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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9년 4월 6일 수요일
법화경 87쪽 제3 비유품(譬喩品)
안녕하십니까
오늘 4월 6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법문 시작하겠습니다.오늘은 전국에 비가 좀, 넉넉하진 않지만 조금이나마 촉촉하게 내려서, 그나마 잔불이 꺼지지 않는가 하는 안도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인터넷뿐만 아니라 매스컴 이라고 하는 것이, 크게 발달한 관계로 전국이, 그리고 전 세계가 일일 생활권, 모두 동시에 모든 정보를 알 수 있게 되서 좋은 점도 있지만, 또 불행은 불행을 함께 해야 하는 그런 입장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대가 이렇게 변모해 가는 것을 어쩌겠습니까. 다 같이 수용하면서 사는 길 밖에 달리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늘 공부는 그동안 법화경을 쭈욱 해오다가 중간에 다른 이야기가 며칠며칠 끼어들었는데, 오늘은 제3품 비유 품을 할 차례 입니다.지난 시간에 있었던 이야기를 좀 정리를 하고, 다시 법화경의 기억을 되살려서 법화경 분위기로 일단 만들어 놓고, 비유 품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지난번 방편 품이 모두가 끝났는데, 방편 품의 계열을 다시 떠올려볼까 합니다.
부처님께서 삼매에서 깨어나서 법화경을 본문, 정문으로 나누는데 정문의 기둥격인 방편품의 중요한 사상인 제법실상에 관한 이야기, 일대사 인연에 관한 이야기, 개시오입, 불지지견(開示悟入 佛之知見)이라고 하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부처님이 깨달으신 그 지견에 모두 들어가게 하고, 깨닫게 하고, 다시 말해서 열어주고 보여주고 깨닫게 하고 들어가게 하는, 그런 회삼귀일 의 일불 성 사상을 역설 하신 대목이고, 또 그중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법화경에서 얘기 하고자 하는 내용이 워낙 궁극의 가르침이고, 또 심오한 가르침이고,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많은 법중 에 더 이상 없는 최후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삼지삼청 이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얘기가 나왔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세 번 그만 두자고 할때 마다, 사리불이 일일이 다 청하게 되지요. 그래서 三止三請(삼지삼청) 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희대의 사건은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五천명 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이 법을 설하고자 하는 그 자리에서, 더 이상은 들을 것이 없다 라고 생각한 나머지 자리를 박차고 떠나 버렸다 하는 그런 이야기... 그것은 前無後無(전무후무)한 일이고, 경전 상에서 편이상 만들어낸 이야기라 하더라도, 다른 경전에서는 도저히 찾아 볼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의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 하면. (그 동안은 근기에 따라서 근기에 알맞은 말만 하시느라고 사실은 부처님이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를 그동안 많이 해왔다는 것이지요.) 당신은 정말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듬뿍 듬뿍 집어주고 싶은데 다이아몬드를 이해 못하는 사람에게 다이아몬드를 집어 줄 수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흙이니, 돌이니, 무슨 구리니, 쇠니 ,이런 것들로 조금 씩 조금씩 그 근기를 성숙시켜가는 그런 안타까운 일을 수십 년 간 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죽음을 앞두고, 다시 말씀드려서 열반을 앞두고 -이제 더 이상 이럴 수는 없다. 설사 내 법을 듣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이제는 최후의 법을, 그리고 최상의 법을 전하고, 열반에 들 수밖에 없는 시점에 이르렀다.-이렇게 이야기가 되지요. 그래서 결국은 五천명이나 되는 사람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게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법화경에서 전하고자 하는 일불승 사상 이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없는 최고의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든 것 이다. 라고 이해하라는 것이지요. 일불승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따지고 보면, 불교는 너무 쉬운 것 이고, 또 간단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되는데, 어렵게 하면은 사람들이 가까워 하고 쉬워하고, 어려운 것을 오히려 쉬워합니다.
정작 쉽고 간단한 것을 오히려 어려워하는 그런 웃지 못할 일들이 바로 우리가 하고 있는 불법에 대한 일인데, 그래서 법화경 방편 품 에는 여러 번 보아 왔고, 제가 법화경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라고 해서 일불승의 내용을, 말하자면 한 예로써, 어린아이가 장난으로 모래를 쌓아놓고 탑이라 하고, 또 불상이라 하는 그런 일 만으로도, 이미 성불했다.
과거의 부처님 당시의 일들을 그런 식으로 표현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딴 공덕을 크게 지었기 때문에 그것이 조건이 되어서 성불했다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본래 우리는 성불 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무슨 조건이 되겠습니까? 부처님 앞에서 손 한번 들고, 합장 한번 하고, 절 한번 하고, 아니면 염불 한마디 한 것이, 그것으로써 皆已成佛道(개이성불도)라! 다 이미 성불해 마쳤다는 이런 표현을 했는데, 그런 것은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성불의 조건은 아닌 것이지요.
그러나 그러한 인연으로 이미 성불 했다는 이런 표현은 쓰고는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우리가 생각해 보면, 아! 일불승 사상이라는 것이 바로 우리는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한 본래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무결한 부처라고 하는 사실! 이것을 우리는 중요하게 생각을 하고, 여기에 눈을 떠야 되겠구나 하는 확신을 우리가 이 법화경에서 가져야 됩니다.
법화경에서 확신을 가져야 할 것은 바로 그 점 이예요. 선사들도 많은 표현을 했습니다. 뭐 ‘구불시공 조만선가’부처가 되기 위해서 육바라밀을 닦고, 온갖 공을 베푸는 것이 조건이 되어서 언제쯤 부처가 이루어진다는 말인가 하는 그런 표현 이라든지, 본래로 한 계단 한 계단 닦아 올라가는 점차적인 부처는 없다라 고 한다든지 하는 그런 등등의 이야기 입니다.
방편품은 이렇게 넘겨 버리기가 너무 아까운 내용 이예요. 어떤 분 에게 임제록 을 전해 줬더니, 약을 먹듯이 읽었다는 표현을 했는데,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방편품은 우리가 약을 먹듯이 한 방울 한 방울, 한 글자 한 글자, 한 구절 한 구절, 정말 소화 시켜가면서, 백번 천 번 새겨가면서 그렇게 공부해야 할 내용입니다. 또 다시 기회가 되면 방편 품의 근본 취지가 이야기가 되어지리라는 생각을 하고, 오늘은 비유 품 으로 들어가겠습니다.
28품 중에서 세 번째 품이 譬喩品(비유품) 인데, 불교의 경전에는 비유 가 상당히 많아요. 그 중에서도 법화경의 비유 품 아주 유독 뛰어 납니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화택(火宅)의 비유가 나오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사바세계를 화택이라고, 불난 집이라고, 마침 어제 참 불이 많이 나서 낙산사가 다 타고, 그래서 가슴 아픈 느낌을 지금 받고 있습니다.
저의 염화실에도 옛날의 낙산사 모습을 누가 올려놓았고, 불타는 모습을 낱낱이 또 올려놓고 해서, 오늘 하루 종일 그것을 대조하며 보면서, 옛날의 그 아름답던 낙산사 모습이 그대로 다 올려져 있고, 또 한참 화염에 휩싸여서 동종이 녹아내리는, 그 큰 법당과 건물들이 그냥 그 거센 불길에 휩싸이는 그런 모습을 사진을 통해서 봤습니다.
마침 오늘 비유품의 이야기는 결국은 불난 집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철없이 놀고 있는 아이들의 삶과 같은 것이다. 하는 그런 비유를 이 비유품에서 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그래요. 부처님께서 사리 불에게 수기를 하십니다.
수기를 하는데, 수기를 하는 이야기가 법화경에 상당히 많지요. 그래서 이제 성문. 연각. 소승법의 열반 락 이 부처님의 방편인줄 모르고, 가섭 등 1200 아라한이 열반 락 을 누렸는데, 부처님의 일불승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어 보살도를 행하게 되는, 그런 내용이 피력이 되지요. 그것이 사리 불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법화경에서 수기를 받는데 사리불이 첫 번 째 로 수기(授記)를 받습니다.
‘화광(華光)여래’라고 하는 이름으로, 또 이구라는 국토 에서, 수명은 12소겁이나 되는 길고 긴 세월을 살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 수기가 끝나고 나서 화택의 비유가 나오고,. 화택의 비유를 통해서 일불승이 다시 밝혀지는데, 여기에서는 일불승 이라는 것이 큰 비유로써 大力白牛車(대력백우거)! -큰 흰 소가 끄는 수레!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요. 수레는 羊車(양거). 鹿車(녹거). 牛車(우거). 그리고 대백우거! 양거=양이 끄는 수레=聲聞(성문). 녹거=사슴이 끄는 수레=緣覺(연각). 우거=소가 끄는 수레=菩薩(보살). 대백우거=크고 흰 소가 끄는 수레=一佛乘(일불승).이지요. 이렇게 비유를 들어서 일불승의 위대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비유품! 이것 하나만으로서도 우리가 사는 현실은 어떤 것이고, 현실을 벗어나서 어떤 삶을 우리가 누리게 될 것인가? 최상의 삶은 과연 어떤 삶인가? 그것을 일러 일불승의 삶이다. 부처의 삶이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데, 팔만대장경의 축소판이라고 봐도 좋고, 또 부처님이 세상을 보는 세상관이 어떤 화택이라고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그런 내용이 비유품의 대체적인 개요가 되겠습니다.
p.87
제3 비유품(譬喩品)
1. 사리불이 깨달음을 얻다
1 그 때에 사리불이 뛸 듯이 기뻐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 하고 부처님의 존안(尊顔)을 우러러보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사리불이 이렇게 뛸 듯이 기뻐한 것은 앞의 방편 품에서 일불승의 위대함을 이야기를 하고, 그것이 결국은 다른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모든 성문들의 것이다. 성문들도 일불승이라고 하는 위대한 경지를 다 수용할 수 있고, 다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다. 이미 사리불은 또 그러한 경지에 올랐다 하는, 그러한 내용들이 피력이 되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들은 사리불은 뛸 듯이 기뻐하고, 부처님의 존안을 우러러보면서 자신의 소감을 이야기 하는 것이지요. 이제 이러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2 이제 세존께 이러한 법문(法門)을 듣고 마음이 크게 기쁘 고 전에 없던 일을 얻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예전에 이런 법문을 들었는데, 보살들은 수기(授記)를 받아 성불 하리라 하였으나, 저희들은 그 일에 참여하지 못하여 매우 슬프고 상심하여 여래의 한량없는 지견(知見)을 잃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말을 처음에 합니다. 그전에 보살들도 따로 부처님이 분별해서 법을 설하지는 않았겠지만, 상당히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그런 법문을 옆에서 사리불도 들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들은, 보살들은 수기를 받아서 성불 한다는 성불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자신은 거기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말만 들었지...
그래서 ‘매우 슬프고 상심하여 여래 의 한량없는 지견(知見)을 잃었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런 표현 입니다. 화엄경을 이야기할 때 “두시청의 가해”라, 그런 말이 있는데, 귀가 먹었다. 보고 듣는 것이, 보고 듣는데서 그만 귀가 멀었다.
화엄경이 회상이 있다. 화엄경이 설해지는 법회가 있다는 소리만 들었지, 도대체 화엄경이 어떤 것이고, 어떤 경지고, 누구에게 설하는지 그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알바가 없었다.
그래서 그 五백 성문들도 전부 “如聾兩盲(여롱양맹)” 마치 귀머거리와 같고 맹인과 같았다 하는 그런 표현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자리를 달리해서 못들은 것이 아니라,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준이 아닌 관계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맹인 이었다는 것 이지요. 화엄경의 경지를 그렇게 표현 했습니다.
여기에 있는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지요. 예전에 이런 법문을 들었는데, ‘보살들은 수기를 받아 성불하리라 하였으나, 저희들은 그 일에 참여하지 못하여 매우 슬프고 상심하여 여래의 한량없는 지견을 잃었다고 하였습니다.’지금 법화경 이야기도, 어쩌면 그렇게 들리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현재 우리가 보고 듣고 할줄 하는 이 사람의 이 능력 이대로 완전무결한 “부처님이다”라고 하는 이 말이, 기존의 불교 상식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전혀 무슨 소린지 모를 꺼 예요.
‘혹시 저것이 외도의 이야기가 아닐까?’ 또 ‘저 스님이 잘못 알고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닐까?’‘소견이 잘못 된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충분히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뒤에도, 사리불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이야기를 하지요.
그와 같이, 자기 수준이 아니고 자기 차원이 아니면 그렇게 제대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습니다.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기 사리불도 한때는 그러했다고 이런 자기 과거를 술회를 하고 있습니다.
화엄경에도 그러한 이야기를 분명히 하고 있어요. 그것은 아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항상 산림(山林)에나 나무 밑에 홀로 앉기도 하고 거닐기도 하면서 생각하기를, '우리들도 법의 성품에 함께 들어갔는데, 어찌하여 여래께서는 소승법(小乘法)으로 제도하시는가. 이것은 우리의 허물이요, 세존의 탓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똑 같이 법의 성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여래께서는 소승법 으로 자신들을 제도 하더라’는 것이지요. 부처님은 그런 일이 없는 것 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허물이요, 세존의 탓이 아니다’라고 얘기 했다는 것 입니다.
그 까닭은, 만약 저희들이 성불의 원인까지 말씀하시기를 기다려서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하였더라면, 반드시 대승으로써 제도하였을 것이지만, 저희들은 방편으로 마땅함을 따라 말씀하신 것을 알지 못하고 부처님의 법문을 처음 듣고는 곧 그대로 믿어서 결과를 얻으려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결국 무엇인가 하면, 자신의 근기들이 하열하기 때문에 그 근기에 맞추어서 방편으로 마땅함을 따라서 말씀하신 것인데, 그걸 모르고 자신들에게 할 수 있는 최상의 법문을 다한 것으로 그렇게 여겼다는 것이지요. 참 안타까운 일이지요.
어릴 때 어린 아이가 울거나 보채면, 밖에 호랑이가 왔다고 하지요. 그러면 호랑이가 왔다는 소리만 듣고도 어린 아이는 놀라서, 울음을 그칩니다. 지금 철이 들어서 그런 일을 회상해 보면, 참 어이없는 일이지요.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이미 그런 일들이, 어이없는 일이었다는 것을 생각까지할 줄 아는 그런 성숙된 자리에 있기 때문에, 크게 문제 되지 않는 것이지요.
그와 같이 사리불도 지금은 부처님의 방편의 말씀인지, 아니면 실법인지, 다시 말해서 요즘 선 법문 할 때 흔히 쓰는 달을 가르치는 손가락 이야기인지, 달을 이야기 하는 것인지 이런 것 을 이제는 환희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예전부터 지금까지 밤낮으로 스스로 책망하였는데 이제 부처님께 듣지 못하던 미증유(未曾有)의 법문을 들었습니다. 이제 모든 의혹과 회환을 버리고 몸과 마음이 태연하여 편안함을 얻었습니다. 오늘에야 진정한 부처님의 아들이며,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다시 태어났으며, 법에서 화생(化生)하였고, 불법을 얻은 줄을 알았습니다.
참 아주 사리불이 방편 품이 끝나면서 비유 품에 와서, 성불 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당장의 어떤 고통을 면하기 위해서, 열반이나 증득해서 좀 편안히 소극적이나마, 그렇게 살겠다 하는 그런 마음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것이 최상의 법 인양으로 생각 했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성문 연각들이 하는 일이지요. 보살 경지만 하더라도, 그것이 딱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좀 더 다른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자신을 희생하고 봉사해서, 모든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자신을 완전히 燃燒(연소) 시키는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을 보살의 삶이라고 그러지요. 결국은 우리가 제대로 부처의 어떤 境至(경지)를 터득했다 하더라도, 그 삶의 표현은 결국은 보살의 삶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여기에 과거의 자기들의 아주 사소한 어떤 법에 만족 하고, 그것이 모든 것으로 생각했던 세월에서 이제는, 부처님의 진정한 법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그래서 지금 비로소 경지에 오른 것 같이 이야기가 되어 있습니다만, 그래서 ‘오늘에야 진정한 부처님의 아들이다.’ 그동안 부처님의 제자라고 해서, 또 뭐 부처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여기에 “佛子(불자)”라고 하는 子(자) 字(자)를 제가 제자라고 표현하지 않고, 아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왜냐? 말하자면 전부 부처의 後身(후신)이고, 부처라고 하는 그런 宗族(종족)의 일원이기 때문에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들이라고 표현 하는 것이, 제자라는 말보다도 가장 훨씬 더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리불도‘.오늘에야 진정한 부처님의 아들이다.’ 또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다시 태어났다.’또 ‘법에서 화생 하였다.’ 법에서부터 변화 하여서 탄생 하였다 이 말입니다.
이것이 표현이 조금 달라서 그렇지, 사실은 같은 내용이지요.‘불법을 얻은 줄을 이제 알았다.’그랬습니다.
금강경에도 의법 출생분(依法出生分)이라고 하는 분이있지요. 의법 출생분 -법에 의해서 다시 태어나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법에 의해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매일매일 탄생해야 되는 것이지요. 매일매일 새롭게 태어나야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불법을 만난 보람이고, 또 불법을 만난가치가 거기에 있습니다. 불법을 만나서 불교 공부를 환희 스럽게 하면서, 아무 변화가 없고, 내 자신의 어떤 정신적인 발전과 변화가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제보다 오늘이 정신세계가 달라졌고, 내 시각이 달라졌고 내 인생을 보고 세상을 보고, 모든 것을 보는 내 안목이 달라지는 바로 이것이, 법에 의해서 化生(화생)한 것이지요. 또 부처님 법문 듣고 다시 태어난 사실 입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내가 다르지요. 오늘보다 내일이 또 다르고... 이것이 불법을 공부하는 보람이고 소득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우리가 불교를 좋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공부 그 자체도 재미있습니다.
불교공부에 맛을 들여 놓으면, 세상에 어떤 맛보다도 제일 아주 즐겁고 맛있고 환희롭지요. 이런 것을 法喜禪悅(법희선열)이라고 표현 합니다. 또 禪悅慰樂(선열위락)! 법의 음식으로써 즐거움을 삼는다
정말 이세상의 어떤 즐거움보다도 부처님의 법을 우리가 깊이 있게 공부하고, 맛을 들이고 거기서 어떤 환희와 즐거움을 느끼고 하면, 도저히 다른 것 하고 비교할 수가 없지요.
그런 것을 여러 우리 법우님들도 충분히 느끼시리라고 믿습니다. 이것을 다시 게송으로 표현을 하는데, 경문 이다보니까 우리가 한 구절도 놓지는 것이 아깝지요. 사실 이 법화경은 앞에서도 표현 했듯이, 약 먹듯이 한 구절 한 구절, 충분히 소화시켜 가면서 그렇게 공부하는 것이 우리에게 제일 소득이 갑니다.
그래서 重誦(중송), 거듭 표현한 내용 이지만, 우리가 한 번 더 살피면서 재차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p.88
2. 게송으로 다시 표현하다
3 이 때 사리불이 이 뜻을 거듭 펴려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제가 이 법문을 듣고 미증유를 얻었습니다. 마음은 매우 기쁘고 의심은 모두 없어졌습니다.
예전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대승법 을 잃지는 않았지만 부처님의 말씀이 매우 희유하여 능히 중생들의 번뇌를 없앴습니다. 저도 번뇌가 이미 다하였지만 듣고는 역시 근심과 걱정이 없어졌습니다.
4 제가 산골짜기에도 있고 나무 밑에 앉기도 하고 거닐기도 하면서 항상 이 일을 생각하고 항상 나를 이렇게 책망하였습니다. '내가 왜 스스로 속았던가. 저희들도 부처님의 아들로 서 무루법(無漏法)에 함께 들었건만 오는 세상에서 최상의 도를 말하지 못하며, 서른두 가지 금빛 모습과 열 가지 힘과 여러 가지 해탈들이 모두 같은 한 가지 불법인데 이런 일을 얻지 못하는구나. 여든 가지 잘 생긴 몸매와 열여덟 가지 특별한 법(法)인 이런 공덕 들을 저희들은 다 잃었구나.'
여기에 소개된 여러 가지 열여덟 가지, 18佛供法(불공법), 32相(상), 80種好(종호), 10力(력), 여러 가지 解脫(해탈), 이런 것 들이 소개가 되는데 이것은, 우리들 마음에 갖추고 있는 모든 그 능력들을 깨달은 분은 한껏 그것을 꽃 피워버린 그런 상태를 이렇게 표현 합니다. 이것이 무슨 특정인 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에게 다 잠재되어 있는 능력을 부처님은 다 한껏 꽃피워서 드러내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고 나눌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저 혼자 거닐면서 보니 부처님은 대중 가운데 계시나 명성이 시방에 가득 차서 중생들을 널리 이익하게 하시는데 나만 오직 이런 이익을 잃었으니 이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일입니 다.
똑 같이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이 될 수 있다 하는 그런 생각을 이제야 하게 되였고, 그것을 못한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다.’ 못한다고 생각한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다.’그런 표현이 되겠지요.
5 저는 항상 밤낮으로 이 일을 생각하고 참으로 잃었는가 잃지 않았는가를 세존께 물으려 하였습니다.
이 내용은 그러니까 우리는 부처가 못 되느냐, 아니면 될 수 있느냐 하는 이 문제에 대해서 부처님께 물으려 했다는 것이지요.
지금도 남방불교, 소승불교, 또는 상좌불교 라고 표현하는데 그런데 서는, 부처의 경지라고 하는 것은 석가모니 한 사람만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지요.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승불교에서 소승, 소승, 소승을 불법 외도라 그러거든요. 불교 안에 붙어있는 외도라고 그럽니다. 외도를 두 가지로 치는데,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을 외도라 그러고, 또 불법 안에서 소승적 소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외도라고 하지요. 付佛法外道(부불법외도) -불법에 붙어서 사는 외도. 이렇게까지 표현할 정도 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리불. 성문들도 따지고 보면 거기에 대해서 의심이 많았다는 거예요. 부처님이 이룩하신 그 경지를 우리는 도저히 이르러 갈 수 없는가 하는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의문이 있었는데, 이제 그 의문이 다 풀렸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법화경을 공부 하면서 철두철미하게 마음에 새겨둬야 할 것은 바로 一佛乘(일불승)!
그 일불승 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모두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부처님이다. 영원한 생명이 있고, 또 무한한 가능성이 우리들에게 그대로 갖춰져 있다. 그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가능성을 무슨 18불공법이니, 32상이니, 80종호니, 八해탈이니, 온갖 여러 가지 교리적인 용어로 표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또 세존께서 여러 보살들을 칭찬하시는 것을 보고 밤낮으로 이러한 일을 생각하였습니다.
여기에 무슨 보살의 종자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성문의 종자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지요. 그런데 이 사리불의 말은,‘보살들을 칭찬하시는 것을 보고’ 하는 그 보살들은 결국은자기보다 수준이 나은, 그런 경지에 있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대승적인 소견을 가진 사람들! 이런 뜻 이지요.
이제 부처님의 음성으로 사람들에게 알맞게 맞추어 설법하시는 것을 들으니 무루(無漏)요, 불가사의(不可思議)라. 중생들을 깨달음의 도량에 이르도록 하시옵니다.
그랬잖아요. 지금 설법 하시는 것, 앞에서 말한, 방편 품에서 설법 하시는 것을 들으니까 ‘무루요, 불가사의라. 중생들을 깨달음의 도량에 이르도록 한다’ 모두가 깨달음의 도량에 이른다는 것은 모두가 부처의 경지라는 것이지요.
6 저는 본래 삿된 소견에 집착하여 여러 범지(梵志)들의 스승이 되었더니, -다른 종교를 믿었지요. 그러다가 마승 이라는 스님을 만나서 그 품위와 교양미 있는 수행자의 모습에 그만 감동이 되어서 곧바로 부처님께 인도 되었다 하는 이야기를 전번에 한 번 들려드린 적이 있습니다.
(여러 범지(梵志)들의 스승이 되었더니)
세존께서 저의 마음을 아시고 삿된 소견을 없애고 열반을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삿된 소견을 모두 없애고 나서 공(空)한 법을 증득한 뒤, 그 때에 저 혼자 생각하기를 열반에 이르렀다 여겼는데 -공(空)의 경지는 여기에서 표현한데로 이것이 교리 상으로 그렇습니다.
(열반에 이르렀다 여겼는데) 이제 와서야 스스로 이것은 참된 열반이 아닌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이 공 하다는 것, 불교를 이해하는데, 일차적으로 필요한 지혜이기도 합니다.
空에 대한 이해가요. 그러나 그것은 중간과정이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만약 성불하였다면 서른두 가지 거룩한 모습을 갖추고 천신. 사람. 야차들과 용과 신들이 공경하리니, 그 때에야 영원히 다 없어진 무여(無餘)열반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모든 능력들이, 석가모니부처님이 존경 받듯이 그렇게 받을 수 있는 덕화가 이루어져야 되지 않겠나 하는 그런 마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대중들에게 저도 마땅히 성불하리라 말씀하시니 이러한 말씀을 듣고서야 의심과 회한(悔恨)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다 성불하리라고 이렇게 앞에서 방편 품에서 이야기 했잖아요. 뭐 ‘나무 불!’하는 염불 한마디, 그것도 그냥 망상이 부글부글 끓는 그런 새카만, 불교적 표현으로 하면 새카만 중생의 모습으로...
부처님께 예배 한번 하고, 손 한번 들고 절(拜배) 한번 한 것으로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그런 이야기까지 듣게 되었으니. 사리불이야 그동안 살아온 것을 비추어 본다면, 성불 천만번도 더 하고도 남지요.
망상이 부글부글 끓는 그런 마음으로 부처님 앞에 손 한번 번쩍 드는 것으로, 합장은 하기 싫고, 절은 더 하기 싫고, 그저 손 한번 이렇게 장난삼아 드는 것으로, “皆已成佛道(개이성불도)”라, 다 이미 성불할 수 있다. 이렇게 했으니까 사리불이 살아온 것을 비추어 본다면, 천만번도 더 성불하고도 남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를 다 들은 사리불이니까,‘부처님께서 대중들에게 저도 마땅히 성불하리라 말씀하시니 이러한 말씀을 듣고서야 의심과 회한이 없어졌습니다.’그랬습니다.
의심과 회한이 다 사라졌다.
앞에, 방편 품에서 한 이야기를 어떤 한 특정인이 듣고 감동한, 그런 감동을 그대로 표현을 하는데 여기서 이러한 감동이 우리들의 감동이 되어야 되고, 이 법화경을 공부하는 모든 사람들의 감동이 되어야, 그것이 참으로 바람직하지 않겠나 하는, 또 우리가 그러한 기대를 가지고 법화경을 공부 하는 것이지요. 당연히 그래야 하리라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법화경을 공부하는 의의는, 정말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그 어떤 위대한 사람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에 비해서 나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그런 떳떳하고 당당함을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살림살이로 만들어야 한다는 그런 생각입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보면, 사람 한사람, 한사람의 실상이 모든 부처님들이 지니고 있는 내용과 하나도 다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天才(천재)도 아니고, 準才(준재)아니고, 모두 佛才(불재)입니다. 佛才! 부처 佛 字(자) 제주 才 字! 부처의 소재! 부처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입장이라고요. 무엇을 못할 것 이며, 무엇이 꿇일 일이 있으며, 무엇이 주눅들 일이 있습니까?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우리가 제대로, 경전을 통해서 제대로 이해를 해야 됩니다.
결코, 누구의 종이거나 사용자가 아니지요.
우리는 당당한, 어디서나 우리는 주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그런 모습이 우리의 실상이고, 또 그러한 실상을 우리가 깨달아야 되고, 그렇게 살아야 된다 하는 그런 가르침이 법화경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법화경공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록:여여, 정리:대원성.
첫댓글 佛才
........._()_()_()_
감사하다는 말씀이외 달리 드릴 말이 없습니다.
감사드립니다..... _()()()_
감사, 감사하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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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才! 부처 佛 字(자) 제주 才 字! 부처의 소재! 부처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나무묘법연화경
공(空)의 경지를 교리상으로 열반이라 생각 했는데, 참된 열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나무묘법연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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