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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unica korea 산우회 원문보기 글쓴이: 南齋
한중철학회 학술발표회
2013. 11. 15.
성신여대 가파른 입구를 힘겹게 오르는데
“南齋~”
“求道의 길은 멀고 험하도다”
숨이 턱에 찬 慕圓 이원재 박사의 맑은 목소리와 밝은 미소가 뒤 따른다.
학술대회장 입구에서 묘하게 만났다.
가끔은 학술장에서 만나는 기쁨이 있다.
"성신여대 출신이면 무조건 며느리로 삼아도 괜찮다."는 慕圓 선생의 이야기에 절로 웃음이 난다.
운동하는 느낌 아니까~ 하
雲庭 李淑鍾 先生 像 앞에서 敬拜하고
雅號가 같은 南齋 李文周 선생을 처음 만났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사회를 맡은 한중철학회 부회장 이문주입니다.
지금부터 한중철학회와 성신여대 동양사상연구소 주최 ‘周易傳義大全의 이해’ 1 학술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바쁘신 중 많은 내외 귀빈과 학계 여러분이 참석해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오늘은 2년여 동안 연구한 곤괘의 자료를 정리하는 의미의 학술대회가 되겠습니다.
진행 순서는 제1부와 2부, 3부로 나누어 1부에서는 ‘程傳’수리론에 관한한국역학자들의 견해를 성균관대 최정준 교수님이,
두 번째는 구한말 自强思想에 나타난 ‘周易’ 변통론적 世界觀을 몽골 울란바트로대 김현우 교수가 발표를 하시고,
제2부에서는 宋代 ‘河圖·洛書’의 출현과 그 圖象의 轉變을 서강대 유승상 교수가 해 주시고 잠시 휴식 후 종합토론을 갖는 순으로 하겠습니다.
종합토론 뒤에는 간단한 뒷풀이도 있을 예정이오니 모두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한중철학회 윤원현 회장님의 개회사가 있겠습니다.
한중철학회 윤원현 회장
오늘 학술대회에 많은 분들이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한중철학회 학술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제1부 사회: 김병애 (시립대)
안녕하세요 제1부 사회를 보게 된 시립대학교 김병애입니다.
같이 공부를 하다보면 끈끈한 우애가 생기며, 흰 눈이 아름다워 눈 위에 말채찍으로 이름 섯자를 새기며 바람에게 부탁하기를
“바람아 내 친구가 올 때까지 이름을 지워버리지 말아다오”라는 이규보의 서정어린 이야기를 듣다보니 너무 재미있었다.
*시가 도착하면 올릴 계획임
제1부 발표1: ‘程傳’수리론에 관한한국역학자들의 견해
-八則陽生과 관련하여-
최정준 (성균관대)
주역 계사전에 역에는 성인의 도가 넷이 있는데 넷은 모두 역의 도리를 사용한다.
일상에서 말하고 행동하거나 기물을 만들어내고 복서를 함에 숭상할 역의 도리가 바로 사변상저(辭變象占)이다.
이 넷 중에 이천은 『역전서』에서 말(辭)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길흉소장의 이치와 진퇴존망의 도리는 괘효의 말에 구비되어있으니 괘효의 말을 미루어 괘를 살피면
괘효의 변화를 알 수 있고 괘효의 상과 시초점은 그 가운데 들어 있다.
이천의 주장은 辭變象占에서 64괘 384효의 괘효사에 해당하는 사(辭)를 잘 미루어보면 변상점(變象占)은 그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이천은 “내가 전하는 것은 말이니 말을 통해서 의미를 얻음은 각자에게 달려있다”고 하면서 정전의 서문을 맺었다.
결국 말이란 말을 통해 표현하려는 의미이다. 이천은 괘효사에서 들어있는 으미를 알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공부방법이라고 보았다.
이렇듯 이천은 의리역학적 관점에서 주역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의 수리(數理)론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일정정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역』의 괘효는 모두 9와 6으로 구성되어있기에 이 부분에 대한 초소한의 핵심적 설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八則陽生“은 이런 맥락 속에서 튀어나온 것으로 보인다.
정리하자면 이 글에서 규명하고자 했던 ‘八則陽生“의 의미는 ’8에서는 이미 양이 생긴다‘는 의미이다. 즉 ’8이 양을 생하는 것‘도 아니고 ’8은 양이 생한것([양이 8을 생한 것]‘도 아니다. 이천의 뜻은 자신이 하도라고 지칭한 그림에서 볼 때
’8의 위치는 이미 양이 생겨난 지점‘이라는 의미이다.
‘八則陽生“조에 대한 한국의 역학자들 비판을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공통적인 점은 역학자들에게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사상수리(四象數理)에 대한 이천의 거부는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주 이진상의 경우만 이천의 표현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보아 이천이 사상수리를 어느 정도 사용하였다고 보았다.
하도낙서와 관련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삼산 유정원은 하도와는 긴밀한 연관이 없지만 만약 낙서라면 가능성이 있다고 보아
이천이 낙서를 하도로 오인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한주 이진상은 삼산과 같은 주장에 대해 비판하며 하도를 가지고 설명해도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고 보았으며 오히려
낙서의 경우가 문제점을 야기한다고 보았다.
전체적으로 종합해볼 때 남는 숙제는 있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삼산 유정원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제1부 발표1: ‘程傳’수리론에 관한한국역학자들의 견해에 대한 논평
논평: 심의용 (성신대)
긴 논평 중에서 일부만 발췌해 보자
정이천에게서 순음이 아닌 것은 소음이 될 수 있고 소양이될 수도 있지 않을까?
순음이 아닌 것은 모두 순(純)수하게 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음양이 서로 섞인 잡(雜)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이천이 은연중에 사상의 수리론을 사용하고 있다는 주장이 필연적으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만약 없다면 수리론이 없는데 수리론을 가지고 비판한다면 그 비판은 정당한 것일까?
이것은 마치 과학을 논하지 않은 사람의 말에 대해서 과학의 개념을 들어대며 너의 생각은 틀렸고,
넌 왜 과학적인 개념과 이론을 가지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욱박지르는 꼴이 아닌가?
차라리 정이천은 이러한 수리론을 몰랐거나 알고서도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체계를 가지고
『주역』을 해석했다고 보고서 八則陽生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단적으로 말해서 정이천을 비판하는 수리론은 소강절과 주희에 의해서 성립된 수리론일 수밖에 없다.
예를들어 정이천은 64괘가 형성되는 과정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건괘와 곤괘가 변화하여 여섯 자식이 되었고 8괘가 중첩되어 64괘가 되었으니,
이는 모두 건과 곤의 변화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乾坤變而爲六子, 八卦重而爲六十四, 皆由乾坤之變也)
이하 정리 중
제1부 발표2: 구한말 自强思想에 나타난 ‘周易’ 변통론적 世界 인식
김현우 교수 (울란바트로대)
김현우 교수는 1. 서론 2. 변통론의 본의와 시대적 발현 3. 구한말 개혁적 유교사상의 분기와 변통적
사고의 발현으로 구분하여 발표하고 결론은 다음과 같이 맺는다.
變通은 『주역』에 나타난 한 사상으로 자연의 필연적 변화와 그에 따른 순응을 의미한다.
조선시대에는 이 변통이 주로 사회개혁이 필요한 사상적 근원으로 이해되었다.
이때부터 변통은 계절과 같이 순환적 사고에서 탈피하여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새로운 시대의 부응과
그 시대에 부합하는 제도의 개선으로 해석되었다.
때문에 김육, 유형원, 이익, 정약용, 박지원 등 조선 후기 사회 변화를 인식하고 새로운 제도의 시행을
추진한 이들은 모두 변통이란 철학적 근거를 통해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해 왔다.
구한말에 이르러 개혁적 지식인들은 서구 근대성을 적극적으로 인식하여 당시를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시대로 규정하고 있었다.
때문에 새로운 시대에 맞는 通이 요구되었는데, 그들 중 개혁적 유교지식인들은 차례로 실학복원, 한국
유교의 정체성 확인, 유교구신 등의 방법을 통해 이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실학 복원파는 정약용을 중심으로 실학을 복원함으로써 그 속에서 정치와 제도 개선의 당위성을 찾고자 하였다.
이후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인해 적극적인 통치가 불가능해지자 이들은 한국 유학의 정체성을 설정하고 자강정신을 세워 사회 개혁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이들 개혁적 유교 지식인들과 과거 봉건적 유교체제를 완전히 벗어던지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실학자들의 핵심사상인 民本에 대해서는 도외시하였다.
이는 리저허우(李澤厚)가 근대 중국의 방향이 ‘민권보다는 구국에 중점을 두었다.’고 평가한 것과 같았다.
그러나 이런 개혁적 방향은 한 번 더 나아가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대동교 ‘유교구신론’ 같은 운동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박은식의 유교구신 등은 중등이하의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주체적 자기인식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민본의 전통을 이은 것이자 새로운 시대에 대한 개인의 주체적 판단을 강조한 것으로 오늘날 국민관과 연결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비록 그들의 노력이 일제강점이라는 현실에 처해 왜곡되었고 해방초기에는 유교가 당시 한국의 전근대적 현실에 원인이라는 지적이 강했다.
이는 이들에 대한 연구가 편향되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였다.
이런 현실에 본 연구가 근대 유교 지식인들의 사상을 보다 심구하여 객관적 평가에 이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논평: 임옥균 (성균관대)
제1부 발표2: 구한말 自强思想에 나타난 ‘周易’ 변통론적 世界 인식을 읽고
1. 우선 평자는 자신의 주 연구 분야가 아니라서 한말의 유학자들에 대하여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으므로 논평자로서는 적적하지 않다는 고백을 하고 이 논평문을 시작한다.
따라서 논평 자체가 매우 일면적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2. 필자는 구한말의 개혁적 유교지식인들이 세계를 인식하는데 『주역』의 변통론을 그 주요한
인식틀로 삼았다는 논지 아래, 유교지식인들의 세 파를 1) 실학 복원파, 2) 한국 유교의 정체성 확립파,
3) 유교구신파로 나누고 그 대표적인 학자들의 주장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설득력 있게 논증하였다.
읽어면서 한말 유교지식인들의 생각을 대략이나마 알게된 것을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예컨대 주 24)에 나오는 박은식의 야마자키 안사이에 대한 언급을 보면서, 당시의 유학자들이 생각
이상으로 국제적인 학문적 안목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3. 이하에서는 읽으면서 의문을 가진 몇 가지 사항을 제시하고 필자의 답변을 들음으로써 평자의 의무를 다하고자 한다.
4.『주역전의대전』에서 변통이라는 용어가 나오는 빈도를 조사하여 그 중요성을 드러낸다던가,
유교지식인들이 자주 쓰는 글자인 ‘久’, ‘弊’, ‘新’ 등의 사용 빈도를 同書에서 조사하여 그들의
“사고가 『주역』과 연결되고 있다는 것을 증면”한 것은 평자에게는 신선하고 흥미로운 연구 방법이었다.
그런데 평자가 갖는 의문은 ‘變通’, ‘久’, ‘弊’, ‘新’ 등의 용어를 많이 썻다고 해서 그것이 꼭 『주역』과 연결되느냐 하는 것이다.
현실의 타파와 변혁을 추구했던 학자들이라면 꼭 『주역』에서 사용하지 않더라도 많이 쓸 수 밖에
없는 용어가 아니었는가 하는 것이다.
필자가 제시한 여러 인용문 중에서 변통을 언급하면서 『주역』의 변통론을 직접 언급한 것은 주 23)
한 곳 뿐이고, 거기에서도 『상서』『맹자』『중용』과 함께 언급하고 있어서 『주역』을 특별히
중시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5. 본문 2쪽에 “일본의 존황파들은 막부시대 주자학에서 벗어나 양명학을 수용하였고, 이들에 의해
메이지유신이 성공하면서 일본은 삼국 중 가장 먼저 근대산업국가로 변신하였다.”
이 내용은 양명학을 수용한 존황파들이 메이지유신이 성공시켰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존황파들 가운데 물론 양명학을 수용한 사람도 있지만, 그 학문적 배경은 매우 다양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에 대한 보충 설명 부탁드린다.
6. 필자는 김육과 정약용의 개혁정치론에 대해 몇 가지 비판적 평가를 하였다.
첫째는 “백성과 소민을 국정의 주체로까지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
둘째는 “사회 개혁에 있어 유교적 사고에서 탈피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필자도 인정하고 있듯이 이러한 한계는 그 두 사람만이 갖는 한계가 아니라 그 시대의
유교지식인이라면 누구라도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라고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시대적 한계’일 것이므로
개인적 한계로 셀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평자의 생각이다.
7. 번역의 문제로 몇가지 잘못된 번역을 지적하였다.
제2부 사회: 김백희 (한중연)
제2부 발표3: 宋代『河圖·洛書』의 출현과 그 圖象의 轉變
유승상 (서강대)
송대에 『河圖·洛書』의 출현은 思想史上 일대 혁명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易圖學”이라는 새로운 학문분야와 “象數學”이라는 새로운 학풍을 흥기시키며 그 영향이 오늘날까지도 심각하게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연원 방면에서는 후인들이 권위를 신장시키려고 假託하는 경우가 심하여 그 본연의 가치에 오점을 남기고 있다.
朱震이 그 대표적인 경우로 三種易圖의 陳博由來說을 주장하여 그 영향 역시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특기할만한 것은 고대의 문헌에서 『河圖·洛書』에 대한 언급이 있는 곳과 사상적 원류를 볼 수 있는 곳에서 전혀 상관성을 찾을 수 없는 점이다.
이 점이 바로 그 진위시비를 더욱 가중시키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易數隱圖』의 問世는 바로 “易圖學”과 “象數學”을 흥기시키는 초석이 되었으나, 그 연원과 작자 문제는 지금까지 논쟁의 대상이며, 특히 “河九洛十”도상은 『易學啓蒙』의 “河十洛九”도상이 출현 후 河洛之爭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河十洛九”도상은 그 후 理學全盛時代가 도래하면서 『河圖·洛書』의 正宗으로 공인되었다.
따라서 송대의 理學은 空前의 역사적 영향을 끼쳤으나 그 가운데는 이러한 신 학풍의 易學이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역학발전사상 송대의 특징은 “易學의 哲理化”라고 할 수 있다.
그 圖象學의 발전도 도상으로 易理를 발휘하고자 한 것으로, 八卦와 六十四卦의 방위배열에서 天地之數, 大衍之數, 河洛之數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역리로 천술하는 것이었다.
특히 宋易은 단서는 멀리 거슬러 가지만 『河圖·洛書』로 파생되는 圖書學은 宋人들의 창조라고 해도 과인이 아니다.
이러한 宋易의 영향하에 후대의 역학은 급속히 팽창하였으며, 현재는 科學易이라 하여 최첨단 과학과 역학을 결합시키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제2부 발표3: 宋代『河圖·洛書』의 출현과 그 圖象의 轉變에 대한 논평
논평: 원용준 (성신여대)
본 논문은 『河圖·洛書』의 출현 상황을 고찰함으로써 그 사상적 원류를 밝히고, 송대에 河圖·洛書의
이론이 새롭게 전개되어 신학풍의 역학을 탄생시키고 발전시켰다는 것을 논증한 것이다.
역학 연구에서 쉽게 다루지 않는 전문적인 주제를 역시 전문적인 시각으로 논했다는 점에서 본 논문은
높은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된다. 사실 평자는 이 분야의 문외한으로 적절한 논평을 행하기에는
역부족이지만 논문을 읽으면서 생겼던 몇 가지 의문에 대하여 질의하는 형식으로 논평을 진행하고자 한다.
첫째, 본 논문의 서론은 소략하기 짝이 없어서 논문의 문제의식, 목적, 의의 등에 대하여 알 수가 없다.
서론은 “송대에 처음 출현한 『河圖·洛書』도상에 관한 그 淵源과 眞僞에 대하여 후세의 변설은 분분
하다”라는 문장으로 끝나고 있는데, 후대의 분분한 변설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논문의 목적인지?
둘째, 서론에서 논문의 문제의식과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본론의 논지 역시 명확하지 않게 느껴진다.
평자가 읽어본 바로는 논문의 본론은
(1) ‘하도낙서’의 연원에 대한 주진 등의 주장의 오류 지적,
(2) ‘하도낙서’의 사상적 원류를 선진에서 한대에 이르는 시기에 한정하여 고찰
(3) 송대의 하락구십지쟁에 대한 고찰로 구성되어 있다.
(1)은 기존 연구에서 이미 지적된 바가 아닌지? (2)~(3)은 평자가 읽기에는 단절된 내용처럼 보이는데,
하도낙서의 사상적 원류와 송대의 하락구십지쟁이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 궁금하다.
셋째, “一.『河圖·洛書』의 淵源辨”에서는 갑자기 “[참조]『先天圖』의 전수계통”이 등장하는데 여기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하도낙서’의 전수계통과 비교하기 위해 배치한 것이라면 구체적인 비교와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또 그 비교를 통해 어떤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는지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넷째, “二. 『河圖·洛書』의 사상적 源流”의 내용 역시 한 대의 기록을 소개한 후 그 기록에서 원류를
찾아볼 수 있다고 할 뿐으로 그 기록에 대한 분석과 설명이 부족하게 느껴진다. 즉, 어떤 사항이
이 책에는 이렇게 나오고, 저 책에는 저렇게 나온다고 하고 있을 뿐, 그렇게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렇게 나오는 사상적 의미는 무엇이지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다. 예를 들어『예기』[월령]에 ‘하락’을
언급하지도 않으면서 ‘하도’의 포국과 일치하는 내용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월령]은 하도의 사상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하였는데, 도대체 어떤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지? [월령]과
양웅, 정현의 이론은 아무 관련이 없는지? 관련이 있다면 어떻게 연결되는지? 등에 대해서는 설명이 있으면 좋겠다.
다섯째, “三. 『河圖·洛書』圖象의 轉變”에서 “바로 이 自然之理를 체현하는 과정에서 朱門은
”河九洛十“을 비판하고 ”河十洛九“를 주장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라고 하는데 自然之理를 체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河十洛九“여야 하는지?
여섯째, 결어에서 “송대에 『河圖·洛書』의 출현은 思想史上 일대 혁명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易圖學”이라는 새로운 학문분야와 “象數學”이라는 새로운 학풍을 흥기시키며 그 영향이 오늘날까지도
심각하게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는데 ‘易圖學’이야 논외로 치더라도 ‘象數學’은 ‘하도낙서’와
무관계한 것이 아닌지? 더구나 ‘象數學’은 한 대에 출현하여 성행하였다는 것이 정설인데 송대의
새로운 학풍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이상으로 논문을 읽으면서 평자가 가지게 된 의문들을 서술해 보았다.
의문들 중 대부분은 평자의 공부 부족 탓이겠지만 이 자리를 빌어 설명을 부탁드린다.
제3부 [종합 토론]
사회: 이철승 (조선대)
지정토론자: 조희영(한중철학회), 임헌규(강남대), 추기연(성신여대), 김동민(성균관대),
이선경(원광대), 장승구(세명대), 이용운(성균관대), 김규선(선문대), 김재경(성균관대)
종합토론에서 재미있는 토론이 전개될 것으로 예상되나 다른 약속이 있어 더 듣지 못함이 몹씨 아쉽다.
한중철학회가 더욱 발전하기를 기원합니다
첫댓글 사진과 더불어 깔끔한 정리에 감사 드립니다.
스크랩을 막아 놓지 않았으니, 퍼온 것이 죄가 되지는 않겠지요.
남재상 사진 작가님께 감사드려야 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