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여당이 된 노태우 정권은 수적인 힘을 배경으로 급속히 폭압적인 통치로 바뀌어갔다.
여소야대 시절 토론과 합의로 처리되던 주요의안도 거의 날치기로 처리했다. 연초부터 청와대와 정ㆍ관계 인사들이 다수 관여된 것으로 알려진 수서특혜 은폐조작사건이 터져 6공비리가 드러났다.
정치권력이 강화되면 하부 권력기관이 설치게 된다. 경찰과 검찰의 공권력이 안하무인격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4월 26일에는 명지대생 강경대군이 상명여대의 학원자주화 집회에서 지지연설을 하고 돌아오던 중 경찰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하는 등 5공식 폭압사건이 일어났다.
대학가와 재야, 노동계, 종교계에서 연일 폭력살인과 공안통치 분쇄규탄 집회가 열리고, 4월 29일에는 전남대생 박승희가 규탄집회에서 분신 사망했다. 5월 1일 안동대생 김영균이 분신 사망한 데 이어 5월 3일 경원대생 천세용이 교내 집회 중 분신 사망하는 등 학생ㆍ노동자들이 노태우 정권의 폭압통치에 투신 분신으로 맞서 고귀한 생명을 내던졌다.
이 무렵(5월 5일) 김지하 시인이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시론이 게재되어 민족문화작가회의가 김지하를 제명하는 등 학생들과 민주인사들의 분노를 샀다. 5월 8일에는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이 분신 사망하고 5월 6일에는 한진중공업노조위원장 박창수가 안양병원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5월 13일에는 전대협 구국결사대 소속 7개 대학생 47명이 여의도 민자당 중앙당사를 점거, “해체 민자당, 타도 노태우”등의 구호를 외치며 농성을 벌이다 경찰에 검거되었다. 김대중은 5월 8일 시국관련 기자회견을 갖고 노재봉 공안내각의 총사퇴와 백골단 해체, 악법개폐 등을 거듭 촉구했다.
김대중은 5월 14일 열린 강경대 학생 영결식에 참석, 운구행렬의 맨 앞에 서서 행진하다가 경찰이 쏜 사과탄을 맞고 자택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았다. 시민ㆍ학생들의 분신투쟁은 계속되었다. 5월 18일에는 전남 보성고생 김철수가 분신 사망하고, 같은 날 광주에서 운전기사 차태권이 분신했으며, 5월 20일에는 광주에서 시위 중이던 권창수가 전경의 폭행으로 중태에 빠지고, 5월 22일 광주에서 정상순의 분신, 5월 25일 성균관대생 김귀정이 폭력적 시위진압과정에서 압사당했다.
1991년의 봄은 민자당 출범 1년 만에 폭압통치로 회귀한 노태우 정권에 저항하던 많은 청년학생ㆍ노동자들이 민주제단에 피를 뿌린 ‘잔인한 91년의 봄’이 되었다. 이 때 서강대 총장 박홍이 “어둠의 세력”운운하는 기자회견으로 민주열사들의 희생을 폄훼하여 지식인들의 지탄을 받았다. 이 무렵 평민당은 수서비리 국정조사와 경찰의 폭력살인 등 국회의 조사특위 구성을 제의했지만 번번이 거부되었다.
평민당은 1991년 4월 9일 재야 명망가, 사회운동가들을 대폭 영입하여 당명을 신민주연합당, 즉 신민당으로 바꾸고, 대여 투쟁을 벌였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3월 26일과 6월 20일 두 차례 지방의회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5.16쿠데타 이후 만 30년 만에 실시된 지자제였다. ‘미스터 지자제’의 별명을 들을 정도로 오랜 세월 지자제 실시에 열정을 보였던 김대중은 남다른 감회에 젖었다.
30년만에 부활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 지자제 선거였으나 공안정국의 서슬과 권력형 수서비리사건 등으로 국민들의 무관심 속에서 치러졌다.
시군구 의원(기초)선거는 정당배제의 선거였으나 각 정당은 내면적으로 자당 소속 또는 자당에 우호적인 인사들을 지원했다. 민자당은 기초의원 선거에서 전국적으로 70%를 상회하는 당선자를 내어 3당합당의 위력을 과시했다. 평민당은 호남에서도 다수 의석을 내주는 기대 이하의 성과를 얻었을 뿐이다. 학생들은 공안통치와 살인정권을 규탄했지만 언론은 연일 학생들의 부도덕성에 초점을 맞춰 보도했다. 공안정국에서는 야당이 불리하다. 안정을 희구하는 국민성향 때문이다. 야당이 패배한 배경이었다.
시도의회 의원(광역)선거에서도 민자당이 총 866개 선거구 가운데 564개 지역에서 승리, 압승했다.
민자당은 광주ㆍ전남북과 제주를 제외한 11개 시도의회에서 압도적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으며 특히 부산의 경우 51개 의석 중 50개를 휩쓸었다.
서울에서도 민자당은 132개 의석 중 110석을 차지하여 21석을 얻은 신민당, 1석의 민주당을 패퇴시키고 압승했다. 신민당은 전국적으로 165석, 민주당은 21석을 얻는 참패였다. 무소속이 전국 13개 시도에서 115명이 당선되고 특히 제주에서는 9명이 당선되어 8명을 당선시킨 민자당을 앞지른 ‘이변’이 일어났다.
선거결과 민자당은 41% 득표에 65%의 의석을 차지하고, 신민당은 22% 득표에 19%의 의석, 민주당은 14% 득표에 2%의 의석을 얻는데 그쳤다. 민자당이 중앙과 지방정치무대를 완전히 석권하고 신민당은 호남을 제외한 전국에서 완패함으로써 당세가 크게 약화되었다.
김대중의 고민은 컸다.
힘든 단식투쟁 등을 통해 쟁취한 지자제 선거가 결과적으로 노태우 정권의 기반을 강화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말았다. 민자당의 3당 합당으로 지역구도는 더욱 철벽을 이루었다. 정책대결이나 민주화의 공적 따위는 지역주의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였다. 3당 합당은 선거제의 원칙을 훼손한 반민주적 정치야합이기도 했지만, 지역구도를 갈라놓은 국민분열의 요인으로도 작용했다.
김대중과 신민당의 고민은 야권통합의 의지로 모아졌다.
구민주당인 ‘꼬마 민주당’의 고민도 마찬가지였다. 구민주당은 5월의 광역선거 참패 뒤 극심한 내분에 휩싸였다. 광역선거에서 14% 득표에 2%의 의석밖에 얻지 못한 것이 당내 분란의 원인이었다.