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 시집 [잉여촌剩餘村 27호]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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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촌剩餘村 제27호]
동인 시집 / 푸른별(2012.09.30) / 값 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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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인 : 김성춘, 김용길, 박종해, 배기현, 오하룡,
유자효, 윤상운, 이상개, 장승재, 조남훈
부처도 가끔은 아프다 - 경주 남산.9
김성춘
경주 남산 골짜기 가면
내 얼굴 어디 갔지? 아직도 궁금해 하는
돌 부처들 산다
사라진 시간들, 분황사 근처 우물속으로 갔을까
덕동 댐 아래 수몰된 그 절터로 갔을까
국립박물관장도 문수보살도 고고학자도
모른다
창밖의 저 소쩍새도 모른다
텅 빈 남산도 모른다
아, 내 얼굴 어디 갔지? 돌부처도 가끔 아플 것이다
아프니까 돌부처도 부처다
얼굴이 없어
눈물도 못 흘리는 우리 부처님
소쩍새 울음 뒤에 세상의 푸른 시간들 바람으로 지나간다
깨어진 시간의 상처마다
역사의 슬픈 그림자 지나간다
아, 내가 가픈가
소쩍새가 아픈가
텅 빈 골짜기 저 돌부처, 오늘도 가끔 아프다.
■ 김성춘
∙74년 심상 제1회 신인상 등단
∙시집『물소리 천사』외 다수
∙제2회 월간문학 동리문학상, 제4회 바움문학상 수상
∙현) 동리목월문학관 교학처장, 계간지『동리목월』편집장
새벽을 나서며
김용길
여명黎明은 하늘 한 쪽
금 간 곳부터 열린다
허연 속살이 보이고
먹다남은 쌀떡 같은 반쪽 달이
식탁에 떨어져
마루바닥에 눌러 붙어 있다
방문 열고
반쪽 달 떼어던지며
돌담 틈 고개 내민
고양이눈같은 어둠 사이로
늙은 아내의 궁둥이살이 보인다
허겁지겁 살아온 생애
되풀이되는 일상의 시작
마음 풀어 여유 부려본들
낡은 슬리퍼 한 짝
댓돌아래 굴리는 것을
■ 김용길
∙제주도 서귀포 출생
∙1966년 [시문학] 2회 추천
∙<문학춘추>신인상 당선으로 등단(1966년)
∙시집『빛과 바람의 올레』외 다수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 서귀포시민문화상 수상
산촌에 밤이 올 때
박종해
산에서 내려온 어스름이
마을 어귀에 스며들어
하나씩 등불을 켤 때
나는 산의 몸속으로 들어가고
산은 나의몸속으로 들어온다.
담장이 허물어지고
창문이 사라진다.
눈도 코도 입도 흐물 흐물 뭉개지고
검은 물결이 산지사방 몰려들어
온 천지가 한 몸이 된다.
어디선가 컹컹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의 파문이 실핏줄처럼 퍼져
밤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 박종해
∙1964년 선균관 영문과 졸
∙1980년『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이 강산 녹음방초(민음사)』 외 9권
∙제1회울산광역시문화상, 대구시협상, 성균문학상, 예총 예술대상 등 수상집
∙울산문협회장, 울산예총회장 역임
∙울산북구문화원장
입춘여름
배기현
자리끼는
아침마다 얼어 있다.
황량한 텃밭,
까치 한 마리
허옇게 서리를 뒤집어 쓴 채
고랑 가운데 죽어있다.
하늘은 낮게 깔리고,
여린 햇빛은
팽팽히 긴장한 냉기의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구석자리를 찾아들고 있다.
낼 모래면 입춘
봄은 저만치 두고 먼저 와 버린 절기,
방榜에 봄 춘春자 쓰기 민망하다.
■ 배기현
∙경남 진해산
∙『문예한국』추천 등단
∙시집『낮은 울타리』
∙에세이집『개나리와 참나리』
∙진해문인협회장 지냄, 창원문인협회 회원
변덕 순례자
오하룡
죄골 신경통을 앓는다
처음에는 침술이 좋다는 한의원에 갔다
며칠 다녔으나 효과가 별로였다
정형외과에 갔다
주사를 맞고 약 처방을 해주어 약을 먹었다
사흘에 한번 나흘에 한번
매일 오라는 소리 안하는 것만 해도
양심 의사라는 생각을 하면서
의사의 지시에 따랐다
더 다녔으면 하는 데
아내가 좋은 데가 있다고 잡아끈다
이름은 달라도 그곳도 한의원이고
정형외과였다
거기 얼마 다니다가
처음 다닌 의원으로 다시 갔다
일흔 중반은
수명 다된 자동차 같다는데
아무리 손봐도 폐차장만 보이는데
그렇다면 어디 한군데
진득이 다니는 소신이라도 보이는 게
상책 같은데 질정 없는 자여
■ 오하룡
∙1940년 구미출신(일본에서 출생)
∙1975년 시집『모향母鄕』으로 등단
∙시집『잡초의 생각으로도』외 다수
∙마산시문화상, 경상남도문화상, 한국구농민문화상 수상.
∙『작은문학』주간, 발행인(현재)
기회
유자효
물소 떼가 물을 먹고 있었다
배고픈 사자 무리가 그들에게 접근하고
물소 가운데 오직 한 마리
물을 먹지 않고 주위를 경계하던 우두머리 수소는 사자들의 은밀한 접근을 직감했다
이윽고 사자들은 모습을 드러내고 물소 떼는 뒤돌아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새끼 물소들의 뒤에서 우두머리 수소는 사자 떼에 맞섰다
사자들은 우두머리 수소에게 떼 지어 달려들었으나 위풍당당한 그를 쓰러뜨리지 못했다
이윽고 달아나던 물소 떼가 돌아와 우두머리와 합세했다
사자들이 물러섰을 때
이변이 일어났다
건장한 젊은 수소가 상처를 입고 힘이 빠진 우두머리 수소를 공격한 것이다
그는 우두머리 수소를 사자들에게 떠밀곤
무리와 함께 초원 저 편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날 사자들은 온 가족이 종일 포식하였다
■ 유자효
∙시집『사랑하는 아들아』『주머니 속의 여자』『전철을 타고 히말라야를 넘다』『여행의 끝』『성자가 된 개』등 출간
∙산문집『나는 희망을 보았다』『다시 볼 수 없어 더욱 그립다』등 출간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유심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한국문학상 등 수상
∙국제펜 한국본부부이사장, 한국문인협회 이사, 지용회장, 구상선생기념사업회 이사, 시와시학회장, 불교신문논설위원, 국악방속「유자효의 책 읽는 밤」진행」
그냥 바라보다
윤상운
하루에도 몇 번 산불산 능선 위의
구름을 보았다
끊임없이 흐르면서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보이는
냇물을 따라 한 십리 쯤 걷다보면
지난 여름에 떠난 물소리들 생각이 난다
어디를 지나고 있을까
흰 억새들이 무리지어 햇빛 속으로 걸어가는
모습들이 보였다
멀리서 구름송이 같은 바람의 무리들이
억새풀을 따라 천천히 흐르고 있다
언제나 같은 모습의
나 사는 시골 슬픈 일 하나 없다
■ 윤상운
∙1947년 대전 출생
∙1973년『조선일보』신춘문예 시「연가」당선
∙3인 시집『겨울삼중주』
∙시집『달빛 한 쌈에 전어 한 쌈』『배롱꽃 붉은 그 길』『행복한 나뭇잎』
∙제8회 최계락 문학상 수상
동행
이상개
가을이 온다기에
오랜만에 마음을 푹 적시려고
길을 나섰다
고속도로를 한참 달리다
창밖을 내다보곤
어느새 단풍들도 함께
길을 나섰다는 걸 알았다
괜히
마음이 후끈 달아올랐다.
■ 이상개
∙1941년 창원 출생
∙1965년『시문학』추천
∙시집『영원한 평행』외 9권
∙시선집『소금을 뿌리며』『
∙[시와 자유] 동인
∙부산시인협회상, 창릉문학상 수상
골목길
장승재
이사 온 안강읍내엔
참 골목길이 많다.
가로 세로 큰길에 이어지는 골목길
골목길을 걸으면 지루하지가 않다.
모양과 크기가 다른 집과 대문들
마당에 심은 나무도 다 각각이다.
아마 그 집에 사는 사람들도 다 다를 터
골목길을 이리저리 기웃거려도
딱히 대문을 밀치거나 사람 부를 집이 없다.
나 여태 어째 살아왔길래
아는 사람이 이렇게도 귀하단 말인가?
문득 외롭고 허탈해지다가도
혼자라소 더 좋고
아는 사람이 없어 더 홀가분하다는 생각에
골목길 걷기는 나의 참 행복으로 다가온다.
■ 장승재
∙1939년 부산 출신(일본 고오베 출생)
∙1960년『자유문학』1회 신인상 당선(시)
∙1961년『경향신문』신춘문예 당선(시)
∙『장승재 시선집과 칼럼집 등
겨울江
조남훈
숲은, 발굼치를 세워
휘파람을 날린다
한 달 넘게 발령중인 한파와 건조주의보 속에
범람했던 그 강물 다 흘려버리고
간신히 살아남은 물줄기만 모인 샛강
더 불러낼 이름 이 있는지
잊혀지지 않는 이름을 부르며 흐른다
언제나 들어도 정다운 고향 사투리 같은
은하수 소곤대는 물면 위로
청둥오리 날아오르고
별은 세상의 안부를 물으며 돋아났다
슬픔을 온전히 간직한 겨울江
옥탑의 십자가 불빛 앞세워
먼 들녘의 쓸쓸한 발자국 소리 지우며
싸늘한 땅의 이마를 쓰다듬는
겨울江은 맨발이다
■ 조남훈
∙1944년 충북 음성 출생
∙시집『미시령을 넘으며』『자정의 불빛』『지적도에도 없는 섬 하나』
∙한국가톨릭문인협회 회원
∙창릉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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