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을 빼앗고, 땅을 빼앗고, 집을 빼앗고, 입을 것, 먹을 것을 빼앗은, 포악한 일본의 침략정치는, 그 최후 계단에 이를수록, 더욱 그 포악의 도를 더하여, 드디어 우리의 성명을 빼앗고, 또 말과 글까지 빼앗으려 함에 이르러, 우리는 몸은 있으나 뼈만 남았고, 입이 있으되 말을 못하며, 손이 있으되 글을 씨지 못하게 되어, 드디어 숨조차 막히려 하던 차에, 아메리까의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로시아의 대포가 울자, 왜적의 악정은 가고, 조선의 해방은 왔다. 깜깜한 칠야는 새고, 환한 아침해가 떴다. 삼천만 민중이 즐거워 뛰는 마음으로 정성과 힘을 다하여, 자유 독립의 나라를 세우고자, 온가지로 애쓰고 있다.
새 나라 만 년 흥성의 터전을 닦으며, 이 겨레 무궁 발전의 한길을 열음(開함)에 있어서, 가장 그 기초가 되며, 가장 그 핵심이 되는 것은 곧 말과 글을 바로잡으며 잘 다듬는 일이다.
원래 말은 사람과 사람과의 마음의 봉창을 트어서 사회스런(社會的) 관계를 맺게 하는 무형의 교통기관이요, 글은 사람의 무형한 정신적 재산을 담아 보존하여 써 사람의 사회스런 관계를 더욱 널리 번지게 하며, 더욱 높이 피어나게 하는 유형의 축적창고(蓄積倉庫)이다. 그러하여, 한가지 말을 서로 같이 씀으로 말미암아, 한 겨레로서의 사랑의 줄이 맺어지며, 한가지의 글을 서로 같이 씀으로 말미암아, 한 겨레로서의 덩이살이(團合生活)의 느낌이 두터워 지는 것이다.
그뿐아니라, 말과 글은 인류 생활의 무기(武器)이요, 민족문화의 연장이다. 무기가 우수한 군사는 전장에서 승리를 얻고, 연장이 날카로운 종족은 생존 경쟁장에서 패권(覇權)을 잡는 것과 같이, 편리하고 훌륭한 말과 글을 가진 이로서, 능히 그 말과 글의 노릇(機能)을 충분히 발휘하고 이용하는 겨레는, 문화의 피어남(發達)을 이루며, 생활의 즐거움(福樂)을 누리며, 생존의 번짐(發展)을 얻는 것이다.
우리 조선 겨레는, 사천 년 내려오는 훌륭한 말과 오백 년 전해오는 과학스런(科學的) 글을 가지고 있으면서, 능히 이를 잘 부리어 생존 발전의 공을 거두지 못하고, 헛되이 남의 발아래에 눌히어, 약자의 설움과 패자의 슬픔을 겪었으니, 어찌 통본ㅎ 지 아니한가.
돌아보건대 우리는 이조 5백 년 동안의 漢子의 속박을 받음이 심하였고, 일본의 식민 정치 사십 년 동안에 일어(日語)의 압박을 당함이 극도에 달하였다. 이른바 교육이란 단지 남의 말과 남의 글과의 형식스런(形式的) 거풀 교육이요, 참일과 참물건과의 바탕스런(實質的) 속살교육은 아니었다. 그러하여, 온 겨레가 한자의 구속과 일어의 압박 밑에서, 그 정력(精力)과 시간을 허비하고, 그 발전과 번영이 저해되고 말았다.
이제, 우리는, 남의 힘과 덕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해방을 얻었다. 이 남의 힘과 덕으로 얻은 정치적 해방을 영원히 우리 것으로 누리랴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을 힘으로서 문화적 해방을 이루어, 일어의 압박을 덜어 버리고, 한자의 얽맴을 벗어나아, 우리말과 우리글로써 민족 생활의 이로운 무기를 삼으며, 민족 문화의 편리한 연장을 삼지 않으면 안 된다.
한글이 볼래 띠고 난 사명(使命)은 끔직이 거룩하되, 그 타고 난 운명인즉 그리 평탄ㅎ지 못한지라, 지난 반 천 년 동안에 혹은 가시밭을 헤치고, 혹은 태령을 넘고, 혹은 절벽을 뛰어 내림이 무릇 몇 번이런가? 그러나 이러한 시련(試鍊)은 다 그 갸륵한 사명을 이루게 하는 준비의 과정이니, 그 과정이 저렇듯 오래었고, 그 시련이 저렇듯 단단하였음은 곧 그 사명이 특히 멀고 큰 때문이다. 이제, 한글이 난지 꼭 오백째 돌인 오늘을 도는점(轉換點)으로 하여, 과거의 악운(惡運)은 깨끗이 가셔 지고, 미래의 행운이 담뿍 약속되도다. 한글이 漢字를 완전히 갈아들어, 우리 겨레 새 문화 세움의 사명을 다할 때가 인제야 바야흐로 닥친 것이다. 나는 이 역사적 도는점에 처하여, 한글의 다행한 앞날을 바라보면서, 그 고유(固有)의 빼어난 노릇(機能)을 흠뻑 발휘하고 한껏 이용하기 위하여, 그 낱낱의 글자를 완전히 풀어서, 가로씨기로 하여야 함을 힘세게 주장한다.
내가 조선사람이 漢字 쓰기를 그만두고 한글만 쓰기로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순 한글로써 초등 학교의 국어 독본을 꾸미기 비롯한 것은, 나의 열 일곱 살에 중등 학교 일학년에 다닐 때이니, 그 초고가 아직도 나에게 남아 있어, 한뉘에 한결같은 뜻을 스스로 나타내어 보이고 있다. 그러고 내가 한글의 가로글씨를 연구하여 발표하기는, 내가 대학 일 년에 다닐 때이니: 곧 1922년에, 일본 유학생들의 하기 순회 강좌에 참가하여, 발표한 바가 있었다. 그 뒤로부터 한글 가로씨기에 관한 연구가 여러 사람에게서 발표되었으며, 나도 또한 그 완성을 위한 노력을 끊지 아니하다가, 금번 해방 전 찬 삼 년을 옥살이하는 동안에, 오로지 가로글씨의 완성을 힘써, 이만하면 근사하다고 자인할만한 성안(成案)을 얻었다.
그래서 몸은 비록 옥중에서 죽어 없어질지라도, 이 한글의 가로글씨만은 세상에 남기어 뒷자손에게 전하고자 가진 애를 쓰다가, 다행이 연합국의 승리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이 해방되자, 나 개인도 옥에서 석방되게 되어 죽지 않고 가로글씨를 가지고 이세상에 나왔다. 나의 감격과 감사를 무엇으로 형용할 수 있으랴? 나의 여생은 덤으로 사는 게라, 이 덤살이를 마칠 때까지, 나는 한자 안쓰기와 한글 가로씨기를 외치고자 한다.
현대는 민중의 시대이요, 한글은 민중의 글자이다. 대중의 노동과 생산을 희생으로 하여, 소수의 특권계급만이 배울 수 있는 봉건적 글자인 한자를 완전히 물리쳐 버리고, 우리는 민중의 글자인 한글만을 가로씨기로 하여, 옛날 한자의 세로 문화(縱의 文化)에 갈음(代)하여, 한글의 가로 문화(橫의 文化)를 건설하자. 그리하여야, 민주주의의 나라를 굳게 세울 수 있으며, 배달겨레의 생명을 영구히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가슴에 가득한 붉은 마음과 뜨거운 정성으로써, 이를 현재 삼천만 동포에게 외치며, 미래 무진수의 민중에게 이른다.
끝으로 내가 이 글을 짓는 동안에 마침 조선에 주둔하는 미군정청 학무국에 조선 교육 심의회가 열히고 있어, 한자 폐지와 가로글씨의 문제가 토의되어 가결되었다. 나도 그 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이 토의에 참가하여, 더불어 다투는 반대자의 의견을 듣고, 많이 참고가 되었으며, "딴산의 돌(他山之石)의 공을 감사하는 바이다.
나의 가로글씨가 이만한 꼴을 가지고 세상에 나오고 된 것은, 온 누리(世界) 인류의 글적적 유산은 물론이요, 조선 동포 뜻있는 남녀 여러 분의 호의적 교시(敎示)와 원조와 협력으로 말미암을 것이 크다. 더러는 세상에 공포되고, 더러는 나에게 보이어 주어, 나의 참고가 된 주요한 가로글씨의 고안자는 김 두봉, 이 관구, 이 민식, 이 극로, 정 열모, 이 강룡, 이 갑, 함 석기, 김 석곤, 여러 분이요: 나의 벼름(安)이 조금의 고침으로써 채택되어, 한 걸음의 실제적 전진(前進)이 있었음을 보태어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