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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의 민중음악
박종문(음악학자)
문학을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으로 구분지을 수 있다면 음악도 순수음악과 참여음악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순수음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음악적 아름다움을 우선하고 여타의 요소들은 순수한 음악미를 보조하고 완성시킬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부여한다. 양악, 국악, 대중음악, 어디에 종사하든 이러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음악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순수예술음악가라 부를 수 있겠다. 정명훈, 조수미, 안숙선, 조용필 이런 사람들을 그 예로 들 수 있으리라.
한편 음악적 아름다움보다도 인간사회와 역사의 대의,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 어떤 안타깝고 눈물겨운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모든 생명들을 볼 때의 애잔함, 이런 것들이 인간에게는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이므로 음악미는 저런 더욱 중요한 것들이 표현될 수 있도록 돕고 봉사하는 수단으로서만 기여해야 한다고 믿는 음악가들을 우리는 참여음악가라 부를 수 있겠다. 참여음악이 가장 많이 목적하고 지향하는 대상이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다수의 사람들, 즉 민중이므로 참여음악은 자연스레 민중음악이라 불리게 되고 현대 한국에서 이러한 목적의 음악행위자들, 즉 민중음악가의 예로 김민기, 김종률, 노래를 찾는 사람들, 안치환, 김광석 같은 사람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순수음악가들은 참여음악은 음악을 수단화하고 그 음악언어들이 조악하기 때문에 음악으로서의 품급이 낮다고 대체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참여음악가들을 멀리하고 심지어 경멸하기까지 한다. 단적으로 그건 음악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그런데 순수음악에서 요구하는 모든 음악적 능력을 갖추고 당당한 음악예술가로 입신한 음악가들 중에서도 극소수의 사람들은 음악의 사회적 의미와 역할, 즉 참여의 문제를 끝까지 고민하고 자신들의 음악행위의 범위와 목적에 참여의 문제를 늘 포함시키고 있다. 그런 음악가들의 예로 김순남, 윤이상 같은 음악가들을 들 수 있다. 이런 걸출한 인물들 말고도 인생의 현실, 삶의 현장을 외면하고 순수한 음악에만 골몰하려니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을 느끼는 상당수의 순수음악가들도 있다.
우리 한국에서 참여음악은 주로 학생운동, 노동운동 등 각종 민중 시위의 현장에서 직접적으로 체험된다. 자의적이건 타의적이건 시위 현장에 있어본 사람들은 시위 대중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사용되는 노래들이 강한 감정의 추동력과 현장을 압도하고 이끌어가는 힘을 행사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리하여 그 힘이 곧 역사를 바꾸고 현실을 개조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조차 받는다. 그 음악들은 대체로 투쟁적이고 전투적이지만 때로 비장하고 때로 애상적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대표적인 민중가요 몇 곡을 음미해보려 한다.
한국 민중음악의 대표적 노래라 할 <임을 위한 행진곡>은 그 곡의 탄생에서 시작하여 민중들에의 수용에 이르기까지 특별한 아우라를 내뿜고 있다.
1. <임을 위한 행진곡>의 탄생 배경
1982년 2월 20일 전남대 교정에서는 신랑 윤상원, 신부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은행원이 되었지만 개인의 안락한 삶을 버리고 정규 교육에서 소외된 이들을 위한 ‘들불 야학’의 교사가 되었고 광주 항쟁 당시 시민군의 대변인으로서 내외신 기자들에게 광주의 진실을 알리다가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의 총에 운명한 윤상원, 그 ‘들불 야학’의 창립 교사였으나 1978년 12월 27일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박기순. 희생과 봉사로 희망을 꽃피우고 모두의 밝은 미래를 만들고자 헌신했던 이 아름다운 두 사람의 영혼결혼식에 전남대 후배 김종률이 작곡하고 백기완의 옥중 장편시 [묏비나리]를 바탕으로 작가 황석영이 작사한 한 편의 노래가 헌정된다. 그 노래가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던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이 곡의 작곡자 김종률은 곡이 만들어질 광주 항쟁 당시 전남대 경영학과 학생이었고 현재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으로 일하고 있다. 1982년 4월 작가 황석영, 광주지역 노래패 15인과 함께 노래극 <넋풀이 ; 빛의 결혼식>을 만들어 윤상원·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 바치기로 하였고, 두 남녀가 광주의 아픔을 통해 둘 다 희생하고, 나중에 다시 영혼결혼식으로 결합한다는 스토리로, 이에 맞게 7곡의 창작곡을 썼는데 마지막에 한 곡이 모자랐다고 한다. “엄혹한 현실에 힘들어하고 기죽고 무서워하는 후배들,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죽은 사람들이 ‘자꾸 기죽지 말고, 용기 잃지 말고, 내가 앞서서 가니까 열심히 싸워서 민주주의를 만들라’고 하는 다짐의 노래가 없었다”고 했다. 노래극의 마지막 퍼즐을 찾지 못한 셈이다. 고민이 커진 김종률은 “집중이 안 돼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해서 집에 가 작곡을 했다”며 “그리고 나서 약 4시간쯤 뒤 <님을 위한 행진곡>의 악보가 나왔다”고 말했다.
김종률은 이 악보를 들고 다시 노래패가 모여 있는 장소로 달려갔는데, 가사가 문제였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가사를 붙이는데 입에 붙지가 않았다”면서 “그때 황석영 작가가 서재에 들어가 책을 가져오더니 그 책을 보고 뭔가를 착착 적기 시작했다”고 했다. 이어 “딱 보니까 이 가사가 입에 착 붙었다. 속으로 대작가는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면서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게 바로 백기완 선생의 [묏비나리]에서 가사를 가져와 황석영 작가가 노래에 맞게 조사를 붙이고 가사를 조정한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관객도 없고 전문적 음악가나 악기나 녹음시설도 없이 그저 통기타와 북과 꽹과리로 반주하며 이 노래를 처음 불러본 노래패 사람들은 형언하기 힘든 긴장과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그만큼 이 노래에는 힘이 있었다. 이리하여 오월의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이 완성된 것이다. 이 노래의 테이프는 당시의 기독청년협의회에 의해 비밀리에 2,000개가 복사되어 전국에 배포되었다. 김종률은 <임을 위한 행진곡>은 사실과 진실에 바탕을 둔 역사의 노래이며 백기완·황석영이 아닌 시대가 가사를 쓰고, 김종률이 아닌 역사가 곡을 붙인 진정한 민중의 노래라고 말한다.
2. 김민기의 <아침 이슬>
한글 위키피디아에서는 〈아침 이슬>을 “1970년 김민기가 작사·작곡하고 양희은이 부른 포크 록 장르의 노래이다”라고 정의해놓고 있다. 발표 당시의 대한민국의 억압된 정치 상황을 은유하는 듯한 가사로 젊은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으며, 1975년 다른 곡들과 함께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10월 유신이 끝나고 제5공화국 시절까지 금지곡으로 남아 있었지만, 민주화를 염원하는 대학생들과 젊은이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서정적인 노래로서 특히 시위 현장에서 격정의 순간이 지나고 후반에 분위기를 바꾸고 기분을 다스리기 위해 널리 불려 왔다. 훗날 양희은은 노래를 지은 김민기나 자신은 이 노래가 학생들의 시위에 사용되리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며, 학생들의 민주화 투쟁을 독려하기 위해 만든 노래도 아니라고 밝혔다. 이 노래는 1971년 정부가 건전 가요로 선정하기도 했었다.
미대 회화과를 나오고 클래식 기타를 익히고 소박한 민중적 정서를 표현하는 아름다운 노래들을 다수 작곡한 김민기는 한국의 대표적인 민중음악가로 지칭해도 모자람이 없다. <늙은 군인의 노래>, <백구>, <가을 편지>, <작은 연못> 같은 곡들은 가난하고 힘들지만 아름답게 살아가려는 민중들에게 위안과 힘이 되는 주옥과 같은 노래들이다. 김민기는 ‘학전’ 소극장을 운영하고 연극 ‘금관의 예수’, 노래극 ‘개똥이’ 뮤지컬 ‘지하철 1호선’등을 성공적으로 연출한 연극연출가이기도 하다. 특히 ‘지하철 1호선’은 1996년 서울연극제 극본상, 특별상을 받았고 무려 4000회의 공연 기록을 세웠다. 2007년 독일 바이마르 괴테 메달을 받았고 2013년에는 제10회 한국대중음악상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깊고 부드러운 저음으로 자신의 노래들을 부를 때는 누가 들어봐도 매우 훌륭한 가수임을 느끼게 해준다.
3. 문대현의 <광야에서> : 스케일과 비장미 넘치는 지사(志士)의 기개를 보여주는 노래로서 시위 현장에서 매우 많이 불린다.
4. 김호철의 <단결투쟁가> : 파업투쟁 등 노동운동의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혁명적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노래이다.
5. 민족음악가 김순남(金順男)
여기서 김순남(1917~1983)을 민중음악가가 아니라 민족음악가로 부르고 있는 이유는 그가 적어도 음악에 있어서는 분단을 통일로 이끌어가고자 온 몸과 마음을 민족의 제단에 불태운, 전설적 천재도 빨갱이도 아닌 이 땅의 참 음악인이었기 때문이다. 15세(1931)에 경성사범학교에 입학한 김순남은 피아노와 성악과 영어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박영환에게서 피아노를 배우고 음악부에 들어가 경성사범 취주악단을 지휘하였다. 조선인 교사 박두봉으로부터 사회주의 사상을 배우고 일본인 음악교사 요시자와로부터는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아 졸업 후 일본유학길에 오르는 영향을 받았다. 어머니로부터 주어진 양호한 음악적 환경의 덕으로 지금의 고교생 나이인 경성사범 시절 이미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다수 연주할 수 있었다.
1937년 일본으로 건너간 김순남은 작곡가 시모후사에게서 4개월간 작곡 레슨을 받고 1938년 3월 토오쿄오 고등음악학원에 입학원서를 제출하였다. 이 입학원서는 하나의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원서에는 김순남에 의해 임의로 그어진 한 칸에 “수업료 면제희망”이라고 기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학교 입학사상 초유의 수업료 면제요구는, 그것도 식민지 조선에서 유학온 조선인 학생이 그런 당돌한 요구를 했다는 것은 경악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러나 입시 관계자들은 김순남의 “배짱에 감탄”하였다. 작곡 외에 악기 실기 테스트에서 김순남은 피아노를 선택하여 시험을 치뤘고 그 피아노 실력은 “깨끗하게 끝내주는” 것이었다. 말할 것 없이 김순남은 ‘토오쿄오 고등음악학원 본과 작곡부’에 당당하게 입학하였다. 아, 조선의 자랑이여! 그런데 바로 이 학교에서 김순남은 민족음악가로 변신하게 되는데 바로 작곡 선생 ‘하라 타로오(原 太郞)’와 운명적으로 만났기 때문이다.
김순남이 입학한 얼마 뒤 이 학교에 작곡교수로 출강하게 된 하라는 ‘일본프롤레타리아음악가동맹’의 서기장을 지낸 사람으로서 후일 김순남이 사회주의적 사상에 빠져드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김순남을 발견했을 때 두 사람은 사제지간을 뛰어넘은 인간적 만남을 가졌다. 하라가 1년 후 이 학교를 그만 두었을 때 김순남 역시 학교를 자퇴해버린 것을 보면 넉넉히 그 관계의 깊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라 타로오는 자서전 「나의 청춘일기」에서 김순남을 “재능풍부하고 혁명적인 음악가”라고 회고할 정도로 서로의 세계관을 공감하고 있었다. 1939년 말에 고등음악학원을 자퇴한 김순남은 자퇴 직전에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란 현대작품으로 ‘일본현대작곡가연맹’의 회원으로 자리잡는다.
1940년 4월 ‘토오쿄오제국음악학원’ 본과 3학년 기악부로 전학하여 1942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다. 1941년에 일본이 미국에 선전포고하자 김순남은 졸업 직후 귀국한다. 당시 국내는 창가풍 노래와 가곡, 딜레땅뜨적 음악인들로 채워져 있었고 전통음악계와 양악계가 냉소적 평행선을 달리며 식민지 민족현실을 외면한 채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순수음악 지향성으로 일제에 편입되어 일본정신과 정서로 대중들을 계몽하며 오도하고 있었다. 귀국 후의 김순남은 친일관제단체인 ‘조선음악협회’에 불가피하게 가입하는 한편 ‘성연회(聲硏會)’란 지하음악서클을 조직·운영하였다. 1944년 10월 김순남은 숙명고녀 출신 보통학교 교사 문세랑과 결혼한다. 두 달 후 12월 17일에 한반도양악사에 현대기법으로는 처음인 “제1회 김순남 작곡발표회”가 열렸다. 유명한 가곡 <喪列>, <철공소>도 이 때 발표되었다.
1945년에도 날개 달린 음악가로 활동하던 김순남은 3월 30일 부민관에서 <피아노 3중주곡>을 발표하였고 6월 9일 ‘경성합창단’을 지휘하여 합창지휘에서도 두각을 나타낸다. 드디어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날이 오고 8월 16일 김순남은 동지들과 함께 ‘조선음악건설본부’를 결성한다. 일본풍 노래가 아닌 해방의 노래 <건국행진곡>(김태오 작사)을 작곡한다. 한 달 후 ‘조선음악건설본부’는 와해되고 9월 15일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이 건설된다. 10월 김순남은 악단비평문에서
“우리는 문학적인 음악을 부인하는 동시에 기계적인 한슬릭의 미론도 일축하여야 한다. 음악은 우리의 생활에서 출발하고 생활과 감정, 생활과 사상은 불가분리하다. 우리는 사상과 음악을, 민족과 음악을, 계급과 음악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념에 치중하고 기교를 배격하는 예술가를 배격하는 동시에 이념을 떠난 예술가를 또한 무시한다. 우리가 참된 음악가가 되려면 현실을 더욱 파악하여 민중의 부르짖음을 들어야 할 것이다.”
라고 말하며 민족음악 실천의 당위성을 외쳤다. 1946년 2월 김순남은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중앙위원, ‘조선문화단체총연맹’의 중앙예술위원이 되었고 대구 10월 항쟁 때에 즉시 작곡한 <인민항쟁가>(임화 작사)는 북한 애국가로 한 때 오인할 정도였으며 일본과 소련에서까지 혁명 송가로 높이 평가받았다. 11월에는 정종길, 안기옥과 함께 남로당 창당시 입당하였다.
1947년 8월 미군정에 의한 좌익인사 검거가 시작되자 김순남은 숨어 살기 시작했고 도피 기간 지척에 딸을 두고도 만날 수 없는 통한을 품고 딸 김세원이 살아가야 할 이 나라의 운명을 생각하며 문득 시를 짓고 곡을 붙여 <자장가>를 만들었다. 드디어 김순남은 1948년 7월 말 월북하고야 만다. 익월 8월에 ‘해주음악전문학교’의 교사로 부임한다. 이 학교는 후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작곡가가 된 정률성이 일시 북한에 들어와 1945년 10월에 창립한 학교(당시 교명은 ‘해주음악학원’)였다. 이 학교에서 김순남에게 작곡을 배운 장일남(가곡 ‘비목’의 작곡자)은 스승에 대한 깊은 존경심의 결과 자신의 이름을 김순남의 끝자인 ‘남’을 따와 장일남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해주에서 평양으로 옮겨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며 헌법위원에까지 오르고 ‘평양음악전문학교’의 교수가 된 김순남은 집과 피아노, 자가용을 갖춘 환대 속에서 평양 생활을 시작한다. 무용가 최승희, 가수 왕수린도 김순남의 집에 출입하였다. 1949년 김순남은 평소 사숙하던 쇼스타코비치와 하차투리안이 있는 소련으로 가게 된다. 이 해 9월 그는 소련의 10월 혁명 기념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2주간 모스크바를 북한 대표로서 공식방문한다. 문학가 이태준도 이 때 동행하였다. 김순남은 거기서 흠모하던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를 만났고 김순남의 악보를 검토한 쇼스타코비치는 “조선에도 이런 작곡가가 있었느냐”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6. 25. 동란 때 김순남은 서울에 와서 음악인들의 조직 책임자로 일하며 많은 노래들을 쏟아냈다고 한다. 김순남의 어머니 이보경 씨는 전후 공산주의자 아들을 둔 죄로 총살되었다. 1952년 7월에 김순남은 정식으로 모스크바 유학길에 오른다. ‘차이코프스키음악원’(현 모스크바음악원)에서 하차투리안에게 작곡을 배운다. 하차투리안은 김순남을 제자로 만나기 전 1951년에 그의 작품 <빨치산의 노래>에 화성을 붙여 발표함으로써 김순남을 자신과 대등하게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무렵 북한에서는 박헌영의 남로당 계열 인사들에 대한 숙청의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모스크바 유학생들 중 남로당계 청년들에게 북한당국으로부터 ‘귀환장’이 날아든다. 평양에 가면 죽는 길이라는 걸 안 많은 청년들은 소련 당국에 망명 신청을 했고 소련은 그들의 망명 신청을 받아주는 대신 북조선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그들을 카자흐스탄으로 유배시켰다고 한다. 유독 김순남은 두려움 없이 북에 귀환하였고 2년간의 무서운 ‘당성 검토’를 받고난 후 1955년 박헌영, 이승엽, 임화 등의 핵심인사들은 처형되었고 김순남은 부르조아 문예의 낡은 잔재를 따랐다는 비판을 받고 모든 공직에서 추방되고 그를 마지막까지 죽음으로 몰고 간, 사형선고보다 더 무서운 ‘창작권 박탈의 형’을 받았다. 실제로 그 후 김순남은 오지에 유폐되어 엉터리 선전선동가, 노동가, 인민군가 따위의 악보를 사보하는 일을 했다는 말이 전해져 있고 마지막 10년간 함경도 동해안 일대를 전전하며 투병생활하다가 1983년 이승의 삶을 마감하였다.
그는 남한에서 추방되고 북한에서 숙청되어 남북의 역사에서 동시에 그 이름이 지워져버린 진실한 민족음악가라고 그 역사적 정체를 밝힌 학자는 중앙대 국악과 교수 노동은(魯棟銀)이다. 그의 저서 「金順男」(1992, 낭만음악사)의 전반부를 참조·요약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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