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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교야구 사상 최초로 4연타수 홈런을 쳤던 고 박정혁(1970~1999) |
1989년 8월 18일. 서울의 대기는 청명했다. 거대한 클렌징크림으로 닦은 듯 하늘엔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살갗을 파고드는 8월의 햇살이 정오를 넘기며 더욱 강해지자 동대문야구장을 찾은 관중은 하나 둘 그늘진 곳을 찾기 시작했다. 머리에 고무 대야를 이고 음료수와 아이스크림을 팔던 상인들도 빈 스탠드에 앉아 연방 땀을 닦았다.
그러나 이날 봉황대기대회 16강전을 벌이는 휘문고와 공주고 선수들은 온몸에서 땀을 토해내면서도 전혀 더위를 느끼지 못했다. 두 팀 모두 이 경기에 사활을 건 까닭이었다. 특히나 휘문고는 앞서 열린 대통령배와 청룡기대회에서 연속 1회전 탈락한 터라, 이해 실질적인 마지막 전국대회였던 봉황기에서 반드시 4강에 들어야 했다. 그래야 고 3 졸업반 선수들이 체육특기생 자격을 얻어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공주고 선발투수는 1학년 박찬호였다. 박찬호는 제구는 좋지 않았지만, 속구 구속은 정평이 나 있었다. ‘한번 긁히는 날엔 당해낼 재간이 없다’고 소문난 박찬호를 상대로 휘문고 안계장 감독은 임선동을 대항마로 낙점했다. 역시 1학년생이던 임선동은 강속구와 날카로운 슬라이더가 돋보이는 팀의 오른손 에이스였다. 중학시절 이름값으로만 치자면 박찬호보단 한 수 위였다. 그러나 정작 안 감독이 믿는 이는 임선동이 아니라 4번 타자 박정혁이었다.
안 감독은 ‘속구에 강한 박정혁이라면 충분히 박찬호를 제압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결국, 예상이 적중했다. 1회 말 박정혁은 박찬호에게 적시타를 뽑으며 타점을 올렸다. 3회에도 홈런을 치며 팀의 4대 0 리드를 이끌었다. 4회 다시 타석에 선 박정혁은 홈런을 노렸으나 볼넷으로 출루하며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공주고의 반격이 시작된 건 5회였다. 대거 3점을 내며 3대 4로 추격했다.
그러나 ‘거포’ 박정혁은 공주고의 추격을 용납하지 않았다. 6회 박찬호의 속구를 정확하게 받아쳐 솔로 홈런을 터트렸다. 휘문고가 5대 3으로 앞선 8회. 여전히 공주고 마운드를 지킨 박찬호가 박정혁과 다섯 번째 대결을 펼쳤다. 그늘에 숨어 있던 관중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선수의 맞대결을 숨죽여 지켜봤다. ‘혹시나 3연타수 홈런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이번엔 박찬호의 강속구가 통할 것’이라는 긴장감이 더해져, 순간 동대문구장은 진공관처럼 조용했다. 드디어 박찬호가 있는 힘을 다해 포수 미트를 향해 강속구를 뿌렸다. 박정혁도 팽팽하게 당겼던 활시위를 놓는 것처럼 쏜살같이 배트를 휘둘렀다.
“깡!”
알루미늄 배트의 청량한 타격음이 동대문구장 대기에 퍼졌다. 잠시 뒤를 돌아본 박찬호는 이내 고개를 숙였다. 반대로 박정혁은 고갤 치켜들며 두 손을 불끈 쥐었다. 홈런이었다. 그것도 고교야구 사상 3번째 3연타수 홈런이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이날 휘문고는 박정혁의 3연타수 홈런을 발판삼아 공주고를 8대 5로 꺾고 8강에 올랐다. 하지만, 박정혁의 홈런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4일 뒤 열린 광주진흥고와의 8강전에서도 2회 첫 타석에서 좌중간 담장을 넘기는 대형 홈런을 때려냈다. 박정혁은 자신의 홈런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묵묵히 루를 돌던 평소와는 달리 1, 2, 3루를 돌고는 껑충 뛰며 홈플레이트를 밟았다.
다음날 신문엔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사가 빠짐없이 실렸다. ‘휘문 박정혁, 고교야구 사상 첫 4연타수 홈런 기록’
그러나 이때만 해도 4연타수 홈런의 박정혁과 3연타수 홈런을 맞은 박찬호는 자신들의 운명이 10년 뒤 어떻게 바뀔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스포츠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박정혁 휘문고 2학년 재학 중이던 박정혁. 사진 맨 왼쪽이 류택현, 사진 가운데가 김형표(전 원음방송 해설위원). 김형표의 좌측이 박정혁이다
박정혁은 1970년 12월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국가대표 육상선수 출신의 대표팀 육상코치, 어머니는 투창선수 출신의 여중 체육교사였다. 스포츠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박정혁은 부모님의 골격을 그대로 빼닮았다. 어렸을 때부터 다른 아이들보다 체구가 컸다. 운동신경 역시 타고나 달리기 경주에서 서너 살 많은 아이를 쉽게 따돌렸다. 반포초등학교에서 육상선수로 뛴 건 그래서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다.
박정혁은 달리기를 잘했지만, 공 던지기에도 능했다. 6학년 때인 1983년 전주에서 열린 전국소년체육대회에 '공 던지기'부문 서울시 대표로 참가해 금메달을 땄다. 아버지는 아들이 육상선수로 대성하길 바랐다. 주위에서도 육상선수로 뛸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박정혁의 생각은 달랐다.
그의 눈엔 언제부터인가 야구 유니폼이 말도 못하게 멋있어 보였다. 온종일 트랙을 달려야 하고, 허공을 향해 공을 던져야 하는 육상보단 그라운드 위에서 치고, 달리고, 던지고, 잡는 야구가 더 매력적이었다.
결국, 박정혁은 부모를 설득해 휘문중 1학년 때부터 야구에 입문했다. 초교 때부터 선수로 뛴 또래 아이들보다 2, 3년이 늦은 시작이었다. 그러나 박정혁에게 야구는 천생 운명이었다. 정식 선수가 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천부적 타격 재능을 선보이며 주전 자리를 꿰찼다. 특히나 장타력이 돋보였다.
박정혁은 중 1때부터 숱하게 학교 유리창을 깼다. 원체 힘이 좋다 보니 풀스윙을 했다 하면 100m밖에 있는 4층 교실 창문까지 타구가 날아가게 마련이었다. 그즈음 수업 중 갑자기 유리창이 깨진다면 그건 십중팔구 박정혁의 홈런 때문이었다.
전 OB 투수였던 김경원(현 경찰청 투수코치)은 당시 보성중 투수였다. 안정된 투구폼과 강속구로 ‘초(超)중학급 투수’로 불렸다. 하지만, 중학시절엔 그런 김경원도 박정혁은 벅찬 상대였다.
"같은 학년이었지만, 중학 시절 박정혁은 우리보다 월등히 힘이 셌다. 그래서 또래들 사이에서 '괴물'로 통했다. 나도 중학교 땐 괴물에게 숱하게 홈런을 맞았다."
이즈음 박정혁을 눈여겨보던 이가 있었다. 휘문고 안계장 감독이었다. 선린상고-고려대 출신의 안 감독은 모교 출신이 사령탑을 맡던 휘문고의 전통을 깼다. 그만큼 능력이 뛰어났고, 이력도 독특했다.
1973년 전남고 야구부를 창단한 안 감독은 당시 교사였다. 1965년 재일교포 야구단이 방문했을 때 고교 대표팀에 뽑힐 정도로 뛰어난 기량을 뽐냈지만, 대학 졸업 후엔 체육과는 상관없는 생물교사로 근무했다. 전남고 야구부 감독을 맡았을 때도 그는 생물 교사직을 병행했다.
전남고 야구부에서 그가 배출해낸 대표적인 선수가 바로 이순철(MBC SPORTS+), 김태업(전 해태)이었다. 두 선수는 1978년 전남고 야구부가 해체하며 광주상고(현 광주 동성고)로 전학갔다. 안 감독은 1981년부터 1984년까지 배재고 감독을 맡아 노찬엽(전 LG)이 성장하는데 도움을 줬다. 그리고 1985년부터 1987년까지 선린상고 사령탑을 역임했다. 선린상고 감독 시절엔 이병훈(KBS N 해설위원), 송구홍(LG 2군 코치) 등을 발굴했다.
전통의 명문이었지만, 휘문고는 전국대회 우승에 목말라 있었다. 봉황대기를 앞두고 단체 사진을 찍은 휘문고 선수들 |
그런 안 감독이 1987년부터 휘문고 사령탑을 맡은 덴 이유가 있었다. 휘문고 야구부가 70년 동안 한 번도 우승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 최초의 야구단은 황성YMCA로 알려졌다. 그러나 한국 사립학교 가운데 가장 먼저 야구부를 창단한 곳은 1907년 휘문고의 전신인 휘문의숙이었다. 수많은 독립투사를 배출했던 휘문의숙은 야구부를 창단하자마자 다른 학교들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우수한 운동시설을 갖췄다.
창단 2년 만에 강호 황성YMCA를 꺾은 것도 학교 측이 물심양면으로 야구부를 지원한 까닭이었다. 당시 휘문고의 승리를 '휘승청패(徽勝靑敗)'란 제목으로 알린 황성신문의 기사는 한국 최초의 스포츠 기사로 인정받고 있다.
휘문고보는 1923년 일본 오사카 나루오구장에서 열린 고시엔대회 본선에 진출해 8강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명실 공히 휘문고보는 해방 이전까진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강팀이었다. 그러나 1945년 해방 이후엔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승에 진출해도 정작 우승은 차지하지 못했다.
휘문고가 야구부 창단 80년째에 타교 출신의 안 감독을 영입한 건 그만큼 우승에 대한 열망이 크다는 뜻이었다.
휘문고 감독 취임 후, 안 감독은 휘문중 3학년생들을 그대로 받으면 강팀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휘문중엔 박정혁을 제외하고도 강타자 김신(전 해태)이 있었다. 같은 재단이라, 휘문중 출신은 휘문고로 진학하는 게 관례였기에 안 감독은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갑자기 변수가 생겼다.
2학년 때 선배들의 구타에 마음이 상했던 김신과 동료 학생선수 6명이 휘문고로 진학하지 않겠다고 버틴 것이다. 이들은 야구부 창단을 준비 중이던 한서고로 진학할 계획임을 밝혔다.
결국, 안 감독은 휘문중 주요 선수들을 한서고에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박정혁을 놓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겼다.
"당시 (박)정혁이는 선천적으로 체력이 좋은데다 발도 빨랐다. 과거 이순철을 보는 듯했다. 여기다 인성이 뛰어나고, 근성도 좋아 휘문고로 데려왔다. 1년만 잘 키우면 2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기용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안 감독은 고교 신입생 박정혁에게 혹독한 기초체력훈련을 시켰다. 야구 기술습득보단 야구에 맞는 몸을 만드는 게 우선이라 생각한 까닭이다. 박정혁은 안 감독의 훈련 스케줄을 충실히 따랐고, 2학년 때부터 주전 외야수로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3학년이 되고서 몰라보게 달라졌다.
"고 1때까진 그저 힘 좋은 선수에 불과했다. 2학년 겨울방학 때 동계훈련 차 타이완을 다녀오면서 확 달라졌다. 힘에다 기술이 더해지면서 장타뿐만 아니라 콘택트능력도 크게 향상됐다." 안 감독의 회상이다.
그러나 이때까지 박정혁을 주목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인 전성기가 찾아온 건 고 3이 되고서였다.
4연타수 홈런의 사나이
1989년 타이완으로 전지훈련을 떠났던 휘문고 야구부. 고 최남수 고려대 감독(사진 맨 왼쪽)과 안계장 휘문고 감독(사진 맨 오른쪽)이 보인다. 안 감독이 바로 앞에 앉아있는 이가 박정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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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고교야구는 시쳇말로 '춘추전국시대'였다. 대통령배는 부산고, 청룡기는 동대문상고(현 청원고)가 우승하며 절대 강자가 보이지 않았다. 이때만큼 고교야구 평준화가 두드러진 해도 드물었다.
당시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봉황대기는 그래서 더 우승팀을 예상할 수 없었다. 야구전문가들은 그저 서울세와 부산세가 강할 것이란 예상만 할뿐이었다. 부산세의 대표적인 주자는 부산고였다.
대통령배 최우수선수상을 받은 강상수(LG 스카우트)는 투타에서 발군의 실력을 자랑했다. 마무리 최호원, 유격수 김태균(SK 코치), 외야수 조원우(롯데 코치)도 두각을 나타내며 부산고는 명실 공히 우승 0순위로 꼽혔다. 신진수, 유현승이 뛰는 경남고도 부산세의 대표 주자였다.
서울세는 '불곰' 김경원이 이끄는 동대문상고와 고교 최고의 유격수 유지현(LG 코치)이 버틴 충암고가 주도했다. 탄탄한 조직력과 에이스 장철의 호투가 돋보인 신일고와 김도완의 어깨에 운명을 건 성남고도 서울세를 이끌 다크호스로 꼽혔다.
이때 휘문고는 가능성은 인정받았지만, 우승 후보로 꼽히기엔 무리가 있었다. 앞서 열린 대통령배와 청룡기에서도 연속 1회전 탈락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주눅이 든 휘문고 선수들에게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렸다. 1회전 추첨 결과 상대가 부산고였던 것이다. 더 심각한 건 설령 부산고에 이겨도 다음 상대가 신일고라는 점이었다.
휘문고 2학년생들은 우스갯소리로 "어차피 질 경기 빨리 져서 3학년 선배들이나 안 봤으면 좋겠다"며 전의를 상실한 표정을 지었다. 부산고와의 1회전은 야간경기로 치러질 예정이었다. 당시 대한야구협회는 휘문고와 부산고처럼 명문 고교가 맞대결을 펼치면 팬 서비스 차원에서 야간경기를 치렀다.
야간경기를 앞두고 휘문고 선수들은 학교 운동장에서 타격훈련을 했다. 부산고 선발이 언더핸드 투수임을 고려해 자기 팀 사이드암 투수를 마운드에 올렸다. 일종의 적응훈련이었다.
이날 9번 타자로 내정된 임선동 차례가 왔다. 공교롭게 임선동이 친 공이 파울이 되며 하나 더 치게 됐다. 그때였다. 임선동이 친 두 번째 타구가 동료 선수의 머리에 정통으로 맞은 게 아닌가. 맞는 순간 쓰러진 동료 선수는 갑자기 코를 골며 자는 이상증세를 보였다.
동료가 구급차에 후송돼 중환자실에 들어가자 휘문고 선수들은 새파랗게 질렸다. 이대로 경기를 치렀다간 콜드패를 당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폭우가 쏟아지며 경기는 다음날로 연기됐다.
마침 동료의 상태가 호전됐다는 소식을 들은 휘문고 선수들은 "쓰러진 친구를 위해서라도 꼭 부산고를 이기자"고 결의했다. 동료의 부상으로 의기소침했던 선수들이 하루 만에 동료의 회복을 위해 똘똘 뭉친 것이다.
동료의 부상이 악재에서 호재가 작용하며 팀 분위기는 금세 바뀌었다. 강호 부산고를 접전 끝에 5대 4로 꺾으며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당시 야구계는 "부산고가 방심한 바람에 졌다"며 휘문고의 집중력보단 부산고의 나태함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2회전 신일고와의 경기는 달라진 휘문고의 면모를 보여준 한판이었다.
휘문고는 3회 신일고 조태상에게 선제 2점 홈런을 맞고서 휘청했다. 그러나 4회 유동한의 홈런으로 1점을 따라붙으며 추격의 고삐를 당겼다. 장철의 구위에 눌려 6회까지 이렇다 할 돌파구를 찾지 못한 휘문고는 7회 기회를 잡았다. 1사 1루에 타석에 4번 타자 박정혁이 들어선 것이다.
부산고전에서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한 박정혁을 신일고 벤치는 정면승부하도록 했다. 그러나 실수였다. 박정혁이 장철의 속구를 받아쳐 역전 2점 홈런을 터트린 것이다. 순식간에 3대 2로 역전한 휘문고는 임선동의 호투에 힘입어 5대 2 승리를 거뒀다.
강호를 차례로 꺾으며 휘문고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3회전 상대는 2회전에서 동대문상고를 3대 1로 이기며 대회 최대의 이변을 연출한 공주고였다.
“3회전에서 만난 공주고는 이전까지 전국 무대에서 보지 못한 낯선 팀이었다. 공주고 선발 박찬호도 당시까진 공주 촌놈일 뿐이었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박찬호를 알지 못했다. 부산고, 신일고를 격파하며 16강까지 오른지라, 우리는 무서울 게 없었다. 무엇보다 정혁이 형의 컨디션이 최고조인 상태였다. 박찬호를 상대로 3연타수 홈런을 쳤을 때 다들 놀랐지만, 우리가 전혀 놀라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정혁이 형이면 4연타수 홈런도 칠 수 있다는 게 우리의 생각이었다.” 박정혁의 1년 후배 A 씨의 회상이다.
4연타수 홈런을 친 뒤 홈플레이트를 밟는 박정혁 |
박정혁의 홈런포가 폭발하며 휘문고는 공주고마저 제압했다. 4일 뒤에 열린 광주진흥고와의 8강전도 이미 분위기는 휘문고로 기울어져 있었다. 박정혁은 2회 선제 홈런을 쏘아 올리며 고교야구 사상 최초의 4연타수 홈런과 팀 승리를 동시에 이끌었다.
그러나 휘문고의 파죽지세도 대전고와의 4강전이 마지막인 듯했다. 6회까지 5대 1로 앞서던 휘문고는 7회 2점, 8회와 9회 각각 1점씩을 내주며 동점을 허용했다. 대전고 투수진을 고려할 때 연장에 돌입한다면 승리를 자신할 수 없었다. 특히나 대전고 투수의 구위가 무척 좋았다.
9회 말 선두타자로 나선 박정혁은 심호흡을 길게 했다. 4연타수 홈런보다 지금 한방이 더 소중할 때였다. 다시 한번 길게 숨을 들이쉰 박정혁은 대전고 투수의 공을 힘껏 받아쳤다.
"깡!"
3연타수 홈런을 쳤을 때와 똑같은 타구음이었다. 박정혁은 1루로 뛰면서 자신의 타구에 눈을 떼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타구는 좌측 담장 뒤의 휘문고 응원석을 향하고 있었다.
"와-"
순간 휘문고 응원석에서 지진이 난 것처럼 커다란 환호성이 들렸다. 휘문고 재학생과 졸업생들은 서로 얼싸안으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랬다. 굿바이 홈런이었다.
박정혁의 대회 6번째 홈런이자 4경기 연속 홈런이 터지며 휘문고는 창단 72년 만에 전국대회 우승을 노리게 됐다.
‘방패’의 위재영 vs ‘창’의 박정혁
봉황대기 동산고와의 결승전에서 위재영의 공에 체크스윙을 하는 박정혁 |
휘문고와 인천 동산고의 봉황대기 결승전은 창과 방패의 싸움이었다. '창'은 4연타수 홈런의 박정혁이었다. 그렇다면 '방패'는 누구였을까. 1회전부터 준결승전까지 마운드를 홀로 지킨 동산고 위재영(전 현대)이었다.
키보다 손가락과 팔이 유난히 길어 '긴팔 원숭이'으로 불렸던 위재형은 전해 열린 황금사자기대회에서 1학년 신분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끈 기대주였다. 시속 145km의 강속구에 칼날처럼 날카로운 슬라이더로 2학년 때부터 '초고교급 투수'로 발돋움한 위재영은 결승전에서도 어김없이 마운드에 올랐다.
야구팬들은 박정혁과 위재영의 맞대결 승자가 결국 우승컵을 안으리라 예상했다. 박정혁의 첫 타석 때 동산고 김학용 감독은 위재영에게 사인을 보냈다. '걸려도 괜찮다'는 사인이었다. 위재영은 반드시 잡아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났다. 그렇다고 순순히 걸릴 그도 아니었다. 위재영은 바깥쪽으로 흐르는 슬라이더를 유인구 삼아 박정혁을 공략했다. 한껏 어깨에 힘이 들어갔던 박정혁은 유인구에 속아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
인천 동산고 에이스 위재영 |
휘문고는 6회까지 3대 2로 앞서다 7회 2타점 결승타를 맞으며 3대 4로 역전패했다. 연투에 지친 임선동이 포수를 봤다가 감독의 사인을 놓쳐, 투수 류택현에게 정면승부를 하도록 유도한 게 화근이었다. 휘문고가 그토록 바랐던 72년 만의 우승은 또다시 훗날을 기약해야만 했다.
혼자 6승을 기록한 위재영은 대회 MVP와 최우수 투수에 뽑혔다. 박정혁은 타점왕과 홈런왕에 오르고, 감투상을 받았다. 비록 우승컵은 안지 못했지만, 박정혁은 고교야구계에서 가장 뜨거운 인물이 됐다. 언론에서 앞다퉈 박정혁을 '차세대 거포', '미래의 홈런왕'이라 부르는 건 더는 놀랄 일이 아니었다.
봉황대기가 끝나고 박정혁은 학교 축제에 하이틴 스타 이미연을 동반했다. 이미연은 박정혁과 반포초교 시절 육상부에서 함께 뛴 죽마고우였다. 이미연의 등장으로 휘문고 학생들은 봉황대기 준우승의 아쉬움을 한꺼번에 쓸어버렸다고 한다.
‘거포’의 힘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1989년 동대문구장에서 열린 한미일 고교야구 친선대회에 참가하는 한국 선발팀에 뽑힌 고교선수들 |
박정혁을 거포 반열에 올린 건 타고난 파워 때문이었다. 고교시절 그의 별명은 '황소'였다. 힘이 세다고 붙여진 별명이었다. 특히나 손목이 매우 발달했다. 손목이 하도 굵어 버스 손잡이에 손이 통과하지 못할 정도였다. 지금도 많은 야구인은 박정혁의 파워를 기억한다. 휘문고 동기 류택현은 팀의 에이스이자, 고교야구의 '넘버 원' 좌완투수였다. 그는 동기인 박정혁의 프리 배팅을 보다가 깜짝 놀란 적이 많다.
"고교 때 학교 운동장 중앙 펜스가 120m가량 됐다. 정혁이가 홈런을 치면 중앙 펜스를 넘기는 건 물론이려니와 25m 높이의 학교 옥상 꼭대기까지 맞췄다. 장사도 그런 장사가 없었다."
1989년 '한·미·일 친선 고교대회'에서 박정혁과 함께 대표팀 멤버로 활동했던 천안북일고 김종훈(삼성 코치)도 비슷한 기억을 하고 있다.
"힘이 엄청나게 좋았다. 쳤다 하면 죄다 홈런이었다.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올까 궁금할 정도였다."
박정혁은 타고난 힘도 좋았지만, 당시로선 드물게 웨이트트레이닝에 열심인 선수였다. 어머니의 권유로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헬스클럽을 다니며 스트레칭과 웨이트트레이닝을 배웠다.
"1980년대 후반만 해도 야구선수에게 웨이트트레이닝은 부상위험이 큰 훈련이었다. 지도자들은 '무거운 걸 들면 안 된다'며 팔굽혀 펴기도 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정혁이 형은 중학교 때부터 웨이트트레이닝에 매달렸고, 스트레칭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다." 박정혁의 휘문고 후배 B 씨의 기억이다.
지독한 훈련보다 효과적인 훈련을 주창했던 안 감독도 선수들의 웨이트트레이닝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그래서일까. 휘문고는 박정혁을 비롯해 김형표, 전형도 등 한방 있는 타자들이 많았다.
고교 때까지 외야수와 투수를 겸했던 박정혁은 대학 진학을 앞두고 타자에만 전념했다. 고 3때 잠시 휘문고 인스트럭터를 맡았던 고 임신근 전 해태 코치는 박정혁의 놀라운 힘을 보고 "무조건 타자로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 박정혁은 투수를 꿈꿨다.
"정혁이는 내심 투수가 되길 바랐다. 하지만, 투수보다 타자가 맞지 싶었다. 그때까지 많은 제자를 키웠지만, 정혁이 만큼 힘이 센 선수는 선린상고 시절의 이병훈밖에 없었다. 정혁이가 '딱' 병훈이 스타일이었다. 거기다 고교시절 팔꿈치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정혁이가 고 3 때 '(류)택현이와 (임)선동이가 있으니 넌 앞으로 타격에만 전념하라'고 일렀다."
안 감독은 '이때 박정혁을 투수로 키웠으면 어땠을까' 하고 후회하곤 한다. 그랬다면 비극적인 사건은 막지 않았을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려대 신입 4번 타자, 불운을 피하지 못하다 고려대에 입학한 박정혁. 박정혁을 잘 아는 이들은 지금의 LG 박병호와 비슷한 타자였다고 입을 모은다. 만약 프로에서 성공했다면 심재학(넥센 코치)급의 파워히터가 됐을 것이라고.
1990년 박정혁은 고려대에 입학한다. 프로 지명이 유력했으나, 고려대 최남수(작고) 감독이 일찌감치 박정혁을 스카우트한 상태라, 프로 스카우트은 별다른 영입작업을 펼치지 않았다.
"처음부터 프로에 갈 생각이 없었다. 정혁이와 정혁이 부모님은 처음부터 대학진학을 바랐다." 안 감독의 회상이다.
박정혁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4번 타자로 기용됐다. 당시 고려대는 임수혁(작고), 마해영(전 롯데), 박계원(롯데 코치) 등 뛰어난 타자들이 많았다. 그런데도 박정혁이 4번을 친 건 그만큼 장타력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최 감독이 박정혁을 특별히 아낀 까닭도 있다.
"야구부원들 사이에서 정혁이는 '최남수의 아들'로 통했다. 냉철한 최 감독님이 유독 정혁이는 참 예뻐하셨다. 막강 고려대 타선에 신입생이 4번을 치는 영광을 얻었지만, 그 때문에 선배들의 시샘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박정혁의 고려대 선배 C 씨의 말이다.
강상수도 고려대 입학과 동시에 주전 투수가 됐다. 고 3때 <주간야구>의 인터뷰에 함께 응한 걸 계기로 박정혁과 친해진 강상수는 "집안이 좋아선지 구김살이 없고, 늘 밝은 친구였다"고 대학 신입생 시절의 박정혁을 떠올렸다.
실제로 박정혁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가 "무척 명랑하고 활달한 이였다"고 말했다. 김경원과 김종훈도 마찬가지다. 두 이는 박정혁을 "유머 감각이 뛰어나고, 까불까불했던 친구"로 기억했다.
"대표팀의 분위기 메이커이자 코미디언이었다. 한번 입을 열면 무척 재밌고 웃겼다. 어두운 구석이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2학년이 되자 박정혁은 주춤하기 시작한다. 친구들에게 "마음먹은 데로 야구가 잘 안 된다"고 털어놓을 정도였다. 그럴 때면 친구들은 "캠퍼스 생활을 그만 즐기고, 야구에만 전념하라"고 농담조로 면박을 줬다. 최 감독은 일시적인 슬럼프라 봤다. 박정혁이 스스로의 힘으로 슬럼프에서 벗어나길 기다렸다.
그러다 일이 터지고 만다. 박정혁 야구인생 최대의 위기가 매우 엉뚱한 곳에서 터진 것이다. 박정혁의 후배 A 씨의 증언이다.
"그날 야구부원들이 학교 합숙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4학년 선배들은 다른 방에 있고, 3학년 선배들이 큰 방에 누워 있었다. 그때 어떤 선배가 정혁이 형을 밀치는 바람에 방에 누워 있던 모 선배에게로 정혁이 형이 떨어졌다. 모 선배가 역정을 내자 정혁이 형이 '제 잘못이 아니라 저 선배가 밀어서 넘어진 것'이라고 대답했다. 말대꾸가 마음에 들지 않아선지 모 선배가 1, 2학년 후배들을 옥상으로 집합시켰다. 현장에 있던 난 속으로 '어이쿠, 큰일 났구나' 했다. 하지만, 정작 큰일이 난 건 다음이었다."
1990년만 해도 대학 운동부의 구타는 일상이었다. 군대와 다를 게 없었다. 아니 군대보다 더 심했다. 모 대학 야구부는 구타가 원체 유명해 신입생들이 그 대학에 가면 지레 겁을 먹고 야구를 그만둘 정도였다. 하지만, 고려대는 그 정도로 심한 대학은 아니었다.
"1991년은 한창 고려대의 성적이 좋을 때였다. 불필요한 구타도 없었고, 선·후배 관계도 어느 때보다 돈독했다. 집합을 건 선배도 '순둥이'로 불릴 만큼 순하고 착한 이였다."
숙소 옥상에 집합한 1, 2학년생들은 선배로부터 엉덩이를 맞았다. 모 선배는 박정혁을 세워놓고 "너만 똑바로 하면 돼!"하고 야단쳤다. 박정혁은 구타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동기들과 후배들이 맞았다고 믿었다.
"선배님, 제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십니까." 박정혁이 항의조로 말했다. 그러나 후배의 항의를 대드는 것으로 생각한 모 선배가 갑자기 흥분해 야구 배트를 들었다.
"이 자식 봐라. 네가 야구를 잘하면 얼마나 잘한다고, 건방지게!" 그리고.
"딱!" 하는 소리와 "앗!" 하는 비명이 동시에 울리며 박정혁이 쓰러졌다.
"선배가 배트로 치려 하자 정혁이 형이 왼팔로 배트를 막았다. 그때 정혁이 형 팔꿈치가 부러진 것 같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모두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박정혁은 병원으로 후송됐다. 진단 결과 예상대로 팔꿈치 뼈가 부러진 상태였다. 학교에선 이 일을 조용히 처리하기로 했다. 박정혁을 가격한 모 선배와 그의 부모가 박정혁의 부모를 찾아와 사과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됐다.
고교시절 라이벌이었던 동대문상고 김경원(사진 왼쪽부터)과 부산고 강상수는 프로에 입문해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뒀다. |
한동안 박정혁은 '선배에게 허릴 맞아 운동을 그만둔 비운의 선수'로 통했다. 하지만, 허리는 중학교 시절부터 좋지 않았다. 휘문중 후배들은 박정혁이 운동기구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걸 자주 목격했다. "왜 그렇게 매달려 있느냐"고 물으면 박정혁은 "허리가 아파서"라고 대답했다. 고려대 신입생 때도 박정혁은 훈련 중 한쪽 손으로 허리를 주무르곤 했다. 누군가 물으면 역시 "허리가 아파서"라고 답했다.
박정혁은 큰 체구에 비해 겁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나 체벌을 몹시 두려워했다. 그래서 중학교 시절부터 선배들도 그에겐 좀체 체벌을 가하지 않았다. 구타로 허리가 다쳤다는 건 사실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허리를 맞나, 팔꿈치를 맞나' 박정혁이 구타를 당한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구타가 선수생활 중단에 어느 정도 부정적인 영향을 준 것도 맞았다.
실제로 박정혁은 팔꿈치 뼈를 잇고자 철심을 박은 후, 재활에 매달렸다. 조만간 회복되리라 믿었던 팔꿈치는 1년이 지나도록 좀체 나아지질 않았다. 이때부터 박정혁의 방황은 시작됐다.
"방황을 많이 했다. 술도 많이 마시고, 야구부에 나오는 날도 줄었다. 감독님도 사정을 알기에 뭐라고 하지 않았다. 공백 기간이 꽤 길어졌다."
그즈음 박정혁의 곁에 있던 이가 단국대 서용빈(LG 코치)이었다. 박정혁은 휘문고, 고려대 동기들보다 서용빈과 더 친했다. 학교는 달랐어도 마음이 맞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당시엔 나도 고민이 많았다. 1, 2학년 때 충분히 주전으로 뛸 자신이 있는데 계속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팔꿈치를 다쳐 방황하던 정혁이와 참 많이 어울려 다니며 서로의 아픔을 달래주려고 노력했다."
3학년이 되자 박정혁은 다시 야구부로 복귀했다. 하지만, 몸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정혁이가 타고난 야구선수라는 덴 이의가 없다. 그러나 천부적 재능에 지나치게 의존한 감이 있었다. 팔꿈치를 다치고, 재활을 열심히 했다면 몸 상태가 더 좋아졌을 거다. 아니 그랬다면 한국 프로야구의 큰 획을 그었을 대선수가 됐을 거다. 지금 생각해도 정혁이가 좀 더 부지런한 선수였으면 어땠을까 싶다." 박정혁의 고려대 동기는 아쉬운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박정현은 천재형 타자였다. 많은 천재가 그러했듯 지나치게 천재성에 의존한 면이 컸다. 중학교 때부터 대학까지 동기들 사이에서 '만만디(주:행동이 굼뜨거나 일의 진척이 느림)'로 불렸고, 선배들로부턴 '절박함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곤 했다. 그래서일까.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조금만 덜 천재였다면…"하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최 감독은 박정혁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박정혁의 실력은 이전과 비교해 현격히 떨어진 상태였다. 좀체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지 못했다. 팔꿈치의 철심도 그대로 박혀 있어 국외로 나가려고 공항검색대를 지나칠 때마다 "삐, 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즈음 안 감독은 학교로 찾아온 박정혁을 만났다. 박정혁은 "팔꿈치가 아프다"며 "운동을 계속할 자신이 없다"고 털어놨다.
4학년이 됐을 때 그는 주로 지명타자로 출전했다. 하지만, 그를 볼 기회는 많지 않았다. 팀 훈련에 자주 빠져 동기들도 그를 보기 어려웠다. 이때까지 박정혁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방황을 거듭하고 있었다. 고교시절 자주 맞대결을 펼쳤던 김경원과 김종훈도 3, 4학년 때는 박정혁을 거의 보지 못했다. 박정혁은 그렇게 4년 만에 ‘고교 최고의 거포’에서 ‘존재감 없는 잊힌 선수’가 되고 있었다.
고교 최대 유망주, LG 연습생으로 프로 무대를 밟다. 1990년 고려대 야구부
1993년 대학을 중퇴하고 OB에 입단한 김경원은 이듬해 부상으로 잠시 2군에 내려갔다. 한번은 2군을 따라 경기도 구리시 LG 2군 연습장을 찾았다가 낯익은 얼굴을 만난다. 박정혁이었다.
“LG에 연습생으로 들어왔단 소식을 듣던 차였다. 직접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한창 훈련 중이라, 긴 대화는 나누지 못했다. 그저 서로의 안부를 묻고 지나쳤다.”
서울고 유지홍 감독은 당시 LG 스카우트였다. 유 감독은 박정혁이 LG에 연습생으로 들어온 사연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박정혁이 고려대 졸업반 때, 어느 팀에서도 지명하지 않았다. 대학 시절 당한 부상의 여파도 있었지만, 프로가 원하던 선수와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그러다 1994년 여름, ‘박정혁을 잘만 만들면 대형타자로 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남수 감독도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당시만 해도 신고선수 제도가 없던 때라, 고민 끝에 '테스트 차원에서 기량이나 점검하자'는 마음으로 연습생으로 입단시켰다.”
여기서 주목할 문구가 있다. ‘프로가 원하던 선수와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다. 박정혁의 꿈은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대회에 나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표팀 경력은 1989년 서울에서 열린 ‘한·미·일 3개국 친선 고교야구대회’에 출전하는 한국 선발팀에 뽑힌 게 전부였다. 그는 고려대 재학 중에도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오랫동안 대표팀 코칭스태프로 활동했던 주성로(히어로즈 이사) 전 인하대 감독은 “박정혁은 힘이 좋아 투수들이 두려워하는 타자였으나, 세련미가 부족하고 기본기가 다소 떨어졌던 선수”라고 평가했다.
“파워는 오히려 프로 선수보다 뛰어났다. 그러나 정확성이 떨어져 ‘공갈포’로 불렸다. 전체적인 플레이도 다소 투박하고, 매끄럽지 못했다. 특히나 수비가 약했다. 아마추어 최고 거포로 불렸음에도 대표팀에 뽑히지 않은 건 그 때문이었다.”
'한·미·일 3개국 친선 고교야구대회'에서 함께 뛰었던 김종훈도 박정혁을 “파워는 무시무시했으나, 수비는 인상적이지 못했던 선수”로 기억했다.
중학 시절 김경원은 ‘괴물’로 불리던 박정혁에게 자주 홈런을 맞았다. 하지만, 고교에 진학하고서는 한방을 맞은 기억이 없다.
“중학교 때는 정혁이가 또래보다 힘이 몇배나 셌다. 하지만, 고교생이 되고선 우리도 힘이 많이 붙었다. ‘힘대 힘’으로 붙어도 절대 뒤지지 않았다. 같은 서울지역이라, 중학교 때부터 자주 맞대결을 펼치다 보니 어떻게 정혁이를 상대해야 하는지도 잘 알았다. 정혁이의 타격 스타일은 이만수 SK 2군 감독님의 판박이였다. 타격폼도 비슷했고, 거포답게 적극적인 타격 성향도 닮았다. 난 이 점을 고려해 철저히 변화구로 승부했고, 효과를 봤다.”
고교시절 박정혁은 정확성이 다소 떨어지는 장타자였다. 맞대결 경험이 적은 지방투수들에겐 강했지만, 위재영, 김경원 등 강속구와 변화구를 적절히 활용하는 영리한 투수들에겐 성적이 좋지 못했다. 가뜩이나 당시 아마추어 선수들은 반발력이 강한 알루미늄 배트를 썼기에 프로 스카우트들은 선수들의 거포 여부를 확인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1990년대 활약했던 한 스카우트는 “전 KIA 내야수 김종국도 광주일고 시절 대통령배대회에서 3연타석 홈런을 쳤다”며 “알루미늄 배트는 빗맞아도 홈런이기 때문에 선수들을 평가할 땐 장타력보단 주로 정확성에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했다.
박정혁은 외야 수비에서도 ‘멀리 던지기’ 선수 출신답게 어깨는 강했으나, 수비 범위와 센스는 다소 떨어졌다. 유 감독이 말한 ‘프로가 원하던 선수와 거리가 멀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단점들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LG는 박정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수비가 어렵다면 지명타자로 성장하면 된다고 기대했다. 박정혁 역시 LG에서 재기를 노렸다. 소원이던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국제대회엔 출전하지 못했지만, 두 번째 꿈이던 훌륭한 프로야구 선수가 되는 것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박정혁을 향한 세간의 평가는 냉정했다.
LG 정성주 스카우트는 당시 2군 전력분석요원으로 활동하며 구리 2군 훈련장을 자주 찾았다. 한번은 메이저리거 박찬호에게 3연타수 홈런을 때린 박정혁을 다시 보려고 유심히 그의 경기를 지켜봤다. 결론은 실망이었다.
“고교 시절의 위력적인 타격이 아니었다. 과연 지금 실력으로 1군 무대를 밟을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다.”
마음처럼 실력이 나오지 않자, 박정혁은 조급해했다. 이내 다시 방황이 시작됐다. 당시 박정혁과 함께 2군에 있던 모 선수는 “정혁이 형을 바라보는 구단의 시선이 매우 차가웠다”고 회상했다.
“실력도 생각보다 떨어졌지만, 괴로운 마음에 술을 마시던 정혁이 형을 구단 관계자들은 못마땅해했다. 전날 음주를 한 뒤 연습에 참여했다가 지적을 당하기도 했다. 가뜩이나 연습생 신분이었던 탓에 정혁이 형의 팀 내 입지는 갈수록 좁아졌다.”
박정혁이 LG에 연습생으로 들어온 반면, 절친한 친구였던 서용빈은 LG에 정식 입단했다. 하지만, 입지가 약하긴 마찬가지였다.
“신인 2차 지명회의에서 41번째로 LG에 지명됐다. 워낙 지명 순번이 낮아선지 입단 때 나를 주목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꼭 살아남겠다’는 절박함과 오기로 입단 첫해 스프링캠프에서 하루 3시간만 자고 훈련에 매달렸다. 하루는 장훈 선생이 LG 타자들을 지도하러 들렸다. 다른 선수들에겐 모두 조언을 들려주는데 나만 건너뛰었다. 속으로 ‘저분도 내 지명순위를 아나’ 싶었다. 그러다 하도 약이 올라 ‘왜 저만 조언을 해주지 않으시냐’고 했더니 ‘넌 타격폼에 특별한 단점이 없다’고 답하셨다. ‘죽어라’ 노력한 게 빛을 내는 순간이었다.”
서용빈은 순전히 자신의 노력으로 팀 내 입지를 강화해나갔다. 그리고 데뷔 첫해 LG의 주전 1루수를 꿰차며 그해 4월 16일 롯데와의 경기에서 신인 최초로 사이클링히트를 기록했다. 서용빈이 '승승장구'할수록 박정혁과 만나는 시간은 줄었다.
박정혁은 6개월이 채 못돼 LG를 떠났다. 이후 그가 다시 야구를 시작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박정혁의 등 뒤에서 형광등 스위치를 끄듯이 그의 야구인생은 그렇듯 조용히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퇴 이후의 삶
고교시절 투수와 타자를 겸했던 박정혁 |
LG에서 퇴단한 박정혁은 야구를 그만뒀다. 그리고 시작한 일이 스포츠 매니지먼트였다.
“1995년인가 느닷없이 정혁이가 찾아와 ‘이제부터 스포츠 에이전시 일을 한다’고 했다. 그러냐고 했더니 ‘앙드레 김 패션쇼에 스포츠 스타가 모델로 참여해야 했는데 네가 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결국, 사정상 패션쇼에 참가하지 못했다. 나중에 정혁이가 ‘우리 회사와 에이전트 계약을 맺자’고 해 흔쾌히 수락했다.”
서용빈은 스포츠 에이전시로 변신한 박정혁의 첫 고객이었다. 박정혁은 양복을 빼입고 야구장을 자주 찾았다. 다음은 LG 정성주 스카우트의 회상이다.
“광주구장에서 열린 무등기대회에도 찾아오고, 동대문구장에도 자주 등장했다. ‘괜찮은 선수가 있으면 소개를 해달라’고 했다. 물어보니까 ‘스포츠 에이전시 활동을 한다’고 했다. ‘아무쪼록 일이 잘됐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성과는 거의 없는 듯했다.”
당시 국내엔 스포츠 매니지먼트사가 우후죽순처럼 생겼다. 박정혁은 모 파이낸셜사에 스포츠 매니지먼트 팀장으로 입사한 터였다. 그러나 매니지먼트 시장은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 ‘스포츠 매니지먼트’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할 때였다. 사람들도 박정혁을 ‘스포츠 에이전시’보다 ‘브로커’쯤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결국, 회사 사정이 나빠지며 박정혁은 회사를 옮겼다. 하지만, 스포츠 에이전시에 대한 꿈은 버리지 못했다.
“옮긴 회사에서도 스포츠 매니지먼트와 관련된 일을 했다. 그때도 정혁이가 찾아와 ‘우리와 계약을 맺자’고 해서 두말하지 않고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역시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듯했다.”
서용빈은 박정혁의 첫 번째이자 두 번째 그리고 마지막 고객이었다.
박정혁은 불행하게 야구를 관뒀지만, 야구나 그 누구를 원망하는 법이 없었다. 항상 밝은 표정과 긍정적인 자세로 삶을 대했다. 야구의 끈도 놓지 않았다. 그는 1989년 봉황기에 출전했던 동기와 후배들을 모아 사회인야구팀을 조직했다. ‘휘문 마니아’라는 이름도 자신이 직접 지었다. 1부리그 대회에서 준우승까지 하는 등 휘문 마니아는 꽤 강팀이었다.
박정혁의 휘문고 후배 A 씨는 1994년 청룡기대회 결승전을 보려고 동대문야구장을 찾았던 일을 떠올렸다.
“LG에서 퇴단한 정혁이 형과 둘이서 동대문야구장을 찾았다. 휘문고와 장충고의 청룡기 결승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당시 휘문고엔 김선우(두산), 손지환 등 뛰어난 후배들이 많았다. 우리가 못 이룬 전국대회 우승을 후배들이 이뤄주길 바랐다. 결국, 휘문고의 우승이 확정되자 정혁이 형과 끌어안고 둘이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평생 체증이 한순간에 풀리는 기분이었다.”
1999년 박정혁은 결혼을 준비했다. 자신이 하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박정혁의 대학친구는 그즈음 박정혁과 술잔을 기울이다 TV에서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경기를 보게 됐다. 당시 박찬호는 ‘코리안 특급’이라 불리며 LA 다저스의 주축 투수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친구는 박정혁이 고교시절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 알지 못했다.
TV를 보던 박정혁은 “쟤가 나한테 10년 전 3연타수 홈런을 맞았던 친구”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친구는 믿지 않았다. 박정혁도 세월의 무상함이 믿기지 않는 듯 혼잣말로 “지금은 완전히 역전됐네…”하며 말끝을 흐렸다.
공교롭게도 그날 중계에서 박찬호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페르난도 타티스에게 메이저리그 사상 최초로 한 이닝에 한 타자에게 2번의 만루 홈런을 허용하는 진기록의 주인공이 됐다. 다시 TV로 눈을 돌린 박정혁은 그 장면을 보고는 뜬금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찬호야, 괜찮아. 넌 잘할 수 있어”하고 격려했다. 그의 표정엔 진심이 가득했다고 한다.
그해 12월 서용빈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전화를 받고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발을 눈물로 적실 뿐이었다. 강상수와 유택현도 같은 시간 전화를 받았다. 두 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길고 긴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바라봤다.
“한창 훈련하고 있는데, 조원우에게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가만히 있다가 ‘정혁이가 죽었다’고 했다. 정혁이가 죽었다니,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강상수처럼 유택현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스포츠 에이전시 일을 열심히 한다는 소식을 듣다가 부음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한걸음에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부모님이 오열하고 있었다. 영정 사진을 보고서야 정혁이가 영원히 떠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용빈은 병원에 가지 못했다.
“당시 아내가 임신한 상태였다. 개인적으로도 병역문제 때문에 몹시 힘들던 시점이었다. 도저히 장례식장에 갈 수 없어 정혁이 어머니께 전화로 위로를 드렸다. 어머니가 흐느끼시는 걸 듣고 내 마음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박정혁은 새벽 귀갓길에 서울 소재 모 호텔 앞의 횡단보도를 건너다 변을 당했다. 후배 A 씨는 담담히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횡단보도를 건너던 정혁이 형이 노트북을 떨어트렸다. 그 횡단보도는 언덕 바로 위에 있어 사고 위험이 컸다. 노트북을 주우려고 허릴 굽힌 사이 개인택시가 신호만 보고, 정작 정혁이를 못 본 모양이었다.”
서울 강남병원에 이송됐지만, 박정혁은 깨어나지 않았다. 성남 화장장에서 이승과 마지막 작별을 한 박정혁은 지인들의 애도 속에 한 줌의 재가 됐다.
야구부 후배 A 씨는 “휘문고 동창들이 모교에 모이면 지금도 1989년 봉황대기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그 대목에서 누군가 꼭 ‘그때 홈런 잘 치던 분은 요즘 어디서 뭘하느냐’고 묻는다”고 했다. 그럴 때면 A 씨는 대답을 뒤로 한 채 창밖으로 눈을 돌린단다. 그리고 학교 운동장을 한없이 바라본다고 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 자신이 있는 쪽으로 홈런을 날리는 한 사내가 보인다고 했다.
그 옛날 그 박정혁은 지금도 '추억'이란 야구장에서 묵묵히 자신만의 플레이를 하고 있다.
이름 : 박정혁(朴正赫)
생년월일 : 1970년 12월 13일~1999년 12월
체격 : 179cm / 86kg
이력 : 반포초-휘문중-휘문고-고려대
통산성적 : 1989년 봉황대기대회 타점왕, 홈런왕, 감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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