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령(宋美齡: 1899-2003)은 장개석(蔣介石)의 아내이자 그의 훌륭한 외교 참모이기도 하다. 손문(孫文)의 아내 송경령(宋慶齡)의 동생으로 본관은 광동성 문창(文昌, 지금은 海南省에 속함)이다. 1899년 3월 23일 상해에서 기업가 집안이자 기독교 집안에서 송가수(宋嘉樹)의 세 딸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송가수는 손문의 혁명을 추종하여 자기 집안의 모든 봉건 잔재를 없애고 딸들에게 현대식 교육을 시켰다. 송미령은 영리하고 대담하여 큰 언니 송애령(宋靄齡)과 마찬가지로 5세 때 중서여숙(中西女塾)에 입학하여 기숙사 생활을 하였고, 1910년 11세 때 작은 언니 송경령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조지아주 위슬리여자대학을 졸업하고 1920년 중국으로 돌아간 이후 그녀는 기독교 여자청년회 활동에 참여했다. 일찍이 영화심사위원회, 소년노동자위원회(童工委員會) 등에서 근무하기도 하였다.
흔히 송씨 세 자매를 일러, 송애령은 돈을 사랑하였고, 송경령은 조국을 사랑하였으며, 송미령은 권력을 사랑하였다고 한다. 송미령이 권력을 사랑하였다는 증거는 바로 그녀가 장개석과 결혼한 사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장개석은 손문의 집을 자주 드나들면서 송미령을 보고 첫눈에 반해 버렸으며, 송미령도 그렇게 건장하고 영준한 국민당 장교 장개석에게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장개석은 일찍이 손문에게 송미령의 형부로서 자기가 송씨 집안에 청혼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그러나 손문은 장개석을 동서로 맞이하는 것이 결코 싫지는 않았지만 장개석의 부탁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첫째는 그가 송경령과 결혼하면서 분란을 일으켰던 송씨 집안과 관계가 그다지 좋지 못하였고, 둘째는 송경령이 장개석에게 극히 안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송경령은 군인 장개석에게 극도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심지어 손문과 측근들에게, "송미령이 죽는 것을 볼지언정 장개석과 결혼하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다."라고 털어놓기도 하였다. 사실 송경령은 장개석의 나이가 너무 많고 출신이 비천했기 때문이 아니라 장개석이 손문의 유지와 국민혁명을 거역하고 민족 분열을 조장했기 때문에 결혼을 반대했던 것이다.
당시에 장개석은 이미 결혼을 하여 아내를 세 명이나 둔 유부남이었다. 그럼에도 송미령이 모두의 예상을 깨고 장개석과의 결혼을 감행할 수 있었던 데는 아이러니컬 하게도 언니들의 성격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송경령이 전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손문과 결혼을 올렸을 때, 오직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던 송미령만은 송경령의 입장을 이해해주고 있었다. 송미령은 그 누구 보다도 먼저 그러한 송경령이 자신의 결혼에 동의해 줄 것으로 믿었으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송미령은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언니가 원망스러웠지만 그녀 또한 그러한 언니의 전철을 따라서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만약 송미령의 영웅 숭배가 송경령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면, 송애령의 영특한 현실주의 관점은 송미령이 결혼의 장애 요소를 깨끗이 쓸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환경에서 송애령은 국민당이 단결하기만 하면 중국의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오직 군인에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송미령과 장개석의 결혼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았다. 송애령과 그녀의 남편 공상희(孔祥熙)의 결합은 중국의 남북 재벌세력의 연합이었고, 송경령과 손문의 결혼은 송씨가문과 국민당의 결합이었다. 이럴 때 집안에 장개석과 같은 군인 세력이 가세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는 것이 송애령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송애령의 강력한 지지를 바탕으로 1927년 12월 1일 송미령은 장개석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후 송미령은 항상 장개석을 따라서 전쟁터로 다녔지만 정치적 노선이 달랐던 언니 송경령과는 불편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약 10년 동안 장개석과 함께 전국을 누비면서 송미령의 발자취가 중국 전역에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송미령은 항상 장개석의 충실한 외교 고문을 맡으면서 구미 각국들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서양 학문에 대한 뛰어난 식견으로 장개석의 공군건설을 완벽하게 보좌하였다. 이 외에도 그녀는 정치 사회활동에 폭넓게 참여하여 여성단체와 아동복지단체에서 단체장 등을 맡았다.
1936년 12월 서안(西安)에서 장개석이 장학량(張學良)과 양호성(楊虎城)에게 감금되는 사태가 발생하였을 때, 그녀는 위험에 처한 장개석을 구하기 위해 직접 서안으로 달려가서 사태의 평화적인 해결을 지원하는 과감성을 보여주었다.
항일전쟁 시기에 그녀는 항공위원회 비서장을 역임하였고, 1943년에는 장개석을 따라 카이로회담에 참석하여 통역을 맡았다.
1948년 장개석을 대신하여 미국으로 건너가서 원조를 요청하였으나, 1949년 장개석의 국민당이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과의 패권 전쟁에서 패하여 대만으로 철수하자, 미국에 체류하고 있던 그녀도 1950년 1월 대만으로 건너갔다. 이때 패권 쟁탈에서 실패한 장개석과 송미령은 비운의 영웅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와 비극의 여주인공 우희(虞姬)의 신세와 다름 없었다.
1950년대 초는 대만의 정국이 가장 불안한 시기였다. 만약 송미령이 비겁한 여인이었다면 그녀는 결코 대만으로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장개석과 국민당을 위하여 언제든지 몸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대만으로 건너갔던 것이다. 송미령이 단순히 장개석의 권력을 흠모하여 그와 결혼하였다고 한다면 그녀의 이러한 행동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을 것이다.
대만에서 장개석과 함께 정권의 혼란기를 겪은 후에 그들은 집에 영화관을 설치해 두고 자주 영화를 보면서 다소 한적한 생활을 보냈다.
1974년 국민당 10기 5중전회에서 송미령은 "중산훈장(中山奬章)"을 받았다. 1975년 4월 5일 장개석이 병사하자 그 해 9월 17일 송미령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녀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에 입원하여 허리 수술을 받았으며 경과는 아주 좋았다. 그 후 여러 차례 대만으로 돌아가 계속적으로 조금씩 미국으로 짐을 옮겼다. 1991년 그녀가 대만을 완전히 떠날 때는 99개의 상자를 가져갔다고 한다.
송미령은 1950년 1월 미국에서 대만으로 건너가 1991년 대만을 완전히 떠날 때까지 약 40여년간 실제로 대만에 있었던 기간은 그 중 절반도 안된다. 그녀는 왜 그렇게 미련이 많은 대만이라는 땅을 떠나야만 했을까? 그 원인을 추측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대만에는 그녀의 친척이 없었다.(그녀의 친척은 모두 미국에 있음)
둘째, 이미 미국에서 폐암 말기에 있던 외조카 공령간(孔令侃)과 말년을 함께 보내고 싶어 했다.
셋째, 장개석과 함께 거주하던 사림관저(士林官邸)는 그녀 혼자 살기에 너무도 적막했다.
넷째, 자신의 건강도 좋지 못하여 움직일 수 있을 때 한시 바삐 미국으로 건너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섯째, 대북의 정치적 분위기가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그러나 그 어떤 이유 보다 그녀는 자기 일생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다 준 제2의 고향 미국으로 하루 빨리 돌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2001년 3월 6일(음력 2월 12일) 송미령은 자기의 104회 생일을 맞이하였다. 작년에는 뉴욕에서 서화전을 열기도 하였는데, 유명한 서화가 진립부(陳立夫), 왕기천(王己千), 장융연(張隆延), 부견부(傅狷夫), 구화년(歐華年) 등의 찬조 출품으로 이루어진 이 서화전에서 송미령은 1950년~1960년 사이에 그린 10폭의 그림을 출품하였다. (오른쪽 위의 사진은 전시회 당시의 모습)
송미령이 100세가 넘도록 장수를 누릴 수 있었던 비결을 무엇일까? 그녀는 젊은 시절부터 매일 정기적으로 관장(灌腸)을 하였다고 한다. 관장 기구를 사용하면 그다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쉽게 용변을 볼 수 있다.
송미령은 관장을 하기 전에 먼저 400~500CC의 온수를 준비하여 관장 기구의 작은 주머니 속에 넣은 다음 기구를 이용하여 온수를 천천히 항문 안으로 주입시켰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온수를 200CC 정도 주입하면 직장이 부드러워져서 체내에 쌓인 대변이 온수를 따라서 천천히 밖으로 방출된다.
송미령은 수 십년간 매일 저녁 잠자기 전에 이러한 관장을 한 번씩 하였으며, 목욕하기 전에도 반드시 먼저 관장을 하고 하루의 대사를 해결하였다. 그녀의 심신을 매우 편안하게 해 준 규칙적인 관장은 지금까지 그녀의 건강을 유지시켜 주는 비결의 하나였던 것이다.
이 외에도 송미령은 독실한 종교생활을 하면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으며, 항상 무릎과 다리를 주무르면서 혈액순환을 시켜 주었다. 또 음식에도 매우 주의하여 반찬을 많이 먹고 밥은 적게 먹었으며, 화가 나면 그것을 가슴속에 담아두지 않고 밖으로 표출하였다. 이러한 모든 것이 그녀가 100년 이상 장수를 누릴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닐까 생각한다.
송미령은 청대 말기, 민국 시기, 군벌 혼전과 일제 침략을 거쳐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냉전시대의 도래와 퇴출, 양안 관계의 긴장 해소 등을 목도하면서, 지금까지 104년의 세월을 살아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