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130)
금수산(錦繡山) 을밀대(乙密臺)에 올라.
모란봉(牡丹峯)에 올라 보니 저 멀리 눈 아래 푸른 비단 폭처럼 대동강(大同江)이 넘실거리는 것이 장관(壯觀)이었고, 강(江) 건너 능라도(綾羅島)에는 실실이 늘어진 수양버들이 바람결에 흐느적거렸다. 때마침 산(山)에는 진달래꽃이 만발(滿發)해서
삼삼오오(三三五五) 모란봉(牡丹峯)을 찾는 상춘객(賞春客)이 입은 백의(白衣)가
연보랏빛 진달래 색깔과 극명(克明)한 대조(對照)를 이루고 있어,
온 산(山)이 붉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아아, 우리가 백의민족(白衣民族)으로 자랑할 만하구나,
그리고 금수산(錦繡山)은 단순(單純)한 금수강산(錦繡江山)의 한 면(面)이 아니라
지상(地上)에서 선경(仙境)이 분명(分明)하구나!)
김삿갓은 눈 앞에 펼쳐진 풍경(風景)에 한동안 넋을 잃고 취(醉)해 있었다.
고려(高麗) 때 시인(詩人) 권한공(權漢功)이 평양(平壤) 구경을 왔다가,
모란봉(牡丹峯) 위에서 대동강(大同江)을 굽어보며 시(詩)를 지은 일이 있는데
그 시(詩)는 이러하였다.
모랫가의 푸른 나무는 봄빛이 엷고
물에 비친 청산에는 저녁놀이 짙구나
물속에 있는 듯 원근조차 모르겠는데
어디선가 석양에 노랫소리 들려오네.
이윽고 금수산(錦繡山) 꼭대기에 올라오니, 평탄(平坦)하고 훤칠한 을밀대(乙密臺)가 나왔다.
거기는 사방(四方)이 탁 틔어 있어서 어디든지 마음대로 바라볼 수 있는 곳이므로
을밀대(乙密臺)를 사허정(四虛亭)이라고도 부른다고 하였다.
하늘로 날아 올라갈 듯이 네 활개를 활짝 펴고 있는 사허정(四虛亭)의 웅자(雄姿)!
언젠가 이곳 사허정(四虛亭)에 올라온 당나라 시인(詩人)이
이곳의 경치(景致)에 감탄(感歎)하여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었다고 했다.
금수산 산머리에
손바닥처럼 평평한 대가 있네
모름지기 하늘에 사는 신선이
바람을 타고 때때로 놀러 오는 곳이리.
때마침 정자(亭子) 위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많은 하객(賀客)이 엉겨 돌아가는데, 한편에서는 기생(妓生)들이 풍악(風樂)에
맞춰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 잔치가 무슨 잔치요?“
김삿갓은 옆에 있는 하객(賀客)을 붙잡고 물어보았다.
"이 잔치는 평양(平壤) 갑부(甲富)인 임(林) 진사(進士) 댁(宅) 회갑(回甲) 잔치라오.“
김삿갓은 출출하던 판인지라, 마침 잘되었다 싶었다.
회갑(回甲) 잔치라면 술과 음식을 마음껏 얻어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김삿갓은 사람 틈을 비집고 정자(亭子) 위로 올라와 보았다.
백발(白髮)이 성성한 임(林) 진사(進士) 내외(內外)는
온갖 음식(飮食)이 요란(搖亂)스럽게 차려진 환갑상(還甲床) 앞에 단정(端正)히 앉아
그의 아들과 사위들 내외에게 헌수배(獻壽盃)를 받고 있었다.
이런 데다가 바로 옆에서는 4, 5명의 기생(妓生)이 은은한 풍악(風樂)에 맞춰
나비처럼 춤을 추며 "태평가(太平歌)"를 나지막하게 부르고 있는데,
이래도 태평성대 저래도 태평성대
요지일월(堯之日月)이요
순지건곤(舜之乾坤)이라
오늘도 태평성대니 만수무강하소서!
자식(子息)들과 친척(親戚)들의 헌수배(獻壽盃)가 끝나자, 하객(賀客)들의 차례였다.
김삿갓도 하객(賀客) 행렬(行列) 속에 끼어들어 축배(祝杯)를 올리며 덕담(德談)을 늘어놓았다.
"오늘의 수연(壽宴)을 진심(眞心)으로 축하(祝賀)하옵니다.
바라옵나니, 학수천세(鶴壽千歲)하시옵소서."
음식(飮食)을 푸짐히 얻어먹으려고 축배(祝杯)를 올렸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자 임(林) 진사(進士)는 김삿갓을 마주 보다가 적이 놀라는 얼굴을 하며,
"이렇게 축하(祝賀)를 해주니 고맙소이다.
그런데 귀공(貴公)은 누구신지 기억(記憶)이
분명(分明)치 않구려. 귀공(貴公)의 함자(銜字)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생전(生前) 처음 만나는 사람이니, 이름을 모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當然)한 일이었다.
김삿갓은 어쩔 수 없어, 이렇게 대답(對答)했다.
"저는 정처(定處) 없이 떠돌아다니는 불청객(不請客)이올시다.
모란봉(牡丹峯) 구경을 왔다가 수연(壽宴)을 베푸시기에 우연(偶然)히
축하(祝賀)의 말씀을 올리게 된 것이옵니다."
"모르는 사이인데도 이렇게 축하(祝賀)를 해 주셔서 더욱 고맙소이다.
축하(祝賀)까지 받았으니, 이제는 피차간(彼此間)에 서로 알고 지내야 할 게 아니겠소?
나는 임현식(林賢植)이라는 늙은이라오.
귀공(貴公)의 함자(銜字)는 어떻게 되시오?"
임(林) 진사(進士)가 부득부득 이름을 알고자 하므로,
김삿갓은 아무리 싫어도 이름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 이름은 "김립(金笠)"이라고 하옵니다."
"옛? 김립(金笠) 선생(先生)이라면 방랑(放浪) 시인(詩人)으로 유명(有名)한
"삿갓 선생(先生)"이라는 말씀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