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처歲月處
김동원
좀 들어 보라 카이. 의미 그거 다 쓸데없는기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아이가. 바람 불면 꽃 쪽으로 달빛 나오면 댓잎으로, 간들간들 사운대다 가는 게 인생 아이가. 그래, 그기라니까. 말도 안 되는 기 말 되는 기라니까. 그래, 그래, 반쯤 술에 취해 그렇게 놀다 서산으로 번지는 기라. 한 백 년 서로 얽키고 설키고 뜯어먹다 가는 기라. 좀, 좀 들어 보라 카이. 안 보이는 거 보이도록 하는 기 시詩 아이가. 막히면 죽고 뚫리면 사는 거 연놈들 이치 아이가. 쓱 쓱 허공에 썼다가, 쓱 쓱 쓱 지우는 거, 그게, 오고 가는 세월처歲月處 아이가!
시검詩劍
김동원
천하를 갖고 싶으냐!
쉬지 말고 광활한 초원에 말을 달려라
칼을 쳐들고 불의 행간을 뚫어라
아무도 흔적을 남길 수 없구나
바람만 칼끝을 보고 있다
눈을 파내어라, 귀를 묻으라
직유는 결코 혼자 죽지 않는다
귀신도 모르게 은유를 쳐내는구나
불이 내렸도다!
시시각각 말은 휘황찬란하구나
말이 말을 닫으니 일어나는 말이 없구나
달려도 달려도 이미 와 있는 말
검劍을 찾을 자者 영원히 없을 지니,
무無를 베라, 천지사방 색色을 베라
무덤은 산 자들의 퇴고가 아니냐
정녕, 천하를 갖고 싶으냐,
번개처럼 단칼에 놈의 목을 베라
이 시인 놈아
김동원
닥쳐요, 잊히면 좀 어때요.
진짜 시인이라면 구름에게 명령해요.
입금 좀 제때 하라고요.
집세가 없어요, 여보!
제발 노을에게 부탁이라도 해 봐요, 우리.
넷이서 밤마다 보름달만 뜯어먹을 순 없잖아요.
달무리라도 덮고 실컷 울고 싶어요.
당신이야 장미 년, 모란 년, 매화 년
끌어안고, 행간 속에 들어가면 그만이지만,
시인의 아내는 뭐예요.
그만, 그만, 내일 바람이 송금한다는
허황한 그딴 소린, 집어치워요. 제발!
빈말이라도, 돈 좀 줘 봐라,
이 시인 놈아!
말귀
김동원
매화 꽃잎은 천천히 허공을 여네. 말귀는 열어 두고, 찻잔 속에 향을 머금네. 대숲 바람이 눕는 사이, 부드럽게 모음이 구르네. 말은 오므라 드네, 아니, 벌어지네. 그래, 그래, 조여 지는 말의 체위. 달빛은 바람의 샅을 핥고 있네.
구름은 또, 허공의 귓등 새로 말이 흐르네.
색의 자음들이 올라타네. 홍紅, 홍紅, 홍紅, 베갯머리에선 색 쓰는 소리가 깊네. 노랑 말귀를 알아 듣는 노란 단풍. 산이 풀리고 노을이 닫히고, 사이사이 말귀가 트이네. 겨울 눈 내리고 봄꽃 피고, 돌아보니, 문득, 말들이 사라지고 없네.
달과 구들장
김동원
난간 앞에는 꽃나무를 심으리라
그녀가 좋아한 백모란 흑모란을 심으리라
남향으로 난 기와집 앞엔 연못을 둘러 두리라
후원 뒤뜰엔 열 한 살에 간 형이 좋아한 매화 두 그루도
옮겨 놓으리라 겨울 아궁이에 불을 피우면 따뜻한 구들장 밑에
두 모자母子가 발을 넣고, 빙그레 웃으시는 아버지 바라보며
도란도란 옛이야기 들리는 대청을 두리라
툇마루를 밟고 밤마다 꿈속에 올라가 보름달 한 켠에
옛 고향 집을 다시 지어 드리리라
그믐달을 파고, 초승달을 놓고, 상현달을 건너
하현下弦을 지나, 봉황산 붉은 노을로
북창엔 당초 무늬 격자창을 내리라
서안書案엔 내가 지은 시집도 올려두리라
그리고 그리고 겨울이 오면, 수천만개의 흰 눈이 바닷물 속에
녹는 것을, 사랑하는 어미가 보게 하리라
달과 소녀
김상환
초승달은 푸른 말이다
달의 갈기 곧추 세워 소녀는 현을 켠다
물수제비처럼 선율이 하늘가에 퍼진다
말은 검푸른 달
그 달의 말과 빛으로
뭇별이 쏟아지면
홍교 아래 물이 흐른다
초승달
김상환
섣달그믐
새로 산 조선낫이 빛나는 초저녁
명주실 같은 고양이 울음이
서쪽 하늘에 가 닿을 즈음
마침내 드러난 뼈, 희다
동천 완장
김상환
문경 가은 완장리完章里에 가면 창자까지 시원하다는 선유동천 완장浣腸이 있다 물과 돌이 태반인 그곳, 너럭바위 사이로 흘러가는 물이 무심의 게송이라면 돌은 한 권의 서책이다 그 옛날 신령한 뗏목 대신 나뭇잎이 흘러간다 새로 산 신발을 벗어 두고 내 마음도 물길 따라 흘러간다 제 8곡 난생뢰鸞笙瀨에 오게 되면 물줄기는 바윗돌에 새겨진 현이, 악기가 된다 생이란 말 황이라는 소리가 율, 려, 율, 려로 흐르는 봄날 오후
입추와 백로 사이
김상환
거문고 산조 같은 물이
누樓의 터진 틈으로 흐른다
코스모스 피고 자리잠이 나는 언덕
늦매미 울음소리 길가에 잦아든다
돌아가 음건陰乾이라도 할까보다
흐린 날의 섬진
김상환
강 따라 둑길을 걷는다
되새가 떼로 울고
물앵두 속이 저 혼자 익어간다
쌍계는 저만치 있는데
돌아나온 거리, 벚꽃이 보이지 않는다
두껍아두껍아 꼭꼭 숨어라
흐린 날의 섬진
강강수월이 희다
개암에 들다
김상환
백제의 유민 같은 눈이 내리면
토담벽 쪽문을 열고
한 아이가 들어선다
민들레 홀씨처럼
바람에 흩어지는 아이의 웃음소리
호랑가시나무가 발톱을 곧추세운다
처마 끝 풍경이 운다
능가산 해는 지고 대숲에 기대어 선
빛과 소금의 상형문자
위로 달이 뜬다
개암 같은 저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