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 령 옛 길
이 땅엔 참으로 산도 많다. 국토의 73%가 산악으로 이루어졌으니 어딜 가나 산이고 산이다.
하긴 대간 하나가 국토의 척량을 이루고 여기서 팔방으로 열두 정맥이 뻗어나갔으니,
우리 지도를 들여다보노라면 반도 전체가 산으로 이루어진 느낌이다.
큰 산에 올라서 둘러보면 보이느니 온통 산과 봉우리의 연맥뿐이요,
사람이 깃을 틀고 살 만한 땅이 없어 보인다.
산이 많은 만큼 우리네 삶도 모두 그 속에서 이루어졌다.
산과 산이 겨우 벌려놓은 좁은 골짜기에 터를 잡고 누천 년 세월을 대대로 살아온 것이다.
사방이 산으로 막혀 있기에 외부로 통하려면 어딜 가나 고개를 넘어야 했다.
언덕 정도의 낮으막한 고개도 있지만 한나절 동안 땀을 흘리며 넘어야 하는 것도 있고,
때로는 하루를 종일토록 힘겹게 넘어야 하는 고개도 적지 않은 게 이 땅의 현실이 아닌가.
고개는 단순히 지역을 가름하는 경계만이 아니다. 산을 넘어가기 위해 오르는 길인 것만도 아니다.
고갯마루 서낭당에 돌을 쌓으며 작은 소망을 빌던 가난하고 소박한 우리네 정서가 스며있고,
오두막 주막집 툇마루엔 고달픈 길손들의 정한이 깃들어 있기도 한 것이다.
때로이 산골 나그네가 되어 산하를 떠돌며 크고 작은 고개를 찾아 넘어 보는 것은
이 땅에 태어나 살아온 태생적 숙명이기도 하려니.
굽이굽이 죽령고개 한도 많은 열두 굽이
달리는 짐자동차 숨이 차서 흐느낀다
부엉새 울어울어 밤은 깊은데
먼동에 불빛만이 처량하구나
산새도 잠이 깨어 날아가는 죽령고개
한 굽이 두 굽이에 밤은 점점 깊어간다
어제 밤 꿈에 만난 그 아가씨들
라이트에 그려보던 죽령의 밤아
오래 적 가수 박일남이 불렀던 ‘죽령고개’ 노래다. 그리 유명세를 타지 못했기에
세인들의 귀에 익숙하지는 못하지만, 서투른 가락이나마 흥얼거리며 발길따라
터벅터벅 죽령고개 마루턱에 올라섰다.
죽령은 경북 영주의 풍기읍과 충북 단양의 대강면을 구분짓는 고개다.
예로부터 바람도 쉬어간다는 추풍령, 온달이 실지 회복의 한을 품고 출정했던
계립령(하늘재)과 더불어 영남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백두대간의 대표적인 세 관문이기도 했다.
그 중에 죽령이 696m로 가장 높은 고개이니 여기서야 구름도 날새도 어찌 아니 쉬고 넘을 수 있으랴.
청운의 꿈을 안고 과거길을 재촉하던 영남의 선비들은 모두 새재로 돌아가고,
다만 보부상과 백성들이나 넘나들던 길이 죽령이다.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이 되고,
죽령을 넘으면 죽을 쑤고 만다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탓이다.
문경을 거쳐 새재를 넘어야, 지명 그대로 경사스러운(慶) 소식을 들을(聞) 수 있다는
일종의 언어유희 탓이다. 뿐이랴, 죽령은 임란 때 왜장 가등청정이 이 땅을 휘젓고
함경도까지 밀어부쳤던 역사의 수난 길이기도 했다.
넘나드는 길손들의 목을 축여주는 고개마루턱의 '죽령주막'
일찍이 신라 시대에 ‘죽죽(竹竹)’이란 인물이 길을 열어 죽령(竹嶺)이라 했다 하고,
혹자는 대나무가 우거져 그렇게 전한다 하더라만, 모두가 부질없는 소리요
억지춘양의 속설에 지나지 못한다.
‘큰재(한티)’를 이두식으로 차음하여 ‘대(大)재’로, 대(大)를 다시 ‘대나무(竹)’로
그릇 인식하여 ‘죽령(竹嶺)’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새재 조령(鳥嶺)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새’는 날아다니는 새(鳥)가 아니요, 억새풀의 의미다.
3관문 마루턱 넓은 터가 억새밭이란 뜻이러니, 굳이 부르려면
‘초령(草嶺)’이나 ‘노령(蘆嶺)’으로 부르는 것이 합당한 이름이겠다.
의미가 그렇다는 이야기이지, 죽령이면 어떻고 대재로 부른들 무어 대수랴.
동행한 일행들은 모두 만춘달 소백산의 철쭉꽃 향기에 취해 신선되어 오르고,
외오 남겨진 발길은 오늘 하루 죽령 나그네가 되었고나. 잿마루 주막에 들러
잠시의 객고도 풀어보지 못한 채, 뒤꼍의 오뚝한 ‘백두대간 죽령’ 빗돌에 손길
한번 쓰다듬고 안내판을 따라 옛길로 들어선다.
나무 계단을 내려서면서 울창한 수림의 그늘이 터널로 이어진다.
바튼 경사길도 잠시 계곡을 끼고 완만히 내려가는 길이다.
물기가 시작될 쯤에서부터는 유난히 으름덩굴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나뭇가지 틈새로 간간이 스며드는 햇빛을 쬐려 초여름 산꽃 들꽃이 부산하게 고개를 바짝 젖혀 들었다.
산뜻한 빛깔로 갓 화장을 마친 꽃잎들이 다투어 부드러운 웃음을 띠고 나더러 눈길을 달라 한다.
산등성이 너머로 뻐꾸기 소리가 들려오고 저만큼의 거리를 두고 꾀꼬리 울음이
오랜 세월 잊었던 유년의 추억으로 끌어들인다.
여느 산길처럼 오솔길이긴 하나 내려갈수록 길이 잘 다듬어져 있다.
근래 들어 영주시에서 옛길 복원을 한 덕분이다.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죽령을 넘는 길은 이 옛길 하나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일제말인 1941년 중앙선 철도가 놓이면서 그 유명한 또아리굴도 생겨나고,
1960년대에 5번 국도가 열리면서 아흔아홉 굽이마다 온갖 서러운 사연들을 새겨두기도 했다.
국도를 타고 산굽이를 휘돌아 넘나들어야 행려의 객수도 제 맛이련만,
이제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불과 몇 분 사이에 꿰뚫고 지나가 버리고 만다.
4.6km의 국내 최장 터널이 새로운 명물이라고는 하지만,
속도만을 지고(至高)의 가치로 추구하는 문명의 편리에 마음 속 느림의
여유를 자꾸 잃어 가는 게나 아닌지.
얼마를 내려왔을까 훤칠한 낙엽송이 밀립한 주막거리 터에 이른다.
나무기둥마다 담쟁이 덩쿨이 휘감아 올린 곳에 무너져 내린 돌담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그 옛적 죽령 길엔 주막이 세 곳이나 있었다 한다. 희방역 근처 길목의 ‘무쇠다리 주막’과
골짜기 중간쯤의 ‘느티정 주막’, 그리고 이 곳 주점거리가 그것이다.
죽령 너머 단양 땅 첫 마을이 용부원리이고 보면 주막을 거쳐간 나그네들이
묵어가는 원(院)이 그 곳에 있었음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나무막대 지팡이를 휘두르며 다시 걸음을 재촉하노라면 금시에 잔운대 안내판 앞에 서게 된다.
퇴계 선생이 풍기군수로 있을 때 친형인 충청감사 온계 선생을 마중하고 배웅하던 자리다.
안영협 냇가에서 나뉜 그림자/ 소혼교 다리에서 애끓이는데
평안히 넘으소서 험한 고갯길/ 명년 다시 오실 기약 잊지 마소서
<퇴계>
어느 덧 서산에 해는 지는데/ 술자리 끝났지만 다리 가에 서성거려
구름 산도 분명 내 말 들었으려니/ 내년에 다시 오리 기다리게나
<온계>
어려서부터 우애 깊던 퇴계 형제의 애끓는 정을 되뇌이매, 오토바이 사고로 아직도 병상에 계신
한 분뿐인 형님을 문병하다 눈물이 어려오는 것을 감추지 못했던 혈육의 뜨거움이
다시금 가슴을 울먹이게 한다.
참나리가 온 자락을 차지한 곳에 다다르면서 길목을 막아선 장승이 쉬어가라니,
여기 곧 느티정 주막거리. 예전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지금은 다만 풍기 명산인 사과를 길러내는 과수원으로 변해 버렸다.
예서부터 숲길은 끝나고 골짜기가 확 트이면서 널찍한 농로길이다.
휘적휘적 내려오기 두 시간 여. 산모롱이를 돌아서 고속도로 교각을 스치면 바로 희방사역이다.
젊은 날 소백산을 찾기 위해 밤열차를 타고 새벽녘에 내리면 산꾼들이 득시글거리기도 했는데.
이젠 청량리와 안동을 오가는 열차가 상하행 각기 한 번씩 뿐인 산촌의 작은 간이역일 뿐이다.
왕년의 희방사역도 이미 성시가 지나가 버렸다.
세월의 뒤안길에 묻히면서 머지않아 사라져야 할 운명이나 되지 않을지,
때마침 지나는 화물열차의 기적소리조차 아스라한 메아리처럼 느껴지며 멀리 여음으로 흩어진다.
( 2007. 5. 27. 낭산)
첫댓글 낭산님의 수려한 문체의 글을 대하니 그곳에 아니 가곤 못 배길 것 같은 마음이 더욱 일렁 입니다. 유서깊은 죽령의 어제와 오늘모습 감동적인 글과 함께 잘 보았습니다. 이제 저도 언젠가 그곳을 찾아가면, 비록 다른이들의 눈에는 보잘것 없게 보일지도 모를 이끼낀 돌부리와 허물어진 돌무지를 예사로 볼 수 없게 될 것 같습니다. 퇴계선생의 형제의 우애가 깊었음을 알 수 있는 싯 귀도 감명 깊습니다. 어디를 다녀와도 여행기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는 내 문장력이 넘 답답하게 느껴 집니다. 저도, 낭산님처럼 훌륭하진 못하나 자유로이 문장 구성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좋겠네요~^^
여울님의 답글이 더 멋진 문장이네. 여행은 아는 것만큼 보인다 합니다. 이것저것 생각하며 둘러보면 기억에도 오래 남을 수 있어 주워들은 이야기를 주섬주섬 늘어놓는 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