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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의 대표적 고택, 지취헌(篪吹軒)
으레 고택은 그 이름처럼 오래된 멋이 있어야 한다. 새롭게 리모델링을 해 번지르르한 집보다는 낡으면 낡는대로 흐트러지면 흐트러지는 대로 나름의 체취가 묻어나야 제멋인 것이다. 오래도록 한 집에 머물게 되면 그 사람의 냄새가 집 안 가득 배어있다. 벽지나 나무기둥에 자연스레 배인 냄새 말이다. 코끝을 가져다 대지 않아도 풍기는 냄새는 어쩐지 그 집에 남아있는 마지막 주인인양 유세다. 그래서인지 집은 몸의 편안함보다 마음의 편안함이 먼저 느껴지곤 한다.
경북 문경시 산양면 존도리에 자리한 지취헌 고택은 서애 류성용 선생의 7대손인 류혜춘(1769-1849) 선생이 지은 집으로 지은이의 호를 따서 지취헌 고택이라 하였다. 류혜춘 선생이 활동한 시대로 미루어 보아 이 고택은 역사가 무척 오래된 가옥임을 알 수 있다.
가옥의 상태만 봐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군데군데 보수하였어도 외관이 제법 낡아 보인다. 문경지역은 전통 목조건축물이 전체 문화재의 10퍼센트도 채 안 되는 숫자일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 비해 건축문화재가 빈약한 편이라 지취헌 고택은 경북 서북부 지역의 건축문화를 엿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소중한 문화재 자료다.
지취헌은 조선 후기 상류사회의 주택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조선시대 후기 상류 주택의 건축수법과 농촌 반가의 주생활 변천과정을 엿볼 수 있는 가옥이기 때문이다. 허나 고택과 몸으로 부대끼며 직접 체험하는 것만으론 옛 생활양식을 체험하는 것이 어려울지도 모른다. 고택은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현대식으로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어쩐지 우리가 으레 정원생활 혹은 귀농생활을 떠올릴 때 머릿속에 펼쳐지는 그런 아늑한 모습이다. 고택이 오래된 만큼 군데군데 보수하여 본래의 모습을 제법 잃었다. 그래도 외관이 크게 달리지고 변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분위기와 속내가 요즘 사람들의 입맛에 맞도록 달라진 것이다.
이 고택의 구조를 살펴보면, 안채와 사랑채로 이루어진 18세기 후기의 농천 반가(班家)로 이자형(二字型)배치 형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대지 약 400평 위에 ‘口’자 형으로 안채에서 모방채를 거쳐 사랑채로 통할 수 있는 통로가 있다. 제법 너른 앞마당에는 잘 정돈된 정원수 아래로 잔디가 깔려있어 어린이들이 뛰어 놀다 넘어져도 다칠 염려가 없을 듯하다. 계절마다 앞마당은 색을 달리 할 테고 그 향기도 다르게 변화할 것이다.
이곳에 오는 것만으로도 옛 것의 여유를 즐길 수 있다.
앞산 솔숲은 고택의 오랜 벗이다. 높다란 대청에 앉아서 300여 미터 떨어져 있는 앞산 소나무 숲을 올려다보는 것으로 아름다운 경치를 눈에 담을 수 있으니 꽤나 만족스럽다. 고택만큼 오래되었는지는 모르나, 푸른 그 빛깔로 제법 오랫동안 고택과 함께 하였다. 고택은 살을 깎고 낯선 시대의 물건들로 속을 채웠다. 원래의 대청과 툇마루도 이젠 볼 수 없다. 허나 소나무들의 푸른빛은 그대로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고택이 잃은 생기가 그 푸른 빛인 듯하여 자꾸만 바라보게 된다.
앞산의 높이는 약 20m로 등산로로도 좋다.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은 것이 적당하다. 동리 옆으로 금천강이 흐르고 아침마다 새소리 들려와 홀로 걸으며 사색에 잠기어도 심심하지 않다. 아름다운 풍경 눈에 담으며 유유자적 걷기에 좋은 길이다. 고즈넉한 고택과 잘 가꾼 정원이 이미 최고의 산책로이니 고택에서 지내다 무료해 진다면 걸음을 옮겨보자.
고택도 그 산과 같아서, 기품이 넘쳐흐르진 않지만 꽤나 고아하다. 예스럽고 아담한 그 모습이 정겨워 보인다. 쉽게 다가갈 수 있을 만큼 적당히 만만한 모습이다. 지난 시대의 멋과 향기들을 게 눈 감추듯 삼켜버린 살같이 빠른 세월이 아쉬울 따름이다.
옛것인 척하지만 결국 다른 모습으로 불을 품은 아궁이,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새 단장한 대청이며 툇마루 따위가 앞산 노송과 함께 옛 고택의 정취를 추억한다. 그 나름대로 멋이 있다. 보수하였지만 온전히 빼앗기지 않았다. 원래의 멋은 아직 남아 고택을 찾는 이들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독특한 건축양식이 있어 눈을 사로잡거나 하진 않는다. 또 오랜 세월 사람들이 지나 다니고 몸을 뉘여 대던 그 대청은 없지만, 그냥 이곳에 살았을 옛 사람들의 자취를 희미하게나마 떠올려 수 있는 것으로 고택의 가치는 충분한 것이다.
출처 : 대한민국 들썩들썩(http://blog.naver.com/travel_i)
◆ 문경 녹문리 고병숙 가옥(聞慶 鹿門里 高柄璹 家屋)
녹문들판 한쪽에 남서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이 집은 녹문리에 있는 개성 고씨의 집 중 하나이다. 자료에 따르면 순조 28년(1828)에 지었다고 전한다.
一자형 대문채를 들어서면 넓은 마당 건너편에 一자형 사랑채가 놓여 있고 그 뒤쪽에 안채가 있다. 원래는 사랑채 오른쪽 뒤에 중문간을 둔 一자형 아래채가 있었으나 아래채는 1980년대 후반에 철거하고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가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대문채는 특이하게 지붕을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를 이루는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앞면 5칸·옆면 1칸 규모로 가운데에 솟을대문이 있고 왼쪽에 방·부엌이 있으며 오른쪽에는 1칸씩 광을 두었다.
사랑채는 앞면 6칸·옆면 1칸 반으로 오른쪽부터 사랑대청·사랑방·부엌·사랑머릿방이 있고 맨 끝의 1칸은 앞뒤로 나뉘어 작은마루와 글방으로 꾸몄다. 사랑대청은 정면을 개방했으며 대청과 사랑방 사이에 문을 달아 공간을 터 넓게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안채는 정면을 개방한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 뒤에서부터 머릿방·안방·부엌이 앞으로 나와 날개를 이루고 있고 오른쪽에는 건넌방이 있다.
19세기 건축 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는 건물로 아래채가 없어지고 일부분이 변했지만 상류주택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http://www.cha.go.kr/korea/heritage)
◆ 문경 최고의 근암서원
1. 개관
서원(書院)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사학 교육기관이자 제향(祭享) 공간 이었다. 조선이 건국되고 국가이념 모토를 유학으로 정하면서 공립교육기관인 향교가 정책적으로 먼저 세워 졌으며, 이후 중종 38년(1543)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지금의 소수서원)을 필두로 전국에 크고 작은 사립 서원이 600여 곳 이상 건립되었다. 국가재정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 사액서원과 사우의 폐단이 오랜 세월 누적되자 흥선대원군에 의해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훼철은 되었지만 조선사회를 지탱하고 인물배출 및 유림의 정신적 위상을 세우는 등 큰 역할을 하였다.
문경시 산북면은 당시 상주목 관할로서 중종 39년(1544) 상주목사 신잠(申潛, 1491~1554, 신숙주의 손자)이 이곳에 근암서당을 건립했으며, 이후 지방유림의 공의로 홍언충(洪彦忠)과 이덕형(李德馨)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사당을 건립하고 근암서원이라 하였다. 이후 1693년 김홍민(金弘敏)과 홍여하(洪汝河) 선생을 추가 배향 하였다. 현종 10년(1669)에 근암서당이 근암서원으로 정식적으로 승격이 되었으며, 정조 10년(1786)에 이구(李?), 이만부(李萬敷), 권상일(權相一) 선생을 재차 추가 배향하여 모두 7현의 선현을 모시고 있다.
현재 서원은 현재의 건물은 1970년대에 복원된 건물로 전면에는 평기와로 팔작지붕을 올린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강당이 있으며, 강당 뒤에는 내삼문과 경현사(景賢祠)로 이루어진 사당의 공간이 별도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역시 현재의 건물만으로는 옛 모습을 짐작하기 어렵고 다만 경현사에 사용한 주춧돌이나 경내에 남아 있는 석재를 통하여 과거의 규모와 권위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이곳 사당의 주춧돌이나 축대석으로 사용한 석재 중에는 부분적으로 옛것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있어 눈길을 끄는데, 그중에서 규모도 작지 않을뿐더러 매우 정교하게 다듬은 것들이 있어 이 서원이 훼철되기 전에는 상당한 규모와 격조가 대단하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곳에는 고호림(高皓林)이 지은「복원사실(復元事實)」, 장병규(張炳逵)가 지은「복원기(復元記)」와 이원영(李源榮)이 지은「존성당중건상량문(尊性堂重建上樑文)」등의 기문이 걸려 있으며, 부훤당(負暄堂) 김해(金楷)의 문집에 「근암서원문루중창상량문(近嵒書院門樓重創上樑文)」이 전한다.
2. 소장 유물 : 청대문집, 퇴계선생친필, 어제어필 등 843점
근암서원 소장유물은 지난 2006년 1월 도 유형문화재 제377호로 지정이 되었으며 일괄 843점이다. 서원에 배향된 인물 중 목재 홍여하, 우암 홍언충, 청대 권상일의 문집목판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청대 권상일의 교지, 첩지, 영지가 70여점 있다. 이외에 청대 선생이 평생을 수집한 서책과 기록물이 많이 있으며, 이 중 퇴계선생친필, 청대문집, 어제어필 등은 매우 귀한 사료라 할 수 있다. 이 중 일부는 안동에 있는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이 되어 있으며 문집류 등은 청대선생의 후손이 보관하고 있다.
3) 근암서원 배향인물 7인
• 홍언충(洪彦忠)
자는 직경이요, 호는 우암이며 관은 부림이다. 대제학과 좌참찬을 지낸 연산조 직신 문광공 허백당 홍귀달의 아들이다. 성종 계사년(1473년)에 태어났고, 연산 을묘년(1495년)에 사마시 동년 별시 을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 홍문관 정자를 거쳐 교서 교리를 하다 예조정랑이 되었다 갑자사화(1504년)에 거제도에 유배되었는데 하루는 섬 안에 사사가 있다는 소문이 나서 모두 피하려 창황하였으나 우암 선생 형제는 태연자약하며 말하기를, “군명은 하늘이다. 하늘을 가히 도망칠 수 있느냐. 죽음이 있을 뿐이다”고 하였다 한다. 중종반정 후에 풀려났으나 그 뒤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후진을 양성하다 불행히도 36세에 졸하였다. 선생은 도학이 높고 엄정 충직하여 후학의 사표로 추앙받았다.
• 이덕형(李德馨)
호는 한음이요 본관은 광주이다. 중종 신축년(1541년)에 태어났으며, 선조 경진년(1580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로 벼슬을 하여 경인년(1590년)에 직제학이 되었고 임진년(1592년)에 대사헌이 되었다. 이해 4월에 왜란이 일어났으며 평양 대동강에서 일본인 현소 등과 담판을 지었으며, 침략의 불의함을 통매하고 왕명으로 요동에 가서 제병에 노력하고 명나라 병사가 내려왔을 때는 접반사가 되어 나라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무술년(1598년)에 우의정, 신축년(1601년)에 도체찰사, 임인년(1602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광해조에 영창대군 옥사가 간신들의 농간으로 야기됨에 직언으로 극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한 지 수일에 병을 얻어 졸하니 나이 53세였다. 시는 문익공이다.
• 김홍민(金弘敏)
자는 임부요, 호는 사담이며 본관은 상산이다. 집현전 부제학 상직의 6대손이며, 옥과 현감 범의 아들이다. 중종 경자년(1540년)에 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총명하였다. 선조 경오년(1570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론을 시작으로 수찬, 응교, 집의, 청주 목사 등을 역임하고 임진왜란 때에는 보은에서 창의하여 6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고, 충보군이라 이름 하여 상주의 적이 호서로 오는 길을 막았다. 벼슬길에 있을 때는 도리로 행하고 집 안에서는 효도와 우애와 화목으로 일생을 지냈으며, 『주서절요』, 『근사록』, 『소학』 등을 깊이 연구하였고, 갑오년(1594년)에 졸하였다.
• 홍여하(洪汝何)
자는 백원이요, 호는 목재이며 관은 부림이니 문광공 홍귀달의 5세손이요, 대사간 호의 아들로 1620년에 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우복 정경세가 말하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큰 선비가 될 것이다”고 하였는데 효종 갑오년(1954년)에 등과하여 검열, 전적, 정언, 좌랑, 사간을 지냈다. 정언으로서 왕의 언동을 간하니 효종이 가납하였다. 그 뒤로 당로자들의 꺼림을 받아 고유 찰방에서 파직되었다 무술년(1658년)에 경성판관으로 부임하여 어진 정사를 폈으며, 을해년에 성학 치도의 요를 상소하고 병마사 권우의 무고로 황간에 유배되었다 그다음 해에 방면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15년을 후진을 양성하는 데에 전념하였다. 사서에 통하고 주서에 전심하여 그 식견을 따를 이가 없었다. 숙종이 병조정랑에 특제하였으나 병이 중하여 나아가지 않고 졸하니 나이 55세였다. 저서로 『사서발범구역』, 『주역구역』, 『휘찬려사』, 『동사제강』 등 많이 있다.
• 이구(李?)
자는 대방이요, 호는 활재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효령대군의 8세손이며 정랑 광흡의 아들이다. 광해 계축년(1613년)에 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제자백가서』를 탐독하다 외조부 칠봉 황시간의 권유를 받고 성현의 학문을 탐구하게 되었다. 정주학과 퇴도학에 전념하여 과거를 버리고 산간에서 후진에게 이기의 진수를 논강하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갑오년(1654년)에 졸하니 42세였다.
• 이만부(李萬敷)
자는 중서요, 호는 식산이며 본관은 연안이다. 가은 심의 증손이요 박천옥의 아들이다. 현종 갑진년(1664년)에 출생하였다. 정주학을 탐구하고 혁혁한 집안이면서도 분화를 멀리하고 오직 성학에만 몰두하여 저술에 힘쓰면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남긴 저서는 지금까지 자손이 보관 전수하고 있다. 계축년(1733년)에 졸하었다.
• 권상일(權相一)
자는 태중이요, 호는 청대이며 관은 안동이니 구학재 구의 증손이요, 증이판(贈吏判) 심(深)의 아들이다. 숙종 기미년(1679년)에 출생하였다. 숙종 경인년(1710년)에 등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로부터 이의(吏議) 부제학, 대사헌을 역임하고 지중추에 이르고 기사(耆社)에 입(入)하여 찬수 당상이 되어 국사를 수찬하였다. 영조가 어필 16자를 하사 격려하였다. 영조 정미년(1727년)에 만경현령이었을 때 다음 해에 무신(1728년)의 난이 일어났는데 미리 민정을 살펴 적변이 일어날 것을 알고 상부에 보고하고 성지를 수축하며 유비무환의 대비를 하였으므로 경내가 무사하였다. 고향에서는 퇴계 선생을 사법(師法)으로 하여 이기호발(理氣互發)을 논하고 경연에도 첨하였다. 저술로서 『근사록집해』 등 여러 권을 남겼으며, 영조 기묘년(1759년)에 졸하니 수가 80세였고, 시호는 희정(僖靖公)이다.
엄원식 (문경시청 문화예술과 학예사)
◆ 문경 장수황씨 종택
장수황씨(長水黃氏)가 문경에 터를 잡게 된 시점은 익성공 방촌 황희(黃喜, 1363~1452)의 증손자인 승의부위(承義副尉) 부사정(副司正) 황정(黃珽)이 이 곳에 정착하면서 부터이다. 그러나 장수황씨가 문경땅에 토착화 되는 시간까지는 몇 대를 더 내려가 고손인 칠봉 황시간(七峰 黃時幹, 1558~1642)때 부터라 할 수 있다. 장수황씨를 논하면서 굳이 황시간을 끌어들인 이유는 현재 산북에 남아 있는 장수황씨의 종택이 바로 칠봉 황시간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일을 실천함에 악이 적다하여 함부로 행하지 말라
황시간은 마지막 임종 시 “내 자손되는 자들은 악이 적다하더라도 절대 행하지 말라”고 유훈을 남겼다. 이 말은 아마도 어떤 일이라도 선하게 행하라는 뜻 일게다. 이러한 유훈이 자손만대 이어지니 그 후손들이 옳지 않을 일을 행할 수 있겠는가? 좋은 글귀나 좋은 말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다. 그러나 행동으로 어떻게 옮기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결국 말이 앞서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실천은 늘 어렵다.
각 지역마다 대표하는 문중이 몇 있는데, 우리지역에도 선조들의 유훈을 간직하고, 후손들에게 지속적으로 교육을 하고 있는 문중이 있어 한편으로는 든든한 마음이 있다.
칠봉 황시간이 살았던 종택 또한 그 기개를 아직까지 간직하며 산북을 지키고 있다. 1991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36호로 지정되었으며, 이 집안 내에 있는 탱자나무도 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집은 정면에 사랑채가 자리하고 그 오른편에 안채가 있다. 그리고 안채에 출입하기 위하여 사랑채 오른쪽 전면쪽으로 중문채가 있었으나 수 십년전 화재로 중문간과 마구부분이 소실되고 현재 일부만 남아있다.
사랑채는 전면에 퇴칸을 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좌측 2칸에 난간을 돌린 마루를 두고 2칸 온돌방과 연결시켰다. 우측칸은 전면에 다락방을 설치하고 하부는 수장공간으로 활용하며, 뒤쪽에 반 칸 정도의 감실을 두고 다시 온돌방을 설치한 3겹의 칸살로 구성되었다. 2009년 경상북도에서 직영사업으로 사랑채를 전면적으로 보수하여 언제라도 거주할 수 있도록 정비하였다.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곡자형(曲字形, “ㄱ”자형) 평면이다. 사랑보다 뒤쪽으로 물려서 위치시키고 안채 좌측편으로 사랑과 유사한 안사랑 공간을 만들었다. 사랑쪽으로 퇴칸을 두면서 뒤쪽에 방을 배치하여 사랑과 연결이 양호하며 전면으로 2칸 온돌방을 마련하여 앞쪽에서의 시선을 차단시켰다. 따라서 중앙의 대청을 중심으로 볼 때 좌측부분은 안사랑공간이고 우측이 일반적인 안채의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 2칸 온돌방과 부엌을 연접시키고 부엌 우측으로 온돌방 1칸과 배면쪽으로 마루 1칸, 측면쪽의 툇마루를 내어 마당에서는 마루가 보이지 않도록하여 여성을 위한 독립된 공간을 마련하였다.
문경지방의 반가주거(班家住居)로서 “ㄷ”자형 정침부분과 독립된 사랑부분이 결합된 배치이며, 사랑과 안채의 연결성과 공간의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평면구성이 이채로운 건물이다.
출처 : 문경시청 홈페이지(엄원식 문화예술과 학예사)
◆ 문경 대하리 소나무(천연기념물 제426호)
이 소나무의 수령은 약 400년으로 높이 6m, 지상부의 둘레 6.5m, 가슴높이 둘레 3.1m이다. 가지 길이는 동 6.5m, 서 8.6m,남 11m, 북 9m이다. 전체적인 형태는 주간부가 2개로 구분되나 다시 각각2개의 가지가 자라 얽혀 있고 그 중 동편의 가지 하나가 고사되어 있다. 반송의 일종인 이 나무는, 전체적으로 나무의 형태가 안정되고 날렵한 형태이다.
방촌 황희(黃喜, 1363∼1452)의 영정을 모신 사당과 서원이 이 나무 주위에 있었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영각동(影閣洞)이라고도 한다. 현재 이 나무는 당산나무로 매년 정월 대보름에 마을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영각동제를 지내는 등 신성시하고 있다.
◆ 내화리 선성김씨 종택과 산수정
선성김씨 종택은 내화리 입향조인 호우당 김단(孝友堂 金?)의 처부인 권극해(權克諧)의 건축이라 전한다. 사랑채는 약간의 개보수가 있었으나 원형이 대체로 유지 되었고, 안채는 김단의 5대손 모암 김낙룡(慕菴 金樂龍)이 만년에 개축하였다.
종택의 구조를 살펴보면 ‘一’자형의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이고 ‘ㄱ’자형의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5칸 규모로 되어있다. 전체적으로 튼 ‘口’자형의 배치형태를 취하고 있다.
안채의 좌측 2칸은 부엌과 부엌방으로 구성한 후, 우측으로 안방 2칸과 마루방을 연접시켰는데 전면에는 1칸 규모의 넓은 퇴칸을 두어 겹으로 구성하였고 우측칸에는 연하여 상방, 고방과 안사랑, 안사랑마루를 두었다.
종택 가까이에 사당이 있고 사랑채 앞에는 산수정(山水亭)이 있어 품격을 높이고 있다.
출처 : http://blog.daum.net/sek00425/13449329
◆ 문경 내화리 삼층석탑(보물 제51호)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삼층석탑으로, 높이는 4.26m이다. 산골 깊숙한 넓은 평지에 건립되어 있는 이 탑의 터에는 본래 신라시대에 창건된 화장사라는 절이 있었는 데 약 100년 전에 모두 불탔으며, 불상 등은 인근의 대승사로 옮겨 가고 석탑만 남았다고 한다.
탑은 일찍이 도괴되어 3층 옥신은 근처에 새로 지은 재실의 주춧돌로 사용되었는데, 1960년 9월에 수습하여 복원하였다. 석탑 주변의 유구는 완전히 없어져 사역을 짐작하기 어려우나, 부근에서 금동불상이 발견된 일이 있었다고 한다. 탑의 구조는 단층 기단에 3층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상륜부은 멸실되었다.
석탑은 크기가 다른 4매석으로 지대석을 구성하였으며, 중석을 받치는 굄은 생략되었다. 중석은 4매의 판석으로 구성되었는데 남북 양면에는 우주와 탱주를 모각한 판석을 놓았고, 동서 양면에는 탱주만이 있는 면석을 그 사이에 끼웠다. 4매석의 갑석은 밑에 부연이 있고 굄 장식은 생략되었다.
탑신부의 옥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한 돌로, 옥신석에는 층마다 우주가 모각되었다. 석탑 복원시에 초층 옥신에서 한 변이 22㎝, 깊이 13㎝의 방형사리공이 확인되었으나 내부의 사리구는 이미 없어진 상태였다. 옥개의 층급 받침은 각층이 4단으로 간결하게 되었으며, 추녀의 밑은 직선으로 되어 있고 낙수면은 반전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초층 옥신석이 매우 높은데 반해, 2층 이상의 옥신 높이와 그 체감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아 전체적인 조화를 잃고 있다. 상륜부는 3층 옥개석의 상부에 옥개석과 한 돌로 노반이 새겨져 있을 뿐 나머지는 결실 되었는데, 상면에는 지름 15㎝ , 깊이 18㎝의 찰주공이 있어 상륜의 설치를 짐작케 한다.
이 석탑은 기단의 구조가 신라 전형양식의 석탑과 달리 변화를 보이고 있으며, 또 갑석의 굄 장식이 생략되는 등 시대적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특히 3층 옥개석에 붙여서 제작된 노반의 구조는 그 뒤 전개되는 고려 석탑과도 비교할 수 있다. 즉, 신라의 석탑양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면서도 단층기단이 생략된 이 지방의 특색을 보여 주는 탑이다.
◆ 약포 정탁(藥圃 鄭琢)과 연주패옥혈(連珠佩玉穴)
2014년 6월 21일 하지날이라 멋진 곳을 찾아 산행도 하고 더위도 식히고자 삼강 주막 옆에 자리한 회룡포가 보이는 비룡산 일대를 오르내리며 산행을 하게된 것이다. 비룡교 전각 위에서 鶴山 유영수 兄께서 준비한 쏘가리 매운탕으로 점심을 먹으며 반주를 곁들일 때 김한진 형과 명당과 풍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연주패옥혈(連珠佩玉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필자가 정탁선생에 대해서 고향의 선현이라 존경하며 흠모하는 인물이라 평소에도 그 분의 업적과 일화에 깊은 관심을 가진 탓으로 오래 전에 카페에
올려둔 것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약포(藥圃)정탁선생(鄭琢:1526-1605)은 임진왜란 중 충무공 이순신과 충장공 김덕령의 무죄를 주장, 구원함으로써 임란을 승리로 이끈 주력인물로 알려져 있다. 충무공도 약포가 아니었다면 훗날 성웅으로 불리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가설은 알려진 사실이다.
약포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 이여송장군의 풍수참모 두사충도 구명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약포선생은 27세 때 사마시에, 33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6조 중 5조의 판서와 좌우의정을 역임했다.
약포는 두사충이 소점해준 집터와 신후지지에 얽힌 설화를 간직한 인물이다.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여송의 풍수참모 두사충은 병영의 진(陣)을 잘못 쳐 벽제관전투에 패전한 책임으로 참수될 위기에 처했다.당시 우의정으로 접반사(接伴使)였던 약포선생의 구명으로 두사충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두사충은 이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경북 문경군 가은읍 갈전리 아호동에 약포의 집터를 잡아준다.
두사충은
"이곳에 집을 지으면 대감과 같은 정승이 세 사람 더 나올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약포는 이 집터를 보려고 평복에 하인 한 명만 데리고 문경새재를 넘던 중 주막에서 묵다가 "백성들은 앞으로 약포 대감 집 짓는 부역에 큰 곤욕을 치를 것"이라는 민심을 알게 됐다. 이 같은 민심을 읽은 선생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양으로 되돌아갔다한다.
다음은 신후지지에 대한 설화다.
두사충은 경북 문경군 동로면 생달리 반송근처에서 연주패옥혈(連珠佩玉穴)을 발견, 정확한 지점을 약포 하인에게 "반송이 있는 곳으로부터 백보지내(百步之內)."라고 알려주었다고 한다.
낙향한 약포는 하인에게 두사충이 정해준 신후지지를 물었다. 반송부근에서 하인이 손으로 갈전동 쪽을 가리키며 신후지지를 말하려는 순간 말이 갑자기 하인에게 뒷발길질을 하여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선생은 "나의 터가 아니구나?" 탄식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이 자리를 찾기 위한 내로라하는 풍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조그만 잡음도 싫어하는 선생은 民心과 獸心을 함께 받아들여 길한 양택지도 길한 음택지도 포기하고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 안장됐다.
선생의 묘는 현침사는 없지만 비룡입수한 괜찮은 돌혈(突穴)에 좌향은 간좌곤향 좌선수 경파로 향법상 길한 문고소수자생향이다. 필자가 이해를 돕기위해 몇 가지를 더 첨가해서 설명하기로 한다.
먼저 연주패옥혈(連珠佩玉穴)이란 무엇일까?
짧게 말하자면 옥관자(옥으로 만든 망건관자) 서 말, 금관자 서말(정이품 벼슬 이상이 쓰는 망건 정도로 이해하심이 좋겠네요.) 정이품이면 참판이상의 벼슬이니 대감이라 불리지요. 쉽게 말하자면 후손에 대감이 세 명은 나온다는 명당이라하면 이해가 되시겠나요?
신후지지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살았을 때 미리 묘소를 점찍어 둔 곳이라고 하면 이해 되시겠지요? 제가 어릴 적 보아온 것으로는 사발같은 것을 묻고 가묘를 주로 만들어놓았던 것 같습니다.
동로면 적성리 입구에 위엄하게 자리잡은 300년이 넘은 소나무가 있어요
무송대라고 쓰여 있었지요. 舞松?? 춤추는 소나무란 뜻이네요. 나뭇가지가 특이하게 춤을 추는 형상이었어요. 구불구불한 게 마치 춤을 추는 형상이었어요.제가 보기에도요.
아마도 이 소나무에서 백보이내에 연주패옥혈이 있다고 했는데... 글쎄요. 수많은 풍수들이 그 자리를 찾지만 아직도 못 찾았나봅니다.
출처 : 문경교원산악회(http://cafe.daum.net/mungyeongclimbing)
◆ 홍건적을 물리친 공신 이자수와 경송정
1. 송안군(松安君)이자수(李子脩) : 공민왕은 안동에 머무르는 동안, 정세운(鄭世雲)을 총병관으로 임명하여 개성에 진입한 홍건적을 물리치게 하였는데, 이 때 이자수가 정세운의 부장으로 활약하였다. 이 공로로 이자수는 송안군(松安君)으로 봉해졌으며, 안사공신(安社公臣)에 책록되었다.
이자수는 원래 청송 진보의 사람인데, 당시 잦은 왜구의 침입과 그에 따른 소란을 피해서 안동 풍산 마애로 이주하여 진성 이씨 안동 입향조가 되었다. 송안군이라는 봉호도 청송의 송자와 안동의 안자를 따서 부여받은 것으로 이해된다. 그의 안동 입향은 그가 50대 무렵이었던 공민왕의 안동 몽진 이후인데, 그 후로 그의 후손들은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어 집성촌을 형성하고 그 일대에서 확고한 사회적 위상을 점할 수 있게 되었다. 훗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이 가문에서 성리학의 최고봉 퇴계 이황 선생이 배출되었다.
출처 : 안동문화콘텐츠(http://www.helloandong.go.kr/sub01/info01_05_0101.asp)
2. 경송정(景松亭) : 경상북도 문경시(聞慶市) 문경읍(聞慶邑) 갈평리(葛坪里)에 있는 정자이다. 송안군(松安君) 이자수(李子脩)의 덕을 기려 후손과 지역 유림이 1958년 2월에 건립하였다. 이자수(李子脩)는 진성이씨(眞城李氏)로 고려말 홍건적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송안군(松安君)에 책봉되었다. 갈평마을에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어 이곳의 관리를 맡고 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경송정 [景松亭]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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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료를 만드시느라 노고가 많았습니다.이자수 수자가 오자입니다.修로 많이 잘못 표기하나 脩(포 수)가 맞습니다.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수정했습니다.
자료 만드시느라 수고 많으셨읍니다
답사에 많은 도움이 되겠읍니다
격려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