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의 항일운동 사적 따라 부포 이원정, 안동독립기념관이 주관하는 만주지역 항일운동사적지 탐방(5박6일) 행사에
우리 부부와 손녀 정민이가 같이 참여했다. 지금부터 1세기 전인 1910년 12월 24일 안동 내앞 마을의 백하 김대락의 출발을 비롯해서 임청각 석주 이상룡, 동산 류인식, 일송 김동삼, 이원일 일가 등 여러 집이 은밀하게 재산을 처분하고 많은 가족을 이끌고 그 추운 엄동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줄을 이어 만주로 떠났다. 만주로 가서는 서울의 우당(友堂) 이회영 등 신민회 인사들과 같이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무장투쟁을 펼쳐 나라를 되찾겠다는 큰 뜻을 품고 …… 예천, 상주를 거쳐 김천까지 걸어서 갔다는데, 백하의 일행 중에는 만삭의 손부와 손녀가 있었다고 한다. 대대로 이어 살던 고향 산천은 버려야 했고, 일가친척과는 헤어져야 했다. 일제의 삼엄한 감시는 피해야 했고 추위와는 싸워야 했다. 이원일은 20대, 김동삼은 30대, 류인식은 40대, 이상룡은 50대, 김대락은 60대 참으로 다양하다. 김대락이 66세였다고 하면 그 때 세월에는 노인 중에 상노인이었을 것이다. 안동 같이 보수성향이 짙은 고향에서 신위를 땅에 묻고 가산을 정리해서 온 집안 식구들을 이끌고 동토의 땅 만주로 찾아 갈 결심을 어떻게 했을까? 우리도 그 때 그 어른들의 예던 길을 따라 김천, 서울 신의주로 해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세상 어디라도 여권이 있고 돈이 있으면 못가는 곳이 없는 세상이라지만, 유독 같은 동족이 살고 있는 북한만은 도저히 갈 수 없다는 것이 가슴 아픈 일이다. 안동독립기념관 김지훈 선생이 인솔하는 우리 일행 21명은 2012년 6월 10일 중국 남방항공의 비행기를 타고 심양으로 갔다. 심양에서는 9․18기념관을 견학했다. 일본의 관동군 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등이 스스로 만천(滿鐵) 선로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 측 소행으로 몰아 싸움을 걸어 1931년 9월 18일 만주 점령 작전을 시작했던 역사적 사실을 기념관에 담고 있었다. 물론 중국이 일본에 적극적 대항이 미미했는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중국이 일본에 항전했던 자료 보다가는 일본이 중국을 점령하려 했던 각종 자료가 더 많았다. 이 전시관을 둘러보면서 우리나라에 있는 독립기념관에도 어쩌다가 우리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는가? 간계한 일본은 우리나라를 어떤 방법으로 빼앗아 갔고, 어떤 몹쓸 짓을 했는가? 학살하고 수탈했던 자료는 말할 것도 없고 보국대로 징용으로 정신대로 끌려가는 사진 자료라도 있을 터인데, 그런 것을 전시하는 공간이 더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이 집단속을 제대로 못하니까 도둑이 들어와서 분탕을 지기는 것과 같이 우리나라가 정치를 얼마나 잘못했기에 일본이 넘보다가 나라를 빼앗아 갔을까? 나라를 빼앗긴 뒤에 뜻있는 지사들이 독립투쟁을 전재했던 것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말이다. 우리는 서울이나 심양이나 경도 상으로 비슷할 것 같은데, 시간을 한 시간 뒤로 돌려놓으라고 했다. 여행 덕분에 한 시간 젊어졌다고 하면서…… 중국 전체가 북경 표준시로 하기 때문에 시간을 한 시간 앞당겨야 한다는 것이다. 계절에 따라서는 다르겠지만, 중국의 새벽 6시면 어두운 곳도 있고, 뿌옇게 밝아오는 곳도 있고, 동산에 해가 솟아오르는 곳도 있을 것이다. 이번 여행의 백미는 안동 어른들이 처음 자리를 잡았던 삼원포, 그리고 경학사와 신흥강습소가 세워졌던 추가가라고 봐야 한다. 100년이 넘었으니 그 때의 자취가 남아 있을 이는 없지만, 그 땅을 한 번 밟아보고 그 산천을 바라보며 그 때 그 어른들이 무슨 생각 어떤 결심을 했기에 그 추위와 배고픔과 공포를 이겨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석주가 압록강을 건너면서 읊었다는 시를 엄숙한 마음으로 한 번 읽어보려 했다. 칼끝보다도 날카로운 저 삭풍이 내 살을 인정 없이 도려내네. 살 도려지 는 건 참을 수 있지만 애 끊어지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기름진 옥토로 이루어진 삼천리 거기에서 살아가는 인구 이천만 즐거운 낙토 우리 부모의 나라를 지금은 그 누가 지배해 버렸는가? 나의 밭과 집을 벌써 빼앗아 갔고 거기에다 다시 내 처자까지 넘보나니 차라리 이 머리 베어지게 할지언정 무릎 꿇어 종이 되지 않으리라! 집을 나선지 채 한 달이 못 되어서 벌써 압록강 도강하여 건너버렸네 누구를 위하여 발길 머뭇머뭇하랴 돌아보지 않고 호연히 나는 가리라! 삼원포를 지나 추가가로 향하는데 중국 「公安」이 뒤따라오더니 우리 차를 세우고 「여기는 관광지도 아닌데 왜 오느냐?」고 하면서 길을 막았다.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일대에 무슨 군사시설이 있어서 길을 막았던 모양이다. 우리는 코밑까지 갔다가 차를 돌리고 말았다. 그래도 우리를 인솔한 안동독립기념관 김지훈 선생은 차를 타고 가면서 준비한 자료를 돌아가며 읽게 하고 설명하면서 교육에 열성을 보였다. 신민회의 우당 형제들이 많은 재산을 처분해서 가져갔고 안동의 석주, 백하 이런 어른들도 전 재산을 처분해서 갖고 갔으니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신흥학교도 세웠을 것이다. 무슨 일을 계획하거나 추진할 때마다 석주와 우당은 머리를 맞대고 서로 상의하지 않았겠느냐? 그러나 불행하게도 1910년 11월 27일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석한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덮어씌워 주로 신민회 회원 700인을 체포하였다가 105인을 기소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105인 사건이다. 신민회를 표적으로 삼은 것은 판결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서간도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한 것을 문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일로 일제는 계속 우당 이회영을 압박해 오자 1913년 우당은 서울로 돌아갔다. 물론 신민회 회원들이 모두 우당을 따라 돌아간 것은 아니지만, 우당을 떠나보낸 석주는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간 이상이었을 것이다. 어려움이 있을 때 누구와 상의하고 무거울 때 누구와 짐을 나누어 질 수 있었겠는가? 우당만 떠났다고 일제가 긴장을 풀고 압박을 늦추었을까? 오히려 우당이 떠난 1913년부터 신흥무관학교가 문을 닫은 1920년 가을까지 일제는 갖은 방법으로 학교를 끌고 나가기 힘들게 했을 것이다. 특히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서간도 한인들을 무차별로 살해했다. 역사에서는 이를 경신(1920년) 참변이라 한다. 100년이 지난 오늘 우리가 그런 역사의 현장을 가본 다해도 십중팔구는 밋밋한 산등성이 아니면 옥수수 밭으로 변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집안시(集安市)로 차머리를 돌렸다. 옛 고구려의 수도였다는 집안은 봉토석실분(封土石室墳)에서의 고구려 벽화는 말할 것도 없고 국내성(國內城)의 흔적, 장군총(將軍塚)과 광개토대왕비를 보면서 살수대첩과 안시성 싸움을 승리로 이끈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더라면 우리나라가 더 강성했고 중국의 동북공정 이야기도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압록강 건너 북한 땅을 바라보는 심정은 어떠했다고 꼬집어 말할 수 없었다. 강폭은 서울에서 보는 한강 폭의 반에도 못 미칠 것 같았다. 강 건너에는 백 명 가까운 여자들이 어울려서 밭일을 하고 있었다. 마음이 아팠다.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차려입은 옷이 울긋불긋한 것이 참 고왔다. 노랑, 파랑, 빨간 원색 옷을 입고 있었다. 나도 주말이면 촌에 가서 손바닥만 한 밭에 풀 뽑고 거름 주고 일을 하지만, 일단 거기 들어가면 다 낡은 일복으로 갈아입으니 거지행색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데, 어떻게 저렇게 고운 옷을 입고 일을 할까? 비록 잘 산다고 해도 꼭 그렇게 차려입고 일할 필요가 있을까? 건너 보이는 산에는 나무 한 구루, 풀 한포기 보이지 않았다. 먼 곳의 산만 봐도 어디가 국경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어릴 때 듣기로는 중강진 같은 압록강 쪽은 사내아이가 오줌을 누면 땅에 떨어지기 전에 마치 고드름처럼 어름이 된다고 들었는데, 그런 추위에 뭘 때고 어떻게 지낼까? 산에 나무 한그루 없으니 연탄이나 기름으로 난방을 하는 도리밖에 없을 터인데…… 우리 일행은 집안에서 백두산으로 향했다. 차만 타면 기본이 4~5시간 넘게 차를 타고 가야한다. 고속도로에서 차를 세우고 난감한 일을 해결할만한 장소가 별로 없다. 물을 갈아 먹었으니 속탈이 나서 급하게 되어도 대책이 없고, 전립선 비대증으로 오래 참을 수 없는 일행들도 힘들었을 것이다. 하는 수 없어 고속도로를 벗어나서 마땅한 자리를 찾아보지만, 쉽지가 않다. 한갓진 곳에 차를 세워도 화장실은 찾을 수 없고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데, 그래도 신체구조학적으로 유리한 남자는 별 문제 없었으나 여자들은 많이 곤란했을 것이다. 하늘이 그렇게 맑더니 백두산이 가까워질수록 어두운 구름이 모여들어 불안하게 한다. 백두산이란 백번 올라가서 맑은 천지를 두 번 보기 어렵다고 백두산이라고 한다더니 오늘 날씨가 심상찮다 싶었다. 장백산맥의 주봉인 백두산의 장군봉은 2,744m나 되고 2,500m 이상의 봉우리만 해도 16개나 된다는 백두산은 면적만 해도 전라북도의 면적과 비슷하다고 한다. 이도백하(二道白河)에서 40분 정도 가서 백두산 입장권을 사면 셔틀버스로 갈아탄다. 하늘에는 구름이 점점 두터워지더니 비가 뿌리기 시작한다. 셔틀버스로 얼마를 올라왔을까? 귀가 멍해지는 것을 보면 해발 2,000m는 넘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프차를 갈아타야 했다. 지프차는 모두 벤츠였다. 길이 계속 갈지자로 이어지는데 커브를 돌 적에 한 번 탈력을 잃으면 속도를 회복하기 힘들기 때문에 얼마나 무리하게 운전하는지 겁이 났다. 휴게소에서 우의를 찾아 입고 밖으로 나오니 비는 그치고 대신 눈 사라기가 쏟아진다. 변화무쌍한 하늘의 조화는 예측할 수 없는 일이다. 휴게소에서 천문봉은 직선거리로는 얼마나 될까? 한 300m나 될까? 내가 다리가 아파서 그렇지 젊은 사람 같으면 5분도 안 걸릴 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우리가 천문봉 정상에 올라서니 눈도 비도 언제 왔더냐? 싶게 하늘이 푸르고 연옥색 빛깔의 넓은 천지가 바로 발아래 펼쳐있었다. 겨울에 얼었던 얼음이 아직 덜 녹아서 암반만한 얼음 덩어리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민족의 발원인 신령스런 산에 올랐으니 늘 간직하고 있던 소원을 빌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사변에 헤어져서 소식을 모르는 형과 동생이 세상 어디에서라도 살아있기를 빌었다. 이도백하에서 하룻밤을 자고 하얼빈을 향해 아침 일찍 출발했다. 신흥무관학교 자리도 역시 군사시설로 탐방이 안 될 거라면서 우리는 교재를 돌아가면서 읽었고 김지훈 선생이 보충적인 설명을 해주었다. 길림에서는 우리 모교(중앙학교) 선배인 김원봉이 의열단을 결성했던 자리를 봤는데 바로 네거리 대각선에 감옥이 있었다고 하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생각해서 자리를 잡았다면 모르는 일이지만 …… 서란시 소과전자로 가서 1932년 5월 12일 석주가 운명한 곳으로 손자 이병화가 살았던 집을 찾았다. 석주는 1858년생이고 우당은 1867년생이었지만, 돌아가시기는 같은 1932년인 것을 보면 유하현에서 두 분이 만나 나라에 몸 바칠 것을 맹세하면서 태어난 해는 달라도 죽음은 같이 하자고 약속이라도 했던 모양이다. 우리 일행은 함께 묵념을 했다. 이런 어른들이 많은 안동에 태어나서 자랑스럽고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 상해임시정부의 국무령을 지낸 임청각의 석주 이상룡은 독립장, 아들 준형이 애족장, 손자 병화가 독립장을 받았으니 3대 독립운동가의 집이고, 대소가에서 서훈을 받은 분이 모두 10명이나 된다. 이 번 행사에 인솔자를 제외한 탐방자 20명은 독립유공자 후손 5명, 안동독립기념관에서 역사 해설사 교육을 받은 분이 10명, 유관 및 협력기관에서 4명 독립기념관 직원 1명이다. 평소에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분, 해설사 교육을 통해 석주, 백하, 일송에 대해 공부가 많이 되었던 분들이라 넓은 옥수수 밭을 가리키며 저기가 이러이러한 자리였다고 하면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눈시울을 적시곤 한다. 만약 일반 여행사가 회원을 모집 이런 사적을 둘러보며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것 보자고 그 많은 돈을 드려 왔느냐?」「여기 뭐가 볼 것이 있다고? 사기 친 것 아니냐?」고 하면서 야단이 났을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교육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얼빈 말이 중국의 표준말인 「보통화」라고 해서 의아하게 생각했다. 나는 당연히 북경 말이 표준어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얼빈은 지리적으로 중국의 변방이고 또 역사적으로 한족이 계속 지배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여튼 간에 지금의 중국 CCTV 아나운서가 되려면 하얼빈 유학은 필수라고 한다. 또 CCTV 아나운서 80% 이상이 하얼빈이나 흑룡강성 출신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중국정부에서 인정하는 표준어(보통화)를 더 많이 쓰는 곳은 북경이 아닌 하얼빈이라는 것이다. 하얼빈 남쪽 24Km 거리에 731부대 기념관이 있다. 1945년 관동군 이시이 시로(石井四郞)가 부대장으로 부임하면서 냉동실험, 세균실험, 독가스실험 등 마루타를 대상으로 인체실험을 했던 곳이다. 실험 대상이 된 수수 백 명의 명단이 넓은 벽 양쪽에 꽉 찼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름도 상당히 많았다. 기념관에는 각종 문서, 사진, 상황을 재연한 밀랍인형들로 꾸며져 있었다. 동상이나 전염병 실험 등 30여 가지의 실험은 물론이고 팔, 다리를 절단해서 다른 쪽에 붙여보는 실험도 했다 하니 세상에 이런 인종이 또 있을까? 지금도 간혹 일본 사람들을 「친절하다. 예의 바르다.」 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겉만 보고 그것을 진실로 믿어서는 안 될 일이다. 오후엔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하얼빈 역으로 가서 안 의사를 추모하여 묵념을 올렸다. 1909년 10월 26일 9시경 이토 히로부미가 기차에서 내려 러시아의 재정대신 꼬꼬흐체프와 함께 러시아 군인들의 경례를 받으며 각국 영사들이 있는 곳을 향하여 천천히 걸어가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안중근은 권총을 빼들고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서 총을 쏘아 4발을 모두 명중시켰다. 그는 다시 이토의 뒤를 따르는 일본 총영사 등 수행원을 차례로 거꾸러뜨렸다. 일본 헌병이 그를 체포하려고 대들자 하늘을 향하여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세 번 외쳤다. 거사의 성공을 알리는 개가(凱歌)였다. 우리 일행은 하얼빈 답사를 마치고 하얼빈 국제공항으로 가서 귀국길에 올랐다. ※ 지명은 고유명사인 관계로 유하현은 류허 현[柳河縣] 삼원포는 싼위안바오[三源堡] 추가촌은 추자춘[鄒家村]로 써야 하지만, 우리가 자주 듣고 말하던 유하현, 삼원포, 추가촌으로 썼다.
2012년 해외(만주) 독립운동사적지탐방 1. 일 정 : 6월 10일(일) ~ 15일(금) 5박6일 2. 대 상 : 21명(독립운동유공자 후손5명, 나라사랑봉사단11명, 시의원1명,
시공무원1명, 언론사1명, 기념관 담당자2명 등)
* 답사코스 1일차: 인천→심양(9.18사변기념관)→통화시
2일차: 삼원포 추가가→집안시(고구려유적지)→통화시
3일차: 통화시→백두산→이도백하
4일차: 이도백하→길림(대동공장터, 만보산토구회 터, 의열단 결성지, 구길림감옥 터 등)
5일차: 길림→서란시 소과전자촌(석주 이상룡 선생 순국지)→하얼빈(731부대, 하얼빈 역, 일본영사관터 등)
6일차: 조린공원, 소피아성당 등→인천
<사진은 안동독립기념관 자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