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7월 30일 군사장(허위)은 미리 군비를 신속히 정돈하여 철통과 같이 함에 한 방울의 물도 샐 틈이 없는지라. 이에 전군에 명령을 내려 일제히 진군을 재촉하여 동대문 밖으로 진군하였다. 대군은 장사(長蛇)의 세(勢)로 천천히 전진하게 하고, 씨가 3백 명을 인솔하고 선두에 서서 동대문 밖 삼십 리 부근에 나아가고, 전군이 오기를 기다려 일거에 서울을 공격하여 들어오기로 계획하였다. 전군이 모여드는 시기가 어긋나고 일본군이 갑자기 진격하는지라. 여러 시간을 격렬히 사격하다가 후원이 이르지 않으므로 할 수 없이 마침내 퇴진하였더라. 이 때에 사기를 고무하여 서울 진공의 영을 발하니, 그 목적은 서울로 들어가 통감부를 쳐부수고 성하(城下)의 맹(盟)을 이루어 저들의 소위 신협약 등을 파기하여 대대적 활동을 기도함이라. <대한매일신보> *부대 조직 13도 의병 총대장 이인영 군사장 허위 경기 황해 진동대장 권의회 관동의병대장 민긍호
관서의병대장 방인관 호서의병대장 이강년
관북의병대장 정봉준 교남의병대장 박정빈 호남의병대장 문태수
<기려수필>, <대한매일신보> 1909년 9월 21일
해설 의병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전국의 의병 부대가 서울 진공을 위한 연합전선을 형성하였다. 13도 창의대장으로 이인영이 추대되고 군사장으로는 허위가 추대되었다. 전국에서 모인 의병 1만여명은 교통이 편리한 양주에 집결하여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하였다. 의병의 대다수는 화승총을 소지하였으나 신식 소총을 가진 3천여명의 해산 군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정병 300명으로 구성된 선발대는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하여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