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의 시냇물
2026.4.5. 부활주일예배
오늘 차를 타고 교회 오는 길에 율전중학교 담장 옆에 자색 목련이 예쁘게 피어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흰 목련도 예쁘지만 자색 목련도 새롭게 봄의 전령으로 예쁘게 보이더라고요. 추운 겨울을 뚫고 새봄을 알리는 그 아름다운 생명들이 새롭고 반갑게 느껴졌습니다.
오늘은 주님 모시고 “길가의 시냇물”이라는 제목으로 짧게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신지 50일 만에 예루살렘 다락에서 기도하고 있는 120명 성도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주님이 약속하셨고 아버지께서 주신 성령을 주님은 제자들에게 쏟아부어 주셨습니다.
그 오순절날 성령이 충만해서 베드로 사도는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에게 복음의 증인으로 외쳤습니다. 특별히 다윗의 시 16편과 110편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지금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아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말씀하기를 “이스라엘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고 말씀합니다. 나사렛 예수님을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확정적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객관적인 인정인 것뿐만 아니라 주님의 영으로 오늘 주님을 따르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예수님은 둘도 없는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시편 110편 마지막 7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낸 의미가 그리스도인들을 길가의 시냇물로 만들고자 하시는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거창하고 화려한 모습이 아니라도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피어 있는 샤론의 백합화처럼 길가의 시냇물로 주님을 위로해 드리고 주님과 형제들에게 기쁨이 되는 자로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 아름다운 길가의 시냇물이 될 수 있을까요? 시편 110편 1, 2, 3절에 그 조건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전날에 주님의 원수된 우리가 이제는 주의 발등상으로 굴복될 때 이 길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서 머리를 쳐들고 내 생각과 경험 그리고 내 삶의 근거가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어리석은 죄인이 “주님 이건 정말 잘못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주님이 옳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저를 위한 십자가였습니다” 주님께 굴복해서 주님이 발로 밟으시더라도 꿈쩍하지 않는 발등상으로 낮아지는 이 굴복, 이 복종은 날마다 필요한 성도의 삶의 출발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베드로가 전날에는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나의 주님,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을 때 그는 반석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만이 아니라 평생 주님께 굴복할 때만 반석같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뿐만 아니라 우리 인격과 삶이 철저히 내 주님의 발등상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두 번째, 이 자리에서 발등상된 우리가 날마다 순간마다 보좌의 주님께 다스림 받는 것이 정말 소중합니다. 고난주간을 거쳐 부활주일을 맞이하는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프셨겠다. 부활의 기쁨이 참 좋다’ 이런 식으로 가볍게 생각하는 의미가 아니라 ‘보좌의 주님이 나의 주님으로 오늘도 나를 주의 백성답게 주님의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다’ 그 목자로써 인도하시는 주님을 그 음성을 좇아 순종으로 살아가는 양된 삶. 주님께 속해서 주의 생명을 나타내는 포도나무 가지로서의 삶. 보좌의 주님께 다스림 받는 그 순종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겠습니다.
세 번째, 3절에 보니까 이와 같은 주의 백성이 주님께 헌신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부활주일은 사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 예수님의 무덤이 나의 무덤, 예수님의 부활하심이 나의 부활 그리고 예수님의 보좌가 나의 영광이요 소망이라고 기뻐하면서 주님의 돕는 자로 새롭게 헌신하는 시간입니다. “주님! 저의 삶은 제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사람의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것이요. 주님의 돕는 자로 살기를 새롭게 작정해 봅니다” 이것이 길가의 시냇물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저는 성서에서 두 군데 길가의 시냇물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한 군데는 열왕기상 17장 4절에 나오는 ‘그릿 시냇가’입니다. 주님은 엘리야에게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엘리야는 선지자 중의 선지자요. 갈멜 산에서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늘에서 불을 내리고 비를 내렸고, 850명이나 되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영적 전투 끝에 그들을 모두 죽였던 능력의 선지자였습니다. 권능의 주의 종이었죠. 그렇지만 하나님이 진정 원하셨던 엘리야의 모습은 조용히 주님께 묶여진 참으로 주님 향한 정함 있는 마음으로 주님과의 관계가 생생한 영혼으로 길 가기를 원하셨던 겁니다. 우리 몸된 교회는 주님께 피하여 숨고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내 주님과의 사귐 속에 평범한 날 주님과 조용히 동행하는 것을 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모시고 홀로 가는 길을 착실히 걸어가시길 권합니다. 달리 위로 받으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께만 피하고 주님께로만 힘을 얻고 주님의 사람으로만 굳게 섰으면 좋겠습니다. 은밀하신 주님과의 산 사귐 속에서 부활의 생명을 먹고 마셔야만 우리는 성도답게 살 수 있습니다. 달리 비결이 없습니다.
또 한 군데는 사무엘상 30장에 나오는 ‘브솔 시냇가’입니다. 잘 알듯이 시글락이라는 다윗의 사람들의 근거지가 아말렉 족속에 의해서 초토화되고 처자들이 끌려가는 그 아픔 속에서 다윗은 일어서서 주님께 여쭈어봅니다. 주님은 “쫒아가라 네가 반드시 미치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삼상30:8)”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브솔 시내를 건너려고 할 때 피곤하여 건너지 못하는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그 시냇가에 머물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400명을 거느리고 아말렉을 쫒아가는 모습을 봅니다. 기드온의 300용사는 피곤하여도 따랐지만, 여기서 주님의 인도하심은 피곤한 형제들을 쉬게 하는 것이 깨어 있는 판단이었습니다. 다윗의 판단은 결국 옳았습니다. 형제 사랑. 주님의 마음으로 연약한 형제들을 품고 가는 그 형제 사랑. 전투하러 나아가서 승리를 가져온 400명이 돌아올 때에 남아 있던 200명은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전투하는 심정으로 기도했을 줄 압니다. 그래서 싸워서 이겼던 형제들이나 남아 있던 형제들이나 분깃을 똑같이 나누는 이 규례를 영원히 지키도록 다윗이 명령했을 때 주님은 참으로 기뻐하셨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천국의 법칙입니다. 이런 모습이 주님이 진정 마시고자 하시는 길가의 시냇물이 아니겠습니까! 아까 말씀드린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숨고 주님께 피하여 숨을 때 그는 길가의 시냇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리고 풍지박산된 이스라엘 나라의 소망의 등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다윗도 역시 전쟁의 현장 속에서 한 사람이라도 필요한 그 상황 속에서 주님의 마음을 품고 200명을 머물게 한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닌 줄 압니다. 그러나 다윗은 쉽게 결정했습니다. 주님의 판단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환경이 조급하게 우리를 이끌어가고 비록 땅끝을 만나더라도 식구님들과 저는 내 주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 속에서 주님의 종의 길을, 형제 사랑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야 오늘과 그 날의 영광이 있을 줄 압니다. 자신에게 속하지 않고 주님 안에서 좁은 길을 가는 성도는 솟아오른 마음으로 이 땅을 내려다보고 깨어 섬겨가게 됩니다.
길가. 주님 모시고 천국으로 순례길을 가는 성도를 말합니다. 시냇물. 오늘 주님의 보좌로부터 샘 솟는 생명수가 가슴에 젖어 있는 사람입니다. 가슴이 은혜 속에 젖어 있는 그 마음으로 메마른 이 땅에서 주의 생명의 통로,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시길 권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이 비유하신 것처럼 길가는 중에 강도 만난 이웃들이 우리 주변에는 널려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 허락된 마음을 좇아 주님의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며 주님의 돕는 자로 섬겨가는 남은 길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 주님은 당신의 마음을 대변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길가의 시냇물 같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찾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 길에서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반응하는 복된 식구님들 되시기를 권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