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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26일 화요일 새벽기도회 ♣
성경:역대하19:1-4(구679P)
제목:여호사밧의 경건심
할렐루야! 오늘도 말씀을 사모하시고 말씀을 묵상하시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시고 기도하시는 기도제목도 응답해 주실줄로 믿습니다.
***{제목}***“여호사밧의 경건심”
“아합에게 화(禍)를 예언한 오직 한 사람”
1.하나님의 뜻대로만 행합니다.
2.환난과 핍박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3.세상과 조금의 타협도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미가야 선지자는 그 시대에 참된 선지자로서는 하나뿐인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했고,어떠한 환난과 핍박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세상과 조금의 타협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미가야 선지자처럼 이 세상에 난무하고 있는 미혹의 영들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만을 굳건히 전하는 오직 한 사람이 됩시다.
오늘날은 미가야 선지자 같은 오직 한 사람이 절실히 필요한 때임을 명심하여 하나님의 진리가 왜곡되지 않고 바르게 전파될 수 있도록 많은 기도와 전도를 해야 합니다.
설혹 그 일을 하다 핍박을 받는 일이 생긴다 할지라도 미가야 선지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호사밧의 경건심"(역대하 19:1-4)
Ⅰ. 하나님은 여호사밧에게 큰 은총을 보여주셨습니다.
1. 즉 여호사밧은 아합과 함께 출전했던 위험한 싸움터에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 전쟁은 여호사밧에게도 매우 큰 희생을 치른 것 같습니다. "그가 평안히 그 궁으로 들어가리라" 고 했기 때문입니다(1절).
이것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1). 자기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컸습니다.
그는 위급한 사태에 처했었으나, 평안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평안히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오가는 길을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보통 때보다 더 큰 위험 속에 처했었더라면, 평안히 돌아올 수 있었음을 특별히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와 죽음 사이에는 일보의 차이밖에는 없으나, 우리는 아직도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2). 그는 자기가 마땅히 겪어야 할 운명보다는 더 좋은 은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의무를 벗어나서 하나님과 자기 양심에도 잘 부합되지 않는 전쟁에 나아갔었으나 이제 평안히 돌아왔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실수한 것을 책잡는 데 극성을 피운다거나 우리가 그의 보호에서 벗어난다고 하여 즉시 피난처를 철수시키는 그런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3). 그는 시체가 되어 집으로 돌아 온 이스라엘 왕 아합보다는 더 은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비록 여호사밧이 아합에게 "나는 당신과 일반이요" 라고 말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구별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의로운 자의 길" 을 알고 인정하고 계시며 그와 동시에, "사악한 자의 길은 멸망하게 되리라" 는 것을 또한 알고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긍휼을 깨닫는 것은 지극히 큰 의무입니다. 싸움터에 함께 나온 이 두 왕 가운데서 "하나는 택함을 받고 다른 하나는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은 피 속에서 집으로 돌아왔으나 또 한 사람은 평화 속에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2. 그는 아합과 연합하였기 때문에 책망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잘못을 깨달아 고칠 수 있도록 너무 늦기 전에 그 잘못을 깨닫게 해주는 것은 커다란 은총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책망을 가한 선지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후였습니다.
그의 아버지 하나니도 바른 예언을 하다가 아사왕에 의해 옥에 갇힌 일이 있었던, 지난 통치 시대의 훌륭한 선지자였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핍박당한 일로 그의 아들 디모데를 좌절하지 않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그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었습니다(딤후 3:11, 14).
(1). 그 선지자는, 여호사밧이 아합과 연합하여 매우 그릇된 일을 행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훌륭한 왕이 악한 자를 돕고, 그들에게 우정의 손길을 뻗쳐 도움을 주는 것이 가하나이까?"
혹은,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나이까? 즉 하나님께서 멀리 둔 자를 당신의 가슴 속에 품고 있으려 하나이까?"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들" 은 어둡고 사악한 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롬 1:30).
제2계명은 우상 숭배자들을 그렇게 비판합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런 자들을 기뻐하거나 친밀히 지내지 않습니다. 다윗은,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지 아니하나이까?"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시 139:21, 22).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고귀하게 된 자들은 자신들을 비천하게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된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2). 그 선지자는, 그 하나님께서 그가 이렇게 행한 것을 불쾌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회개하여 그와 화평을 이루지 아니하면, 더 큰 화가 미치리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장(章)에 기록된 바와 같이, 그는 자기에게 상관되지 않은 분쟁에 끼어들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책망으로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만일 싸움을 좋아한다면, 실컷 싸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합의 집에 뿌려진 큰 재앙의 씨는 그가 그 집과 가까이 지낸 것에 대한 의로운 심판이었습니다.
(3). 그러나 또한 그 선지자는 칭찬하는 일도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누구를 책망할 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왕에게 선한 일도 있으니(3절), 비록 하나님께서 왕을 불쾌히 여기셨다 하더라도, 그는 당신을 버리지 않으며 앞으로도 버리지 않을 것이옵니다" 고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충성된 마음을 가지고 우상 숭배를 미워하며, 진심으로 하나님을 구한 것은 훌륭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비록 지금 하나님을 진노케 했더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받아들이셨으며, 계속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격려하셨습니다.
Ⅱ. 하나님께서 여호사밧에게 이러한 은총을 베푸셨으므로, 그는 보답으로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선지자에게 취하였던 것과 같은 태도를 가지지 않고 그 책망을 잘 받아들여 복종했습니다.
"의로운 자가 나를 죽이는 것은 친절이 되리라."
이러한 견책이 어떠한 영향을 그에게 주었는지 살펴봅시다.
1. 그는 "예루살렘에 거하며" (4절), 국내의 일에 전념하면서, 아합을 방문하는 것과 같은 위험을 무릅쓰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는 더욱 지혜로와 질 것이며", 경고를 받아들일 것입니다(잠 9:8, 9).
2. 그가 아합을 찾아 갔던 것을 속죄하기 위해(이런 표현이 타당하다면), 그는 경건하게 자기 자신의 나라를 둘러보았습니다.
그는 손수 남쪽에 있는 브엘세바에서부터 북쪽에 있는 에브라임 산지까지 "민간에 순행하며 저희를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즉 그들을 올바로 회복키 위해 최선을 기울였습니다.
(1). 그는 선지자의 말을 자기가 전에 백성들을 바로 잡으려 한 일이 하나님을 매우 기쁘게 했다고 말하고 있음을 깨닫고, 아직 다 끝내지 못한 그 일을 다시 착수했습니다.
칭찬이 우리로 하여금 이처럼 우리들의 의무를 속히 이행하게 하며, 우리는 칭찬을 받을수록 더욱 힘을 내어 잘 행하려 한다면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2). 아마도 그는 자기가 최근에 그 자신이 우상을 숭배하는 아합의 집과 또 이스라엘 나라와 친분을 맺은 일이 자기 나라에 나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들을 교화시키던 왕까지도 우상 숭배자들과 그토록 친밀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 유다의 많은 백성들은 용기를 얻어 다시 우상 숭배에 집착하게 되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사밧 왕은 그들을 다시 바로잡기 위해 더 많은 힘을 쏟아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우리가 우리의 믿음과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상하게 한 것을 복구하기 위해 우리는 최선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죄악에 빠지거나 그 속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자들에게 우리의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자신을 소생시킬 수 있도록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삶의 기준이 분명하십니까"
어떤 시골에 아주 믿음이 좋은 집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송아지 두 마리를 얻었습니다. 잘 키웠습니다. 너무 너무 탐스러워서 부부가 의논했습니다.
"여보 하나님 은혜에 너무 감사한데 한 마리는 하나님께 드립시다." 그래서 한 마리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밖에서 남편이 일을 하고 있는데 그만 두 마리 가운데 송아지 한 마리가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뛰어 들어왔습니다.
"여보!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어 버렸어." 아내가 묻습니다. "아니, 우리가 어느 것을 하나님 것으로 지정하지도 않았는데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알아요." "척보면 알 수 있어.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었어. 우리 송아지는 괜찮아요".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자신에게 만족을 주는 쪽으로 해석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인 일반적인 인생입니다. 즉 자기 지향적 인간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에게 초점을 맞추며 살아갑니다. 그런가 하면 환경 지향적 인간도 있습니다.
외적조건에 의해서 지배되고, 주도되어 지는 사람입니다. 남이 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소외되는 것 같고 자존심 상하여 견딜 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어떤 부류의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둘 다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 지향적인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신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판단하는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기준이 분명한 사람들입니다. 삶의 기준이 자기 이익과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판단 기준이 분명합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유다 왕 여호사밧은 분명한 삶의 기준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삶의 기준이 분명하길 원하십니까?
첫째로 삶의 목적이 하나님을 찾는 기준으로 분명해야 합니다
세상의 석학중의 석학이라는 파스칼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누나가 한 사람 있었는데 수녀가 되었습니다. 파스칼은 외롭게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많은 것을 발명하면서 학문에 몰두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밖에 없는 누나가 치료할 수 없는 병에 걸려 죽어갑니다. 파스칼은 온 세상이 어두워지고 세상이 꺼지는 절망감을 느낍니다.
그는 어느 날 밤 "하나님이 있다면 한번 기도해보자"하고 결단하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죽어가는 누나의 침상을 붙잡고 친구와 함께 밤을 새우면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있다면 누나를 살려주십시오 그리하면 제가 이 두뇌와 지식을 바쳐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누나가 깨끗하게 나은 것입니다. 그 후 파스칼은 자기의 지식과 학문을 하나님을 증거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사람들은 철학자를 보면 놀란다! 그러나 철학자는 그리스도를 보면 놀란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찾아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에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나옵니다. 나라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다스려 강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부귀 영화가 극에 달하자 북 이스라엘 아합왕의 딸과 자기 아들을 정략적으로 결혼 시켰습니다.
그런데 며느리는 하나님을 좇지않고 이방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사람입니다. 여호사밧은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나라를 자신에게 맡기셨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과는 관계없이 자신의 통치에 유리한 쪽으로 결정하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한번 잘못 찾아 간 길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잘못된 길로 빠져들게 합니다. 목적지와는 멀어집니다.
이스라엘 왕이 연합군을 만들어 전쟁을 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있는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뜻을 미가야 선지자에게 물어 봅니다. 안된다고 할 때 단호하게 결단하지 못하고 이방 선지자의 말을 따라 전쟁터에 나갑니다.
그 결과 전쟁에서 패하고 여호사밧은 겨우 목숨만 살아 나왔습니다. 얼마나 수치스러웠겠습니까?
이 때 예후 선지자가 그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오늘 본문 2절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좇지 않음으로 진노가 임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말씀을 겸허하게 받아들입니다. 다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합니까? 오직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찾는 삶입니다. 돈을 찾는 삶이 아닙니다. 명예를 찾는 삶이 아닙니다. 권력을 찾는 삶이 아닙니다.
문제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삶입니다. 이게 신앙인의 삶입니다.
인생은 한 번 사는 것입니다. 누구를 찾으며 인생을 살겠습니까? 무엇을 찾으며 인생을 살겠습니까?
하나님을 찾는 것이 가장 행복한 길이고 하나님을 찾으며 사는 길이 가장 기쁘게 사는 길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삶의 동기가 하나님을 위해 사는 기준으로 분명해야 합니다
삶을 살아가게 될 때 원칙을 바로 세워야합니다. 인기를 위한 삶, 명예를 위한 삶, 부귀 영화를 위한 삶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호사밧왕은 실패를 통해 뼈져린 경험을 하고나서 나라를 순행하면서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이 살길이며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나라도 사회도 가정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께 돌아가는 길이 사는 길입니다.
나만을 위해 사는 삶, 내 가족만을 위해 사는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주를 위해 살겠다는 기준을 분명히 가지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주신 건강, 나에게 주신 재물, 나에게 주신 재능, 나에게 주신 지식, 나에게 주신 시간을 주를 위해 사용하겠습니다’하며 기준을 분명히 해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죽는 것 아닙니다. 내가 손해 보는 것 아닙니다. 살아 있는 동안, 주어졌을 때, 나의 마음대로 할 수 있을 때 주를 위해 살아가는 인생이 되시길 바랍니다.
셋째로 삶의 방법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기준으로 분명해야 합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 땅에 성취하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 가정에, 내가 소속된 교회에, 내가 일하는 일터에 내가 머무르는 곳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기준이 분명히 서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자꾸 내 방법, 세상의 방법을 고집하지 마십시오. 성공적인 인생은 하나님의 방법을 택할 때입니다.
여호사밧 왕은 판사들을 임명하면서 삼가 행하라고 말씀을 합니다. 그 삼가 행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대리하여 재판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재판하고자 하시는 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예화)
찬송가 425장(통217장)을 지은 분은 미국의 아델라이데 폴라드여사입니다. 당뇨병으로 고생하다가 안수받고 건강해졌다고 합니다. 그녀는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려고 했는데 기금 마련에 실패했습니다.
어느날 기도 시간에 어떤 할머니가 기도하는데 "주님, 우리 생애 어떤 일이 일어나도 좋사오니 주님의 뜻과 섭리만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때 감동을 받아 이 찬송을 작사하였다고 합니다. 옳습니다. 우리 생의 길에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지만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그것이 성공이고 그것이 우리가 사는 의미인줄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렇게 살다 인생 끝나는 것이 아닌가하고 초조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매순간 주어지는 생활 속에서 주님의 뜻을 성취한다면 염려할 필요가 없을 줄로 압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고요한 중에 기다리니 진흙과 같은 날 빚으사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병들어 몸이 피곤할 때 권능의 손을 내게 펴사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온전히 나를 주장하사 주님과 함께 동거함을 만민이 알게 하옵소서."
***{결론}***
"삶의 기준이 분명하십니까"
첫째로 삶의 목적이 하나님을 찾는 기준으로 분명해야 합니다.
둘째로 삶의 동기가 하나님을 위해 사는 기준으로 분명해야 합니다
셋째로 삶의 방법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기준으로 분명해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2 가지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1.성도는 불신자에 대해서 개인적인 연민이나 사랑의 마음은 가져도 그들의 행위에 동조하지 않는,그래서 "믿지 않는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않는"(고후6:14)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아합과 동맹을 맺어 함께 행했기에 예후의 책망을 받게 된 것입니다.
2.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돌보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그 어떤 상황에서도 위로와 평안의 마음을 잃지 말고 끝까지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요13:1).
본문에서도 예후는 여호사밧에게 책망을 하면서도 그의 선행에 대한 하나님의 기억하심을 언급함으로써 위로와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면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에 거하며,그분이 싫어하시는 일,즉 악에서는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분이 싫어하시는 악에 계속 머무른다면 그것을 참된 사랑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일을 할 때 이일들이 나에게 유익한가, 기쁨을 줄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인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많은 돈과 명예와 권력이 온다할 지라도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단호하게 하지 않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삶의 기준을 분명히 하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목표가 분명하고 동기가 분명하고 방법이 분명한 신앙인이 되어 언제나 하나님께서 붙드시며 도와주시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묵상:역대하19:1-4절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묵상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