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비참함 그리고 위대한 반전
시62:9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성경은 인간이 어떤 일을 하여야 행복과 번영을 이룰 것인가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지금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에 대하여 말한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이 생각하는 행복은 하나님이 생각하는 행복과 번영과는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의외로 많은 사람이 이 둘을 분별하지 못하고 신앙의 언저리를 돌면서도 본인이 진정한 신앙인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성경과 파스칼이 팡세에서 말하고 있는 인간의 실상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천체가 그리는 커다란 궤도에 비하면 한 점과 같다. 그리고 이 커다란 궤도 자체도 천공을 떠도는 뭇 천체들을 포용하는 궤도에 비하면 극히 미세한 끝자락에 불과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세계는 자연의 광대한 품 안에서 지각할 수 없는 한갓 점일 뿐이다. 이러한 무한 속의 인간은 저울에 달면 입김보다 가벼운 존재에 불과하다. 그래서 인간은 비참하다.
그러니 우리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 무엇이긴 한데 전체는 아니다. 우리의 몫으로 주어진 무한과 유한의 이 중간이 언제나 양극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 누군가가 사물에 대하여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좀 더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볼 수 있어도 궁극에서는 여전히 무한에서 한없이 멀다. 우리의 수명이 십 년이 더 연장된다고 하더라도 영원 안에서는 똑같이 아주 미미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무한에서 보면 모든 유한은 동등하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다 같이 유한한데 나와 다른 특정한 어떤 유한과 비교되는 것만으로도 고통이며 비참함이다.
그렇게 깃털 같은 인간이 이 땅에서 사는 햇수만큼 더 오래 사는 것도 아니고 살면 살수록 이 땅에서 살 수 있는 햇수가 줄어들어 종래는 소멸하고 만다. 그래서 불안이 생기고 이 불안은 인간이 타고난 존재적 불안으로 인간 의지 밖의 일이다. 자기에게 닥쳐오는 중차대한 일인 줄 알면서도 전혀 손 쓸 수없이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너무나. 비참한 인생의 현실이다.
이러한 비참과 불행에서 인생을 위로해주는 것이 위락이다. 일시나마 비참에서 행복하다는 환상을 주지만 위락이야말로 우리의 비참 중 가장 큰 것이다. 위락은 우리 자신을 깊이 생각하지 못하게 하고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파멸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쾌락이 없으면 권태를 느끼고 이러한 쾌락과 권태는 결국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산 채로 파멸에 이르게 한다.
그런데 이런 비참함이 비참한 것으로 그냥 끝나버리는 것이라면 인간은 동물과 다를 것이 없다. 만약 인간이 자신이 이렇게 비참한 상태에 놓여있는 존재임을 절실히 인식하고 여과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바로 인간의 위대함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파스칼은 말한다....... 놀라운 반전이다.
그러니 인간이 비참하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비참을 아는 것이다…. 짐승들은 비참하지만, 자신들의 비참을 느끼지 못한다….그것은 자연적인 상태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짐승들이 자연적인 상태를 받아들이는 그 상태를 참을 수 없는 비참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위대함은 이 비참 의식과 맞물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신의 이런 비참함을 받아들이려면 상당한 용기가 있어야 하고 깊은 사유(思惟)가 동반되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바람에 날리는 연약한 갈대이지만,........생각하는 갈대이다.
이런 비참함의 근원 중의 하나인 죽음과 종말은 인간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고 인간 의지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인생의 마지막 종말은 불명료하다. 그러나 그 죽음이 자체로는 아무리 불명료하더라도 죽음이란 것은 반듯이 일어나는 사실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왜 일어나는지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깊이 있게 검토하고 생각하는 것을 게을리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자기의 전 존재가 관련된 문제를 그렇게 무관심하게 검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허세다…. 세상이 아무리 생산적이고 아름다워도 죽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불명료한 사태 속에서 명료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적어도 인간의 필수적인 의무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자신의 상태만큼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파멸과 영원한 불행의 위험에 대하여 무관심한 사람은 자기 책임을 버린 사람이다
일자리를 잃거나 명예를 실추당하거나 하면 밤을 새워 절망하고 살길을 모색하면서 죽음에 의하여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을 알면서 무감각한 것은 분명히 허세를 부리는 것이다. 이성적인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하찮은 일에 대한 인간의 예민함…. 중대한 일에 대한 인간의 무감각….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비참한 일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혼이 한낱 바람과 연기일 뿐이라고 말함으로 득의양양하고 만족스럽게 크게 허세를 부리는 모습은 이 세상에서 가장 서글픈 모습으로 자기 책임을 버린 사람들이다.
사람은 성취하고 위대함을 만들어가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 반대 방향 즉 자기가 낮아지고 아무것도 아닌 무로 돌아가기는 쉬우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무에 도달하기 위해서도 많은 지식과 결단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 무엇이긴 한데 전체는 아니기에 위대함에 도달하는 것에 못지않게 무에 이르기에도 상당한 깨달음이 필요하다.
성경은 인간이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 젓고 그래서 신의 위엄과 영광에 참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영광을 끝내 감당하지 못하고 타락하였다. 만약 애당초 타락한 존재였다면 진리와 행복에 대한 아무런 관념이 없었을 것이다.
마치 폐위된 왕과 같다…. 평민으로 태어난 사람은 자기가 평민이라는 것을 불행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왕위에서 쫓겨나 평민으로 강등된 사람이 평민의 신분을 참아낸다는 것은 고난이다. 왕의 자리에서 추락한 왕….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이것이 인간이고 그의 비참함이고 반대로 그의 위대함이다. 비록 인간이 왕의 자리에서 강등되었으나 왕의 영광에 대한 관념만은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의 신분 안에는 위대함이 있으나 우리는 위대하지 못하며 그것보다 더 불행한 것은 행복의 관념은 가지고 있되 여기에 도달할 수 없고 진리의 영광에 대한 잔상은 가지고 있는데 오직 허상만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인간은 절대타자인 초월적인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초월성에 진입한다는 것은 비약이고 이러한 비약은 이성(理性)에 대한 반역이다
그러나 이성이 참으로 이성다울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고 자신을 넘어서는 것에 스스로를 복종시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참된 종교는 이성을 초월하되 반이성적인 것은 아니며 이성을 사용하되 맹목적으로 굴종시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성에만 의존하는 종교는 이신론이고 이성을 버린 종교는 미신이다. (이신론 理神論 : 자연주의, 하나님이 자연을 창조하시고 자연의 질서대로…. 인간의 이성대로….살아가게 하였다는 것 )
인간은 이 비참과 위대함의 풀 수 없는 혼합…. 경멸과 동시에 존경의 대상…. 모순과 역설의 존재이다. 누구가 이 혼돈을 정리할 것인가? 누가 이 무질서에 빛을 비출 것인가?.
그래서 인간은 철학에서 위안을 얻으려 하지만 철학의 근본적인 오류는 인간이 인간을 무한히 넘어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데 있다, 인간을 단지 인간적인 범주 안에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철학의 한계이고 오류이다. 인간은 인간의 한계를 무한히 넘어서는 초월의 경지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비참함을 진실하게 인정하고 수용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초월의 경지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은 인간이 흩날리는 먼지 같은 티끌로 지어졌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 재료는 하잘것없는 진흙이지만 그 형상은 인간이 감히 따를 수 없는 신의 모양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유한과 무한 양극단을 동시에 품고 있는 중간자의 위치에 있다….
그러니 하늘로 가는가? 땅에 묻힐 것인가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는 자신이 결정할 몫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인생의 비참함을 해결하여 주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해결자로 보내주셨다고 말씀하신다.......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위로받으십시오…. 그러나 당신이 위로를 기대해야 할 것은 당신에게서가 아니라 반대로 당신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음으로써 위로를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woongdou@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