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신재(周愼齋)가 경탄한「一邑五胎地」이다.
◎ 하나의 산에 네 분의 임금(王)의 태(胎)를 묻었으니 「白山 四胎地」요. 하나의 읍(邑)에 네 분의 임금과 왕비 한분의 태를 묻은 곳이니「一邑五胎地」라고도 한다.
※ 과거 조선세조 때 '순흥도호부'가 혁파되면서 그 때부터 「풍기군」이 당시의 이 고장 으뜸 행정구역(순흥, 예천일부 포함)이 되었음.
이러한 현상은 조선팔도 다른 곳에는 찾아 볼 수 없는 일이라고 신재 주세붕 선생은 재임지인「풍기」를 경탄하는 내용을 자세히「죽계지(竹溪志)」에 남겼다.
◎ 소백산 아래 지금의 순흥 땅에 고려 말의 세 임금인 충렬, 충숙, 충목왕의 태(胎)를 묻었고, 조선 초엽에는 성군(聖君) 세종대왕의 정비인 소헌왕후 심 씨의 태를 묻은 데서 불러온 말이며, 또한 명봉산(예천 용문)에 문종의 태를 묻게 된데서 연유하는 이야기이다.
※ 모두 그 당시 풍기군 관할 내였으며, 희방사(喜方寺)에는 세종의 명을 받아 수양대군(首陽大君 : 世祖)이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사(佛事)를 도모한 곳이다. 나중에 아들 ‘도원군’이 요절하자 세조는 다시 이곳에서 불은(佛恩)을 입고자 목판을 제작하는데, 이때 제작된 것이 그 유명한 “월인석보(月印釋譜)”이다. 이것은 석가모니(佛)를 찬양하는 대서사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기록한 “석보상절(釋譜詳節)” 그리고 “훈민정음(訓民正音)”을 합친 것이다. 그러나 6.25 동란 때, UN군 참전으로 인민군들이 남한 내에 고립되면서 희방사 內에 숨어있던 인민군 잔당들을 소탕하기 위해 UN司의 작전지시에 따라 “소개령(疏開令)”을 내려, 절을 불 지르게 되니 「월인석보」판각과 판본이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같은 전쟁 시에 「합천 해인사」는 한 공군조종사의 뚝배기 애국심으로 폭격직전 전화(戰禍)의 잿더미에서 살아남게 되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UNESCO)에 등록되어 있다. 그 주인공은 공군창설 멤버요, 5共시절 국무총리를 역임한 김정렬씨의 친동생인 ‘김영환 장군’이다. (그는 빨간 마후라를 처음으로 만들어서 목에 두른 장본인이기도 하다.) 나는「6. 25 전쟁비사」에 전해오는 김 장군의 생명을 담보로 한 나라사랑 이야기를 수시로 서원을 찾는 단체관광객을 대상으로 96년부터 수도 없이 줄기차게 전해왔다. 나의 필드강의를 두 번이나 듣게 된 충주 예성동호회 회장이며 前 중원부군수를 지낸 故 김예식 옹이 녹취 ? 보완한 뒤로 청주지역 공군부대 등 여러 경로를 통해서 그 사실을 재확인하여 더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가 형성되다 보니, 결국 합천 해인사 앞마당에 팔만대장경이 김 장군의 기지로 살아남게 된 내력을 돌 비(碑)에 새겨 건립하게 됐으니 그나마도 나로서는 가슴 뿌듯한 일이다. “월인석보”목판 역시도 남아 있었다면 당연히「세계문화유산」감인데...
화마의 인민군 사진
◎ 태묻이(胎藏)한 곳, 순흥에는 ‘태장리’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부르기도 좋고 듣기도 좋고 역사마저 반증해주니 때로는 ‘지명(地名)’도 문화재가 되는 법이다.
※ 예; 비로사(비보사찰 ? 수호사찰)와 소백산 史庫터(비로사와 밀목재 사이 ? 풍기 달밭골). 그리고 일제가 창지개명시킨 순흥 태장(台庄).
수호사찰 「비로사」현창사업과 사고터(史庫址) 복원
※ 왕의 태(胎)를 묻은 곳에는 나라 역사 서적(실록 ? 선원록)을 함께 봉안코자 반드시 사고(史庫)를 세웠었다(예: 성주 태실과 성주 사고. 영천 청통 은해사를 수호사찰로 한 조선 12대 임금인 仁宗의 태실). 또한 일조량(日照量)이 많고 통풍이 잘 되는 등, 기후조건이 뛰어난 곳이래야 건물과 유물관리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고는 볕 잘 드는 양지바른 곳과 배수가 잘 되는 곳 그리고 좌우로는 날개 벽 같은 산이 두르고 있어서 평소에 바람이 내리불기도 치불기도 하여 통풍이 잘 되는 곳을 선택하되, 수시로 포쇄(曝?)가 가능한 곳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곳 풍기 지역도 순흥과 함께 태(胎)묻이 한 고을이며, 우리 국호가운데 ‘靑丘(청구)’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탑비 비문에 실어놓은 유일한「사고 및 어태 수호사찰」이 「비로사」이다. 절 입구 오른쪽 풍기 달밭골에서 순흥 달밭골로 넘어가는 성재(밀목재) 바로 밑에 “독가촌”이 몇 채 있다. 그 위쪽이 바로 고려말 사고를 보관했던 곳으로, 지금은 주초만 남아있어 「사고터」라고 불린다. 79년 국유림 내 불법 건조물 철거 때, 뜯겨버린 「九日기도원」(조춘홍 원장, 변분남 권사)자리가 바로 사고터이다.
우리는 그동안 방치하다시피 버려졌던 이 사고터(史庫址)를 하루 빨리 발굴(주춧돌 등) 조사하여 자랑스런 풍기 땅 문화유적으로 보존할 수는 없을까? 풍기인들이여! 이곳이야 말로 훗날 조선시대의 태백산 사고 모델이 되었던 곳인 만큼 앞으로 복원의 삽질은 여러분들이 풀어야 할 과제요, 사고 터 복원만큼은 풍기인의 자존심이 걸려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송지향 향토지 참고)
※ 소백산의 "사고터" 동네는 70년대 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20여 호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피난촌이기도 했다. 6.25 이전 자유를 찾아 낙남해 온 세대들이 이화세계를 추구하면서 산전을 일구어 산약(갈근, 창출, 감초, 당귀, 시호 등)을 채취하거나 불배추, 산감자 등 화전을 생계수단으로 삼았다. 간혹 주변에서는 자 ? 타칭 도사들이 모여들어 기도와 수련처로 이용되다 보니, 별의별 도인들(요즘 같으면 기치료 ? 기인 ? 둔갑 등 잡술가)이 비로봉 계곡아래 비로폭포 밑과 정안동 계곡에 모여 살았기에 일명 "도골"이라고도 불렀다. 특히 ‘달밭골(月田洞)’은 사방으로 산들이 둘러싸여 있어 하루 종일 해 보다는 달과 별보는 시간이 더 많은 곳이라고 해서 일명 ‘달 밝은 골(月明洞)’이라고도 불렀다.
※ ‘사고터’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일까? 비로사 오른쪽 길로 조금 올라가면 달밭골 동네가 나오는데, 요즘은 등산객들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한 두 집이 민박을 겸해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故 김순종씨 가옥 위쪽으로 약 삼백 여 미터 이상 올라가면 평평한 분지가 나타나는데, 잡초와 잡목으로 우거져 있어 앞을 분간하기가 어렵다. 지금은 그곳에 움막 같은 산가(山家) 몇 채가 다시 들어서 있다. 오랜 세월로 자취가 사라지기 일보 직전임에도 아직 석축더미 등 주초 자리가 남아 있으니, 바로 그 주변이 구일기도원이 있던 자리임과 동시에 고려실록을 보관하던 '사고터'임을 알 수 있다.
九日기도원
밤낮 꼬박 아흐레면 하늘응답 받았다지.
생식촌(生食村) 모둠살이 이상향(理想鄕)을 가꾸던 곳
달밭골(月田洞) 그 주초(柱礎) 자리가 고려사고(高麗史庫)터라네.
(60년대 단양 가곡에서 변분남 권사 ,조춘홍 원장 가족이 이곳 사고터에 들어 와 건립한 기도원)
81년 朴 錫 泓 작시
구일기도원
(소백산 사고터 자리에 들어 선 기도원 건물, 79년 국유림 內 불법건조물 정비 때, 안타깝게도 철거되어 일부는 경주 시루미 기도원으로 옮겨갔음.)
故 변분남 권사(구일기도원 원장) 기도원 청년봉사단(72년 6월) 기도자들(김종숙 외 2인), 72년 6월
조진홍 권사, 김인실(조춘홍 前 원장의 고명딸, 경희의대생), 72년 6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