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시, 무의식시의 이해와 감상
주류적인 시의 분류법은 극시, 서정시, 서사시다. 21세기 들어 이른바,
미래파시의 출현에 따라 자아와 대상의 거리감을 기준해 전통시와 미래파시로 구분되기도 한다.
이 분류법은 분석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 보면 의식시, 무의식시로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말 그대로 시인의 의식 세계를 드러내면 의식시, 무의식적인 세계를 묘사하면 무의식시다.
이 구분을 위해 먼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최초로 언급한 의식, 무의식의 영역을 살펴 보자.
프로이트는 정신에는 인간이 인식하고 들여다볼 수 있는 의식과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확인하기
어려운 무의식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무의식이 인간의 정신 활동에서 의식에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무의식의 영역은 의식 영역의 기저나 하부 구조 혹은, 주변부에 머물며
정신적 에너지에 의해 의식 영역으로 넘어오거나 무의식 상태로 표출된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어린 시절에 겪었던 추억이나 경험, 트라우마와 상처, 콤플렉스가 무의식의 영역에
잠복해 있다가 외부의 자극에 의해 돌출되는 현상이 신경증이나 정신질환이다.
인간을 육체와 정신이라는 이분법적인 기준으로 생각했던 전근대인에게 이 발견은 큰 충격이었다.
이 사상은 일본의 사소설가들의 작품을 거쳐 이상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 결과 '날개' 같은 작품이
탄생했다. 즉, 이상의 작품은 자아의 무의식의 나열이기 때문에 타자는 쉽게 이해할 수 없다.
근래 유행하는 미래파시도 마찬가지다. 서정시가 의식의 표출이라면 미래파시는 무의식 세계의
시상이기 때문에 독자가 해석이 어렵고 자폐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정신분석학의 의식, 무의식의 이분법을 원용하면 아래 소개하는 '백지의 척후병'은 무의식시다.
이 시는 시상의 뒤틀림, 굴절, 비약이라는 미래파시의 전형이라는 점에서 역시 미래파시로
구분될 수 있다.
이 시는 낮에 홀로 원룸에 기거하던 젊은 여성이 급작스럽게 가스 검침원의 방문을 받았을 때
느낀 공포심이 시상의 발화점이다. 검침원이 집에 머무는 몇 분 동안 시인의 무의식에 잠복해 있던
방어기제의 형상이 시의 주된 이미저리다. 아래가 정신분석학자들의 이론에 근거해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을 구분해 본 이 시의 해설이다.
-젊은 여성 시인은 예고 없이 방문한 남성 검침원과 대면한 순간 무의식 영역에 잠복해 있던
공포가 표출되고(연속사방무늬 물이 부서져 내리고), 평소의 편견 혹은, 과거에 경험한 정신적
외상이 되살아난다(구름은 재난을 다시 배운다.). 여기서 구름은 같은 상황에 대해서 화자의
무의식 영역에 축적돼 온 여러 기억의 기표다. 뉴스에 흔히 등장하는, 검침원을 가장해 침입한
치한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례가 '재난'으로 은유됐고 순간적으로 떠오른 여러 사례가 '재난을
다시 배운다'로 변주됐다.
-가스가 새는 것을 확인하려 검침원이 밸브에 비누거품을 묻히는 순간에도 화자는 남성 검침원이
바닥을 밟고 다니는 소리에 겁 먹어 무의식 영역에 잠복된 공포심(구름)을 토하는 것 같다.
-일을 마친 검침원이 흰색 슬리퍼를 끌면서 지나가고 그가 수리한 가스밸브를 본 순간, 뱀(렌지에
연결된, 뱀의 외피를 연상시키는 비닐 가스관)이 정수리부터 허물을 벗는 듯하다.
이 연까지가 무의식의 영역에 대한 묘사고 다음 연부터는 검침원이 떠난 뒤 홀로 남은 화자가
의식의 영역에서 보여주는 시상이다.
-몇 분의 짧은 시간 동안에 화자의 공포심(구름)은 파편화돼 부서질 정도로(발가락을 다 잘라 냈을
겁니다.) 극대화되고, 그런 현실이 전쟁으로 느껴진다(전쟁은 전쟁인 거죠.). 여기서 '전쟁'은 이런
류의 일상적인 타자의 방문 때마다 공포를 느껴야 하는 현실의 불안정성, 화자의 내면에 경험적으로
축적된 피해의식, 우리 사회에 대한 선입견을 함의한다. 매일 몇 차례씩 낯선 타자와 대면할 때마다
전쟁을 치루듯 치열해져야 하는 상황이 화자의 무의식 영역에 퇴적된 현실의 형상이다.
-다른 방문자와 마찬가지로 검침원은 무심하고 비호의적이 말투를 남기고 떠나고
(그는 무너진 방설림 근처에 하숙하고), 우리 집의 겨울(검친원의 딱딱한 태도에 결빙된 화자의 심리)을 측량하고 다른 집으로 간다.
-의식의 영역으로 돌아온 시인은 회고해 본다. 우리 고개를 수그려 인사를 나누었던가?
폭발음(수리한 뒤에 렌지에서 가스불이 켜지는 소리)가 들렸던가? 이 행은 서로간에 무관심한,
배려가 없는 대인관계에 대한 성찰을 부각시킨다.
-렌지로 돌아와 수선 여부를 확인해 보는데 검침원이 고친 밸브가 '팔꿈치로 배로 기어가 빙하
(화자의 결빙된 심리)를 밀고 가는 (뱀의) 정수리(붉거나 초록 빛깔을 띄는 가스 잠금 장치) 같다.
-뱀(무늬가 그려진 가스 연결관 혹은, 차가운 검침원의 은유)의 외피를 닮은 허물이 차갑게 빛난다.
눈(얼어붙은 화자의 내면) 밑에서 포복하던 생물들이(본래 화자의, 살아 있는 의식들)이 문을
찧는다(검침원이 떠나자 비로소 화자는 무의식에서 의식 영역으로 돌아오고 생동감 있는 평소의
정신을 되찾는다.). 인질(타자 때문에 억눌려 있던 화자의 심상)들이 일어선다(활기를 되찾는다.).
결미에서는 함께 어울릴 때보다 홀로 있을 때 더 편안해지는 현대인의 내적 모순을 형상화했다.
관계맺음의 필연성, 호혜성을 탐구하는, 진부한 결말을 외면하고 현실을 여과 없이 투사한 점이
역설적으로 높은 점수를 받은 듯하다. 서두의 '구름'과 조응하는, 파편화되고 뒤틀린 사회에서
억눌릴 수밖에 없는 개인의 심상을 환유한 '인질'이라는 시어는 섬뜩하도록 상징적이고 감각적이다.
이렇게 감상하면 제목의 '백지'는 세상을 편견 없이 대하려는 젊은 시인의 의식 영역의 치환이다.
즉, 무의식 영역에서는 평소에 축적된 대인관계의 위험성이 잠복해 있지만 의식 영역에서는
세상을 깨끗하게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막상 타인을 대할 때면 공포심이 돌출하고
그럴 때마다 '척후병(무의식 영역에 잠복해 있는 타자에 대한 의심)'을 내보내야 한다.
정신분석학자들은 평소에 감각 기관을 통해서 인식되거나 지각되지 않은, 축적된 기억이 정신적
에너지(이 시에서는 검침원의 급작스런 방문)을 받는 경우 현시된다고 보는데 이 시의 '척후병'이
그 예라 하겠다.
백지의 척후병 - 김복희
<저작권자 - 2015년 한국일보>
연속사방무늬 물이 부서져 날리고
구름은 재난을 다시 배운다
가스검침원이 밸브에 비누거품을 묻힌다
바닥을 밟는 게 너무 싫습니다
구름이 토한 것 같습니다
낮이
맨발로 흰색 슬리퍼를 끌면서 지나가고
뱀이 정수리부터 허물을 벗는다
구름은 발가락을 다 잘라냈을 겁니다
전쟁은 전쟁인거죠
그는 무너진 방설림 근처에 하숙하고
우리 집의 겨울을 측량하고 다른 집으로 간다
우리 고개를 수그려 인사를 나누었던가
폭발음이 들렸던가
팔꿈치로 배로 기어가 빙하를 밀고 가는 정수리
허물이 차갑게 빛난다 눈 밑에서 포복하던 생물들이 문을 찧는다
인질들이 일어선다
(아래는 심사평. 발견과 발명의 차이에 주목할만 하다.)
시에서 발견과 발명은 구분된다. 발견이 낯익은 대상에서 낯선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라면,
발명은 대상과 무관하게 낯선 의미를 빚어내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발견은 소통
가능성(서정시), 발명은 소통 불가능성(비서정시)과 직결되고, 다시 발견은 언어의 투명성(우리),
발명은 언어의 불투명성(나)과 연관된다. 우리 현대시는 발견과 발명 사이에 서식한다. 발견의 시가
윤종욱씨의 ‘방의 전개’였고, 발명의 시가 김복희씨의 ‘백지의 척후병’이었다. 윤씨는 안정감이
돋보였고, 김씨는 상대적으로 가능성이 커 보였다. 심사위원들은 고심 끝에 두 신인을 동시에 문단에
내보내기로 했다. (심사위원 - 문학평론가 남진우, 시인 황지우, 이문재)
(이 시인은 2018년 대산창작기금 수혜자로 선정됐다. 아래가 심사평)
김복희,「아름다운 베개」 외 49편은 이즈음 문예지를 펼치면 보게 되는 낯익은 문법이다.
단점이지만 왕성한 상상력이 더 정제되고 깎인다면 개성이 될 것을 알기에 마지막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심사위원 - 고형렬, 장석남, 최정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