본군 위안부로 엄청난 고통을 치른 김학순 씨를 만나 체험담을 들었을 때는 가슴이 미어져 할 말을 잃었다.
"너희들과 이야기할 수 있어서 기쁘다. 젊은 당신들은 바르게 살아달라"는 학순 씨의 다정한 말이 몸에 깊이 스며들었다. 독립운동의 상징의 장소이기도 한 파고다 공원에서는, 노인들로부터 일본인들이 올 곳이 아니라고 호통치는 말을 듣기도 했다.
현재 와코대(東京都町田市소재) 1학년이 된 와타나베 아야(渡辺文) 씨(18세)는 책으로 배우는 학교 수업에서는 알 수 없는 과거 역사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국 고교생, 대학생들과의 교감도 있었다. 가랑비 속에서 다 같이 어깨동무를 하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던 추억은 잊을 수 없다. 펜-프렌드도 생겼다. 한글을 사전에서 찾아보며 편지를 주고받는다.
"언어 차이는 우리를 하나로 묶는 데 장애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한국·일본)가 건너야 할 강은 없습니다." 펜-프렌드가 된 한국 고교생 김경진(金京珍) 씨의 말이다.
국경을 넘어 서로 교류하고 싶다고 와타나베 아야 씨도 바라고 있다. 시만토강은 일명 '와타리가와(渡り川-건너는 강)이라고도 한다고 한다. 두 나라의 사이가 벌어진 시대에 국경을 잇는 강이라는 의미를 담아 고등학생들의 활동이 '와타리가와(건너는 강)'라는 영화로 정리됐다. 마지막 회에 상큼한 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어서 행복하게 생각한다.
여기서, 여러분께 인사드립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시작하여 훈훈한 만남과 멋진 사람들, 가슴 아픈 이야기와 화가 나는 일들, 그리고 저의 허당 이야기들까지 오랫동안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게으르고, 글재주도 없는 제가 어떻게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여러분의 격려 덕분이었습니다.
허약체질이라고 썼더니 '루루드약수(온천약수)'를 보내주신 분, 매번 자필 그림으로 감상을 보내주신 분 등등 많은 후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오로지 감사할 따름입니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많은 만남을 거듭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1994 09 25)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77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77. 후기
이 책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이것도 하나의 소중한 '만남'이겠지요.
다양한 만남을 주제로 1993년 4월부터 1994년 9월까지 1년 반 동안 마이니치신문 일요클럽(毎日新聞・日曜くらぶ)에 연재한 '두둥실 만남의 상자'에 다소 가필하여 탄생한 책입니다.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하고 보니, 웃음도 있고, 다큐멘터리도 있고, 드라마도 있고... 이런 식으로, 부드러운 것부터 딱딱한 것까지 뒤죽박죽 섞은, 정말 비빔밥 같은 에세이집이 되었구나 하고 새삼 어이가 없어졌습니다(정말로).
생각하면, 살아간다는 것은 만남을 이어가는(나 자신에게도) 것. 사랑, 우정, 꿈, 일, 기타 등등, '언젠가 만날 수 있다'고 믿고, 어영차, 어라차차이네요.
연재 중에는 담당 편집자 이데 유키오(井出幸男) 씨, 일러스트레이터 가토 유카리(*加藤ゆかり1964~)씨, 그리고 제1 도서 편집부의 사토 미치코(佐藤美智子) 씨에게 신세를 졌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서 감사드립니다.
그럼 여러분 마지막은 흔히들 하는 말로 작별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엔시타이(ご縁しだい-인연을 바랍니다), 언젠가, 또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경남
* 본문 끝 ( )내는 마이니치 신문 '일요클럽'의 게재 연월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