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2차년도 연재 - 양한모·김구정·박병래·구상·김금룡의 삶과 신앙 조명
평화신문은 이번 호부터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2차년도 연재를 시작합니다.
이 기획은 20세기에 이땅에서 살다 간 가톨릭 평신도 가운데 신앙과 삶에서 귀감이 되는 대표 인물 10인을 선정,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의 평신도들을 위해 밀도 있게 조명하는 연재 기획입니다.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회장 권길중)와 공동으로 기획하고 경동제약(회장 류덕희)이 협찬하는 이 연재에 독자 여러분의 변함없는
관심과 성원을 기대합니다.
|
▲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여 탄생한 한국 천주교회는 신앙 공동체 형성
직후부터 박해를 받아야 했다. 그림은 한국 교회가 겪은 첫 박해인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을 묘사한 고 탁희성(비오) 화백의
작품. |
‘빛과 소금-20세기 이 땅의 평신도’는 어떤 기획인가
한국 천주교회가 다른 나라 가톨릭 교회와
독특하게 구별되는 점은 외국 선교사의 도움 없이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자발적으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신앙 공동체를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선교사의 도움 없이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공부하고 마침내 신앙 공동체를 이룬 것은 세계 교회사에 일찍이 유례가 없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천주교회는 선교사(성직자, 수도자)가 아니라 평신도들이 시작한 교회라는 남다른 자부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또
다른 특징이자 자랑은 극심한 박해를 딛고 일어선 교회라는 점입니다. 1785년 명례방(지금의 명동성당 자리)에서 일어난 추조적발사건을 시작으로
이 땅의 교회는 100년 가까이 크고 작은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로 인해 무수한 신앙 선조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고, 그 가운데 103위를 성인으로, 124위를 복자로 모시고 있습니다. 또 우리 교회가
2차로 시복 시성을 추진하고 있는 순교자들도 133위에 이릅니다. 하지만 이분들만이 아닙니다.
박해가 끝난 후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신앙으로 말미암아 희생된 이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교회는 이분들 가운데 81위를 근현대 신앙의
증인으로 선정, 시복 시성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와 별도로 성베네딕도회는 자체적으로 하느님의 종 38위에 대한 시복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목숨 바쳐 신앙을 증언한 훌륭한 선조들을 이렇게
많이 모시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 한국 천주교회에는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는 이런 순교자들 외에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자신의 삶으로 묵묵히 녹여낸 수많은 신앙의 증인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저마다 자신이 처한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말과 표양으로 신앙의 증인이 됐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또 다른 귀감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일반 신자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빛과 소금-20세기 이땅의 평신도’는 그런 분들을 찾아 그 삶과 신앙을 조명해 오늘을 살아가는 평신도들의 모범으로 삼고자 하는
기획입니다.
이 연재 기획에서 다루는 평신도들에게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20세기에 살았고 지금은 세상을 떠난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20세기 이전에 살았던 이들 가운데도 본보기가 되는 훌륭한 평신도들이 적지 않겠지만, 시대 상황과 사회 문화적 환경이 오늘과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 가까운 시대의 인물이면 좋겠다고 여겨 20세기 인물로 국한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이들은 박해에
의한 ‘순교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전과 같은 ‘박해’의 상황을 더는 경험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오히려 일상 속에서 신앙을 치열하게 살아낸 분들이 오늘의
우리에게는 훨씬 더 가깝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공통점을 바탕으로 한국 평협은 인물 선정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평화신문을 통해 신자들에게 후보자 추천을 공모했습니다.
위원회는 공모 결과를 토대로 10인을 선정하고, 그 가운데 1차년도(2014~2015) 인물로 5인에 대해 전문 필진이 각각 10회씩 모두
50회에 걸쳐 연재했습니다.
1차년도에 평화신문에 연재된 5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익진(프란치스코, 1906~1970), 김홍섭(바오로, 1915~1965),
최정숙(베아트리체, 1902~1977), 서상돈(아우구스티노, 1850~1913), 장면(요한, 1899~1966). 연재된 내용은 한국 평협이
2월 중 책으로 출간할 예정입니다.
이제 2016년을 시작하면서 2차년도 인물 5인에 대해 연재를 시작합니다. 지난해 ‘빛과
소금-20세기 이 땅의 평신도’에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올해에도 이 연재물에 지속적인 관심과 성원을 보내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이창훈 기자
|
▲ 양한모 |
양한모(아우구스티노, 1921~1992)
공산주의자였다가 그리스도의 품에 안긴 평신도 신학자. 황해도 봉산
출신인 그는 고교 시절에 공산주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1936년 조선 공산당에 입당해 활동했다.
1949년 남로당 서울시당 위원장으로 있다가 체포되면서 전향한 이후에는 공산당 타도에 앞장섰다. 1968년 정의채 신부(현 몬시뇰)에게서
세례를 받고 가톨릭에 귀의한 후에는 평신도신학과 통일 사목을 화두로 삼아 연구했다.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1989년 서울 세계성체대회 같은 굵직한 교회 행사에 관여했다.
|
▲ 김구정 |
김구정(이냐시오, 1898~1984)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에 여생을 바친 교육자. 대구 신암동에서 출생한
그는 사제가 되고자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의 전신)에 입학했으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간도 지역에서 교육계에 몸담았다가 광복 후 군산여고, 군산대학, 대구 대건고 등에서 교사로 봉직했다.
1960년쯤부터 주재용 신부와 인연을 맺고 교회사 연구와 집필에 열중하면서 여생을 바쳤다. 그러나 단순한 순교 정신의 탐구보다 민족사
안에서 그 가치를 밝히려고 노력했다.
|
▲ 박병래 |
박병래(요셉, 1903~1974)
성모병원의 기초를 다진 의사.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으나 서울에서 자랐다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5월 의사 면허를 취득했다.
서울교구가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1936년에 설립한 성모병원의 초대 병원장으로 취임해 20년간 봉직하면서 병원의
기틀을 다졌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가톨릭 의료 봉사단’을 조직, 활동하다가 군의관으로 입대해 공군 의무감을 지내고 1956년 제대했다. 이후에도
의사로서 활동하면서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꾸준히 펼쳤다.
|
▲ 구상 |
구상(요한 세례자, 1919~2004)
시인. 서울 이화동에서 태어나 어려서 함경도 덕원으로 이주했다.
덕원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소신학교에 입학했으나 3년 만에 그만두고 야학당 교사와 노무자 생활을 거쳐 일본에 유학, 1941년 니혼대
종교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함흥 북선 매일신문 기자로 있으며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광복 후 1946년 월남한 그는 승리일보, 영남일보, 경향신문 등에서 언론인으로, 서강대 중앙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60년 가까이 시집과
시화집, 희곡집 등 40여 권을 내놓으면서 구도 시인으로서 문학적 삶을 꽃피웠다.
|
▲ 김금룡 |
김금룡(가이오, 1914~1988)
레지오 마리애의 초석을 놓은 기도의 일꾼. 전남 무안 출신인 그는
장모를 통해 천주교를 알게 됐고, 1947년 세례를 받았다.
1953년 5월 31일 당시 광주교구장 현 하롤드 주교의 지도로 목포 산정동본당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을 발족했고,
평생을 레지오 마리애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자선과 선교 활동을 통해 평신도 사도직을 실천했다.
그는 17년 동안 낙도 공소 회장을 지냈고, 환갑을 넘겨서는 선종 봉사 활동을 통해 가장 낮은 이들을 위한 사랑에 모범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