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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 8:34-38
34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38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
그리스도의 영향력
저희 교회는 평신도 리더자 교육을 위해서 TEE교재를 사용합니다. Theological Education by Extension, 즉 신학 연장 교육입니다. 이 교재는 1권부터 6권까지 있습니다. 1권 2단원 제목이 “왕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이곳에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는 사람을 설명하기 위해서 네 개의 의자 그림을 사용합니다. 첫번째 그림은 둥근 원 속의 의자 위에 예수 그리스도가 앉아 있는 그림입니다. 이것은 이 사람의 인생은 예수님께서 다스린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즉, 왕이신 그리스도의 은총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그림은, 둥근 원 속의 의자 위에 사탄이 앉아 있는 그림인데, 이 사람은 멀쩡하게 보이지만 인생 전체가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제, 세번째와 네 번째가 오늘 새벽 예배를 드리는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할 그림들입니다. 세 번째와 네번째의 공통점은 사단이 둥근 그림 밖에 있습니다. 대신에 예수님께서 원안에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 두 그림의 차이가 있는데, 세 번째 그림은 의자 위에 예수님께서 앉아 계시고, “자기 의지”는 의자 밑에 있습니다. 그리고, 네번째 그림은 의자 위에 “자기 의지”가 앉자있고, 의자 믿에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러면, TEE 교재는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세번째 그림과 네 번째 그림 중에서 사단이 악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그림은 몇 번째일까요?” “내 의지”가 의자에 앉아 있는 그림입니다. 그 다음의 질문은 “그리스도께 자신의 모든 의지를 내어 드린 그림은 어떤 것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의자 위에 앉아 있는 그림입니다.[1] 의자 위에 예수님께서 앉아 있는 인생은, 왕이신 메시아의 은혜를 입는 삶을 살게 됩니다. 왕의 보호를 받습니다. 왕이 주시는 호의가 삶에 있습니다. 단지 이론이 아닌 하나님의 은총의 능력이 삶의 자원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나를 부인할 때 가능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인생은 본질적으로 사단이 둥근 원 밖에 있고, 원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의자 위에 계시는 인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삶을 통치하십니다. 그 삶에는 생명이 있으며, 진실하고 아름답고,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단이 원 밖에 있을지자로, 현실적으로는 의자 위에 예수님께서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지”가 앉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능력는 것은 이 사실을 잘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날 예수가 그리스도인 교회가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외면당하는 이유가 이 부분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말씀입니다. 함께 34절을 다시 읽습니다.
34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When He had called the people to Himself, with His disciples also, He said to them, "Whoever desires to come after Me, let him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NKJV].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내 인생의 의자에 않으시는 비결입니다. 앞 장에서 말씀 드린 자기 부인에 관한 보충설명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신앙과 혼동하면 안 되는 두 가지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자기 훈련” (self-discipline)과 금욕주의 (asceticism, 어세터시즘)입니다.[2] 성경이 가르치는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금욕주의나 자기 훈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금욕주의와 자기 훈련은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도 합니다. 금욕과 자기 훈련은 인간이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절제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이 훈련은 수양을 쌓기 위해서 종교인들이나 정신적 지도자들이 자신의 욕심을 죽이는 노력을 하는 종류의 것들입니다. 마치 100세 시대는 근육이 중요하기 때문에, 기육 키우는 운동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자기 부인은 (not wife, but denial) 육체에 관한 훈련이 아니고 영적 세계에 관한 것입니다.
독일의 기독교를 세웠던, 본훼퍼 (Bonhoeffer)는 자기 부인을 이렇게 설명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더 이상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 보며 예수님을 인식하는 것이다. 앞서 가시는 예수님 그리고 우리와 멀리 계시지 않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을 부인하는 모든 사람들은 ‘주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신다, 그 분께 가까이 가자’라고 하는 사람들이다.”[3] 자기 부인이라는 것은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고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결정을 내 계획에 따라 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에 맞춥니다. 뿐만 아니라, 절제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목적과 만족을 이루기 위해 육체적 절제 생활을 하는 금욕주의나 자기 훈련은 자기 부인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자기 부인은 철저하게 하나님께 나의 모든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절제와 금욕이 사람인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훈련인 것에 비해서, 자기부인은 사람이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대신 처절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4] 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함께 고린도 전선 10:31절을 읽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So, whether you eat or drink, or whatever you do, do everything for the glory of God [NRSV].
무엇을 하든 생각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먹는 것도 생각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면, 먹으면 않됩니다. 마시는 것도 생각해 보고, 하나님의 영광이 아닐 것같으면, 먹으면 않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말 한 마디를 하든, 행동하나를 하든, 사람을 만나든, 어디를 가든, 삶의 전영역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 나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특히 말을 듣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남을 비판하는 말을 듣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들을 하나님의 영광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때, 예수가 우리 인생에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잃으면 얻는 진리
예수님께서는 나르 따르려거든, 즉 생명을 살리려거든, 혹은 하늘의 일을 이루려거든,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인간 정서와 반대되는 말씀입니다. 어찌하든 나를 드러내고, 내가 이겨야 하는 것이 세상의 질서입니다. 고난의 삶을 싫어 하는 것이 사람의 소망입니다. 지금 나에게 유익이 되고, 나의 꿈을 이루고, 나의 영광을 드러내는 시대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입니다. 소련이 나라로 존재할 때,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솔제니친이 미국을 방문하여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미국이 기독교 국가인 줄 알았는데 와 보니까 이 나라는 모두가 자기를 숭배하고 자기를 섬기는 나라이군요.”[5] 만나본 모든 사람들이 자기 중심으로 세상을 보며 사는 미국 사회를 풍자한 말입니다. 사실, 이 풍자는 인간 자체의 이기적 성품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나 자신을 부정해야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제사장이시고, 왕이신 예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에 축복하시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는 길이 곧 승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부인하는 삶은 곧 예수 안에 있는 나를 긍정하는 길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길은 곧 비전을 이루는 길입니다. 이것을 위대한 역설이라고 말씀합니다. 계속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함께 35-36절을 읽습니다.
35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나 중심적으로 살게 되면 결국은 모든 것잃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 중심적으로 살게 되면,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며 예수님을 섬기는 인생은 부끄러운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내 목적과 유익을 버립니다. 그리고 사람의 안목으로 실패자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궁극적인 성취의 삶인 것입니다.[6] 지금 예수님께서는 인생의 핵심적인 질문을 하십니다. 목숨을 잃을 것인가, 아니면 목숨을 얻을 것인가를 말씀합니다.[7] 예수님께서는 “구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잃으면, 결국 얻는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을 때, 사람들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요? 모든 일이 잘 풀리며, 성공한 인생으로 평가 했을까요? 분명히 사람들은 예수님을 실패자로 봤을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길은 가치 없다고,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는 예수님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함께 빌립보서 2:6-11절을 읽습니다.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 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포기하셨는데, 결국은 자신을 세우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고 죽는 것 같은 삶이었만, 결국은 위대한 자리에 오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은 처절하게 자신을 부정했습니다.[8] 그 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높이셨습니다. 그 삶이 에수님의 삶을 통한 사명을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9]
오늘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 나를 포기하는 것은 성공자가 아닌 실패자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위한 나의 삶에 관해서 부정적으로 평가 하지, 결코 긍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인생의 길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위한 인생은 결국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한 자기 부정은 긍정에 도달하는 확실한 길인 것입니다. 함께 히브리서 12:2절을 읽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으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이, 오늘 사람들의 평가 속에 실패자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는 즐거운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진리를 잊으면 안됩니다. 이것의 믿음의 인생입니다. 예수님 가신 그 길이 믿음의 길이고, 우리가 따라갈 길인 것입니다.
Loser and Winner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정하고 십자가 위에서 달려 죽는다고 하실 때, “그럴 수 없습니다”고 주님께 충고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승리로 보지 못했고, 실패로 봤기 때문에 이런 실수를 했던 것입니다. 십자가가 얼마나 부끄러웠으면, “너도 예수와 같을 패지?”라고 대제사장의 여종이 베드로에게 물었을 때, 저주하면서 “나는 이런 사람은 알지 못한다”고 부정했을까 (막 14:71). 진정한 승리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나를 부정하고, 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38절을 읽습니다.
38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음란이란 구약에서는 이방신을 섬기는 것을 뜻합니다.[10] 사람들이 자신들의 욕구에 따라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것을 신으로 섬기는것이 음란입니다. 음란이란 인간 내면의 욕망이며, 자기 욕구에 이끌리는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음란한 세대에는 표적을 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막 8:12). 음란은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 막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일어나는 원인입니다 (렘 13:27;골 3:5-6). 이런 시대에,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며, 십자가를 지는 것은 환영 받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부정하고, 사명의 길을 가는 것을 떳떳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일을 하고, 복음을 전하고, 사명의 길을 가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베드로는 왜 자신을 부정하고 십자가 지는 것을 부끄러워 했습니까?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믿음의 주며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의식하는 인생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중요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잘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사람들 앞에 잘되기를 바라며, 예수를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큰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를 믿으면서 사람만 생각하면, 베드로가 되게 됩니다. 두번째,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 지는 것을 부끄러워 했던 것은, 인생을 보는 시각이 근시안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모든 것이 판가름 나는 인생관입니다. 오늘 십자가면, 영원한 십자가입니다. 오늘 연습하면, 내일 금메달을 따는 희망을 잊은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오늘에 제한한 인생관을 갖게 되면, 나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내일에 얻는 축복을 결코 희망할 수가 없습니다. 인생이란 오늘이 마지막 아닙니다. 이 땅에서 우리 인생을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 (오늘) 너희가 내 말을 부끄러워 한다면, (내일)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옳 때, 그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인생의 최후 Winner가 누군지를 말씀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생의 최후 Loser가 누군지를 말씀합니다.[11] 예수님 오실 때, 패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승자가 될 것인가? 오늘 복음과 예수님 때문에, 내 삶이 패자처럼 보인다고 해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최후 승리자가 될 줄 믿습니다. 함께 고린도 후서 12:10절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 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역설로 살아 갑시다!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최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세상 사람 몰라줘도 주님께서 나를 세우실 줄 믿습니다!
찬송: 50 (71) 내게 있는 모든 것을, 213 (348) 나의 생명 드리니
[4]Morna D. Hooker, The Gospel According to Saint Mark, Black’s New Testament Commentaries (Peabody: Hendrickson Publishers, 1991, second printing 1997), 208. Hooker는 자기 부인을 이렇게 표현한다. “The attitude called for is one in which self-interest and personal desires are no longer central. The disciple must also take up his cross. The vivid image, in which the disciple of Jesus is likened to a condemned criminal carrying the transverse beam of his own cross to the place of execution.” 십자가를 지는 자는 자신의 의지나 목적을 가질 수 없고 오직 심판자의 뜻에 따르는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직 예수님만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6]David E. Garland,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Mark (Grand Rapids: Zondervan, 1996), 328. Garland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Jesus tells his disciples to follow the way he has chosen, not the way they would choose for themselves. Jesus does not want a convoy of followers who marvel at his deeds but fail to follow his example.”
[7]이곳에서 “목숨”이란 헬라어 “yuch,”인데 두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지상에서의 삶 자체를 뜻합니다. 죽으면 끝이 나는 지상의 삶을 뜻합니다 (마 2:20; 20:28; 막 10:45; 눅 12:22 f.; 요 10:11; 행 15:26; 빌 2:30; 요일 3:16; 계 12:11.). 두 번째는 “영혼, soul”를 가르킵니다. 인생에 꿈과 희망, 비전, 삶의 가치 설정을 이끌어 내는 인간 존재의 일부분입니다 (막 14:13; 눅 1:46; 12:19; 요 12:27; 빌 1:27; 엡 6:6; 골 3:23; 살전 2:8; 히 12:3; 계 18:14.). 영원과 관계된 목숨입니다. 이 목숨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요 11: 25-26).
[8]Jac. J. Müller, The Epistle of Paul tot the Philippians, NICNT (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55, reprinted 1991), 86. Müller는 사명을 성취하신 예수님의 지상 삶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The whole time of His sojourn on earth was a time of self-humiliation. He was being humiliated and abased, instead of commanding and ruling in power and majesty and occupying a place of honour and authority and preeminence among men. From the manger to the cross He trod a path of humiliation, which culminated in the misery and suffering and reproach of a shameful death on a tree. Obedience unto God and surrender and submission to the will of God was maintained by Him unto the end, and the profoundest degree of humiliation was reached in that His death was not to be a natural or an honorable one, but was the painful and accursed death of the cross (cf. Deut. 21:23; Gal. 3:13).”
[11]Bruce B. Barton, te al., Life Application Bible Commentary: Mark (Wheaton: Tyndale House Publishers, Inc., 1994), 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