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6년에 시작된 병자호란이 끝나고, 조선이 항복하면서 1639년에 이 비(碑)를 세운다. 정식 이름은 "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이다. 조선의 仁祖는 淸에 패배하여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淸 태종의 요구에 따라 그의 功德을 적은 비석이다.
조선 초기까지 조선에 조공(朝貢)을 바쳐오던 여진족(女眞族)은 明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노려 급속히 성장하여 후금(後金)을 건국하고, 더욱 더 세력을 확장하여 조선을 침략하는 등 관계가 원만치 못하였다. 나라의 이름을 청(淸)으로 바꾼 여진족은 조선에게 臣下로서의 禮를 갖출 것을 요구하자, 두 나라의 관계는 단절된다.
결국 인조14년, 1636년에 청나라 태종은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직접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킨다.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가서 45일 동안 항전하지만, 결국 1639년 조선은 항복한다.
이에 淸太宗은 자신의 孔德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하였고, 그 결과 삼전도비가 세워졌다.
1. 청(淸)과 조선은 군신(君臣)의 의(義)를 맺는다. 지금까지는 형제의 관계이었다,
2. 조선은 명의 연호(年號)를 버리며, 明과의 국교를 끊어야 한다.
3. 仁祖의 장자(長子)와 다른 아들 그리고 대신들의 자제를 인질로 보내야 한다.
: 이 조건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이 청의 인질이 되어 끌려 간다.
4. 淸에 대하여 경조사 등에 신하의 예를 갖추되, 明에 하던 것과 동일하게 하며, 양국의 왕실은
서로 통혼(通婚)하여 우호를 굳혀야 한다.
5. 청나라가 明을 공격할 때, 조선은 원병(援兵)과 병선(兵船)을 보내야 하며, 조선은 성(城)을 축조
하거나 보수하지 못한다.
6. 조선인 포로가 만주에서 도망가면 다시 체포하며, 조선은 이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
7. 조선에 있는 귀화인을 돌려 보낼 것.
8. 조선은 일본과의 무역을 종전대로 하되, 일본의 사신을 인도하여 청으로 내조(來朝)할 것.
9. 매년 1회, 청나라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세금을 바칠 것.
결국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나라에 대하여 사대(事大)의 예를 지킴에 따라 조공(朝貢)관계가 유지되었다. 중국에 가는 사신들의 중요한 임무는 세금과 방물(方物 .. 청의 황제나 황후에게 바치는 공물)을 갖다 바치는 일이었는데, 이는 조선에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끼쳤다. 또한 전쟁 중에 포로로 끌려 간 조선의 백성들을 다시 찾아 오는데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여야 했다
비석의 받침돌인 귀부(龜部)가 두 개인 이유는?
처음에 왼편의 작은 귀부를 만들었으나, 淸은 너무 작다고 다시 만들라고 하였다. 그래서 오른편의 좀 더 큰 귀부(龜部)를 다시 만들어 허락을 받아야 했던 역사.. 다시 돌을 다듬어야 했던 석공(석공)의 마음은?
그러나 비석의 귀부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비문(碑文)의 내용에 관한 역사는 더욱 창피하였으며, 조선 조정에서는 부끄러운 치욕의 논의가 많았으며, 후일 당쟁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높이 3.95m, 폭 1.4m이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20행,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20행,
그리고 뒷면에는 한문으로 .. 이렇게 3개 국어로 씌여 있다.
백헌 이경석 (白軒 李景奭) ..삼전도비의 비문(碑文)을 작성한 悲運의 주인공
조선시대 선비에게 글이란 목숨과도 같은 것..仁祖는 당대의 문장가인 4명의 신하에게 각각 비문의 작성을 명하지만, 그 누구도 제대로 그 命을 수행하지 않았다.
이경전(李慶全)은 병을 핑계로 자리에 누어 버렸고, 조희일(趙希逸)은 고의로 거칠게 글을 작성하여 채택되지 않도록 한다, 결국 이경석과 장유(張維) ... 두 사람의 글을 淸나라에 보내지만, 심한 질책과 함께 되돌아 온다.
결국 仁祖는 이경석을 불러 간곡히 부탁하나, 이경석은 국가를 위하여 개인의 명예를 희생할 것인가 ? 아니면 개인의 명예를 지킬 것인가? 조선의 운명이 달린 名分과 現實사이의 갈등이었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의하면 인조는 다음과 같이 이경석에게 부탁한다. " 지금 저들이 이 碑文으로 우리의 향배(向背)를 시험하려 하니 우리나라의 존망이 여기에서 판가름나는 것이다. 월(越)나라 구천(句踐)은 회계산(會稽山)에서 오(吳)나라의 신첩(臣妾) 노릇을 하였지만 끝내는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功을 이루었다. 훗 날 나라가 일어 서는 것은 오직 나에게 있는데, 오늘 할 일은 다만 문자(文字)로서 그들의 마음을 맞추어 사세가 더욱 격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
이경석의 친필. 易地思之...아마 이경석의
피 맺힌 절규일 것이다.
왕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이경석은 비문의 일부를 고치고는, 자기에게 공부를 가르쳐 준 형
이경직(李景稷)에게 편지를 보내어 " 글 공부를 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됩니다. "라고 적었다 그 당시에는 누구도 이경석을 비판하지 못한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인줄 너무 잘 알기에....
그러나 훗날 이경석은 이 비문의 작성으로 인하여 宋時烈과 그 제자들로부터 수 많은 공격과 수모를 당하였으니, 그야말로 소절(小節)이 대의(大義)를 꾸짖는 격이었다.
경기도 분당에 있는 이경석 묘 앞의 神道碑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다. 원래의 신도비가 누군가에 의하여 땅 속에 파 묻혀 있는 것을 후손들이 찾아서 새로 만들고 나란히 세웠다.
1637년. 처음, 한강의 높은 언덕 위에 누각을 짓고, 계단을 쌓은 단(壇)위에 세웠다.
1895년. 조선 말기, 고종은 이 치욕의 산물을 강물 속으로 쓰러뜨렸다.
1913년. 일제 치하, 일본은 이를 찾아 다시 세웠다.
1916년. 일제는 이 삼전도비를 보물로 지정한다. 조선은 원래 중국의 속국(屬國)이었음을
강조하여 자신들의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그들다운 잔꾀어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지역주민들이 부끄럽다 하여 땅 속에 파묻어 버린다.
1963년. 큰 홍수로 땅에 묻혀 있던 삼전도비가 드러난다. 당시 문교부는 치욕의 역사도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 우리의 역사라는 인식으로 다시 세우고 사적 101호로 등록한다.
高宗의 지시에 의하여 자빠트려진 삼전도비
이와 같이 조선은 표면적으로 청나라에 대하여 사대(事大)의 예의를 갖추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사상이 병자호란 이전보다 오히려 굳어 갔다. 그리하여 항복이 조건이었던 청나라의 출병(出兵) 요구를 거절하곤 하였지만, 1640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할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임경업장군을 지원케 하였다.
조정은 임경업장군에게 전선(戰船) 120척과 군사 6,000명 그리고 군량미 1만포를 지원케 하였는데, 임경업은 일부러 戰船 30척을 파괴하고,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는 틈에 明나라에게 청나라의 계획을 알려 주었다.
1643년에는 조선이 명(明)과 통교(通交)한 사실이 발각되어, 최명길(崔鳴吉)과 임경업(林慶業)이 청나라로 붙잡혀 갔다. 이듬해 청나라는 수도를 北京으로 옮기고, 인질로 잡아 갔던 소현세자,봉립대군,김상헌, 최명길 등을 조선으로 돌려 보냈다.
그러자 仁祖는 인평대군을 보내어 감사의 뜻을 표함으로써, 병자호란의 사후 처리는 일단락되었지만, 1649년 즉위한 봉림대군, 효종의 강력한 주도아래 배청(排淸)사상을 근거로 한 북벌론9북벌론)이 대두되었다. 한편 큰아들 소현세자는 귀국 후 청나라의 앞 선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하였으나, 이를 반대하던 아버지 仁祖에 의하여 오히려 독살되고 만다.
겸재 정선의 그림인데...화살표 위치가 삼전도비가 있던 곳
두 마리의 용(龍)이 여의주(如意珠)를 희롱하고 있다.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떵애 두드려야 하는 항복의 의식(儀式)이다. 그리고 머리가 땅에 부딪치는 소리가 청 태종의 귀에 들려야 했다.
이 때 임금 인조의 이마에서는 피가 흘렀다고 하나, 차마 실록의 기록에는 빠져 있다. 이 항복의 의식에 인조는 곤룡포(袞龍袍)를 입지도 못하고, 臣下의 의복인 남색 옷을 입어야 했다. 또는 청 황제가 보낸 청나라 軍服을 입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影禎도 남색이었다. 明나라의 승인을 아직 받지 못햇으므로..
정식의 곤룡포는 금색 또는 붉은 비단으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