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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나는 1970년대 초에 대전시 용두동 즉 용머리골에서 살며 지냈다. 그곳은 옛날 서대전고등학교 교문 길 맞은편과 현 충남여중 운동장 담밖의 동네로 속칭 피난민촌이었다. 6.25때 피난 와 오갈 데 없는 난민들을 위하여 정부에서 야산 언덕(용머리)에 8-10평 정도의 판잣집을 지어주었는데 100여 가구나 되었다. 이런 곳은 대전에만도 너덧군데나 되었다. 전후 20여년이 지난 1970년대 초가 되자 기반을 잡은 피난민들은 떠났고, 그 자리에는 경쟁에서 밀린 이들이 들어와 달동네를 이루었다. 원치 않은 아이들은 많이 태어났고 그들은 부모의 무관심 속에서 아무렇게나 내던저져 위태롭게 자랐다. 서대전고등학교 교문을 건너 충남여중 울타리를 끼고 서대전초등학교 동쪽 울타리쪽으로 내려오는 용머리골 길은 왕복 2차선 길로서 동네에서 가장 큰 길이다. 당시는 승용차나 택시가 거의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그 길은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놀이터였다. 여기서 나는 예상 외의 아이들 모습을 보게 되었다. 어둡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순수하고 착하고 당차게 살아가는 아이들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모습이 풍경화처럼 아름답기까지 하여 짤막한 얘기로 만들어 몇 개를 소개한다. |
새 학년
새 학년이 되었다. 돌이도, 식이 훈이도 쁜이, 숙이, 순이도. 일 학년 동생들을 새로 맞은 그들은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지만, 한편 전 학년처럼의 개구쟁이 짓은 이제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용머리 골목을 위해서 뭔가 보람 있는 일을 하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아침 청소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골목길이었다. 그러나 추워서인지 트럭이 가까스로 드나들 만한 그 길을 청소해 주는 이는 겨우내 아무도 없었다. 생활에 바쁜 어른들은 내 주변을 깨끗이 해야겠다는 생각은 까맣게 잊은 듯, 골목길은 갈수록 지저분해졌다. 물론 잡화가게 옆집인 이층집처럼 잘 사는 이도 더러는 있지만 그들 역시 골목을 위해서 비를 들고 싶은 맘은 없는 모양이다.
아침 청소는 게으름을 없애는 기회도 되고, 주변을 깨끗이 하는 착한 일도 되어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기라고 아이들은 생각했다. 물론 청소는 오후에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길을 지나다니는 분들에게 방해도 될 뿐만 아니라, 괜히 제 자랑하는 것 같아서 남들이 다니지 않는 시간인 새벽에 하자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식구 몰래 이불 속에서 빠져나온 아이들 여섯 명은 비를 들고 모였다. 그리곤 골목길을 쓱쓱 쓸기 시작했다. 사람의 발자취가 뜸한 골목 안은 유달리 더러워 보였다. 그러나 막상 깨끗이 쓸고 나니 마음이 여간 상쾌하지 않았다. 이 청소는 매일같이 하기로 약속했다.
“이놈들, 무슨 짓들을 하는 거냐? 누가 너희 놈들 보고 길 쓸랬니?”
그런데 아이들은 엉뚱한 일을 당했다. 헐레벌떡 뛰어온 잡화가게 옆집인 이층집 아저씨가 꽥 소릴 질렀다.
“……?”
“여기 쓸다가 무슨 서류 못 보았니?”
“서류라니요? 어떻게 하셨기에요?”
“아저씨가 어젯밤에 술을 마시고 돌아오다가 이 가게에서 담밸 샀거든. 돈을 내려고 하니까 종이쪽지가 나오잖아. 취중이어서 그 쪽지를 내버리고 다시 돈을 꺼내 담뱃값을 냈던 모양이야. 새벽에 깨어나 일하려고 서류를 찾으니까 없잖아.”
“그래서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젯밤에 내버렸던 쪽지가 서류였단 말이야. 그 서류가 없 으면 큰일 나는데. 그런데 네놈들은,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내동 안하던 청소를 한답시고 그 쪽지마저 치워버렸느냐 말이야?”
“그 쪽지 봤어요. 아직 쓰레기차가 안 지나갔으니까 저기 모아 놓은 데에 그냥 있을 거예요.”
잡화가게 앞을 쓴 돌이는 아저씨를 모시고 가서 그 서류를 찾아냈다. 때마침 아침청소 실시 상황을 살피러 나오신 동장님이 나타나 아이들과 마주쳤다.
“아아니, 이 더러운 골목을 너희들이 이렇게 말끔히 청소했니?”
“네에.”
“이런 착하고 훌륭한 일이 다 있나. 동장 아저씨가 이곳에 온 지 처음 있는 일 이구나. 그리고 어린 너희들이 청소하는 일도.”
뜻하지 않던 꾸지람을 듣던 아이들은 여간 기쁘지가 않았다. 동장님은 말씀을 계속 이으셨다.
“아, 이제 보니 아이들만 착한 일 한 게 아니었군요. 바로 댁의 착한…….”
“아아니, 아니올시다. 저어, 저는 헤헤.”
이층집 아저씨는 뒷머리를 득득 긁으면서 어쩔 줄을 몰랐다.
“하여튼 감사합니다. 마침 시장님께서 아침청소에 앞장서는 분을 찾아 상주겠다 고 추천하라셨는데 댁과 아이들을 추천하겠습니다.”
“아뇨, 천천만의 말씀입니다. 실은…….”
이 때 쁜이가 잽싸게 말을 이었다.
“그래요, 동장님. 실은 이 아저씨 때문에 저희들이 아침 청소를 하게 된 거예요. 아저씨가 저희들의 청소 반장님이시거든요.”
동장님은 이층집 아저씨에게 몇 번이고 감사를 드리고는 떠나가셨다. 뜻하지 않게 즐거운 청소를 하고 돌아오는데 아저씨가 다시 꽥 소릴 질렀다.
“이놈들!”
하고는 모두들 자기집 대문 안으로 몰아넣었다.
“술버릇 나쁜 이 아저씨, 고생을 덜 시킨 이 고얀 놈들. 그 벌로 너희들 벌 줄 빵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실컷 먹어라. 이 아저씨도 너희들처럼 고얀 사람이니까, 내일부턴 내가 앞장서서 이 골목안 청소를 하지.”
아이들은 아저씨의 속마음을 알아서 모두들 깔깔깔깔 하하하 웃었다. 아저씨는 아이들의 궁둥이를 현관 안으로 몰면서 껄껄껄 웃는다.
별일
엄마들이 공동우물가에 모여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여름철이 되면 도시의 높은 지대는 수도 사정이 안 좋았다. 밤늦게나마 나올 둥 말 둥하여 엄마들은 불편했다. 두레박으로 물을 퍼 쓸 수 있는 공동우물이나마 있는 게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다. 그래 빨랫감이 모이면 이 공동우물가로 나와 빨래들을 했다.
엄마들에게 있어서 이 우물가는 소식을 알리고 듣는 데에는 아주 좋은 자리였다. 삐순이 오빠가 새색시를 맞아들였고, 육손이 할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은 이곳을 통해서였다. 요새 애들의 도시락 찬은 무엇으로 싸 주며, 돌이는 어제 숙제를 안 해 가서 청소를 했다는 말도 이곳을 통해서 나왔다.
오늘도 빨랫감을 가지고 모여든 엄마들의 화제는 이 얘기 저 얘기 끝에 애들 흉보는 얘기로 번져갔다.
“우리 돌인요, 텔레비전 만화영화라면 환장을 해요. 걔 땜에 저녁상 늦게 물리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에요.”
“우리 쁜인 어제 저녁 라면을 사러 보냈더니 끓는 물이 말라붙도록 안 돌아오잖 아요. 나아가 보았더니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는 거예요. 기가 막혀서.”
두레박으로 물을 푸던 식이 엄마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그런 정도라면 애교로 봐 줄 수 있게요. 우리 식인 공불 통 안 해요. 학교 다니 는 애들이 그것보다 중한 일이 어딨겠어요? 학교에서 올 때 팽개친 책가방을 이 튿날 그냥 들고 가는 게 일쑤라니까요. 그런데도 통지표 받아보면 중간은 넘으 니 참 알쏭달쏭한 일이에요.”
“훈인 늦잠 자는 버릇 땜에 큰일이에요. 밥상을 들여와서 호통을 쳐야 일어난다 니까요. 그래도 숙이는 좀 낫겠죠?”
“걘들 별 수 있겠어요. 걘 군것질이 심해요. 저금통의 돼지가 통 무거워지지를 않아요.”
“우리 순인 말버르장머리가 나빠서 탈이에요. 할머니께도 반말을 찍찍 해대서 오늘 아침에도 저희 아빠한테 꾸지람을 들었다니까요.”
얘기가 이쯤 되자, 엄마들은 모두 속이 편하질 못해 우울했다.
“요새 애들은 우리가 자랄 때완 너무 달라요.”
“그것보다도 저 녀석들에게 어떻게 2~30년 뒤의 조국을 맡기겠어요.”
이런 걱정을 하고 있을 즈음, 아이들은 감나무 밑에서 놀고 있었다. 돌이와 식이는 그림딱지 치기를, 쁜이와 순이는 공기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싸움들이 벌어졌다. 그 싸움은 거의 동시에 벌어졌다.
돌이는 식이에게 벌써 스무 장이나 잃었다. 식이가 제 딱지로 돌이의 딱지를 쳤을 때 둘의 딱지는 떼구루루 몇 바퀴를 뒹굴었다. 그러다가 땄느니 못 땄느니 싸움이 벌어져 주먹으로 치고 때리기까지에 이르렀다.
쁜이의 공기놀이 차례였다. 둘 집기를 끝내고 셋 집기를 할 차례였다. 돌 네 개가 바싹 붙어 있었다. 너무 열중하여 돌 하나를 건드렸는지 안 건드렸는지 몰랐다. 그게 원인이 되어 둘이는 싸움을 하게 되었다.
마침 빨래를 마치고 돌아오던 엄마들이 이 장면을 보게 되었다.
“너희들 싸움 안 그쳐!”
넷의 엄마들은 빨래를 내려놓고 가서 자기애를 끌어내려 했다. 그러나 워낙 화가 난 애들의 싸움은 엄마들의 힘으로 떼어 말려지지를 않았다.
그 때 마침 애국가 음악이 들려 나왔다. 동사무소에서 방송하는 국기 하기식 방송이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참 이상했다. 그렇게 말리려 해도 막무가내였던 애들이 방송을 듣자마자 잡았던 멱살을 놓았다. 방송이 들리는 쪽을 향해 오른손을 왼편 젖가슴에 얹고 있었다. 언제 싸웠느냐는 듯싶었다. 싸움을 구경하던 어머니들도 빨래를 내려놓고, 난생 처음 국기에 경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엄마들은 실로 오랜만에 가슴 뿌듯함을 맛보았다. 될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데 2~30년 후에 얘들이 떠맡을 조국의 밝은 앞날을 보는 듯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엄마들은 아까 우물가에서 애들 흉본 게 괜스레 미안했다. 엄마들도 오른손을 왼편 젖가슴에 얹고 있었다.
“까짓거 말좀 안 듣거나 싸우는 것쯤이야…….”
“까짓거 텔레비전을 많이 보거나 공부 봄 못하는 것쯤이야…….”
“암요, 저 애들이 저렇게들 믿음직스러운데……
.”
참 별일도 다 있다. 싸움하고 있는 애들 앞에서 꾸지람해야 할 엄마들이 애들을 칭찬하는 것은 아무래도 별일이다.
아버지의 직업
“달캉달캉…….”
감나무 아래에서 준이는 튀밥 풀무를 돌리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장작을 팼고, 식이는 장작개비를 불그릇에 넣었다.
“너희들 없었으면 튀밥장수 못 했을까 보다.”
“할아버지가 여기 단골로 안 오시면 우린 심심할 거예요.”
할아버지가 곰방대를 빼물자, 숙이가 다가서면서 말을 거들었다. 그 때, 돌이가 징징 울면서 저 쪽 골목에서 나오고 있었다.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할아버지.”
“개구쟁이 놀이가 울 때도 있나? 도대체 왜 우니?”
“…… 아버지한테서 꾸지람 들었어요.”
땟물이 밴 옷소매로 눈물을 쓰윽 닦으면서 돌이는 모여 있는 데로 와 쭈그려 앉는다.
“형하고 싸우기라도 한 게로구나.”
“아니에요. 우리 아버지는 매일 나만 혼낸다고요, 공부 안 한다고요.”
“공불 안 하면 혼나도 싸지.”
“공분 해야 뭐 한 대요? 우리 아버지처럼 자전거포에서 기름때나 묻히게요. 아 버진 삼등 밖으로 떨어진 적이 없었대요.”
튀밥 할아버지는 말문이 막혔다. 그렇지만 아버지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돌이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아버지 직업이 어때서?”
“학교 친구애들 보면 창피해요.”
“준이 너도 아버지 직업이 창피스러우냐?”
할아버지는 다른 애들의 속을 다 떠보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아버진 하숙생이에요. 날이 밝기도 전에 운전대 잡고 나가서 열두 시가 넘어서야 돌아오시는 아버지가 자랑스러울 것이 뭐있어요?”
“허허 그렇게 생각하면 쓰나? 그럼, 식이 넌?”
“저도요. 포장 리어카를 끌고 다니면서 제일 더러운 남의 구두나 지으니까요.”
“그래 쁜인?”
“말도 마세요. 제가 제일 창피해요. 트럭 꽁무니 따라다니면서 똥이나 푸는 미화 사에 다니시잖아요.”
“허허 큰일이군. 숙인 안 그렇겠지?”
“우리 아버진 깜둥이잖아요. 연탄공장에 다니시니까요.”
아이들 모두가 아버지의 직업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 데에 대해 할아버지는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으흠 그러니? 누워서 침 뱉으면 제 얼굴만 더러워지는 법인데 나는 너희들이 그런 못난이 아버지를 둔 줄도 모르고 굽실거리며 인사를 했더니, 앞으로는 처다 보지도 말아야겠구나.”
할아버지는 튀밥 기계 눈금을 보며 아이들의 속을 떠보았다. 못난이 아버지라는 말을 들은 아이들은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못난이 아버지라니요. 그래도 우리 아버지는 얼마나 훌륭한 일을 하시는데 요?”
식이가 불쑥 나섰다.
“그래, 왜?”
“우리 아버지 같은 분이 안 계셔 봐요. 구두가 망가져 질질 새는 것을 고쳐주니 남을 위해 봉사하시는 분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도 그래요. 집집마다 변소가 넘쳐 봐요. 어떻게 되겠나요. 우리 아 버진 이 도시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시는 분이에요. 그래서 시장님으로부터 상 장도 받으셨는걸요?”
“그래, 준인?”
“우리 아버지야 최고지요. 뭐 급한 사람 태워 주고, 죽게 된 사람 병원으로 날라 주시니까요. 다 죽게 된 사람 열 명도 더 실어다 주셨대요.”
“우리 아버진 더 해요. 탄 없으면 얼마나 불편할 지 상상이나 해 보셨어요? 밥 도 못해먹고 추운 겨울이 되면 모두 얼어 죽을 거예요.”
“그럼 돌인 어떻게 생각하니?”
“우리 아버지도 얘들 아버지한테 뒤지지 않을 만큼 훌륭한 분이에요. 사람을 태 우고 물건을 나르는데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자전거를 고치시니까요.”
제 아버지 자랑으로 얼굴까지 상기된 아이들의 눈망울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튀밥이 튀겨질 시간이 다 되었는지 할아버지는 한 손으로는 통을 대고 또 한 손으로는 기계를 대면서 말씀하셨다.
“우리 다 함께 ‘우리 아빠 최고’하고 소리 높이 외쳐 볼까?”
‘탕’소리와 함께 감나무 골목안은‘우리 아빠 최고!’소리로 메아리치고 있었다.
엄마 다툼 아이 싸움
“쁜이 엄마, 이웃간에 그럴 줄은 몰랐어요. 아무리 눈 없으면 코 베어 먹는 세 상이기로서니 그런 엉터리 책꽂이를 소개해 줄 수가 있어요?”
“내가 엉터리 책꽂이를 소개해 주다니요? 콩나물시루 같은 시내버스 속에서 돌 이 엄마가 실수를 하여 망가뜨려 놓고서 나보고 탓해요?”
“돌이 책꽂이 하나 사겠다니까, 싸고 튼튼한 책꽂이라면서 쁜이 이모네 가겔 소 개해 주었잖아요? 책 한 권 끼워 보지 못하고 망가지는 게 튼튼한 책꽂이인가 요?”
돌이와 쁜이는 엄마들이 감나무 앞 잡화 가게에서 다투는 걸 보며 눈만 꿈벅였다.
“그만 두어요. 책꽂이 값 팔천 원 내 돈으로라도 드릴 테니, 그 책꽂이 우리 집 에 갖다 놓으세요.”
“아니, 내가 언제 돈 도로 달랬어요? 쁜이 이모부가 목수이니까 고쳐 주도록 해 한다고 말하면 안 되나요. 억을해 하는 나보고 갖다까지 놓으라고요? 똥 낀 놈 이 성낸다더니 참 별일이야.”
“엄마, 싸우지 말아요.”
점점 소리를 높여 다투는데 겁이 난 돌이와 쁜이는 각각 제 엄마의 손을 끌었다.
“인석들이 어른 일에 무슨 참견이야.”
화가 난 엄마들의 손에 돌이는 머리통에 알밤이 쥐어 박혔고, 쁜이는 팔을 꼬집힌 채 멀찍이 물러나고 말았다.
엄마들이 헤어진 뒤, 돌이와 쁜이만이 덩그마니 남게 되었다. 돌이는 쁜이네 때문에 엄마한테 알밤 먹힌 게 속이 상했다.
“니네 이모부 사기꾼이지, 엉터리 기술자?”
“우리 이모부가 왜 사기꾼이니? 사기꾼은 자전거포를 하고 있는 네 아버지이지. 우리 오빠 자전거에 전등 달아 주고서 하루도 못가 고장 나게 하고서는 천 원이 나 받아먹은…….”
“뭐야, 이것이? 우리 아버진 나라에서 정해 준 값 이상은 안 받는단 말이야. 제 아버진 겨우 똥차 따라다니면서.”
“뭐야, 똥차? 그래 우리 아버지는 똥차 따라다닌다. 그게 어쨌다는 거니?”
어른들의 말다툼은 엉뚱한 데로 번져 아이들의 싸움을 만들어 놓고 말았다.
“네가 우리 아버지 헐뜯었으니까 나도 그랬지, 이 계집애야.”
“너 나보고 욕했어. 나는 욕할 줄 모른다든? 왜 남의 아픈 곳을 쑤시니.”
“이 쌍년이.”
돌이가 쁜이의 머리채를 흔들었다.
“이 새끼가.”
쁜이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돌이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둘은 엉겨 붙었다. 처음엔 팔을 치다가 나중에는 주먹다짐, 발길질까지 했다. 돌이는 쁜이의 코를 터뜨려 놓았고, 쁜이는 하수구의 진흙을 던져 돌이의 옷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어른 다툼이 애들 싸움으로 번졌고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진 꼴이 되고 말았다.
빨래 비누를 사러 나왔다가 쁜이의 코가 터져 피가 나는 것을 본 쁜이 엄마는 깜짝 놀랐다.
“아휴 우리 쁜이가 어찌 된 일이니?”
옆에서 씩씩거리는 돌이를 보았다.
“너, 이 녀석 돈 벌어 놨니? 멀쩡한 애 때려 코까지 터뜨려놓게.”
쁜이 엄마는 역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마침 공중전화를 걸러 나왔다가 돌이의 옷이 엉망이 된 것을 보고 돌이 엄마는 깜짝 놀라 허겁지겁 뛰어나왔다.
“아니 돌이야, 이게 무슨 날벼락이니?”
옆에서 쌕쌕거리는 쁜이를 보게 되었다.
“쁜이 니네, 돈 많은 모양이구나. 새 옷 사 입히고 싶어서 그랬니?”
그러다가 돌이 엄마와 쁜이 엄마는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둘이는 아까의 꽁한 일로 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가자. 너 저 왈패 녀석 하구는 다신 놀지 말거라.”
쁜이 엄마는 돌이를 노려보며 팔을 끌었다.
“가자. 너 저 독살맞은 계집애하군 다신 놀지 말거라.”
돌이 엄마는 앞서가는 쁜이를 손가락질하며 앞세웠다.
재미있는 일은 이튿날에 벌어졌다. 아침 학굣길에서 만난 돌이와 쁜이는 언제 싸웠느냐는 듯이 서로 마주보고 깔깔대며 학교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연탄재를 버리러 나왔다가 얼굴이 마주친 돌이 엄마와 쁜이 엄마는 샐쭉하니 고개를 돌리며 자기집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살맛나는 세상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감나무 밑에 쓰러져 있는 웬 시골 할머니를 아이들이 발견했다. 그분은 몹시 배가 아픈 듯이 틀어쥔 채, “아이고 배야!”하며 신음하고 있었다. 매우 심한 상태 같았다. 그러나 누구하나 이 할머니를 거들떠보는 이가 없었다.
아이들은 할머니를 빨리 모셔야겠다고 생각했다.
“할머니 어디 가는 중이세요.”
“이 동네에 산다는 막내딸네 집에 처음 찾아가는 중이야.”
“따님이 뭐 하는 분인데요?”
“내 사위가 김정수야. 시청에 다닌대.”
식이가 묻자, 할머니는 몹시 괴로운 듯 가까스로 답하더니 이내 의식을 잃었다.
이 일을 당한 아이들은 와락 겁이 났다. 다급해져서 쁜이가 가겟집으로 달려갔다.
“웬 시골 할머니가 감나무 밑에 쓰러져 돌아가시게 생겼어요. 우선 여기로 모셔 올까요?”
“예끼놈, 나보고 송장 치우란 말이니? 어서 가. 나한테 들렀다는 말은 하지도 말 고.”
뚱보 아저씨는 할머니 쪽을 찔끔 내다보더니 문을 닫으려 한다. 아무리 차가운 게 도시 인심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하다 싶어서 쁜이는 실망했다.
“아저씨, 이 할머니 돌아가시게 됐어요. 살려주세요.”
준이가 지나가는 아저씨에게 쫓아가 매달렸다.
“인석아, 내 코가 석 자야. 우리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연락이 와서 가는 참이야. 환자면 병원으로 모셔야지, 왜 나보고 살려 달라는 거야.”
한 마디 내뱉고는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달아난다. 아이들은 쌀쌀맞은 어른들의 마음씨를 원망했다.
할머니는 더욱 괴로운지 숨소리까지 심상치가 않았다. 그냥 두면 돌아가실 것 같았다. 다급해진 돌이는 아버지가 일하는 자전거포로 갔다. 그리곤 리어카를 끌고 나왔다. 할머니를 병원으로 모셔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돌이와 식이는 할머니의 팔을, 쁜이와 준이는 다리를 들어 리어카에 모셨다. 그리곤 끌고 밀며 병원 안에 들어섰다. 이 모습을 본 간호원 누나가 깜짝 놀랐다.
“치료비는 누가 낼 거니?”
눈치를 살피던 누나가 다짜고짜로 치료비부터 묻는 바람에 아이들은 말문이 막혔다.
“치료비 낼 사람 없으면 이 할머니 다른 병원으로 모시고 가 봐. 지금 의사선생 님도 안 계시니까.”
아이들은 분해 얼굴까지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할머니가 죽어 가는데…….
“치료빈 왜 못 내요? 우리 할머니에요. 어른들이 외출 중이어서 우선 모셔왔는 데, 치료비는 아버지가 곧 가지고 오실 테니 치료나 빨리 해주세요.”
아이들은 돌이의 그 말을 듣고는 의젓한 돌이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간호원 누나가 내실로 들어가자, 흰 가운을 입은 의사선생님이 나오셨다. 할머니는 곽란(급히 체한 것)이 났던 모양이다. 두 대 주사로 할머니는 눈을 뜨셨다.
그러던 동안에 돌이 아버지가 오셨다. 난데없이 리어카를 가지고 나간 돌이가 안 돌아오자, 이상해서 나와 보니, 죽게 생긴 웬 할머니를 싣고 병원으로 갔다는 말을 가겟집 주인으로부터 듣고 오신 것이다.
돌이 아버지는 기특한 일을 한 애들이 여간 대견스럽고 예쁘지가 않았다.
“그래, 사위가 어디서 사는 누구죠?”
돌이 아버지가 그렇게 묻자, 그제야 생각이 난 듯 할머니는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냈다.
(12통 3반 51의 7번지 김정수)
주소를 본 돌이 아버지는 자못 놀랐다.
“할머니, 사위가 청소부지요? 눈 밑에 검은 점이 찍혀 있는…….”
“으응, 그래요. 근데 사윈 어떻게 알지요?”
“우리 동네 오물은 댁의 사위가 다 치워 주는데요. 우리집에서 네 번째 건넛집 에서 살아서 늘 만나요.”
할머니는 그제야 안심을 하며 일어나 앉았다. 그리곤 돌이의 손을 꼭 잡았다.
“너희들이 생명의 은인이구나. 너희처럼 착한 사람만 있으면 얼마나 살맛나는 세상이 되겠니?”
할머니의 눈시울에서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저녁 햇빛이 병실 안으로 기어 들어오고 있다.
낯선 손님
여름 방학이 되었다. 해가 서녘 도회를 물들일 무렵, 감나무 골목 아이들은 낯선 손님을 대하게 되었다. 조그맣고 이마가 툭 불거져 나온 못생긴 짱구였다. 소리쟁이인 복덕방 할아버지네가 외갓집인데 이름이 성철이라 했다. 외갓집에 놀러온 모양이다.
볼품없는 낯선 손님을 대하게 된 아이들은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감나무 밑에서 만난 그들은 돌이의 소개로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식이라는 애야. 먹보로 통하고 있는데 태권도 왕이야. 4급이라니까.”
“얜 준이고. ‘심’자와 ‘술’자 붙은 꾸러기인데 달리기왕이야.”
“얜 순인데 척척박사이고.”
“나? 개구쟁이 돌이야. 음악박사로 통해. 하모니카, 피리, 멜로디온 정도는 끝내 주지.”
이렇게 소개를 해 주었는데, 성철이는 좀 모자란 애 같았다. 눈만 껌벅거릴 뿐 표정이 전혀 없었다.
달밤이었다. 저녁을 먹고 아이들은 감나무 밑으로 모여들었다. 다 모이고 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연탄집까지 달려오는 달리기였다. 소화도 잘 될 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있을 운동회 준비 때문에 준이의 제안으로 시작된 지 보름이나 되었다. 사내애들 넷이 출발선에 섰다. 준이, 식이, 돌이, 훈이.
“성철이 넌 골인 점에서 누가 몇 등이나 하는지 가리기나 하는 게 좋을 거야.”
“나도 하면 안 되니?”
“하면야 좋지만 꼴지 가면 너만 창피하잖아.”
“그래도…….”
달리기왕 준이의 권하는 말에도 성철이는 하고 싶어 했다. 왕복을 달리려면 육백 미터는 족히 되는 거리였다. 좀 달리다 보니 저 뒤에서 쫄랑쫄랑 따라오는 애가 있었다.
“따라오지 말라도.”
“괜찮아.”
준이는 낯선 손님을 맞아 오늘은 발걸음이 한결 더 가벼웠고 힘이 솟았다. 반환점까지 이등을 삼십 미터쯤까지 떼어놓자, 준이는 발걸음을 재게 뛰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등이 점점 좁혀드는 것이었다. 준이는 있는 힘을 다해서 뛰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좁혀들기 시작해서 반환점에서 절반을 넘어서자, 이등이 자기를 앞섰다. 생각조차 못했던 성철이였다. 십 미터도 넘게 뒤떨어졌다. 창피했다. 그렇다고 항복할 준이는 아니었다.
“꽤 잘 달리는데, 다시 한 번 해 볼래? 이젠 엿 먹여 주지 않을게.”
“그만 하지 뭐.”
성철이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준이는 녀석이 겁을 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팔을 끌었다. 감나무 골목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이 정도로 그치고 말 수는 없었다. 돌이의 신호 소리에 맞추어 있는 힘을 다해서 뛰었다.
그러나 성철이를 도저히 따를 수는 없었다. 십 미터쯤 떨어졌을 때 준이는 기권하고 말았다. 끝까지 달려봤자 더 떨어지기만 할 게 분명했다. 그것보다는 핑계를 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배가 아파서…….”
준이는 확실히 기가 죽어 버렸다. 그러면서도 성철이를 꺾어 놓고 싶었다. 지켜보던 아이들도 실망하는 눈치였다.
“자, 그럼 휴식 겸해서 돌이의 하모니카 연주 솜씨나 들어볼까?”
따분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한 준이 말에 돌이는 감나무 골목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성철이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다. 돌이는 고향의 봄, 파란 마음 하얀 마음, 신바람 강바람을 거침없이 불었다.
“성철이 넌 못 불지?”
“조금은.”
돌이는 요 때다 싶어 하모니카를 넘겨주었다. 녀석은 서툴게 도레미파솔라시도를 불더니 폼을 잡았다. 그러더니‘고향 땅’,‘옹달샘’,‘오빠 생각’을 거침없이 불어댔다. 전주곡은 물론이요, 박자까지 쿵작짝하고 넣으면서.
멜로디만 부는 돌이완 비교도 안 되어 아이들의 눈은 똥그래졌다. 감나무 골목 사내아이들은 풀이 죽고 말았다.
“너희들은 우물안 개구리라는 것을 몰랐니?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교 훈을 가르쳐 준 성철이에게 감사해야 할 거야.”
술래잡기놀이를 하다가 함께 모여 두 노래를 들은 척척박사 순이의 말에 애들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평양 할머니
양복점은 용머리골 골목으로 들어가는 왼쪽에 있었다. 주인아저씨는 용머리골 골목의 반장님이었고, 살기도 잘 살아서 양복점 뿐만 아니라 용머리골 골목 아이들이 틈만 있으면 나와서 노는 빈터의 땅 주인이기도 했다. 지금은 살 만큼 사니까 기술자를 두어 일시키고 매일 술타령이지만 아이들은 빈터에서 놀 때마다 아저씨로부터 시끄럽다고 쫓겨나곤 했다.
양복점 출입문 곁에는 혼자 살면서 광주리를 파는 할머니가 계셨다. 사람들은 평양 할머니라고 불렀다. 봄이면 딸기․토마토, 여름이면 복숭아․포도, 가을이면 감․밤, 겨울이면 귤과 군고구마를 거기에 부처님처럼 앉아서 파셨다.
이곳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 곳에서 장사를 해서 아이들은 모두 그 할머니를 친할머니처럼 따랐다. 애들이 배고파하는 모습을 보면 그냥 주었다. 돈은 주어도 그만 안 주아도 그만이다.
학교에서 상을 탄 아이를 알면 꼭 붙들고 와 광주리에 것을 그냥 주었다.
운동회 날에도 모두들에게 감과 밤을 나누어 주고야 학교로 장사하러 가는 할머니여서 아이들은 군것질하려면 꼭 그 할머니한테서 샀다.
하기야 이 양복점 아저씨가 떠돌아다닐 때 이곳에서 양복점을 내도록 한 분이 그 분이었고 은근히 선전도 해 준 분이 그 분이라는 것을 오래 산 분은 모르는 이가 없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닷새 전부터 안 나오는 까닭이 준이로부터 밝혀졌다. 그날 벌어 그날 끼니를 때우는 평양 할머니가 몸져 누워 있다는 것이다.
“우리, 그 할머니 문병 가자.”
이 말은 이곳 애들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나왔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아이들은 양복점 앞에 모여 들었다. 돌이와 훈이의 손엔 쌀봉지가 들려 있었고, 순이와 식이의 손엔 돼지 저금통을 턴 돈이 들려 있었다. 숙이의 손엔 음료수 세 개, 쁜이의 손엔 연탄집게가 쥐어져 있었는데, 그 아래엔 활활 불이 단 연탄이 들려져 있었다.
아이들은 양복점 맞은 편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양복점 아저씨 곁을 지나 평양 할머니네 셋방으로 갔다. 할머니는 얼음처럼 차가운 방안에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오들오들 떨고 계셨다. 아이들을 본 할머니의 눈에선 눈물을 핑 돌았다.
“이 늙은이에게 세상이 이렇게 따뜻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구나.”
할머니는 돌이의 부축으로 가까스로 일어나 앉으며 옷소매로 눈물을 닦는다.
“아니어요. 그 동안 저희들에게 베푸신 따뜻한 사랑에 비하면 마로 받은 것을 되 로 갚는 셈밖에 안 돼요.”
“아니지. 내가 너희들에게 ‘되로 주고 말로 받는구나’.”
숙이는 가져온 음료수를 열어 할머니의 손에 드렸고, 순이는 할머니가 점심도 굶었다는 말을 듣고는 쌀봉지를, 쁜이는 연탄불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돌이와 훈이는 할머니의 어깨와 팔을 주물러 드렸고, 식이는 물수건으로 때낀 할머니의 손을 닦고 있는데 양복집 아저씨가 들어오셨다.
“할머니, 우유 배달을 하는 이씨네 집이 어디…”
아저씨의 얼굴은 붉어 있었고 술 냄새가 풍겨 나왔다.
“응, 공동 우물 밑 골목의 복덕방 옆……”
“아아니, 말썽꾸러기인줄로만 알았던 너희들이!”
골목안 아이들을 보고 난 양복점 아저씨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 어른들이 너희들을 대할 낯이 없구나. 그간 내가 너무 했다. 너희들이, 이 너희들이 이러는데 우리 어른들이 그냥 있을 수가 있니? 할머니, 할머니 치료는 내가 맡겠습니다. 그리고 반상회를 열어 할머니의 생활을 도와 드리겠어요.”
양복점 아저씨의 얼굴엔 굳은 다짐의 빛이 뚜렷하다.
“아니, 이씨까지도 날?”
“할머니, 당장 의사 선생님을 모셔 오겠어요. 이 일은 제가 할머니로부터 받은 은 혜에 비한다면 말로 받는 것에 비해 되로 갚아 드리는 셈도 못 되니까요.”
“아, 아니지. 내가 되로 준 도움을 이씨는 말로 갚는구먼.”
“할머니, 금방 의사 선생님을 모셔 올게요.”
양복점 아저씨는 빙그레 웃음을 남기고 나갔다.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아이들의 눈망울에도 잔잔한 웃음이 맴돌았다.
감 따는 날
화가 아저씨처럼 하늘에, 나뭇잎에 아름다운 물감을 칠하던 가을은 이 곳 골목 안 감나무에도 그 멋진 물감을 칠하기 시작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시퍼렇던 감들은 요술사 가을 아저씨의 솜씨에 의해 홍시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맘때쯤이면 이곳 용머리 골목 안은 즐거운 잔치가 벌어진다. 감을 따고, 딴 감을 집집마다 나누어 가지면서 내년의 이맘때를 기다리는 추억을 만드는 잔치 말이다.
오늘은 감 따는 날이다. 이 동네에서 제일 오래 사신 복덕방의 육손이 할아버지가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일은 시작되었다. 돌이, 준이, 식이가 감나무에 올라가 따 내리기 시작했다. 밑에서는 숙이, 순이, 쁜이가 광주리에 받아 놓았다. 씨감 하나만 남겨 놓고 다 따 내린 감은 네 광주리나 되었다.
“자, 그러면 집집마다에게 골고루 나누어야지. 모두 몇 개인지 돌이 네가 세어 라.”
그러나 육손이 할아버지의 그 말이 끝나자 돌이는 아이들과 미리 약속한 각본에 의해 엉뚱한 말을 꺼냈다.
“할아버지, 이 감 한 광주리만 저희들에게 줄 수 없어요?”
“네끼놈들, 딴 수고 값을 그렇게 많이 달래?”
“저희들은 한 쪽도 안 먹고, 할아버지께서 칭찬하실 일을 할 생각이 있어서 그 래요. 결과는 나중에 죄다 말씀드릴게요. 네, 할아버지.”
상냥이인 쁜이가 팔에 매달리며 조른다. 할아버지는 작년보다 한 광주리나 더 딴 감이란 것과, 애들이 나쁜 짓은 안 하는 착한 애들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내주었다.
감을 골목 안 가게에 갖다 놓은 다음, 아이들은 골목 안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마침 쓰레기차가 방울을 딸랑거리며 골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먼지를 쐬며 온갖 쓰레기를 치워주는 고마운 아저씨들이다.
차가 멈추고 쓰레기를 다 실을 때였다. 쪼르르 달려간 아이들은 잘 익은 홍시 두 개씩을 아저씨들의 손에 쥐어 준다. 아저씨들은 쓰레기차를 여러 해 따라다녔지만, 자기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받아보긴 이번이 처음이다. 홍시처럼 몰랑몰랑하고 새빨간 애들의 마음씨가 여간 고맙지 않았다.
다음에 나타난 이는 집배원 아저씨였다. 30년 동안이나 이 골목에 궂은 소식 기쁜 소식을 빠짐없이 전해 준 대문 밖의 천사였다. 아저씨는 배달가방을 자전거에 놓은 채, 편지를 들고 한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아이들은 숨어서 훔쳐보고 있었다. 숙이가 홍시 네 개와 쪽지를 그 새에 얼른 넣고 돌아와 숨었다. 편지를 전해 주고 자전거를 끌던 아저씨는 문득 가방이 표 나게 무거워졌음을 느꼈다. 가방을 열었을 때 나타나는 홍시 네 개와 쪽지 하나!
(감나무 골목을 위해 수고해 주신 아저씨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골목안 감나 무 올림)
아저씨는 가슴이 찡해옴을 느꼈다. 서툰 글씨만 보아도 누구의 짓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무렵 동장 아저씨는 동사무소 아저씨들과 둘러앉아 머리를 짜내며 회의를 하고 있었다. 가난한 용머리 골목안의 어린이들을 위하여 동화책을 사 놓았는데 어떻게 나누어주어야 할지를 상의하고 있었다. 안경 아저씨가 벌떡 일어나서 입을 열었다.
“아이들을 모아놓고 전달식을 성대히 가졌으면 합니다. 그리고 사진도 찍어 우 리의 뜻있는 일이 신문에 나도록 합시다.”
동장 아저씨는 고개를 내둘렀다. 잠바 아저씨가 일어났다.
“동장님 이름으로 우리의 뜻을 적어 집집마다에 부치면 어떨까요. 방송국에는 제가 알릴 테니까요.”
“못난 송아지 엉덩이에서 뿔난다는 말 작작 하시오. 우리가 한 일인 줄을 눈치 채지 못하는 방법을 생각해 봐요.”
동장 아저씨는 꽥 소릴 지른다.
“오라, 그 생각을 못했군.”
착한 일은 남이 안보는 데에서 하는 신념으로 살아온 아저씨였다. 동장 아저씨는 용머리골의 주민등록대장을 뒤적이며 수첩에 적기 시작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있는 집만 골라 적고는 밤이 되자, 동화책 꾸러미를 자전거에 싣고 동사무소를 빠져 나왔다.
이튿날 아침, 엊저녁에 남몰래 한 일로 아직도 즐거운 마음으로 제일 먼저 출근한 동장 아저씨는 깜짝 놀랐다. 잘 익은 홍시 감들이 책상마다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장 아저씨의 책상 위에는 이런 쪽지가 한 장 놓여 있었다.
(우리 마을을 위해 수고해 주신 아저씨들께 감사드립니다. 용머리골 감나무)
그날 아침 일찍 일어난 골목 안 아이들은 깜짝 놀랐다. 더러는 제가, 더러는 엄마가 아버지가 대문 안에서 새 동화책을 주웠기 때문이다. 동화책 위에는 이런 쪽지가 놓여 있었다.
(골목 안 감나무의 감들처럼 무럭무럭 커 주기를 바라면서, 용머리골 감나무)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이 아름다운 일은 앞으로도 누가 한 일인지 안 밝혀질지도 모른다. <끝>
약 력
정 만 영
* 본 약력은 편집자가 필요한대로 사용하십시오.
․ 출생 : ’46. 충남 부여군․읍 석목리 생
․ 등단 : ’74 동아일보신춘문예 동화 당선
․ 경력 : 충남아동문학회 창립 멤버(’73), 한국문협 회원(’76), 충남수필문학회 창립회원(’82) 가톨릭문우회 창립회원(’83)대전문인총연합회 초대 사무국장 역임(’90), 한국아동문학회 부회장 역임(’94), 한국문협대전광역시지회 부회장 역임(’98) 대전서구문학회장(’98) 대전장대중교장 재임 중 정년퇴임(’09)
․ 저서
․ 창작동화집 :「꿈이 피는 나무」(’79), 「신비의 거울」(’81), 「감 따는 날」(’84), 「별나라 왕자」(’84), 「머리가 둘인 송아지」(’90), 「도둑과 아기」(’92) 「유리성 궁궐」(’92), 「괴짜 선생님의 숙제」(’95), 「그림첩을 베고 잠든 아이」(’01), 「훈이의 시골여행」(’05), 「환경․과학 동화집」(’09)
․ 산문집 : 「선생님, 갠 늘 환자예요」(’92), 「정만영 산문집」(’09), 「정만영 평론집」(’09)
․ 수상
한국동화문학상(’81), 한국 방송통신 대학 체험수기 모집 당선 (’83), MBC 문화방송 주관 전국 향토도민의 노래 ‘충남의 노래’ 우수상(’84), 한국 청소년 연맹가 ‘모닥불 앞에’ 당선(’85), 한국예총회장상(’88) 한국아동문학작가상(’93), 대전직할시문화상(’92), 교육부장관상(’92), 황조근정훈장(’09)
․ 평설 리스트 : 한상수 : 정만영 형의 동화세계 (’79. 동화집 ‘꿈이 피는 나무’ 발문), 송하섭 : 非人間化에의 防波堤 (’79. 9. 19. 대전일보) 김재창 : 관심의 아름다움 (’96. 9. 아동문예), 김영훈 : 정만영 동화와 휴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