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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장마의 마지막 비가 유리창을 얇게 긁어내리던 저녁, 찬호는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신발을 벗다 말고 그는 거실에 놓인 웨딩 잡지 더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형광 포스트잇들이 연노랑 깃발처럼 꽂혀 있었다. 은지가 붙여둔 것들—식장 비교표, 예복 견적, 신혼여행 루트. 어느 페이지의 접힌 귀퉁이는 마음 한구석을 찌르는 바늘 같았다.
“오늘 회의만 세 개였어.”
찬호가 넥타이를 느슨히 풀며 말했다.
“고생했어. 근데 주말에 웨딩페어 한번만 같이 가주면 안 될까?”
은지는 조심스레 물었다. 목소리 끝이 살짝 들떠 있었다.
“부모님도 이번엔 진지하게 얘기해보자고…”
그 말끝에, 찬호의 가슴속에서 금속성 마찰이 일었다. ‘결혼’은 그에게 어느새 달콤한 단어가 아니라, 갈고리였다. 회사에서 겨우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사라지지 않는 불안이 있었다. 팀장이 얼굴만 찡그려도 ‘내가 뭘 잘못했나’ 벽에 머리를 기대던 밤들이 떠올랐다. 그 위에 집, 예물, 신혼집 대출이라는 단어가 겹쳐졌다.
“조금만… 천천히 가면 안 될까?”
“찬호야. 내가 빨리 결혼하자고 재촉하는 게 아니야. 그냥, 우리도 우리 미래를—”
“미래 얘긴 나도 하고 싶지. 근데 그 미래가 전부 돈 얘기 같아서… 숨이 막혀.”
공기는 금세 딱딱해졌다. 은지가 잡지 위에 올려둔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그의 말에 상처를 받은 건지, 그저 지친 건지, 눈동자가 흐려졌다. 한동안 말이 오가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이 컵에 담긴 미지근한 물처럼 방 한가운데 놓였다.
“우리… 상담 같은 거 받아볼래?”
은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회사 동기가 추천해준 곳이 있어. 타로카페 ‘해꿈’.
연애 상담도 하고, 그냥 마음 정리도 도와준대.”
“타로?”
찬호는 웃음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그걸 믿어?”
“믿음까지는 아니어도,
누가 우리 얘기를 한 번 차분히 들어주면 좋겠어.
우리 둘 다 말이 많았잖아.
아니, 생각이 많았잖아.”
그 말은 이상하게도 찬호의 마음에 닿았다. ‘생각이 많다’는 건, 요즘 그의 가장 정확한 상태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보자.”
Ⅱ
타로카페 ‘해꿈’은 오래된 벽돌 골목 끝, 작은 주유소를 지나 좁은 계단을 한 층 올라서야 나오는 곳이었다. 초를 켠 듯한 따뜻한 조도가 실내를 감싸고, 벽면에는 기하학적인 별 문양과 오래된 지도가 걸려 있었다. 커다란 나무 테이블 위에는 카드들이 천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그 옆에 고양이 한 마리—마치 이곳의 오래된 손님처럼—둥글게 몸을 말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타로 리더 유진이 미소 지었다. 차분한 눈빛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해꿈은 마음이 쉬어 가는 곳이에요.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요?”
은지가 먼저 말했다.
“우리는…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같은 곳을 보고 걷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손짓과 숨의 속도를 바라보는 듯했다.
“좋아요. 카드로 지금 이 둘 사이에 흐르는 것을 살펴볼게요.
카드가 답을 ‘결정’해주진 않아요.
다만, 길을 비춰주는 등불일 뿐.”
유진은 카드를 천천히 섞어 테이블 위에 펼쳤다. 첫 카드—‘연인(The Lovers)’. 둘째—‘교황(The Hierophant)’. 셋째—‘펜타클 10(Ten of Pentacles)’. 이어서 교차 카드로 ‘전차(The Chariot)’와 ‘별(Star)’이 나왔다. 마지막에 조언 카드로 ‘운명의 바퀴(Wheel of Fortune)’. 카드들 사이에 미세한 바람이 도는 것 같았다.
“연인은 ‘선택’의 카드이자,
서로의 언어를 배우는 과정이에요.”
유진이 말했다.
“교황은 제도와 전통, 그리고 약속의 형식.
펜타클 10은 가문, 재산, 안정. 전차는 방향을 잃지 않는 의지,
스타는 서로를 다시 믿는 희망.
그리고 운명의 바퀴는… 바람이 바뀔 때입니다.
바람이 바뀔 때, 노를 함께 저어야 해요.”
찬호는 말을 아꼈다. 카드는 그저 카드라고 생각했지만, 유진의 어휘 하나하나가 묘하게 그의 맥박과 박자를 맞췄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손가락을 포개었다.
“두 분에게 하나의 작은 의식을 권하고 싶어요.”
유진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서로의 기준을 말하고, 양보하고, 합의하는 연습.
그걸 작은 행운의 놀이로 묶어볼게요.
바로 이번 주 ‘로또 1185회’에요.”
“로또요?”
찬호가 눈을 들었다.
“숫자는 상징이에요.
각자 삶의 토막들을 담아두는 그릇이죠.
두 분이 각각 세 개씩 후보를 가져오고,
그 이유를 말해주세요.
그리고 마지막 한 개는 ‘함께’ 고르세요.
합의의 숫자. 그 여섯 개로 티켓 하나를 사세요.
중요한 건 당첨이 아니라—같은 번호를 고르는 경험이에요.
마음이 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는 증거를 하나 만드는 것.”
은지가 웃었다.
“재미있겠다.”
“좋아요.
단, 합의가 끝나면 그 번호는 ‘우리의 숫자’가 돼요.
누가 더 많이 양보했는지 따지지 않기.
그리고 중요한 약속 하나.”
유진이 손가락을 세었다.
“당첨되더라도, 돈으로 말하지 말고
마음으로 먼저 말하기.
그것만 지킨다면,
바람이 아주 좋은 쪽으로 불 거예요.”
고양이가 그 순간 작게 야옹 하고 울었다. 마치 계약서에 도장을 찍듯.
유니버셜 웨이트 타로카드 참조
https://blog.naver.com/hd-books/223460795599
Ⅲ
다음 날 밤, 두 사람은 테이블에 앉았다. 앞에는 빈 종이와 펜, 그리고 차가 식지 않도록 두 손으로 감싼 머그컵이 놓여 있었다.
“세 개씩, 그 이유와 함께.”
은지가 말했다.
“먼저 너부터.”
“좋아.”
찬호가 적기 시작했다.
“7—내 생일의 행운 숫자라고 믿고 싶어서.
12—우리가 처음 만난 달.
33—회사에서 내 사번 뒤 두 자리.”
“현실적인 사람이네.”
은지가 웃었다.
“나는 2—우리 둘.
18—우리 부모님 결혼기념일.
41—우리가 처음 같이 떠난 여행 버스의 번호가 401이었는데, 0을 빼면 41.”
“그건 좀 억지 같은데.”
“억지라도 내 마음에는 의미가 있어.
넌 사번도 넣었잖아.”
둘은 서로의 숫자들 옆에 이유를 적었다. 그 과정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이유를 설명하는 일이란 결국 마음의 방을 보여주는 일이라서, 각자의 방에 걸린 액자들—부끄러운 것과 자랑스러운 것들—을 한 번씩 손으로 쓸어야 했다.
“마지막 하나.”
은지가 말했다.
“우리의 숫자.”
찬호는 잠시 생각하다가 타로카페에서 보았던 카드를 떠올렸다. 희망의 별. 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별 하면 몇이지?”
“17.”
은지가 바로 대답했다.
“메이저 아르카나의 ‘스타’.”
“그럼 17로 하자.”
“좋아.”
은지가 펜 끝을 들어 올렸다.
"잠깐, 그럼 일곱 개가 됐네."
"하나를 내려놓자."
찬호가 말했다.
"어떤 걸 뺄까?"
은지는 종이 위 숫자들을 훑다가 18 위에 손가락을 멈췄다.
"이건 부모님 결혼기념일이야.
내게 소중하지만, 우리의 시작은 우리 이야기로 남기고 싶어."
잠깐 머뭇거리던 찬호가 덧붙였다.
"어제 유진이 말했잖아. 타로에서 18은 달(Moon), 흔들림과 두려움,
17은 별(Star), 길을 잃지 않게 비춰주는 희망이라고."
은지는 빙긋 웃으며 18에 얇게 선을 그었다.
"그럼 달 대신 별을 택하자. 부모님의 사랑은 내 마음에 두고, 우리의 티켓에는 우리 별을 올려두자."
두 사람은 숫자들을 한 줄로 적었다.
2, 7, 12, 17, 33, 41.
어느새 종이 가장자리에 은지가 그려둔 작은 별이 몇 개나 더해져 있었다. 그 별들은 종이 위에서 조용히 반짝였다.
로또 구입은 토요일 오후, 동네 문구점 옆 작은 판매점에서 했다. 플라스틱 케이스 안쪽에는 지난 회차 당첨 번호들이 마치 족보처럼 나열되어 있었고, 주인은 검은 볼펜을 귓바퀴에 꽂고 있었다.
“자동이요, 수동이요?”
“수동이요.”
은지가 종이를 내밀었다. 주인은 읽는 둥 마는 둥 숫자를 키패드에 입력했다. 기계가 윙 소리를 내며 종이를 토해냈다. 티켓의 얇은 종이는 믿기 어렵게 가벼웠다. 그러나 그들이 함께 고른 번호들이 그 위에 박혀 있는 걸 보니, 종이가 갑자기 묵직해진 듯했다.
“이제, 기다리는 거지.”
찬호가 말했다.
“응. 근데 결과와 상관없이 오늘 기분이 좋아.”
은지는 티켓을 지갑 속, 폴라로이드 사진 뒤에 끼웠다. 두 사람이 비 오는 날 편의점 앞 파라솔 아래에서 찍었던 사진이었다. 사진 속 둘은 젖은 머리카락을 흔들며 웃고 있었다. 그때는 웨딩 잡지도, 대출 얘기도, 팀장의 인상도 없었다. 오로지 비 냄새와 튀김 냄새, 그리고 웃음만 있었다.
그날 밤, 은지는 먼저 잠들었다. 찬호는 불을 끄고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같은 번호를 고른다’는 건 생각보다 커다란 일이었다. 그는 은근히 안도했다. 어쩌면 자신이 느끼던 무게는 결혼 자체가 아니라 ‘혼자 떠맡아야 한다’는 감각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숫자 여섯 개가 그 사실을 보여줬다. 짐의 무게를 나누는 가장 단순한 방식—같은 것에 같은 마음을 얹는 것.
Ⅳ
토요일 저녁, 발표 시간이 다가왔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배달이 아닌 음식으로 식탁을 차렸다. 순두부찌개가 보글거리고, 김이 봉긋 솟았다. 티켓은 식탁 한가운데 작은 접시에 얌전히 올려두었다. 마치 제물처럼. TV에서는 진행자의 쾌활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 1185회 로또 당첨 번호를 발표하겠습니다!”
첫 번째 공이 뽑혀 나왔다. 화면 아래에 숫자가 뜨는 순간, 은지가 먼저 입을 막았다. “2… 우리 숫자!”
둘째 공—7. 셋째—12. 찬호의 머리가 잠깐 하얘졌다. 그들의 숫자가 순서대로 화면 아래에 줄을 맞추고 있었다. 네 번째—33. 다섯 번째—17. 찬호는 손가락 끝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여섯 번째 공이 천천히 굴러 나왔다. 화면이 클로즈업되고, 진행자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마지막 숫자는… 41!”
시간이 멈춘 듯했다. TV의 밝은 조명과 식탁 위 흰 김 사이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다. 은지가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울음을. 웃음과 울음이 뒤섞인 소리가 순두부찌개의 보글거림과 이상하게도 잘 어울렸다. 찬호는 허공을 더듬다가 은지를 끌어안았다. 티켓이 접시 위에서 살짝 흔들렸다.
“우리… 1등이야?”
은지가 물었다.
“응.”
한 단어가 이렇게 많은 것들을 불러올 줄 몰랐다. 그 한 마디는 부엌의 전등까지도 조금 더 밝게 켜는 듯했다. 그들의 숨이 서로의 어깨에서 엉키고 풀렸다. 뇌 속 어딘가가 콕콕 찌르는 듯한 비현실감, 발바닥에서 올라오는 묵직한 현실감. 두 감각이 같은 엘리베이터에 타서, 서로 양보도 없이 같은 층으로 내려오는 느낌.
잠시 후, 두 사람은 다시 테이블에 앉았다. TV에서는 축하 음악이 흘러나오고, 화면 아래로 지역별 판매점 정보가 지나갔다. 그 새, 국물이 식어갔다. 그들은 눈을 깜박이며,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한 숟갈씩 떠먹었다. 놀라움은 여전히 식탁 위를 서성였지만, 그 속에서도 배는 고팠다. 사람은 언제나 먹는다. 아주 기쁜 날에도.
“유진한테… 알려야 하지 않을까?”
은지가 말했다.
“내일 아침에 가자.”
“좋아.”
그날 밤,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잠들었다가 깼다를 반복했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것들이 스쳐 지나갔다. 창밖에서 비가 잠깐 다시 내렸다가, 또 그쳤다. 새벽녘에 깨어난 순간, 찬호는 알았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꿈은 늘 어딘가가 흐렸다. 지금은 모든 선이 정확했다. 숫자 여섯 개가 만든 선들이.
Ⅴ
해꿈은 일요일 오전에도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고양이가 먼저 올라와 의자 등받이에 앞발을 올렸다. 유진은 그들을 보자마자 미소 지었다.
“표정으로 알겠네요.”
“우리가… 됐어요.”
은지가 티켓을 꺼내 보였다.
“1185회 1등.”
유진은 손뼉을 한 번 가볍게 쳤다. 그리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해요. 이제 진짜 의식이 시작이에요.”
“시작이요?”
“맞아요. 제가 어제 뭐라고 했죠?
돈으로 말하지 말고, 마음으로 먼저 말하기.”
유진은 커다란 노트를 꺼냈다. 표지에는 ‘해꿈의 서약’이라고 적혀 있었다.
“여기, 두 분의 서약을 적어주세요.
이 돈이 ‘우리 사이’를 대신하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
돈 앞에서 서로를 먼저 보겠다는 약속.”
찬호와 은지는 펜을 잡았다. 둘은 천천히, 정말로 천천히 썼다. ‘우리는 서로에게, 돈이 아닌 말을 먼저 건넨다. 누구의 공이 더 큰지 따지지 않는다. 우리가 고른 여섯 개의 숫자를, 우리가 고른 여섯 개의 약속으로 바꾼다.’
유진은 차를 내왔다. 따뜻한 자스민 향이 방 안을 채웠다. 카드는 아직 테이블 한편에 있었고, 그 위로 아침 빛이 얇게 내려앉았다.
“이제, 구체적인 얘기를 조금만 해볼까요?”
유진이 말했다.
“부모님, 친구들, 회사.
누구에게 언제 어떻게 이야기할지.
무엇을 먼저 할지. 그리고 무엇을 절대 하지 않을지.”
그날 오전, 두 사람은 작은 계획표를 만들었다. 부모님께는 시간차를 두고, 같은 말로, 같은 방식으로. 서로의 통장을 들여다보며, 먼저 갚을 것과 미룰 것을 정리했다. 신혼집은 덩치 큰 집이 아니라 햇빛이 잘 드는 집으로. 신혼여행은 화려한 섬이 아니라 오래 걷기 좋은 도시로. 결혼식은 ‘행사’가 아니라 ‘초대’로. 그리고—중요한 한 줄. ‘감사’. 돈은 늘 누군가의 어떤 노고의 집합이니까, 그 무게를 가볍게 여기지 않겠다는 합의.
문을 나서기 전, 유진이 말했다.
“그리고 한 번 더, 작은 의식. 이건 제 선물이에요.”
그녀는 카드 한 장을 뒤집었다.
‘세계(The World)’.
“끝이자, 다시 시작.”
유진이 웃었다.
“축하해요. 당신들의 세계가 한 겹 넓어졌어요.”
가게를 나왔을 때, 비는 완전히 그쳐 있었다. 공기가 이상하리만큼 맑았다. 두 사람은 골목을 천천히 걸었다. 길모퉁이를 돌아설 때, 은지가 찬호의 손을 잡았다. 말없이. 손끝에서 서로의 체온이 넘어왔다. 아주 평범하고, 아주 대단한 감각.
“찬호야.”
“응.”
“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찬호는 걸음을 멈추고 은지를 바라봤다. 이제 그 말은 갈고리가 아니었다. 같은 번호로 같은 종이에 적힌 여섯 개의 숫자처럼, 같은 방향으로 놓인 하나의 문장일 뿐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날 오후, 두 사람은 오래 걷기 좋은 도시를 찾았다. 지도를 펼치고, 햇빛이 오래 머무는 골목을 골랐다. 가끔은 값비싼 풍경보다 오래 머무는 햇살이 사람을 좀 더 잘 살게 한다고 믿기로 했다. 저녁에는 양가 부모님께 차례로 전화를 걸었다. 머뭇거리던 순간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더 꼭 잡았다. 말은 생각보다 잘 나왔다. ‘우리가 당첨이 됐고, 하지만 그보다 먼저, 우리가 결혼을—서로의 속도로, 서로의 언어로—하자고 결심했다’고.
밤이 되자, 방 안이 조용했다. 은지는 서랍에서 로또 티켓을 꺼내 폴라로이드 사진 옆에 다시 끼웠다. 그 앞에 작은 노트를 놓았다. ‘해꿈의 서약’에서 적어온 문장을 다시 한 번 옮겨 놓았다. 손글씨는 덜렁거렸지만, 오히려 그래서 좋았다. 사람의 마음은 원래 조금은 덜렁거리는 법이다.
“우리, 그때 편의점 파라솔 밑에서 찍은 사진.”
은지가 말했다.
“그때도 비가 왔지?”
“응.”
“나는 그날이 좋았어. 오늘도 좋고.”
찬호는 창밖을 보았다. 비에 씻긴 도시의 불빛들이 또렷했다. 그는 마음속 어딘가에서 아주 작고 오래된 스위치가 딸깍 소리를 내며 켜지는 것을 들었다.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들이, 이제는 둘이 나눌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숫자 여섯 개가 보여준 것. 결혼이라는 단어가 보여주지 못했던 것을—사소하지만 분명한 합의의 기쁨.
그는 은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우리, 내일 저녁엔 부모님께 직접 찾아가자.
그리고… 다음 주말엔 집 보러 다닐까?”
“좋아.”
은지가 웃었다.
“햇빛이 오래 머무는 집.”
두 사람은 불을 끄고 누웠다. 희미한 가로등 빛이 커튼 틈으로 흘러들었다. 잠이 들기 전, 찬호는 종이 위에 적힌 숫자들을 한 번 더 떠올렸다. 2, 7, 12, 17, 33, 41. 그 숫자들이 하나의 문장처럼 읽혔다. ‘둘이, 행운의 문 앞에서, 처음 만난 시간으로 다시 돌아와, 희망의 별을 보고, 오래 머무는 집을 택하자.’
그 문장을 마음속에서 천천히 읽고 있을 때, 그는 알았다. 1등은 아마 당첨 그 자체가 아니라, 같은 번호를 함께 고르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순간은 계속해서 연장될 수 있다는 것을—매일의 장보기에서, 빨래를 널 때, 계절이 바뀔 때, 누군가의 생일을 챙길 때, 실패하고 다시 일어설 때, 아주 사소한 순간들 속에서.
창밖의 별은 보이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그리고, 충분함은 언제나 사람을 더 멀리 데려다준다. 멀고도 가까운 내일로.
🌸🌼🌷🕊
심리와 치유의 신비한 타로 세계, 타로 소설 ‘타로의 신’
메이저 아르카나 19번 태양의 기운을 담은 타로 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