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년 11월 6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죽었다. 소서행장은 1592년 5월 31일(음력 4월 21일) 대구를 점령했던 일본 침략 제1군 대장이다. 그의 사망일을 맞아 대구 지역의 임진왜란 역사를 알아본다.
홍의紅衣장군 묘소
장군의 묘소를 찾는 일이 그리 만만하지 않다. 사전지식이 없으면 정말 그렇다. 여기서 말하는 사전지식이란 임란 당시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장군이 홍의장군 곽재우라는 사실이나, 그의 이름이 한자로 '郭再祐'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을 알아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장군은 자신의 무덤에 봉분을 하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왜군들이 왕릉을 파헤치고 종묘를 불살랐는데 신하된 자의 무덤을 어찌 번듯하게 꾸밀 수 있겠느냐는 것이 장군의 충정이었다. 그 때문에 '아무려면 홍의장군인데 묘소가 제일 그럴듯하지 않겠나' 식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곽씨 문중의 묘역 안으로 들어가도 장군의 무덤을 찾지 못한다. 가장 낮은, 제일 볼품없는 무덤이 바로 장군의 것임을 그가 어찌 짐작이나 하겠는가.
뿐만 아니라, 묘비에서 '재우' 또는 '再祐' 두 글자를 찾는 사람도 낭패를 면할 수 없다. 그런 글자가 새겨져 있는 묘비는 아무데도 없다. 장군의 묘비에는 '忠翼'(충익) 두 글자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장군의 시호가 충익인 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력으로 묘소를 찾아내지 못한다.
[임진왜란과 홍의장군 곽재우] 임란 당시 전국의 의병은 2만2천명 정도였다. 그 중 절반이 넘는 1만2천여 명이 경상도 의병이었다. 경상도 의병들은 부산포로 올라와 한양으로 진격하는 왜군의 진로를 막아 적의 수송로를 끊었고, 곡창 지대인 전라도 일대가 침탈되는 것을 차단하였다.
'마땅히 나라를 위해 적을 토벌하는 것이니 적의 머리를 올려 전공을 세움은 의리상 옳지 않은 일'이라는 홍의장군의 말처럼, 죽음을 눈앞에 두고 '오직 나라가 있음을 알았지 내 몸 있는 줄은 몰랐도다'라고 토로한 경북 고령 출신 김면 장군의 말처럼, 의병들은 죽음으로써 나라를 구하였다.
임진왜란은 1592년에 일어났다.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한 것은 4월 14일(양력 5월 24일), 그로부터 불과 7일 후인 4월 21일(양력 5월 31일) 대구는 벌써 왜에 함락되었다. 왜의 침입 16일 후인 4월 30일(양력 6월 9일)에는 임금인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대구는 왜군의 주력 부대가 북상을 할 때나 남으로 물러갈 때나 항상 지나가는 진군로였다. 명나라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지만 대구는 곡창 지대인 전라도와 통하는 지역이므로 군량을 준비하기에도 좋았다. 외국 군대가 번갈아 지나다녔다는 것은 결국 대구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어려움이 많았음을 말해준다. 대구직할시가 1982년에 펴낸 <대구의 향기>는 '왜란 초에 벌써 왜적의 후방 기지로 되었으니까 더 말할 나위도 없고, 이듬해 5월 왜군이 남으로 물러간 후에는 명의 대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명군으로부터 입는 피해가 막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구에서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킨 사람은 서사원徐思遠(1550-1615)이다. 왜군의 침공을 받은 대구부사 윤현尹睍이 공산성으로 물러났을 때 서사원은 거기 모여든 사람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왜군의 주력부대가 통과하고 또 후방부대가 주둔하는 곳이 바로 대구인 관계로 우리 의병이 거리낌없이 활약하기에는 무척 어려웠으므로, 당시 대구 지방의 의병 활동은 주로 팔공산 주봉의 공산성 일대에서 이루어졌다. 서사원 의병장은 곡식 300섬을 청도의 오례산성에 보내어 그곳에 주둔하고 있는 의병들을 돕기도 했다.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 이강伊江서원에서 그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서사원은 대구의 동북부에서 주로 활동했고, 남서부 일대에서는 우배선禹拜善(1569-1621) 의병장이 두드러지게 활동을 하였다. 우배선은 전란 당시 불과 24세의 백면서생이었던 관계로 그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종전 이후 국가 차원의 논공행상에서 '영남 3대 의병장'이라 칭송받는 곽재우, 김면, 정인홍 등과 함께 1등공신으로 나란히 책봉될 만큼 공이 컸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55권 27년(1594) 9월 24일 기록에 보면 선조가 '우배선과 안신갑 같은 자는 용감하여 선전하였으므로 명하여 수령을 삼았다'고 말한 기록이 나온다.)
왜란 때의 의병장 중에서 대구와 연고가 있으면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이는 홍의장군 곽재우이다. 필마단기로 적진을 유린하고, 매복과 기습 등 다양한 전술전략에 능통하여 '신출귀몰', '천강天降장군', '홍의장군'의 신화성을 얻은 그는 국민 모두의 뇌리에 익숙한 의병장이다. 사재를 털어 의병을 모집하고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작전과 무용으로 왜적을 줄기차게 격파해 낸 그는 여러모로 '스타'성이 넘치는 인물인 것이다.
물론 홍의장군은 경남 의령 출신으로 의병 활동도 경남 일대에서 펼쳤다. 의령 일대와 그 이웃인 현풍·창녕·영산·진주까지를 자신의 작전지역으로 삼았다. 1592년 5월 하순에는 함안군을 완전히 점령하였고, 왜병을 맞아 싸워 대승을 거둠으로써 경상우도쪽 농민들이 농사를 짓는 데에 평상시보다 불편한 점이 없도록 만들었다. 10월에 있었던 김시민金時敏의 1차 진주성싸움에는 휘하의 의병을 보내서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홍의장군의 활약은 왜군의 호남 진출을 저지해낼 정도였다. 정유재란 때에도 밀양·영산·창녕·현풍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화왕산성을 고수하여 적의 접근을 막기도 하였다.
홍의장군의 생가는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에 있다. 그의 묘소는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신당리에 있다. 그런데 홍의장군의 증조부로부터 5대에 걸친 현풍玄風 곽씨 문중의 선영 안에 들어가서도 장군의 묘소를 찾는 일은 상당히 어렵다. 장군이 죽으면서 남긴 '예장禮葬을 하지 말라'는 유언 때문이다. 장례에 예식을 갖추지 말라고 하였으니 무덤 자체에는 결과적으로 봉분이 없어졌다. 무덤에 볼록한 봉우리가 없고 그냥 평지처럼 납작하다는 말이다. 웬만큼만 입신출세를 해도 축대를 구축하고 비석을 세우고 왕릉만한 봉분을 쌓으려 드는 게 세속적 가치관에 젖은 인간군상들의 행태인데, 사재를 털어 의병활동을 한 1등 국가공신의 무덤은 그 바로 앞에 가서도 찾기가 쉽지 않으니, 어찌 그의 크고 넓은 뜻을 간단히 헤아릴 수 있으리오.
[생각거리] 1.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불과 7일만인 4월 21일 대구가 함락된다. 바로 그 다음날, 대구 함락 소식을 들은 곽재우는 고향 현풍에서 전국 최초로 의병義兵을 일으킨다. 하지만 4월 30일,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압록강까지 도망가서는 명나라로 망명하려다 신하들의 만류로 멈춘다.
2. 임란 발발 소식을 들은 곽재우는 조상들의 묘소부터 납작하게 만들었다. 왜군들이 묘소를 발굴할까 우려한 때문이었다. 그는 뒷날 죽을 때 자신의 무덤을 납작하게 만들도록 한다. 나라가 이 꼴인데 어찌 무덤을 덩그렇게 쓸 수 있겠느냐면서 예장禮葬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더 가볼 곳] 묘소 이외의 곽재우 유적으로는 달성군 유가면 가태리에 있는 예연서원(대구시 기념물 11호), 망우당공원에 있는 곽재우기념관, 동상, 임란의병기념관.
사효굴四孝窟
사효굴은 이름 그대로 네 명의 효자에 얽힌 전설이 깃든 동굴이다. 자세한 내용은 1982년에 대구직할시가 펴낸 <대구의 향기>에 실려 있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그 책을 찾아서 읽어보기는 어려우므로 줄거리를 간략히 요약하여 소개해보면 <아래>와 같다.
<임진왜란 당시, 유가면 쌍계동의 곽씨 일가족이 이곳으로 피난을 했다. 어머니는 그 이전에 일찍 타계하였고, 남은 아버지와 네 아들은 동굴 안에 숨었다. 왜적이 굴 앞에 왔을 때 평소 해소병을 앓던 아버지가 기침을 했다. 아버지를 살리려고 장남이 굴 밖으로 나와 처형되었다. 아버지가 또 기침을 해서 차남이 죽었다. 아버지의 기침은 멈추지를 않아 다시 삼남이, 마지막으로 막내아들까지 다 죽었다.
그러고도 아버지는 기침을 멈추지 못해 결국 그도 왜군에게 잡혔다. 사정을 알게 된 왜군들이 감동을 하여 노인의 등에 '효자의 아버지'와 그 사연을 써서 붙였다. 다른 왜군이 노인을 죽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 일이 있은 이후부터 사람들은 이 굴을 사효굴이라 불렀다.>
[생각거리] 나라에 대한 충성의 길과 부모에 대한 효도의 길이 다를 경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도동서원 사적 488호, 보물 350호 (임진왜란 유적은 아니지만 홍의장군 묘소 및 사효굴과 가까운 곳에 있으므로 '떡 본 김에...' 답사를 해본다.)
사적 488호인 도동서원의 강당과 사당, 담장은 보물 제 350호이다. 김굉필 선생을 모시는 이 도동서원은 낙동강을 바라보는 천혜의 굽이 안에 너무나 조용히 앉아 있다. 그 까닭에, 답사객들은 갑자사화(1504년)와 무오사화(1498년)의 참혹을 깜빡 잊기 일쑤이다. 흔히들 서원 앞의 커다란 은행나무를 보며 "이 나무, 김굉필 선생이 심은 거야. 500년도 더 되었어!"하고 감탄사를 연발하는 데 그친다는 말이다.
김굉필 선생의 묘소가 도동서원 뒤편 산자락에 있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아니, 알려지지 않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혹시 묘소조차도 관광지로만 인식하는 무례한 사람이 있어 함부로 발걸음을 이리저리 옮겨대면 난감한 일인 까닭이다.
서원에서 왼쪽으로 올라 다람재에 가면 보기드문 절경을 볼 수 있다. 다람재에 올라 낙동강과 첩첩산중에 에워싸인 도동서원 전경을 바라보는 일은 '눈을 즐겁게 한다'는 말의 유래가 헤아려질 만큼 유쾌한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