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1. 24. 주일예배 설교(요한복음강해 36)
요한복음 9장 13~41절
억지 춘향
■ 우리의 고전 ‘춘향가’에 변 사또가 나옵니다. 변 사또는 춘향이 마음에 들어 자기 여자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춘향에게는 다른 남자가 마음속에 들어와 있기에 변 사또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변 사또는 자기 말을 안 듣는 춘향을 억지로 수청 들게 하려고 핍박을 합니다만, 결국 어사의 출두로 변 사또는 형벌을 받게 됩니다. 이때 나온 말 하나가 ‘억지 춘향’입니다. 그 뒤로 ‘억지로 어떤 일을 이루게 하거나, 어떤 일이 억지로 겨우 이루어지는 경우’를 비유할 때 이 말이 사용되곤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억지 춘향’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억지가 본문 곳곳에서 눈에 띱니다.
■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이 눈을 떴으니 장안의 화제가 된 것은 당연했습니다. 당시의 교리에 의하면,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죄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난치가 아니라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아무리 수고해도 눈을 뜰 수 없는 병이었습니다. 그런데 눈을 떴습니다. 그러니 장안의 화제가 된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축하 받지를 못했습니다. 오히려 트집거리가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교리 위반이기 때문에 그랬을까요? 교리에 의하면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죄로 인한 것이라고 했는데 눈을 떴으니 교리 위반이 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트집 잡힌 것이 아닐까요? 충분히 합리적인 의심이지만 이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었을까요? 13~14절을 보면, 답이 나옵니다.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사람들은 앞을 보지 못하다 예수님을 만나 앞을 보게 된 사람을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왜 데리고 간 것일까요? 트집거리를 만들려고 간 것입니다. 14절을 보셨죠? 안식일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사두개인들도 있고, 에세네파 사람들도 있는데, 굳이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이 사람을 데리고 간 이유는 안식일로 트집을 잡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강경한 율법주의자들로 특히 안식일 문제는 절대 양보하지 않는 사람들이었거든요. 그들에게 안식일은 그 어떤 노동도 허락되지 않는 신성한 날로 해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길길이 날뛸 수 있는 제대로 된 건수를 만들 필요가 있었기에 바리새인들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기대와는 다른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15~17절을 보시죠.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잘 보시죠. 건수로 잡으려던 안식일 이야기는 쑥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대신 예수님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논쟁으로 넘어간 것입니다. ‘이 사람은 누구냐?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이 질문에 우선 두 가지 답이 나왔습니다. 하나는 ‘이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다!’는 반응이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이 사람은 최소한 죄인은 아니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반응이죠?
이 대립되는 반응들이 팽팽했는지 그들이 데리고 온 앞을 보게 된 사람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러자 그는 ‘그는 선지자입니다!’ 이 말이 굉장히 충격이었나 봅니다. 자기들끼리 ‘예수는 죄인이다, 아니다’를 두고 논쟁을 하기는 했지만, 선지자로 생각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아예 못 박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18~23절의 상황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소서 하였더라.”
앞을 보게 된 사람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생각한다는 대답이 맘에 들지 않은 것입니다. 트집 잡자고 시작한 일인데 이런 분위기로 가면 일을 망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들은 이 사람의 부모를 찾아간 것입니다. 찾아가서는 대뜸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당신 아들이 맞소? 맞다면 당신 아들이 어떻게 눈을 뜬 것이요?’ 이 질문에 부모가 뭐라고 대답하였습니까? ‘우리 아들 맞소. 그런데 눈을 어떻게 떴는지, 누가 도와 줬는지 우리는 모르오. 그가 다 큰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보시오.’
앞을 보게 된 사람의 부모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한 데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떠졌는지, 누가 도와줬는지 직접 보지는 못했어도 이 고마운 일에 대해 아들을 통해 누구보다도 자세히 알고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와 ‘누가’를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유는 22절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사실 법과 제도로 공포감이 만들어진 상태에서 소신을 밝히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불이익 또는 불편함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이 제법 민주화가 됐다고 해도 반민주적, 반통일적 법과 제도가 곳곳에 숨겨져 있는 상태에서 소신을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줄 모릅니다. 특히 반공법이라고 일컫지만 사실은 일제강점기 때 만든 조선치안법을 모델로 삼은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공포감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또한 기업우선주의에 입각한 노동법이 노동자 착취 및 탄압법이 되어 공포감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공포감이 소신을 어렵게 합니다.
그래서 앞을 보게 된 아들을 두고 마냥 기뻐하지 못한 채 공포감으로 대답해야 했던 부모가 십분 이해됩니다. 그런데 부모와는 달리 아들은 매우 용감했습니다. 24~34절에서 보여주는 아들과 바리새인들의 대화를 주목해 보십시오.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어떻습니까? 이 둘의 대화가 잘 이해되셨습니까? 아들을 추궁하는 자들의 억지와 추궁 받는 자의 당당함이 보이십니까? 앞을 보게 된 사람을 추궁하는 목적은 단 하나였습니다. 예수님을 책(責)잡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추궁당하는 이 사람은 멋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내가 지금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보니 당신들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은가 봅니다. 창세 이후 최초로 눈을 뜬 내가 보니 이 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분입니다!’
앞을 보게 된 사람의 당당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진실을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을 붙잡기는 했지만 눈치를 보지 않고 진실을 붙잡기로 했기 때문에 당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진실을 경험했다고 모두가 당당하지는 않습니다. 비굴함, 비겁함, 심지어는 배신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진실만을 붙잡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진실을 향한 올곧음이 진리를 만나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진실을 붙잡은 것 때문에 부당하고도 불편한 일을 겪어야 했지만 결국 진실은 진리를 만나게 했습니다. 진리를 붙잡은 것 때문에 사람들에게 쫓겨났을 때,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오셨습니다. 35~39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여러분은 이 내용에서 무엇을 보셨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다시 35절로 안내하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예수님은 왜 이러셨을까요? 왜 이 사람을 만나셨을까요? 이 사람이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장 만나러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신앙고백을 받으시고 그를 제자로 받아주신 것입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진리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삶의 태도가 무엇일까요? 진실입니다. 진실은 옳음을 향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실은 불의/부정의에 대해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의의 삶을 꿋꿋하게 살아내는 것입니다.
사실 진실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억지 춘향인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진실의 삶, 지리를 향한 삶을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억지 춘향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40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진실이 싫고, 진리가 거북한 이들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해꾼의 노릇을 합니다. 안타깝게도 억지 춘향이 교회 안에도 많은 것 같습니다. 오, 주님!
우리는 41절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옳지 않은 세상 것에는 눈을 뜨고 있고, 하나님 나라에는 눈을 감고 있다면, 이는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진실과 진리에 눈을 반짝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의 삶이 신앙적이길 바랍니다. 진실을 추구하고, 진리를 만나는 삶이길 바랍니다. 불의에 저항하고, 정의에 앞장서는 삶이길 바랍니다. 그래서 매일 매순간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