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순 친구와의 옛 추억
전○순 친구가 모처럼 인생철학이 담긴 의미 있는 영상을 올린 것을 보니, 문득 옛 추억이 떠오릅니다. 그 언제였던가. 아마도 1990년대로 기억합니다. 내가 야간 비상근무로 대전의 한 골목에 배치되어 잠복 근무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랐지요.
“윤승원씨 아니세요?”
전○순 친구는 당시 지역 주민이었고 나는 비상 근무하는 사복 경찰관이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지 수 십여 년이 흘러 길거리에서 서로 만나도 누군지 몰라보게 많이 변해버린 동창생인데도, 전○순 친구는 그 어두운 골목에서도 나를 참으로 용케도 알아보고 먼저 인사를 건넸습니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나도 “아! 전○순 씨!”하고 이름 석 자 불러 보았지요. 지금 생각하면 내가 부끄러워집니다.
어두운 골목에서 옛 초등학교 친구를 만나 가까운 찻집에도 가지 못하고 영하의 추운 골목에서 이런저런 고향 얘기만 잠깐하고 헤어졌습니다.
현직 경찰관 신분으로서 더구나 동료경찰과 함께 비상근무 중이라 행동이 자유스럽지도 못했고, 시간적 여유 또한 없었지요.
그 당시 어두운 골목에서 전○순 친구가 나를 먼저 알아본 것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장면입니다.
마침 그 당시엔 전○순 친구 오빠이신 전종남(田鍾男) 선배님(18회 졸업생)이 제게 원고청탁(역사학사 정구복 박사님이 추진하는 <장평초등학교 60년사> 편찬)하는 문제로 매우 친밀하게 대화가 오가는 중이어서 나는 전○순 친구 오빠와 관련한 얘기를 주로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전종남 선배님은 참으로 다정다감한 분이었습니다. 얼굴도 미남이고 언변(言辯)도 뛰어날 뿐만 아니라 머리도 명석하여 고향인 청양군 적곡면(현재 장평면) 출신 중에 공직에 있거나 사업에 성공했거나 아니면 이름 없이 살아가는 평범한 출향인까지 집안 내력부터 현재 근황까지 말씀해 주실 땐 그야말로 청산유수(靑山流水)이셨지요. 고향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그만큼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은 애향심이 남다르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존경할만한 훌륭한 선배님이었습니다.
단체 채팅방에서 모처럼 전○순 친구의 성명 삼자를 보니 반갑고 옛 추억이 되살아나 어쩌다 이런 얘기까지 하게 되네요.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전○순 친구를 최근에 만났던 얘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인근 도솔산에 아침 등산을 하고 내려오던 전○순 친구와 또 마주친 겁니다.
오늘 전○순 친구가 올린 영상에도 나옵니다만 “이 나이까지 살아보니 별거 아니더라.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고, 건강하고 마음 편한 게 제일이더라.”라는 주제의 글 속에 전○순 친구의 인생철학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봅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씩씩한 전○순 친구의 발걸음! 이마에서 김이 모락 모락 나는 활력 넘치는 전○순 친구의 밝은 표정!
내가 본 전○순 친구는 70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아니었습니다. 아주 건강미 넘치는 낙천적인 내 고향 친구였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한 나날 보내세요.
2019. 8. 10. 10:00
ㅡ 문득 옛 추억이 떠올라 안부편지 보냅니다. 윤승원 드림 ㅡ
<사랑방 이야기>
조금 전에 전○순 씨와 옛 추억을 나누다가 전○순 씨 오빠이신 전종남 선배님을 잠깐 언급했습니다. 과거에 그 선배님과 대화하면서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어 한마디 더 추가합니다.
그분은 열 살이나 아래인 저에게 한 번도 예사낮춤이나 반말을 하지 않고 꼭 존댓말을 썼습니다. 말씀을 낮추라고 누차 말씀 드려도 "그럴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그 분과 장평초등학교 동기동창생인 정구복 교수님도 제게 꼭 존댓말을 하시기에 제가 말씀 드렸습니다.
“연세로 보나 학교 후배로 보나 제가 10년쯤 아래인데 어찌하여 꼭 존대 말씀을 하십니까. 말씀 낮추십시오.”
그랬더니 정 교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한두 살 차이도 큰 연령 차이처럼 느껴져 나이 많은 사람이 나이 적은 사람에게 낮춤말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제 같이 늙어가는 처지가 아닙니까? 윤승원 씨나 나나 똑같이 늙어가는 마당에 존중하고 살아야지요.”
저는 선배님들로부터 이런 말씀을 듣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요즘 페이스북이나 카톡으로 과거 까마득한 경찰 후배들과 댓글을 나눌 때도 꼭 존댓말을 쓰게 됩니다.
처음에는 다소 어색하게 느껴졌는데 이제 오히려 그렇게 하는 언어습관이 편안하게 느껴집니다.
얼굴 마주하고 얘기하거나 술자리에서 허물없이 대화할 때는 말을 놓는 게 편하고, 더 친숙하게 느껴집니다만 인터넷이나 채팅방 대화에선 상호존중 언어가 왠지 편안하게 느껴집니다.
물론 제 개인적인 느낌입니다. 꼭 예법에 맞는다는 주장은 아니지요.
충청도 청양 양반답게 예의범절이 반듯하셨던 고 전종남 선배님이 문득 그리워 적어 보았습니다.
2019. 8. 10. 윤승원 씀
첫댓글 1)지금 시간이 10일 0시 5분입니다. 장천선생의 글을 읽고 참으로 깊은 인연을 생각하게 됩니다. 전종남 친구이야기 나와고 바로 그 여동생이야기 나왓기 때문입니다. 이를 알기 쉽게 말하기 위해서 우리 동창회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우리 초등학교 동창들의 모임은 매년 11월 11일 공주에서 한번 만납니다. 몇년전 그 모임에서 정종남 친구의 명복을 함께 빌어주고 그에 대한 몰랐던 이야기에서 여동생과의 이야기를 듣고 참으로 존경할만한 가족이라는 생각을 했고 전종남 친구의 훌륭한 미담을 듣고 깊이 깊이 존경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친구라도 사생활에 대한 것을 모르고 지내는 것이 일반적인 것입니다.
2)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그 오빠에 그 동생이 참으로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아마 그 소식은 전0순씨에게 물어서는 못 듣을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런 고향의 친구의 여동생 이야기를 들으니 한번 만나보고 싶었던 분을 만난 것 같습니다. 전종남씨는 참으로 좋은 친구인데 일찍 가서 참으로 안타갑습니다. 그가 만약 살아 있다면 우리 18회 동창회가 더 활기찬 모임이 될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기다려지는 11월 모임에서 윤선생과 전0순씨 이야기를 하면 동창중에는 전여사에 대한 이야기가 줄줄이 나올 것 같습니다. 11월 동창회모임이 기다려집니다. 감사합니다
3) 윤선생님의 형님 윤행원씨는 내큰조카딸이 훌륭하신 선생님이었다고 전화번호를 알려달라는 전화를 엊그제 받았습니다. 장천선생의 책을 그 조카에게 주었더니 읽어보고 전화를 한 것입니다. 이런 말을 쓰는 것은 고향은 인적 연계가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말하려고 쓴 것입니다. 대를 이어서 이야기가 전해지고 많은 사연이 연결되는 것이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에서 열리는 총동창회에 재 작년에 갔다가 우리 마을의 친구의 아들이라고 와서 인사릃 하기에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시간이 나면 고향이라는 수필도 한 번 써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1)존경하는 정 박사님이 올려주신 장문의 댓글을 읽으면서 며칠 밤에 걸쳐 털어놔도 못다할 말씀을 압축하여 담아 놓셨구나! 느낍니다. 전종남 선배님과 그분의 여동생인 저의 초등학교 친구 <전 여사>에 대한 얘기만 하더라도 '만리장성'인데 정 박사님은 훌륭한 집안의 오빠와 동생이라는 함축언어로 찬사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깝게 일찍 세상을 떠나신 전종남 선배님에 대한 애틋한 추모의 정까지 담으셨습니다. 사실 저는 이 서간문을 옮기면서 사사로운 얘기에 대한 부끄러움보다는 전종남 선배님과 그분의 여동생이 자랑스럽고 품격 있는 언어로 예를 지키시는 정 박사님의 고매하신 인품을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윤승원 2)고향 친구와 고향 선배님의 이야기를 이렇게 자랑스럽게 편지글로 쓰고, 만인에게 공개하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제가 그동안 써왔던 수많은 글의 요소도 <작지만 따뜻한 것, 소박하지만 인정을 느낄 수 있는 것>에서 삶의 또다른 가치를 두었습니다. 정박님이 운영하시는 본 카페가 그러한 가치를 담는 그릇이요, 각박한 사회에서 따뜻한 인간애를 나누는 가교의 마당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얘기는 애써 발굴하려고 한다고해서 쉽게 찾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윤승원 3) 우연히 생활 속에서 발견하는 보석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바쁜 사람들은 예사 지나칩니다. 단체 채팅방에서 모처럼 눈에 띈 초등학교 여자 동창생 이름 석자에서 그의 오빠 전종남 선배님을 추억하고, 그분의 다정다감한 인품을 반추하다가 정 박사님의 격조 있는 언어생활이 떠올라 세상에 알리고 싶은 충동에까지 이르게 됐으니 '생활의 보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참으로 감사한 인연입니다.
1)저에 대한 찬사가 너무 지극하십니다. 저는 이제 서서히 물러가는 석양과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노을이 질때까지 무언가 이 세상에 나오게 하신 부모님의 은공을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 힘을 쏟겠습니다. 그리고 죽음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맞아들이겠습니다. 장천선생을 자주 만나게 됨이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당나라 한유의 글에
"두 사람이 수레를 앞뒤에서 끌고 갈 경우 평지에서는 앞사람이더 힘을 쓰지만 고개를 올라갈 때에는 뒷 사람이 미는 힘이 더 큰 힘을 발휘하고
고개를 넘어 내려갈 때에도 뒷 사람이 잘 당겨주어야 한다"
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는 요즘 장선생과 함께 올사모라는 수레를 끌고 가고 있습니다.
2) 그리고 장천선생은 올사모라는 수레에 좀 더 많은 사람을 싣고 그 의식을 사회화하는 데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길이 흐르는 냇물이 강물이 되듯이 멋진 수필을 통해 가능할 것으로 믿습니다. 우리는 이제 둘도 없는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당나라 한유의 '수레 끄는 이야기'는 오늘 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하지만 저는 정 박사님의 수레가 평탄하게 잘 굴러 가기 때문에 그 모습을 바라다보는 것만으로도 배움이 크고 깨닫는 바가 크오니, 힘을 보탤 여지도 없습니다. 온화한 인품으로 늘 따뜻한 격려 말씀 주시는 것만으로도 고향 선배님의 '큰 나무 그늘 덕'을 보는 겁니다. 실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