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가 지구상에 배출한 가장 위대한 현대 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불리는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평생 수백 권의 저서를 남겼으며, 그중에서도《마르크스의 유령들》은 가장 큰 화제와 논쟁을 불러일으킨 저작으로 손꼽힌다. 1993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이래 난해함과 도발성으로 인해 프랑스 안팎에서 찬사와 비난을 한꺼번에 받았고 오늘날까지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책으로서는 다른 어떤 책보다 더 많은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는 데리다 후기 사상의 대표작인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이번에 진태원 박사의 번역으로 국내 출간되었다.
프랑스에서 초판이 나오자마자 여러 나랏말로 번역되었고(영미권의 대표적인 좌파 학술지인 《뉴 레프트 리뷰 New Left Review》, 205, May~June 1994에는 이 책의 영역본이 출간되기도 전에 발췌본이 미리 실리기도 했다) 수많은 서평과 논평의 대상이 되었으며 연극으로 공연되기도 한 이 책은, 해체론의 창시자로서 온갖 목적론적 사유의 허구성을 드러내어 가치들의 상대화와 무력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기독교는 물론 마르크스주의 쪽에서도 곱지 않은 눈길을 받던 데리다가 서구에서 마르크스주의의 현실적 영향력이 급감한 1990년대에 마르크스주의적 사유의 의미와 가치를 새삼 옹호하고 나섰다는 사실만으로 화젯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이 책에서 '유령학'이라는 새로운 연구 영역을 열어젖힌 데리다는 미국의 정치이론가 프랜시스 후쿠야마의《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1992)에서 쏟아 냈던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궁극적 승리에 대한 예찬을 일갈한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제목에 유령을 내건 만큼 유령이나 망령 또는 환영 등이 마르크스 해석 작업의 중요한 쟁점임을 밝히려는 책이다. 이를 위해 데리다는 햄릿의 유령을 차용한다. 햄릿에서 나오는 유령은 끊임없이 그를 따라 다니며 사고 깊숙이 자리 잡고 떠나지 않는데, 이는 자본주의에서 끊임없이 출몰하는 마르크스의 사상으로 연계된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을 틈타 자유민주주의의 지지자들이 몰아내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의 도구로서, 억압과 착취와 차별에 맞서는 해방운동의 대명사로서 어디선가 불러대는 목소리가 있는 한 망령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고 데리다는 주장한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제목은 또한 마르크스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유령들, 또 마르크스 자신이 계속 몰아내려고 했지만 완전히 몰아내지 못했던 유령들을 가리킨다. 이 책에서 데리다는 마르크스가 결코 유령의 논리, 신들림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다만 그것과의 단절을 부당하게 가정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데리다에 따르면, 일체의 망령이나 유령 또는 환영이 쫓아내야 하는 일종의 악이 아니며, 모든 유령과 결별하는 것이 해방 운동과 이론을 위해 필수적인 것도 아니다. "시간이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다(The time is out of joint)"는 햄릿의 말에 주목하면서 데리다는 만약 이러한 어긋남과 탈구가 없다면, 마르크스의 정신도, 마르크스의 유령들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그 유령의 명령인 마르크스 정신에 대한 상속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지적한다.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현대의 서구식 자유주의를 질타하고자 마르크스의 정신과 사상을 일방적으로 옹호하지는 않는다. 이 책에서 데리다는 현재의 정치제도가 무엇이든 유령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항구적인 요인들이며 그런 유령들과 모종의 화해에 도달할 수 있게 해 주는 '유령학'이 필요함을 시종일관 논변한다. 바우만(Zygmunt Bauman)이 지적한 '대안 없는 삶'이 만약 사회주의 세계의 위협으로 드러날 때면 데리다의 유령은 자본주의의 유령으로 되돌아올 것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마르크스의 정신과 사상의 후계자로서 그 책임을 스스로 떠맡으면서 동시에 철학자인 데리다 자신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와 이론을 탐구한 책이기에 마르크스주의의 현재와 장래에 대한 보다 넓고 깊은 식견으로 독자를 인도할 것이다.
본격적인 데리다 연구의 초석이 될 번역서
이번에 우리말로 출간된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일찍이 국내에 번역된 데리다 책들을 대상으로 주제 서평을 쓴 진태원 박사가 세 번째로 내놓은 데리다 번역서로 치밀함과 성실함이 도두보이는 역작이다. 프랑스 철학 전공자이며 본격적인 데리다 연구자인 옮긴이는, 곳곳에 수사학적 기법과 철학적 논증이 교묘하게 결합되어 프랑스어 화자들도 놓치기 쉬운 데리다 식의 언어유희를 적절하게 살려 내면서 데리다 글의 고유한 어법과 리듬을 우리말로 되살리되 난삽하지 않게 옮기는 '미션 임파서블'을 수행해 냈다.
1990년대 들어 우리나라에서도 《마르크스의 유령들》(한뜻, 1996)을 비롯하여 데리다의 저작이 상당수 번역되어 나왔지만 국내의 데리자 연구자들과 전공자들의 연구 방식은 '원서' 또는 '외국어 판본'으 로 일관되었고 결국 데리다의 주요 개념이나 용어들은 옮긴이의 입맛에 따라 번역되었다. 오역으로 심하게 훼손된 데리다 번역서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검토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좋은 번역서가 있어도 쳐다보지 않은 채 미국이나 독일 또는 일본에서 전개되는 논의를 모방하거나 그대로 수용하니 데리다에 대한 국내 논의가 산발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새롭게 개척된 인문학적 주제나 이론은 데리다의 학문적 업적과 무관한 것은 거의 없다.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신역사주의 등 다양한 사조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데리다가 주창한 해체론의 덕을 보았으며, 플라톤에서 하이데거에 이르는 철학사뿐만 아니라 언어학,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 등 다양한 분야와 주제가 데리다 저작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다. 국내에서 데리다에 관한 독서와 연구가 효과적이고 생산적으로 이루어지려면 기존의 수용 및 논의 방식에 대한 좀 더 진지한 반성과 전환의 모색이 필요할진대 이번에 번역 출간된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데리다 연구자 및 독자들에게 그 작업을 위한 더욱 치밀하고 날카로운 문제 제기와 비판의 초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