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 가운데 때론 하나님이 등을 돌리고 계시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시편을 보면 다윗도 그런 경험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정말 애 끓는 절규요 매달림입니다. 주의
얼굴을 언제까지 숨기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외치는 모습과 비교해 보세요. 주님의 고난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셔서
영광으로 돌아가시는 예정된 코스이기에 하나님은 얼굴을 돌리시고 못 본체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육체의 옹졸하고 치사한 옛 자아를 포기토록 하시기 위해 때로는
하나님은 얼굴을 돌리고 계시는 것 같을 때도 있습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간절하게 육체로부터의 구원을 간구해야 합니다. 모델이신 주님을 따라서 말입니다(히5:7)
2절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아리이까” 내 영혼 안에
일어나는 내적 전투로 인해 언제까지 갈등(wrestle)해야만 합니까? 애타 부르짖습니다.
신앙은 긴가민가할 때가 가장 어렵습니다. 신앙의 회색지대를 지날 때가 무척 힘듭니다.
엎치락덮치락하므로 정말 레슬링 같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허탈하기도 합니다.
종일토록 그렇답니다. 매일 매일 반복되어 오는 나 자신에 대한 회의와 신앙의
가치에 대해 흔들리는 자신의 무력감이 속을 발칵 뒤집고 흔들어 놓습니다.
3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여호와여 나의 하나님이여
이제는 돌아보시고 응답하셔서 내 눈을 뜨게 하소서’ 부르짖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
자신이 사망의 잠을 잘까 두렵기 때문이었습니다. 빛과 어둠을 알고 생명과 사망의
간극을 알고 나면 사망의 잠이 얼마나 답답하고 괴로운지 알게 됩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지 않으면 자꾸 눈이 감깁니다. 이런 이들을 종종 보는데 참 안타깝습니다.
마음의 눈이 밝아지고 마음이 총명으로 정돈되어 있으면 환경이 잘 못 되어도 정상입니다.
그러나 열심히 일을 하고 분주해도 마음이 어두워지면 사망의 잠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영안이 어두워지면 원인 모를 불쾌감과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다윗은 이를 두려워합니다. 이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망의 잠을 자도록 미혹시킵니다. 그 올무에 걸리기만 하면 흑암이 짓누릅니다.
4절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그렇게 되면
원수들이 길길이 뛰며 좋아하게 됩니다. 이를 다윗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과 연결시키고 자신의 내적 갈등을 하나님께 제출하는 다윗을 보세요.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기분전환을 위해 운동을 한다거나 영화를 보거나 쇼핑 등을
할 겁니다. 그러나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이건 분명히 영적인 레슬링이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깨어 기도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베푸신 은혜의 총량을 깊이 헤아립니다. 사단은 우는 사자와 같이 입을
벌리고 덤벼 댑니다. 신자들이 세속적인 믿음으로 돌아갈 때 사단은 기뻐합니다.
아니 지극히 인간적으로 살아가는 걸 마귀는 기뻐하고 별별 호응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갈등으로 인해 요동하면 이 원수들이 얼마나 낄낄대며
좋아하겠는가를 생각하고는 이것을 두려워합니다. 신실한 주의 종의 자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은 역전승의 드라마입니다. 십자가에서는 주님께서 마귀에게
완전히 패배한 형국이었습니다. 아마 사단에게는 축제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3일 만에 다시 일어나셔서 단번에 사망의 권세를 무장해제 시켜 버렸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일생도 항상 역전의 드라마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죽음을
항상 짊어지므로 그 생명이 내 몸과 죽을 육체에 나타나는 비밀을 터득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5절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그러나 나는(But) 하고 단호한 결심을 합니다.
그 결심은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만 바랍니다’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만 의지하고 사모하겠다는 결단입니다. 이렇게 되는 게 바로 구원입니다.
결코 나를 버릴 분이 아니라는 강력한 믿음입니다. 그리고는 ‘나는 주의 구원
안에서(in thy salvation) 춤을 추고 기뻐할 것입니다’ 하고 툭 튀어 나옵니다.
용수철과 같은 순발력입니다. 생명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이 생고무처럼
탱탱해져 톡톡 튀어야 합니다. 저 쪽 동네 세상 사람들은 나의 외모를 보고
어쩔 줄을 몰라 좋아 하지만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길길이 뛰며
기뻐하겠다는 성도들의 단호한 신앙고백입니다.
6절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겠습니다’는 고백은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다윗이 이와 같은 고백을 하는 근거는 하나님이 그를 후하게 넘치도록 대접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대접하실지
안다면 성령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황금률입니다(마7:12) 시편은 하늘에 속한 성도들의 신앙을 노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시편도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시편 1편처럼 말씀을
즐거워하여 묵상하는 믿음이 갖는 복입니다. 비록 육신의 상황은 좋지 않을지라도
내 속은 주의 구원의 즐거움으로 인해 길길이 뛰겠다는 진정한 성도들의 노래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