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수행은 점진적인 단계를 표방한다. 1층 없이 7층을 짓지 못하고, 마라톤 선수가 단 한 발자국으로 마지막 지점에 골인하지 못하듯이, 마음공부를 하는 수행자의 길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즉 한 생각이 바뀐다고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마음이 정화되고 향상돼 지혜의 정점에서 깨달음의 완성에 이른다는 것이다. 붓다는 그런 점진적인 수행 과정을 계정혜 삼학으로 제시했다.
삼학(三學)이라는 말에서 ‘학’은 팔리어로 ‘식카(Sikkhā)’이다. 이 ‘식카’는 경전이나 이론을 배운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마음을 지속적으로 수련하고 훈련한다(Training)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완전한 해탈과 열반, 깨달음이라는 최종의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수행자가 계속 익히며 닦아야 할 단계적 실천수행이 바로 계정혜 삼학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번에 삼학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 계(戒, Sīla)는 나 자신과 타인들에게 혹은 뭇 중생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자발적인 절제력의 훈련이다. 해로운 일들은 삼가고 유익한 일들은 행하는 자기단속과 훈련을 통해서 신구의 삼업을 청정하게 하고 바른 공덕의 삶을 사는 것이 계의 정신이다. ‘청정도론’은 “사람과 동물, 그리고 모든 식물들이 땅을 의지해 살아가듯, 수행자는 계의 땅을 의지해 살아야 한다”고 비유한다. 그러면서 “계의 물만이 중생들의 때를 씻을 수 있고, 중생들의 열병을 잠재우며, 계는 천상에 오르는 사다리요, 열반에 들어가는 문”이라고 했다.
두 번째, 수행자는 번뇌 망상들을 가라앉히고 마음집중을 성취하는 본격적인 명상수행을 해야 한다. 이것을 정(定, Samādhi)이라고 하는데, 정은 마음이 고도로 집중된 삼매나 선정을 의미한다. 이런 삼매나 선정을 얻으려면 어떤 한 대상에 마음을 집중해나가는 사마타 수행을 해야 한다. 수행자는 사마타 수행을 통해 마음이 고요해지고 청정해지며 희열과 행복감이 내재되어 있는 선정을 차례대로 성취한다. 그러니까 사마타 수행은 중간 단계의 중요한 과정이다.
세 번째는 사마타 수행으로 얻어진 삼매와 선정을 기반으로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한다. 위빠사나 수행이란 몸과 느낌, 마음과 법을 관찰하는 사념처 수행으로 지혜(慧, Paññā)를 성취하는 방법이다. 끊임없이 생멸 변화하는 몸과 마음의 현상들을 관찰하여 그 현상들에서 무상·고·무아라는 본성을 통찰하는 것이 위빠사나 지혜이다. 수행자는 위빠사나 지혜가 성숙되어 일어나는 정점에서 열반을 체험한다. 열반 증득을 통해 족쇄 번뇌들이 뿌리 뽑히고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게 되며, 궁극적으로는 사성제와 연기법을 깨닫게 된다고 하는 것이 초기불교에서 제시한 수행의 차제이다.
‘대반열반경(D16)’을 보면 부처님은 계정혜 삼학을 일곱 번에 걸쳐 말씀하신다. 이 경전은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전 몇 개월의 여정을 기록한 경전인데, 여기서 계정혜 삼학을 수차례 반복하여 말씀하셨다는 것은 그만큼 긴요한 가르침이라는 의미이다. 경전은 “이러한 것이 계이다. 이러한 것이 삼매이다. 이러한 것이 통찰지이다. 계를 철저히 닦아서 생긴 삼매는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 삼매를 철저히 닦아서 생긴 통찰지는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 통찰지를 철저히 닦아서
생긴 마음은 바르게 번뇌들로부터 해탈하나니, 그 번뇌들은 바로 이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와 존재에 기인한 번뇌와 무명에 기인한 번뇌이다”라고 했다. 즉 계정혜 삼학이 연기적으로 성숙되는 수행과정을 통해서 수행자는 모든 종류의 번뇌들로부터 완전한 해탈을 얻는다는 것이다.
근대 미얀마의 스승인 레디 사야도는 “첫째, 새들은 알의 형태로 어미 새의 자궁으로부터 나온다. 둘째, 알의 껍질을 깨고 세상으로 나온다. 셋째, 날개가 충분히 자랐을 때 새들은 둥지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가고 싶은 곳으로 자유롭게 날아간다”며 수행자도 이와 비슷하다고 했다. 그렇다. 붓다가 제시한 계정혜 삼학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수행의 단계이자 방법이다.
일중 스님 동국대 강사 satiupekkh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