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빨간 피터
최봉호
모처럼 큰맘 먹고 시내에 있는 소극장에 갔다. 한 마술봉사단체에 같이 적을 둔 ㅈ 마술사가 초청해주었다. ‘굿바이 빨간 피터’라는 타이틀의 모노드라마 연극이다. 원숭이로 분장한 ㅎ 배우는 자기가 마치 진짜 원숭이가 된 양 연기를 한다.
아프리카 야생에서 살다 인간에게 잡힌 원숭이는 쇠창살우리에 갇히게 되었다. 출구를 찾아야했고 인간화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래서 원숭이다움을 포기하고 사람들 흉내를 내야했다. 악수하기, 침뱉기, 담배피우기, 술마시기 등에 길들여졌다. 그러다가 술에 만취한 어느 날은 마침내 인간의 소리도 터트리게 되었다. “핼로우 핼로우, 미스터 몽키!” 결국 빨간 피터라는 별명을 가진 서커스단의 광대가 되어 공연을 펼치고 때로는 환호갈채를 받기도 했다. 왜 빨간 피터냐 하면 사냥꾼이 쏜 총알이 뺨을 스쳐 상처 자국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연극은 한 시간여 진행되었다. 배우는 이 연극에 자기감정을 모두 이입한 것 같다. 과거에 피터와 비슷한 경험을 겪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사실적으로 할 수 없는 연기였다. 원숭이가 그 배우로 환생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는 수년전에 우연히 만나 잠깐 얘기했을 때 보여 주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활기차게 연기를 한다. 그때 초로의 힘없는 광대의 모습을 엿보았는데 이번 연극을 보니 내가 그를 잘못 본 것임을 알았다. 배우는 혼신의 힘을 다한다. 배우는 중간 중간에 관객을 무대로 불러내 눈을 맞추기도 하고, 보기 힘든 고급 마술도 보여준다.
엉겁결에 무료로 입장한 것이 미안했다.
이를 보다가 갑자기 ‘70년대 추송웅이란 연극배우가 생각난다. 당시 ‘빨간 피터의 고백’이란 모노드라마로 히트했던 배우이다. 당시 추송웅 배우는 원숭이 습속을 익히기 위해 창경원 동물원 원숭이 우리를 여러 번 찾아가 관찰을 했고 우리 안에서 같이 잠을 잔 날도 있다고 한다.
이 연극의 원작은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소설,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이다. 그의 다른 소설 <변신>이 인간이 벌레로 변한 것과 반대로, 이 소설은 원숭이가 인간으로 변해 인간 사회 속에서 인간화될 수밖에 없었던 원숭이의 상처가 주된 이야기이다.
카프카는 유대인의 피가 흐르는 독일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에 많은 고민을 했던 작가이다. 이 단편소설도 그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엿보인다. 빨간 피터는 인간 사회 속에서 자신의 본성, 욕구, 의지는 철저히 감추어야만 했고 타자인 인간의 규격에 맞게 살아야했다. 그는 불행했지만 그 또한 행복이라 여겨야 했고 자기최면을 걸어 불행한 현실을 애써 부정해야만 했다.
어쨌든 우리에서 빠져 나오는 데 성공한 피터는 이제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된다. 연회에도 참석해야 하고, 학술 모임에도 참석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름대로 열심해 배워 유럽인의 평균 교양에 도달하였다고 고백한다. 피터가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은 우리 아이들이 성인이 되는 과정과 너무나 유사하다. 그렇지만 체제가 정한 출구는 평균인이 되도록 하는 장치일 뿐이다.
배우는 피터가 반쯤 조련된 암컷 침팬지와 결혼 생활을 하는 장면도 연기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체제에 완전히 길들여져 있지 않은 존재인 여성과의 결혼생활. 당연히 피터는 아내의 눈빛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착란 증세”를 보고, 연인을 야생으로 되돌아가라고 조언한다. 자신의 아픈 기억과 상처를 후벼 파는 경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는 인간이 가장 존엄하다는 인간중심주의가 전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카프카는 의심한다. 그는 원숭이 피터의 입장에서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혹은 인간이 되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름 내게 의미가 있는 연극을 보았다. 내가 무대에 올라 마술을 보여줄 기회가 생기면 원숭이 역할 연기를 실감나게 펼친 추송웅과 ㅎ 두 배우를 생각하면서, 어설프겠지만, 혼신의 힘을 쏟아 공연을 펼치고 싶다.
첫댓글 최수필가님
아주 훌륭한 수필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더 기대하겠습니다.
최봉호 수필가님,
올려 주신 수필 잘 읽었습니다,
좋은 수필 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