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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좋은교회/20200614 주일오전예배/ 정광수목사님 | |
분류 | 주일오전예배 |
제목 | 복음과 종교 |
성경 | 마태복음 23:1-12 |
정리 | 참좋은교회 청년부 |
성경말씀(23:1-12)
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녹취자료 |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괴나리 봇짐 하나씩 메고서 그냥 나온 거에요. 가진 것도 없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첫번째 명령한 것이, 성막을 지어라...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되졌을 때에 또 무엇을 명하는 것인가? 성전을 재건해라... 가진 것도 없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가장 먼저 성막과 성전을 지으라고 명하셨어요.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길을 걸어가면서 성막 중심으로 이와 같이 12지파가 같이 생활 하도록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바로 생활의 중심이 성막을 있게 만들었구요. 하나님은 왜 성막을 짓게 만든 것인가? 하나님 앞에 예배가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가장 귀중히 여겨야 될 것이 있다 그러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 해야 합니다. 예배를 통하여 성취될 언약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한 주간 영적 싸움에 승리할 힘을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얻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 84편을 보면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 지요... 시편 84편 4절을 보면 예배를 통하여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가 복이 있다고 표현을 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주님을 찾을까요? 시편 40편 2절을 보면 내 영혼이 하나님과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 어느때에 나아가 하나님 얼굴을 뵈올까... 사모하는 마음이죠. 그리곤 시편 37편을 보면 악인의 형통을 보고서 실족할 뻔 그 시편 기자가 17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 예배 드리다가 해답을 얻었다고 말씀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4장 24절 말씀에서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를 드려라 우리에게 말씀을 하죠.
자, 지난주 메시지는 사단이 우리를 속이는 속임수를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 내가 믿는 아버지 하나님 누군가? 창조주요, 전능자요, 지존자요, 절대자 되시는 바로 그분을 믿지 못하도록 속이죠. 내속에 나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가 누군지 모르도록 속입니다. 그분이 참 선지자요, 참제사장, 참왕 되심을 모르도록 속이고, 그리고 성도의 신분과 권세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도록 사단은 속입니다.
자, 우리가 왜 실패하는 것인가? 사단에게 속아요. 그래서 사단이 우리에게 던져준 틀린 해답이 진짜인줄알고 망할 해답에 속고 또 다른 해답을 가지고서 진짜 해답인 그리스도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사단의 말을 듣고 살면 어떤 때는 굉장히 형통하고 잘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시편73편을 보면 악한 자의 형통을 보고서 거의 실족하여 넘어질 뻔 하였다고 말합니다. 죽을 때 고통도 없고 그 힘이 강건하고 고난도 없고 재앙도 없고 교만하고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능욕하고 거만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소리지르고 항상 편안하고. 이들의 삶을 보면서 예수를 안믿고 하나님을 조롱하고 멸시하는데도 저렇게 잘 살 수있구나. 실제로 우상숭배한 애굽이나 바벨론이 얼마나 강성하고 세계를 정복했어요.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겉모습만 보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기자가 어디서 깨달았다고요? 성소에 들어가서 예배드리다가 깨달았다고. 기도하다가 깨달았다고. 결국 그들의 결과는 뭘까요? 이 땅에서 아무리 잘 살아도 그 결과는 지옥백성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땅에 살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영적문제에 시달리다가 지옥가게 되는거죠. 사단이 준 무서운 속임수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해답으로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을 종교라고 합니다. 오늘 메시지의 핵심자체는 복음과 종교입니다. 겉으로는 복음이나 종교나 비슷합니다. 오히려 종교생활하는 자가 더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믿음이 더 좋은 것처럼 보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같은 바리새인 서기관을 향하여서 너무 심하다 할만큼 그들을 정죄하는 장면이 23장에서 나옵니다.
그들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소원은 내 자식이 태어나면 바리새 공부를 시켜서 바리새인 만드는 것이 그들의 로망이었습니다. 실지적으로 사도바울도 바리새공부를 한 자입니다. 아주 자랑스럽게 여겼죠. 종교가 무엇인가요? 바로 마태복음 16:14에 나오는 것처럼 종교는 예수를 어떻게 믿는 겁니까? 세례요한처럼 예레미야처럼 엘리야처럼 선지자 중에 한사람처럼 그 종교입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사회 정의를 부르짖고 그리고 구제 봉사에 생을 걸고 신비한 영적체험을 위해 밤을 새워 기도하고 열심히 교회에 충성 봉사하고 굉장히 좋아보입니다. 그런데 왜 종교가 무서운 것인가하면 그 중심자체가 바로 내가 하는 겁니다. 내 열심 내 선행 내 공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겁니다. 인간이 가진 모든 이성과 지성과 감성과 총 동원시켜서 내 노력과 내 힘으로 신앙생활하는 모습이 사실 종교입니다.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 굉장히 옳게 여겨지기도합니다. 문제는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필요없는 겁니다.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할지라도 흑암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교회에 충성봉사한다고 할지라도 종교생활은 재앙이 비켜지나가지 않습니다. 종교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겁니다.
복음의 중심, 바로 그리스도가 중심입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될 때 성삼위 하나님의 능력이 내 가운데 실제로 임하게 되는 겁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될 때 말씀의 성취가 이뤄지고 오직 그리스도가 될 때 세가지 저주가 떠나가게 되고 오직 그리스도가 될 때 실제적인 응답이여기서 오게되는 겁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될 때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서 그리스도가 내인생의 주인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여러분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되어지는 겁니다. 뭐할때요? 오직 그리스도 언약 속에 들어가게 될 때요. 우리는 어떤 고백을 해야할까요? 주님 나는 한순가도 그리스도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예배를 지금도 받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에게 절대불가능을 절대가능으로 바꿔주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복음 누리는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그 사람의 삶을 하나님이 온전히 주관하시는 겁니다.
1.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라
예수님이 제자와 무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예수께서 그렇게 책망을 하면서도 그들의 가르침은 들으라고 말씀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그들을 모세의 자리에 앉혔다는 이야기는 하나님이 그들을 메신저로 세웠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행하고 지키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강단에서 목사가 선포한다면 선포하는 목사의 외모나 인격이나 인품이나 행위를 보지말고 선포하는 말씀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목사도 흠이 많아요. 실수도 할 수 있어요. 목사도 흠이 많아요 실수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목사 행위는 보지말고 무엇을 보라? 선포하는 말씀을 잡으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누가 메시지 하든지 상관없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그 말씀을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으로 잡으면 되는거에요. 성경에 한나를 보면 한나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너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다보니까 엘리제사장이 보니까 웬 여자가 대낮부터 술에 취해서 저렇게 흐느적거리는 것인가 싶어서 왜 술먹고 그러냐고 했단 말이에요. 완전히 영안이 어두운 거죠. 그런데 거기서 한나가 자기 마음의 답답함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게 되죠. 그때 엘리가 이야기합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은혜를 베푸시길 원한다고. 그 말을 듣고서 아멘하고 한나는 돌아가는 것이에요. 누가 선포를 하든 상관없어요. 강단의 메시지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으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강단에 목사를 세운 것은 목사를 위해 세운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에게 반드시 전달되어야 할 메시지를 목사의 마음과 생각을 주관하여서 메시지를 선포하게 만드는 겁니다.
저는 그 확신을 갖습니다. 하나님이 부족하지만 정광수 목사를 세워서 오늘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 선포하게 만드신다는 확신을 갖고서 말씀을 선포합니다. 성도님들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까? 하나님이 오늘 내게 꼭 필요한 말씀을 주시는구나 하고 아멘으로 우리가 받아야하는 겁니다. 한나처럼 메신저가 누구인지 상관없어요. 아멘으로 그 말씀을 받을 때 내게 응답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아멘으로 받지 않으면 그 말씀이 나와 상관이 없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사단이 신자를 은혜 받지 못하도록 속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목사에 대해서 불신앙하게 만들고 오해하게 만들어서 말씀이 들려지지 않게 만들어요. 정목사는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아 맨날 나한테 잔소리하고 책망하는 것같아 목사님은 아무개 장로랑 권사만 좋아하고 나는 안좋아 하는 것 같아. 나한테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여러분의 마음상태가 불편한 상태로 예배를 드리게 되면 어떨까요? 메시지가 귀에 안들어 와요.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부탁하는 것은 절대 집에 가서 교회나 목사 흉보지 말아요. 그건 혼자 기도제목이지.. 흉보면 자식들이 무슨 생각하는 줄 아나요? 흉보면 ‘저 목사 형편없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 자녀는 교회에서 절대로 은혜 받지 못하게 되요. 이것은 사단의 술책들입니다.
마태복음 5:24 말씀을 보면 먼저 해야 할 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형제들에게 원망 받을 일이 있거든 형제와 같이 화목하고 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필요하다고요? 예배 이전에 목회자와 불편한 관계 속에 있다면 반드시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마무리를 하지 않는다면 예배를 드려도 말씀이 들리지 않게 되요. 예배시간에 은혜 받는 일에 방해되는 것은 모두 제거하고 말씀을 받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가끔 보면 예배시간에 핸드폰을 쳐다보시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굉장히 영적으로 손해입니다. 핸드폰을 꺼두시던지, 진동으로 바꾸거나 아예 안 보시는 것이 좋아요. 예배만 제대로 드려도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성공해요. 록펠러의 경우에는 예배드리기 한 시간 전에 교회에 왔어요. 예배하나만을 붙들고 예배에 성공하기 위해서 기도했어요. 예배를 통해 모든 인도를 받았던 록펠러는 역사상 가장 부자가 되었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크게 쓰임 받은 인물 중에 하나가 되었어요. 그 분이 한 일은 딱 하나! 예배에 성공했어요. 이것만 회복해도 다 되도록 해주신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으면 그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행하고 지키라고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말을 듣고 그 행위는 본받지 말되 그 말씀은 지켜 행하라고 말합니다. 역대하 20장을 보면 여호사밧왕 때에 모압, 암몬, 세일산 거민들이 연합군을 형성해서 유대나라를 침공해요. 여호사밧왕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큰일났습니다.” 평상시에 군대를 준비해둔 것도 아닌데 갑자기 전쟁이 일어나니까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었단 말이에요. 그 때 하나님이 여호사밧의 기도에 응답하시는데 여호사밧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 야하시엘에게 답을 주었어요. 이 전쟁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싸우실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요. 그 때 여호사밧이 백성을 모은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신뢰하라.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라고 말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준 선지자의 말을 믿으라고 합니다. 우리에게도 중요한 부분은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하나님이 목사님을 통해 내게 주신 음성이라는 사실을 믿고 아멘 해야 합니다. 누가 그렇게 한 것인가? 바로 여호사밧이 그렇게 했어요. 그 확신을 갖고 성가대를 군대 앞에 세워서 전쟁에 임하는 장면이 나오죠. 그 전쟁에서 대승리를 거두도록 하나님이 축복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을 때 성취될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믿음으로 아멘하면서 결단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듣고 참고사항으로 끝나버린다면 그 모습이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다 알고 있잖아요?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다락방 바리새인이 될 수 있어요. 우리가 몰라서 안하는게 아니거든요. 바울은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를 귀히 여기라고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6:6절 말씀을 보면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이 말은 맛있는 음식이 있거든 함께 나눠먹으라는 말고 같아요. 빌립보서 4:18절 말씀을 보면 감옥에 있는 바울이 빌립보교회에 답신을 하는데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목사를 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목사가 마음껏 말씀을 전달할 수 있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목사를 도와주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목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목사를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다는 그 마음 자체가 이미 축복된 마음이에요. 여러분들이 교회와서 예배드리고 은혜를 받을 때도요 그 마음을 가진 사람은 정말 말씀을 사모하게 되고 그 말씀 속에 집중하게 되어있어요. 섬기는 차원자체가 아닌겁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3을 보면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오늘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으로..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으로 내 속에 받아지는 시간으로 우리에게 이 예배를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려야 하는 겁니다.
2. 그들의 모든 행위는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모든 행위는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것이라고 책망을 하죠. 자, 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외식을 할까요? 그리고 잔치의 윗자리나 회당의 높은 자리나 시장의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 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인가요? 왜 외식하고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이렇게 노력하는 것인가요? 그래야 행복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과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를 다 가지고 있어요. 부자나 성공자나 높은 지위를 가진 자나 누구든지 다 권세욕도 가지고 명예욕도 가지고 사랑과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돈을 벌면 뭔가 또 과시하고 싶어서 크고 화려한 좋은 집도 짓고 좋은 차를 사기도 하고, 또 명품으로 치장하기도 하고. 인도의 한 부자가 결혼식을 하는데 한국돈 한 천억원을 들여서 자식 결혼식을 시켰더라구요. 뭔가 뭐 하고 싶어서요? 자랑하고 싶고 과시하고 싶은 것입니다. 가난해도 뭔가 나타내고 싶어서 짝퉁명품이라도 매야 또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리고는 죽먹고 나오면서도 고기 먹고 나온 것처럼 이쑤시개를 쑤시고 나와야 자기만족이 되고, 그러나 진짜 부자는 사치하지 않습니다. 정주영회장이 돌아가신 후에 유품들을 정리하는 자료들을 잠시 보니까 TV는 30년된 TV를 보셨고, 소파는 20년, 30년 되었고, 장롱도 30년 전에 샀던 장롱이고, 진짜 부자는 다 가졌기 때문에 사실 뭐 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왜 사람들이 외식하는 것인가? 왜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인가? 바로 창세기 3장 4-5절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영적 상태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만족을 얻지 못하니까 세상의 어떤 것을 통해서라도 마음에 뭐를 얻어야 해요? 이 만족을 얻어야 해요. 이것이 영적상태입니다. 한마디로 정말 복음을 누리지 못하게 되면 사람이 공허하게 되어져요. 창세기 1장 2절에 보면 ‘땅이 혼돈하며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이 없는 인간의 영적 상태를 이야기 합니다. 다 혼돈해요. 무질서해요. 공허해요. 텅 빈 안식과 평안과 행복이 없어요. 그런가 하면 흑암이 덮여 있는 신분인 마귀 자식이에요. 우리가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좋은 차, 좋은 집, 명품, 명예욕, 권력욕에 눈이 먼 자로 우리가 보면서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그들을 보아야 할까요? ‘아 저분들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혼란하고, 공허하고, 흑암에 잡혀 있는 것이로구나.’ 이 눈이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라도 채우지 아니하면 미칠 것 같아요. 이들의 삶 자체가 성공해도 사실 지옥입니다. 여러분 이재용씨가 행복한 것 같습니까? 참 힘들어요. 그렇죠? 이건희씨가 아들 하나에 딸 셋을 두었거든요. 삼성 최고 그룹에서 두었는데 그 자식들 중 딸 하나와 아들은 둘 다 이혼했죠. 그리고 막내딸은 뭐 했나요? 뉴욕에서 자살해서 죽었어요. 아니 대한민국의 최고의 집의 자식들이 왜 그렇게 이혼하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어느 임금의 고백입니다. 자기는 왕이 되고 싶어서 왕이 되었는데 왕의 왕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을 표현하기를 머리위에 큰 칼이 끈에 묶여져서 자기 머리위에 내려 꽂혀 있는데 그 줄이 약한 줄이라서 언제 끊어질지 몰라요. 끊어지면 그 칼이 자기 정수리에 꽂아진다는. 항상 자기가 불안, 초조 속에서 자기 왕 자리에 앉아 있다고 고백을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영적 상태가 바로 어떤 것인가? 불안하고 초조한 것입니다.
자, 문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 같으면 우리 시대로 하면 예수 잘 믿는 성도를 이야기 하는 것이죠. 문제는 이들이 뭐 했다는 것인가요? 복음이 아니고 종교생활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종교화 되면 반드시 일어나는 현상이 외식으로 나타납니다. 특별히 율법주의자들은 100% 외식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율법의 기능 자체가 정죄하는 것이잖아요. 잘했다, 못했다 판단하는 것이예요. 그런데 자기네 율법을 강조하고 가르치게 되니까 자기 스스로는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여져야 하잖아요. 이게 자연스럽게 뭐로 나타나는 것입니까? 외식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이에요. 그리고는 백성들 앞에서는 예수 잘 믿는 것처럼 보여줘야 하잖아요. 속은 안 그런데. 그래서 시장바닥에서 손들고 기도하고 금식하면 얼굴을 세수도 안하고 금식하고, 구제 할 때에는 남보란 듯이 구제하고, 왜요? 이것이 그렇게 해서라도 뭔가 자기를 유지해야하니 얼마나 불쌍한 사람이에요.
이것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중직자가 되어서 복음 누리지 못하게 되면 신앙생활이 무서운 짐이 됩니다. 성도들 앞에서 외식해야 해요. 예배도 외식 예배 드려야 하고요. 기도도 믿음 있는 것처럼 표현해야 하니까 외식하는 기도를 해야 하고요. 헌금도 외식하는 헌금을 하게 됩니다. 이 복음과 종교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목사도 복음 누리지 못하고 목회 하게 되면 목사들도 간경화 걸려요. 어느 목사가 등산을 하다가 고목나무 봤는데 속이 팍 썩었거든요. 고목나무 보고서 ‘야 이 나무야 너도 목회했냐?’ 정말 복음 없이 목회하게 되면 죽을 맛이에요. 저는 어떤 때는 너무 마음이 편안해서 '하나님, 이렇게 편안해도 됩니까?'할 만큼 그런데... 이것이 복음 없이 목회를 하게 되면 정말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1장 28절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고. 여러분, 신앙생활도 복음 누리지 못하고 종교식으로 예수 믿으면 교회 다녀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서 교회 다녀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참으로 힘들고 고달파요. 그래도 교회 와서는 믿음이 좋은 척 해야 되고. 그렇다고 예수 안 믿을 수도 없고 교회 안 다닐 수도 없고. 이것이 어쩌면 오늘 나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한국과 세계교회에 제가 가는 곳곳마다의 영적 현실을 봤을 때 전부 이렇게 살아갑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전부 이렇게 삽니다. 교회가 복음 놓치고 종교생활 하는 모습을 사실 우리가 보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것이 행복해야 합니다. 진짜 부자는 외식 안 합니다. 다 가졌는데 외식 할 이유가 뭐가 있나요? 청바지를 입고 다녀도 슬리퍼를 신고 다녀도.. 다 가졌기 때문에 자기는 외식할 필요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복음을 누리게 되면 사실 외식할 필요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고. 이 고백이 나와야 맞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 자체가 내가 지금 종교식으로 예수를 믿는 것인가, 정말 복음으로 신앙생활 하고 있는 것인가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3.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자,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우리에게 말씀을 합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축복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성도의 신분과 권세를 실제적으로 누리게 되면 우리는 사람을 의식하거나 외식하지 않아도 됩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을 때에 처음부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서밋으로 불렀습니다. 복의 근원으로, 땅의 모든 족속이 너 때문에 복을 받을 것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어떤 것입니까? 이것이 안 누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뭐 해야 돼요? 인본주의 써야 하고 외식해야 돼요. 안 그런척 해야 돼요. 어느 정도? 마누라까지 누이라고 속여가 될 만큼 그렇게 외식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소돔왕 앞에서 아브라함이 복음 깨달은 후에 뭐라고 고백하나요? 소돔왕이 전리품 가지고 가라고 이야기 했을 때 아브라함은 네가 주는 것은 실오라기 하나라도 가지고 가지 아니한다. 나는 복의 근원이고 앞으로 큰 부자가 될 것인데 그 때 네가 말하기를 내가 장사 밑천을 대줘서 아브라함이 부자 되었다고 이야기 할 것 아니냐? 나는 그런 소문 싫다. 나는 복의 근원이다. 우리가 정말 복음 누리게 되면 생각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왜? 복음 안에 다 들었으니까.
인간이 갖고 있는 사람에게 사랑 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욕구를 뛰어 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복음 누리게 된다면 이 욕구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왜? 욕구보다 더 귀하고 좋은 것은 내가 갖게 된다면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외식의 필요성 자체가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외식의 문제만 이야기 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우리가 복음을 누리게 된다면 요셉처럼 상대방을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는 자로 바뀌는 것입니다. 정말 복음 누리게 된다면 이삭처럼 얼마든지 관용을 베풀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정말 복음 누리게 된다면 다윗처럼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울왕을 끝까지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내 힘과 내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복음을 누리게 된다면 이와 같은 사람으로 내 인품 자체가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최고 실력 있는 사람은 허풍 떨지 않습니다. 진짜 부자는 외식하지 않습니다. 왜? 다 가졌으니까. 우리가 렘넌트 7명을 예를 드는 것은 하나같이 망하거나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에 놓였지만 그들이 정말 복음 깨닫고 복음 누리게 됐을 때에 한 시대를 살리는 사람으로 오히려 변화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무엇으로 불러주신 것인가? 바로 왕같은 제사장으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는 신분으로 나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자, 오늘 본문 속에 선생이라 하지 말라. 아버지라 하지 말라. 지도자라 하지 말라. 이렇게 표현한 것은 나와 함께하시는 그리스도가 내 인생에 참 선생입니다. 나의 갈 길 바로 그 분이 가르치고 인도하시는 그 분이 선생인 것입니다. 그 분이 내 아버지가 되셔서 나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 바로 그 분이 그리스도가 되신 것입니다. 그 분이 나의 지도자가 되셔서 나를 온전한 사람으로 나를 다듬어 가시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게 되도록 만드는 그 일을 누가 하시는 것입니까? 그리스도 하시는 것입니다. 어디에 들어가게 된다면? 정말 내가 복음 속에 들어가게 된다면 하나님이 내 인생을 이렇게 쓰시도록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놓치게 되면 불신자들 앞에서 조롱거리가 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다음 주간에도 계속해서 바리새인에 대한 메시지가 나오게 되는데 이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기가 막히게 잘 알아요. 그런데 무엇을 안 한다고요? 전혀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지식으로 끝나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체험하고 누리는 답을 오늘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3절 말씀에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했죠. 왜 행하지 않는 것인가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먼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하나님의 음성으로 내게 들려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두가지로 나타나지죠. 하나님이 내게 붙잡아야 될 언약의 말씀을 줍니다. 그것은 행위와 상관이 없어요. 그것을 약속으로 붙들면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또 한가지는 실천해야 될 것을 내게 메시지로 주어요. 우리는 순종의 의지와 결단을 가지고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말씀을 우리가 순종해야 되는 겁니다. 문제는 90% 이상의 신자들이 교회에서 말씀을 들어요. 듣고서도 언약의 말씀을 내 것으로 잡지 않아요. 놓쳐요. 그리고 순종해서 실천하지 않아요. 우리는 복음을 잘 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뭐가 안 따르죠? 그 언약을 실제로 안 잡아요. 언약잡고 기도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 말씀대로 내가 순종하려고 결단도 하지 않아요. 복음의 내용을 너무나도 잘 알아요. 이것이 다락방 서기관과 다락방 바리새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왜 실패할까요? 예수님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왜 책망하고 있나요? 몰라서 안하는 것이 아니야.. 다 알아도 안하는 것이야.. 뭐가 안되어졌다는 이야기입니까? 말씀이 안들려지는 것이에요. 그리고 불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12절 말씀을 보면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겠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이것은 인간관계에서 적용이 되는 해답입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요,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높여 줘야 되겠죠? 그런데 여기에는 더 깊은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라는 이야기는 종교생활 하는 자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 힘과 내 능력으로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자기 이름을 높이는 자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야.. 자기를 낮추는 자는 뭐가 낮추는 것인가요? 나는 한순간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살 수 없습니다. 주여 나를 긍휼히 여겨 주옵시고, 나를 붙잡아 주옵소서. 바로 예수님이 뭐가 되셨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선생이라 아버지라 지도자라 하지 말라.. 참 선생과 아버지와 지도자는 한 분 그리스도밖에 없다고.. 정말 그분이 내게 해답이 되셔서 나를 살아 가시도록 그분께 맡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자신의 영적 실존을 깨닫고서 주님.. 나는 안됩니다. 주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셔서 나를 살아 주옵소서. 그것이 자기를 낮추는 자입니다. 그것이 진짜 겸손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참된 예배를 우리가 드려야 되는 겁니다. 왜 잘 안되는 것인가? 사실, 기도 문제거든요? 기도를 왜 안하는 것인가? 하나님이 안 도와줘도 산다는 그것이 자기를 높이는 자입니다. 예배의 중심을 안드리는 자, 자기 자신을 높이는 자입니다.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 앞에 서고,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을 때에 정말 우리는, 주님. 정말 이 속에서 승리하기를 원합니다 하고 내게 힘을 달라고.. 정말 하나님의 언약 잡고 24시 기도 속으로 정말 들어가게 되진다면은 하나님이 이렇게 만들어 주실 것인데.. 이제는 우리가 하나의 예배가 또 형식이 되어져서, 복음 아는 것도 형식이요, 예배도 형식이요, 만약에 이렇게 끝나게 된다면은 우리는 오늘 예수님이 책망하셨던 서시관과 바리새인과 사실은 다를 것이 없는 겁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우리가 점검하면서 내가 지금 종교식으로 예수를 믿고 있냐.. 정말 복음적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인가를 자신을 놓고 점검을 해보아야 합니다. 하고서 이제는 자기 자신을 낮추면서 정말 오직 그리스도 한분만으로 정말 만족할 수 있는, 이 속에서 정말 언약 잡고 기도로 승리할 수 있는..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오늘도 예배를 통하여서 붙잡을 언약과 실천해야 될 미션을 주신 것을 감사를 드립니다. 강단의 메시지를 통하여 성취될 기도제목을 찾게 하시고, 한주간도 말씀 묵상하며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응답되어지는 6일 동안의 삶이 되도록 주님이 저희 삶을 온전히 주장하여 주옵소서. 사단은 우리에게 틀린 해답으로 망할 해답으로 다른 해답으로 우리를 속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려서 사단의 계략을 보게 하시고, 또 이길 수 있는 힘을 저희들에게 더하여 주옵소서. 모든 사람은 사랑받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욕구들을 다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복음을 누리지 못한다면 누구나 외식할 수밖에 없음을 우리가 깨달았습니다. 나 자신은 지금까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외식하였음을 이 한시간에 고백합니다. 이제는 예수그리스도가 참 선생이요, 참 아버지요, 참 지도자가 되어서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시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나의 인생을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한순간도 나는 그리스도 없이는 살 수 없사오니, 나의 주인이 되시고 나의 갈길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복음 있는 나의 삶을 통하여 온 땅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증거 되게 하옵시고, 나의 인생이 237개 나라를 살리는 일들에 주역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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