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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두 얼굴] 위선과 허위의 바다-어니스트 헤밍웨이(4)
자신의 스타일과 윤리관을 창안해 낸 헤밍웨이는 필연적으로 양쪽 모두를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상상력을 현실에서 집행해야만 했던 희생자이고 죄수이며 노예였다. 이 지점에 선 헤밍웨이의 모습은 역사상으로 유일무이하지는 않다. <차일드 헤럴드? 1편을 출판한 바이런은 자신의 작품이 가리키는 길을 걷도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돈 주안>을 쓰는 것으로 방향을 약간 수정했을지는 모르지만, 그는 자신에게 자신이 노래했던 삶을 사는 것 이외의 대안은 남겨 놓지 않았다. 그렇기는 해도 바이런에게는 그것이 취향의 문제이면서 충동의 문제였다. 그는 오입질과 영웅적 행동, 해방자 역할을 즐겼다. 헤밍웨이와 동시대를 산 앙드레 말로는 또 다른 행동파 지식인이며 소설가, 혁명가, 탐험가, 보물급 예술품을 약탈한 발굴자, 레지스탕스 영웅, 드골 대통령의 오른팔이 돼서 내각의 장관을 역임하는 것으로 경력의 끝을 장식했다. 그런데 헤밍웨이의 삶은 확신하기 어렵다. 그가 “현실의” 삶, 행동하는 삶을 추구한 것은 그가 쓴 소설과 같은 장르에서는 필수적이었다는 점에서 지적인 행동이었다. 스페인 내전을 다룬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0)의 주인공 로버트 조던이 말했듯, 그는 “그것이 진정 어떤 것인지 알고 싶었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는 것이 아니라, “격렬한 행동에 사로잡힌 지식인인 헤밍웨이는 현실적인 인간이었다. <토론토 스타>의 통찰력 있는 동료는 약관의 나이인 그를 이렇게 요약했다. “무척 예민한 감수성과 폭력에 몰두하는 성향이 매우 기묘하게 결합된 그와 같은 사람은 일찍이 지구상에 없었다.” 그는 특히 아버지가 했던 야외오락 모두와 스키, 심해 고기잡이, 맹수 사냥, 그리고 전쟁과 같은 부가적인 활동들을 즐겼다. 그가 수시로 보여 준 용기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뉴욕 타임스>의 기자 허버트 매튜스는 1938년 에브로강 전투에서 급류에 휘말려 익사할 뻔한 자신을 헤밍웨이가 비범한 강인함을 보여 주면서 구해준 사실을 묘사했다. “그는 위기에 몰렸을 때 좋은 사람이다.” 동아프리카의 사파리에 그를 데려간 백인 사냥꾼들도 비슷한 광경을 목격했다. 게다가 헤밍웨이의 용기는 사려 없이 행해지는 본능적인 용기가 아니라, 사색의 결과로 나온 용기였다. 많은 일화들이 입증했듯, 위험에 대한 헤밍웨이의 감각은 예리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았던 그는 자신의 두려움을 정복했다. 겁이라는 감정을 헤밍웨이보다 더 생생하게 묘사한 작가는 없었다. 그는 독자들에게 그의 소설처럼 살고 싶어 하는 욕망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이것이 헤밍웨이의 행동가 이미지가 그의 명성과 함께 빠르게 퍼진 이유다. 루소 이래의 숱한 지식인들처럼, 자신을 홍보하는 헤밍웨이의 재능은 놀라웠다. 그는 육체적이면서 시각적으로 강렬한 헤밍웨이 페르소나를 창안해 냈다. 그의 페르소나는 낭만주의의 느긋하고 낡고 벨벳처럼 부르러운 이미지를 뒤집어엎었다. 그는 당시의 의용병 복무자들의 차림새를 활용해서 사파리 복장, 탄띠, 장총, 챙 달린 모자, 화약통, 담배, 위스키 등을 그의 사나이다운 매력에 활용했다. 그가 집착했던 것 중의 하나는 실제 나이보다 몇 년 더 늙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일찍이 1920년대부터 자신을 “파파”라고 홍보했다. 새로 사귄 여자들은 그의 “딸”이 됐다. “파파” 헤밍웨이는 1940년대 초반에 이미 사진 잡지에서 친숙한 인물이었고, 할리우드의 1급 남자배우들만큼이나 유명했다. 역사상 그 어떤 작가도 그만큼 많은 인터뷰와 촬영 요청을 받은 적이 없었다. 얼마 안 있어 흰 수염이 난 그의 얼굴은 톨스토이보다 유명해졌다.
그런데 헤밍웨이가 자신의 윤리관을 구체화하고 그가 창작한 전설에 맞게 살아가려고 노력한 것은 고행의 연자방아 위에 제 발로 올라선 것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연자방아에서 내려오는 것을 죽을 때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가 모성애를 은행 계좌의 형태로 본 것처럼, 헤밍웨이는 자신의 행동 경험을 계좌에 꾸준히 예금하고는 소설을 위해 꺼내 쓰곤했다. 1917-1918년의 이탈리아 전쟁은 그가 예금한 최초의 거금이었다. 1920년대에 예금의 대부분을 소진한 그는 스포츠와 투우에 광분한 경험을 통해 고갈돼 가는 계좌의 잔고를 맞췄다. 1930년대에는 맹수 사냥으로 쏠쏠한 예금을 했고, 스페인 내전으로 거액을 횡재했다. 그런데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기회를 활용하는 데는 굼떴고, 그의 뒤늦은 전쟁 개입은 집필 자금에 거의 보탬이 되지 않았다. 이후 그의 주된 예금은 사냥과 고기잡이였다. 맹수 사냥과 투우로 구성된 순회 여행으로 옛날의 발자취를 다시 밟으려는 시도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우스갯거리로 끝이 났다. 에드먼드 윌슨은 헤밍웨이의 글쓰기와 행동이 대조적이라며 “젊은 달인과 늙은 사기꾼”이라고 기록했다. 사실 헤밍웨이는 격렬한 취미 몇가지를 계속해서 즐기기는 했지만, 그가 주장했던 것만큼 많이 즐긴 편은 아니었다. 야생을 향한 헤밍웨이의 열정은 상당히 감퇴했다. 그럴 만한 용기만 잇었다면, 그는 라이플을 기꺼이 거둬들이고 도서관에 정착했을 것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출판업자 찰스 스크라이브너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릇되고 부자연스러우며 허풍 가득한 표현이 슬며시 끼어들었다. “내 50번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섹스를 세 번 하고, 클럽에서(아주 빠른) 비둘기 표적 열 개를 연달아 쏘고, 친구와 같이 삐뻬 에드직 와인한 상자를 해치우고는 오후 내내 바닥에서 월척들을 찾아다녔다네.”
참? 거짓? 허풍? 아무도 모른다. 스스로에 대한 헤밍웨이의 설명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헤밍웨이의 주장은 그런 말들을 뒷받침하는 확증 없이는 어느 것 하나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다. 소설 속 윤리관에서 진실이 굉장한 중요성을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헤밍웨이는 진실은 그의 자아에 봉사하는 충실한 부하가 되어야 한다는 지식인 특유의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는 거짓말하는 것은 작가가 되기 위한 훈련의 일환이라고 생각했고, 때로는 그런 생각을 자랑스레 떠벌렸다. 그는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거짓말을 해 댔다. 매혹적인 이야기 <병사의 고향>의 등장인물 크렙스를 통해 분명히 밝힌 것처럼, 헤밍웨이는 자신이 수시로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는 “최상급의 작가들이 거짓말쟁이라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라고 썼다. “그들의 직업의 중요한 부분은 거짓말이나 날조다……그들은 종종 무의식적으로 거짓말을 해대고는 깊이 후회하면서도 그 거짓말을 기억한다.” 그런데 헤밍웨이가 전문 작가라서 그렇다고 변명하기 훨씬 전부터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 그는 다섯 살 때 길길이 날뛰며 달아나는 말을 혼자 힘으로 막아냈다는 거짓말을 했다. 그는 부모에게 영화배우 매 마쉬와 약혼하게 됐다는 거짓말을 했는데, 그가 그녀를 본 것은 <국가의 탄생>이라는 영화에서 외에는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캔자스시티의 동료에게 150달러짜리 약혼반지를 세세히 묘사하면서 이 거짓말을 다시 써먹었다. 시장에서 구입한 것이 분명한 물고기를 직접 잡은 것이라고 친구들에게 말했던 열여덟 살 때처럼, 뻔뻔스러운 거짓말의 상당부분은 무안할 정도로 속이 뻔히 들여다보였다. 그는 시카고에서 프로 권투 선수로 활동하던 이야기를 자세하게 털어놓은 적이 있는데, 코가 부러졌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싸웠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북미 원주민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얘기를 꾸며 냈고, 심지어는 북미 원주민의 딸이 있다고까지 주장했다.
자서전 <파리는 날마다 축제>는 루 루소의 <고백록>처럼 전혀 믿을 만하지 못하며, 솔직한 말처럼 보일 때 가장 위험한 것이 되었다. 그는 부모와 누이에 대한 거짓말을 해대곤 했는데, 그래야 할 명백한 이유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여동생 캐럴이 열두 살 때 성도착자 여섯 명에게 강간을 당했다고 말했고(사실이 아니다) 나중에는 그녀가 이혼했으며 심지어는 죽었다고까지 주장했다.(그녀는 헤밍웨이가 싫어한 가디너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다).
가장 복잡하고 반복된 헤밍웨이의 거짓말은 상당수가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경험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물론 군인들 대부분은, 비록 용감한 군인일지라도 참전 경험에 대해 허풍을 떨어댄다. 그리고 헤밍웨이의 삶을 어느 정도로 세밀하게 조사해 보느냐 여부는 진실과 뒤섞인 거짓을 얼마만큼 세밀하게 판명해 내느냐와 결부돼 있다. 그렇지만 이탈리아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헤밍웨이의 날조는 대단히 뻔뻔하다. 우선, 그는 군대에 자원입대했다고 했지만 시력이 나빠서 입대를 거절당했다. 기록에는 이런 얘기가 없고, 그럴 법하지도 않다. 그는 사실상 자신의 선택으로 비전투 요원이 되었을 뿐이다. 그는 신문 인터뷰를 포함한 많은 기회에, 자신이 이탈리아 69보병연대에서 근무하면서 중요한 전투를 세 차례 치렀다고 말했다. 또 정예부대인 아르디티연대에 소속됐다고도 주장했다. 영국군 친구인 “친크” 도먼 스미스에게는 자신이 그라파산 돌격전을 이끌었으며, 전투 동안 중상을 입었다고 말했다. 스페인 내전의 전우였던 구스타보 듀란 장군에게는 처음에는 중대를, 그다음에는 대대를 지위했다고 말했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열아홉 살에 불과했다. 그는 실제로 부상을 당했다(이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부상을 입은 상황과 부상의 종류에 대해서는 거듭 거짓말을 했다. 그는 음낭에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총을 맞았다는 이야기를 꾸며내고 자기 고환을 베개 위에 놓아두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기관총에 두 번이나 맞아 나가떨어졌고, 45구경 탄환은 32번이나 맞았다고 말했다. 그가 죽을 것이라고 믿은 수녀들이 가톨릭 세례를 베풀었다는 이야기는 보너스였다. 이 모든 설명은 진실이 아니다.
전쟁은 헤밍웨이의 내부에 숨어 있던 거짓말쟁이를 끌어냈다. 스페인에서 매튜스의 뛰어난 활동을 시기한 그는 테루엘 전선에 대한 거짓말투성이 원고를 고국에 보냈다. “전투에 대한 첫 기사를 매튜스보다도 열 시간 앞서 뉴욕에 송고한 후, 부대로 돌아와 보병 연대와 함께 전면 공격을 하고는 폭파 중대와 세 개 연대의 뒤를 따라 마을에 들어가서 열을 지어 행군하다가, 돌아와서는 정말로 경이적인 시가전 이야기를 송고할 준비를……” 그는 1944년에 파리를 해방시킨 최초의 인물이 됐다는 거짓말도 했다. 섹스도 그에게서 거짓말쟁이를 끌어냈다. 그가 종종 꺼내곤 했던 이탈리아 이야기 중 하나가 시칠리아의 호텔 여주인이 옷을 감춰놓는 바람에 1주일간 그 여자와 정을 통해야만 하는 성적 포로가 됐다는 것이었다. 그는 버나드 베렌슨(많은 거짓말투성이 편지의 수신인이었다)에게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를 완성한 후 여자를 불러들였는데 아내가 갑자기 돌아오는 바람에 여자를 지붕을 통해 몰래 빼돌려야만 했다고 말했다. 진실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이야기다. 그는 1925년 팜플로나에서 있었던 시기심에서 비롯된 “유대인(헨리) 로엡”과의 유명한 싸움에 대해서도 거짓말을 했다. 총을 든 로엡이 그를 쏘겠다고 협박했다는 얘기였다(이 사건은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에서 변형됐다). 그는 결혼과 이혼, 이혼 합의 사항에 대해서도 거짓말을 했는데, 거짓말의 상대는 관련된 여자들과 그의 어머니였다. 셋째 아내 마사 겔혼에게 했던, 그리고 그녀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했던 거짓말은 특히 뻔뻔했다. 그녀는 그를 “뮌하우젠[18세기의 유명한 허풍쟁이 독일 남작] 이후로 제일가는 거짓말쟁이”라고 간단히 정의했다. 다른 소설가 -거짓말쟁이처럼 헤밍웨이도 그릇된 단서를 남겼다. 그의 가장 인상적인 작품들의 일부는 내용적으로 자전적인 이야기로 보이지만, 순수한 창작물일지도 모른다. 말할 수 있는 것은 헤밍웨이가 진실을 조금도 존중하지 않았다는 것이 전부다.
결과적으로 그는 “저열하고 부정직한 10년간”인 1930년대를 살아가는 데 적절한 인물이자, 그 시대를 살아갈 준비가 돼 있는 인물이었다. 헤밍웨이의 정치적 신념은 일관성을 보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의 윤리관은 사실상 개인적인 충성심에 대한 것이다. 한때 그의 친구였던 도스 파소스는 젊은 시절의 헤밍웨이를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정치적 주장을 폭로하는 데 있어서 가장 날카로운 두뇌의 소유자의 한 사람”으로 여겼다. 그렇지만 이 주장에 대한 증거를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 헤밍웨이는 1932년 선거에서 사회당 후보 유진 뎁스를 지지했다. 그런데 1935년 무렵에 그는 대부분의 이슈에서 공산당의 노선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인물이 돼 잇엇다 그는 1935년 9월 17일 공산당 기관지 <신대중>에 기고한 과격한 논설 <누가 노병들을 죽였는가?>에서, 연방 프로젝트에 고용된 군인 출신 철도 노동자 450명이 플로리다에 닥친 허리케인으로 사망한 문제를 두고 정부를 비난했다. 전형적인 공산당의 선전선통이었다. 1930년대 내내 헤밍웨이의 시각은 공산당이야말로 반파시스트 성전(聖戰)을 이끌 정당하고 믿음직스러운 유일한 지도자이며, 공산당을 비판하거나 공산당의 통제를 벗어난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배신 행위라는 것이었던 듯하다. 그는 반공 노선을 취한 사람은 누가 됐건 “바보 아니면 악당”이라고 말했다. 그는 <에스콰이어>가 창간한 새로운 좌파 잡지 <켄>이 공산당 선전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난 후, <켄>의 발행인란에 그의 이름이 오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스페인 내전에 대한 반응도 이런 접근 방식을 따랐다. 소설가의 관점에서 스페인 내전을 소설 소재의 출처로 본 그는 내전을 반겼다. “작가에게 있어 내전은 최고의 전쟁이며, 가장 완벽한 전쟁이다.” 그런데 충성심의 갈등, 관습의 위력, 정의의 개념 차이에 관한 세밀한 그의 윤리 규범의 관점에서 볼 때, 기이하게도 그는 전쟁에 대한 공산당의 조잡한 노선을 시종일관 받아들였다. 그는 전선을 네 차례(1937년 봄과 가을, 1938년 봄과 가을)나 방문했는데, 뉴욕을 떠나기도 전에 내전의 성격을 완전히 규정한 상태였고, 도스 파소스, 릴리언 헬먼, 아치볼드 매클리시와 함께 선전 영화 <화염 속의 스페인>을 찍기로 이미 서명을 한 상태였다. 그는 “내가 지주들과 더불어 술을 마시고 비둘기 사냥을 다닐 때조차도, 나의 마음은 늘 부재지주에 맞선 피착취 노동 계급 편이었다”고 썼다. 공산당은 “이 나라의 인민”이고 전쟁은 “인민”과 “부재지주, 회교도, 이탈리아인과 독일인” 사이의 투쟁이었다. 그는 전쟁에 관련된 사람들 중에 “가장 훌륭한 사람들”인 스페인 공산당을 좋아하고 존경한다고 밝혔다.
공산당 노선에 발맞춰서 소련의 역할, 특히 스페인 공화국의 피로 물든 내부 정파 싸움의 과정에서 스페인 공산당에게 잔인한 짓을 지시한 소련의 역할에 대한 선전을 억제한다는 것이 헤밍웨이의 노선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도스 파소스와 불명예스러운 절교를 해야 했다. 파소스의 통역 호세 로블레스는 존스 홉킨스 대학 교수 출신으로, 전쟁 발발과 함께 공화국군에 합류한 인물이엇다. 그는 무정부주의 조직인 POUM의 지도자 안드레스 닌의 친구였다 로블레스는 스페인에 파견된 소련 군사사절단의 단장 얀 안토노비치 베르친 장군의 통역이기도 했기 때문에, 마드리드 국방성을 다루는 모스크바의 비밀을 일부 알고 있었다. 베르친을 살해한 스탈린은 스페인 공산당에게 POUM도 해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닌은 고문을 받다 죽었고, 파시스트 행위를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된 수백 명도 처형당했다. 로블레스는 일단 간첩죄로 체포된 후 비빌리에 총살당했다. 도스 파소스는 실종된 로블레스를 염려했다. 자신은 정치 문제에 있어 노련하지만 도스 파소스는 세상물정 모르는 풋내기라고 생각한 헤밍웨이는 걱정하는 그를 비웃었다. 헤밍웨이가 머물던 마드리드의 게일로드 호텔은 공산당 실력자들이 자주 드나들던 곳이었다. 헤밍웨이는 친구 페페 킨타니야(훗날 공산당이 집행한 대부분의 처형에 책임이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물었다. 헤밍웨이는 로블레스가 아직 건강하게 살아 있으며, 체포된 것은 확실하지만 공정한 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헤밍웨이는 이것을 믿었고 도스 파소스에게 그대로 전했다. 사실 로블레스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헤밍웨이가 (마드리드에 막 도착한 기자로부터) 뒤늦게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도스 파소스에게 로블레스는 유죄가 확실하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보뿐일 것이라고 말했다. 몹시 괴로워한 도스 파소스는 로블레스의 유죄 인정을 거부하면서 공산당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이것은 헤밍웨이의 도스 파소스 비난으로 이어졌다 “현재 스페인에서는 자네가 편들었던 사람들과 파시스트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어. 자네가 공산당을 증오한다는 이유로 지금 여전히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자네의 비난을 정당화하려는 생각이라면, 자네가 최소한 사실만큼은 제대로 알려고 애를 써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일세.” 그런데 나중에 밝혀졌듯 도스 파소스는 사실을 제대로 알았다.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얼간이는 헤밍웨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