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나 (동국대 교수, 영화평론가)
다시 연말이다. 어떤 하루는 지루하고 진부하건만 한 해는 빨리 가버린다는 기이한 느낌이 엄습해온다. 여기저기 송년 모임이 열리고, 이 해가 가기 전 꼭 보자는 안부가 오간다. 보고 싶은 얼굴들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그런 이들을 다 만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그것조차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일상에 갇힌 자신이 한심해 보인다. 그래서 약속한다. 새해맞이로 만나자, 라고.
지난 주말 친구들과 송년회를 했다. 살다보니 가족과 떨어져 사는 친구들이 상당수 있다. 나도 그중 하나이다. 한 친구가 말했다. “먼 거리가 좋은 관계를 만든다.” 흔히 듣던 말인데도 모두들 명언이라며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들었다. 아무리 좋은 사이여도, 혈연가족이어도 매일 같이 붙어 있으면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다는 것이 요지였다. “자식을 사랑할수록 멀리 떠나보내라”, 라는 옛말에도 그런 취지가 숨어 있을 법하다.
“인생이란 홀로됨과 같이함을 오가는 나룻배”
‘따로 또 같이’라는 관계의 미학은 살수록 소중하게 다가온다. 오래 전 만났던 알베르 까뮈의 말이 생생하게 가슴에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인생이란, 홀로됨과 같이함을 오가는 나룻배.” 까뮈의 <이방인>에 매혹됐던 시절이라, 정교한 시처럼 운율을 맞춰 논하는 삶의 철학적 관찰이 멋져 무심결에 외어버린 말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를수록 이 표현이 ‘따로 또 같이’라는 삶의 기술의 핵심을 깨우쳐주는 화두로 작동한다. 까뮈의 말 한마디에 영감을 받아 실천하려는 지행합일 각오를 하는데 이십여년이 걸린 것이다. “어리석은 나여!” 헛웃음이 나온다.
그런 와중에 영화 <클라라>를 보았다. 슈만과 브람스와 사랑했던 여자, 19세기 낭만주의 음악천재들의 격렬한 로맨스. 영화를 보기 전 내가 알던 전부는 이 정도였다. 그런데 실화에 기댄 <클라라>를 보니 온갖 감회와 상념이 피어난다. 결혼제도로 가둘 수 없는 사랑. 따로 있으면서도 늘 같이 한 브람스와 클라라의 음악동반 로맨스. 우울과 광기를 일용할 양식처럼 겪어내야 했던 슈만과 클라라. 무엇보다 여자가 공적 존재가 될 수 없던 억압적 시대, 음악 로맨스로 구원을 모색했던 주체적 여성 클라라가 구사한 관계의 미학은 한 세기를 넘어 심장을 울린다.
영화를 만든 헬마 산더스 브람스감독은 브람스의 후손이자 70대 여성이다. 오랜 세월을 살아낸 감독 특유의 깊은 시선이 잡아낸 인간 탐구는 ‘따로 또 같이’라는 관계의 미학을 낭만적 선율로 들려준다.
반세기 이상 분단 휴전국이라는 처참한 상황에 놓였건만 경제 선진국만 되면 우리만 따로 행복하게 살듯이 보이더니, 글로벌 한국을 내건 남쪽에 포탄이 떨어졌다. 그리하여 20대 전쟁세대가 탄생했다는 비상시국 진단이 내려진다. 먹고살 것조차 없는 북쪽을 압박하니 특유의 벼랑 끝 전술이 나온 것이라는 분석, 게다가 올해가 가기 전 뭔가를 날리겠다는 북쪽 경고에 불안과 우울이 송년 분위기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그간 분단에 대해 별 생각없이 살았던 20대 학생들은 이 불안감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묻는다.
‘같이함’이 없는 ‘따로’는 외로운 자멸을
‘따로 또 같이’란 관계의 미학은 개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일까? 보고 싶어도, 함께 하고 싶어도 당장은 같이 못하더라도 언젠가 함께 할 존재가 어딘가에 있다는 위안. 따로 있어도 같이 한다는 전제하에 삶의 외로움을 이겨내는 지혜. 이런 덕목은 개인사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리라. 칼 세이건 원작의 영화 <콘택트>는 지구 인류의 외로움을 외계와 함께하는 관계의 미학으로 풀어내는 천문학적 지혜를 보여준다. 북쪽을 증오하든, 훗날 통일 모국의 동반자로 보든 따로놀기로 대해선 안 된다는 교훈이다.
‘같이함’이 없는 ‘따로’는 지구이건, 남한이건, 개인차원에서건 외로운 자멸을 동반한다. 우주적 생명체 법칙이 남북분단 관계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라는 우둔한 증오감을 ‘따로 또 같이’라는 관계의 미학으로 풀어내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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